4.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2:1-16)
                    
칭의론 문제
로마서 1장 후반부와 오늘 우리가 읽은 2장만 보면 죄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매우 공격적인 성격의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는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종교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어떤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공격합니다. 물론 인간이 죄의 현실 안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죄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가르침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죄의 숙명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할 뿐만 아니라 죄의 구체적인 책임감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원래 기독교는 사람들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바울의 이런 진술은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전제한 가운데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1:18-32은 이방인(로마인)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 오늘 읽은 2:1-16은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바울이 이들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인이나 유대인 양자 모두 나름대로의 확실한 의(義)를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볼 때 로마인들의 법이 갖고 있는 의의 기준도 결국 썩게 될 것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의도 역시 썩을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의 경우에 그런 기준들이 매우 세련된 문화와 교양으로 나타나며, 유대인들에게 매우 종교적 의미가 풍부한 율법으로 나타나지만 그런 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의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못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죄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그런 상태에 내버려두는 것으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논리입니다.
이 의의 문제는 로마서 전체의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도 대개는 정치적인 로마인들이나 철학적인 헬라인들, 그리고 종교적인 유대인들과 거의 비슷한 차원에서 이 의의 문제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의로워지고 싶다는 말이 곧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도 역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욕구에 빠져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활동에서도 우리는 대개가 남의 이목을 중요시하고, 가능한대로 남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이런 심정이야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이것이 구조화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헌금이나 교회 봉사, 그리고 성금 모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만 기준을 두고 움직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데서 의(옳음)를 획득합니다. 이 사회는 이런 문제가 훨씬 노골적입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사업에 성공하고 자녀 교육에 성공하는 일들이 결국은 남에게서 인정받는 것과 직결됩니다. 만약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기의 삶을 소진시켜가면서까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애를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오늘 바울이 말하는 의와 심판 같은 문제가 우리의 삶 전반에 깔려있는 어떤 경향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번에도 함께 생각했던 것처럼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게 될 우상"으로 바꾸려는 삶의 경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법주의의 함정
특히 바울은 2장부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그 율법적인 기준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유대인은 단순히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의롭다고 자칭하는 유대인들의 현실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한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3절에서도 비슷한 논조가 반복되었습니다.
율법 선생으로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징계하던 바리새인은 가장 전형적인 종교인이며, 경건주의자이며, 대표적인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서 옳고 그름을 나누었습니다. 일반론적인 면에서 보면 율법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서 산다는 것 자체는 하등의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율법은 지금의 기독교 교리와 같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율법주의로 빠져들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부분에서 핵심적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선생이라고 한다면 자기는 그런 율법에서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똑같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태가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이 표현 그대로 위선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선생들이 있습니다. 굶고 있는 자식을 위해서 빵을 훔친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판사가 부동산 투기를 하기도 합니다. 신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 실제로 자신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목사들도 많습니다.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하라고 학생들을 다그치면서도 실제로 자기는 별로 공부하지 않는 교수들도 많습니다.
