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새로운 의(義)   (3:21-31)
                        

율법의(義), 하나님의(義)
바울은 지금 매우 고단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한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통한 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작업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바울의 이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일 유대인들을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 논리가 그 당시와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심성이 악하다거나 믿음이 없다거나 생각이 짧다는 식으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닫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훨씬 타당한 대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은 수 천년 동안 율법의 의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 너머에, 또는 그것을 뚫고 나오는 새로운 의의 길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주변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일해야한다는 예수님의 입장을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해 있던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쪽은 진리와 생명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은 율법과 전통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이 양자 사이의 대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참고적으로,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저술하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율법으로 인해 벌어진 논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재해석을 각주로 달았다면 오늘의 본문도 내용적으로 훨씬 풍부해졌을 텐데, 그런 시도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아마 복음서보다 바울의 서신들이 역사적으로 앞서 기록된 탓도 있긴 하겠지만, 예수님 생전에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바울로서는 복음서의 내용에 대한 정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사가인 토마스 쿤에 따르면 이것은 곧 "패러다임"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천동설이라는 물리학적 구도에 묶여있는 사회는 그것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학설이 완벽하게 등장하지 않는 한 그 사회의 모든 문제를 끌어가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다고 해서 과거의 구도가 당장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과거의 구도는 그것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죽거나, 아니면 새로운 구도가 혁명적인 방식을 통해서 한 사회를 새롭게 만들 때만 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본대로 종교적인 패러다임도 역시 과거가 사라지거나 새로운 것의 혁명이 없는 한 바꾸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서문자주의가 그 한 예입니다. 근본주의 선교사들 덕분에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정서 속에, 그 인식 속에 각인된 축자영감설은 좀처럼 극복되지 않습니다. 수년 전에 벌어졌던 해프닝입니다만 대한성서공회에서 새로운 성서를 번역 출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서 자유주의적 번역이라고 해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 성경은 폐기처분되고, 다시 보완된 성경이 나왔습니다만 그것도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돌아보면 참으로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성경>이라고 해야한다면서 대한성서공회와 대립되는 대한성경공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습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바울은 믿음을 통한 의(義)라는 자신의 주장을 "차별이 없으신"(22절)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보충합니다. 이 주장은 29절에서도 거의 같은 논조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라면 유대인들에게만 효력이 있는 율법을 의로움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위험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창조하신 이유는 지옥불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들로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생각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대담합니다.
예수님도 이미 하나님을 이렇게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해 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상대했습니다. 현실적인 인간 이해입니다. 모범적인 사람들만 상대한 게 아니라 죄인이나 부도덕한 사람들과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만나셨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정확한 성구가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과 의기투합하지 말하는 경고가 있긴 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로 세상과 함께 하지 말라는 쪽으로 살아가는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과 악에 기울어지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옳고 그름의 최종적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재단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2천년 전 율법적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은 바울의 주장을 거부한 유대인들처럼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종교적 집착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한 것만큼은 받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과 세상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 현장에서는 기독교 신앙에 일종의 반대급부가 있는 것처럼 설명되곤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 물질적인 축복이 임한다거나, 기도하면 가족의 평안하다거나, 이런 기복적인 차원에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존재론적 기쁨과 평화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물질적인, 또는 사회신분이 상승되는 기대에만 주목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에 불과합니다. 약간 말이 옆으로 흘렀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종교적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라 차별 없이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만 드린다면, 예수를 믿는 세계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축복이며, 절대적이라는 점입니다. 자기의 영적인 풍요로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고 남보다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이제 바울은 자기의 생각을 명확하게 끊어서 말합니다.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이제 율법을 통한 의가 극복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이제 그런 종교적 업적 없이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의 일관된 칭의론입니다.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30절).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칭의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점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의로움의 획득이 믿음만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행위도 필요한지에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주장에 따라서 이런 인간의 행위까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믿음에 의한 하나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믿음을 상위개념으로 설정합니다. 구원론에서도 역시 로마 가톨릭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업적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개신교는 하나님의 은총만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는 칼로 무를 자르듯이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설명하자면 "나무와 열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점에서 우선 존재가 우선한다고 볼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존재는 열매를 보고 판단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행위가 인식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존재론적으로는 믿음이, 인식론적으로 행위가 우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쪽 모두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착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존재의 변화인 믿음을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단 이 믿음은 인간의 삶에 놓여 있는 수행까지를 포함하는 차원으로 심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랑
바울이 율법을 통한 의에 대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이유는 율법의 본성이 자기 자랑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27,28절, 공동번역). 우리의 윤리적 업적과 종교적 업적을 자기가 의로워질 수 있는 토대로 간주하는 생각이 율법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 자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몇 번 지적된 바이지만, 아무리 철저한 율법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그 율법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통한 의만을 주장한다면 결국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뿐입니다. 25절에 기록된 대로 과거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믿음의 방식으로 인간을 의롭게 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역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를 자기 자랑이라고 본 바울의 통찰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 깊숙이 박혀있는 인간 본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자기를 자랑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일 