둘째는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안디옥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율법은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 수행은 신앙생활에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는데, 여기서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제자 베드로는 유대인들도 지키기 힘든 율법을 이방인 형제들에게까지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지킬 수 없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그 판단 기준이 다시 자기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2절)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이 불편 부당하게 심판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율법을 형식적으로 얼마나 지켰는가의 기준이 아니라 그 율법의 근본 의미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절)고 진술합니다. 이 말을 자칫 인과응보의 차원이나 인간적 평가 기준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서, 즉 있는 그대로의 삶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다녔는가, 우리가 헌금을 얼마나 냈는가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마음을 먹고사는가, 무슨 마음으로 교회에 나가는가의 차원이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에 자기의 모든 삶을 걸어두었던 사람들로서는 실망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타부타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은 14,15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본성적으로 율법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과 서로 고발하고 변명하는 생각이 그 행위에 대하여 함께 증언합니다."(15절). 기독교라는 종교 형식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양심과 생각에 의해서 그들의 행위가 증언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7,8절에서 이 말씀을 좀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율법주의의 함정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형식적인 행위는 그것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율법주의가 전적으로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려는 행위가 아니라 썩지 않는 본질(영성, 하나님 나라)을 추구하는 자에게 마땅히 드러나야 할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현실적 삶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룬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서 패거리를 짓고, 진리에 불순종하며, 오히려 비진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노와 분"이 임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진리와 비진리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시키기 힘든 점이 없지 않습니다.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는 나쁜 일과 좋은 일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 앞에서는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주한 미군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한 분단국으로 우리가 이번에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파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도 역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디 이런 문제 만이겠습니까? 반(反)폭력, 산아제한, 유전공학, 생태학 등에 걸친 많은 문제들은 진리와 비진리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이 좀더 예민해지면 이런 미묘한 사회 문제에서도 역시 어떤 방향이 주어집니다. 반면에 우리의 정신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흥분한 상태에 빠지면 판단능력도 역시 축소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영성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패거리 짓는 일과 불의에 약삭빠른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곧 사심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심판의 방식
7-10절 사이에 악과 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지, 그 방식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며,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는 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노와 분이, 후자에 속한 이들에게는 영생이 임한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역본에는 악한 이들에게 비탄과 두려움과 불쾌와 성냄이, 선한 이들에게 영광과 명예와 평화와 영생이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착한 사람이 부자가 된다거나 악한 사람이 쫄딱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거론된 이 단어들은 대개가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를 잘 모르는 어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최고급의 호화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지옥에 가면 꺼지지 않는 유황불에 들어가기나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옥의 두려움에 근거하거나, 천당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면 좀 미숙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여기 땅에서 경험하는 생명형식이 아무리 최고의 상태로 보존된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절대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이런 조건이 파괴되었다고 해서 절대적인 행복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지옥에 가겠다는 마틴 루터의 진술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지평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정화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전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상사처럼 개입해있는 비탄, 두려움, 불쾌, 성냄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작은 일로 두려워하고 화를 냅니다.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툭하면 자살을 하는데, 이것도 역시 평소에 두려움으로 살아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2003년) 봄 틱낫한의 책 <화>가 베스트 셀러에 올랐었습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도 현대인들이 화를 많이 낸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교회 현장에서도 화를 참지 못하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인과 목사 사이에, 교인과 교인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때로는 몸싸움까지 마다하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싸움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여전히 분노와 성을 삭힐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늘 인간 곁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평화와 영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 이런 평화와 영생이 어느 정도로 자리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성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런 평화와 영생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진정한 시인이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에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심판이 유보되는 이유
바울은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남을 심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절). 이 사람들은 자기가 여전히 건강하고 사업도 잘되고, 자식들도 잘 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 관용, 인내 때문일 뿐입니다(4절). 앞 단락에서 말한 두려움과 비탄은 마지막 심판의 전조입니다.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인내를 경멸하는 사람들에게 진노로 임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것들도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16절). 그런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회심하도록 기다리십니다. 이게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 관용, 인내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독특한 역사 이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 이 세상은 곧 하나님의 인내심이 시험받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를 기계적인 인과응보사관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의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심이 끝나게 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실제로 실행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삼 년이 지났는데도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무화과나무를 없애고 다른 나무를 심어야 하겠지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눅 13:6-9). 소위 탕자의 비유도 역시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심판 표상이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유쾌하게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성서에서는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현대인들에게 공연한 공포감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의 심판 표상이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심판 표상의 핵심은 역사의 단절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와 문화와 역사의 발전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역사가 해체되는 때(카이로스)를 기다립니다. 즉 인간의 모든 것을, 숨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16절)는 메시지의 핵심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 발전, 또는 종교적 기준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가 결국 판단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신비이듯이 심판도 역시 신비(은폐)의 방식으로 인간과 우주의 역사에 개입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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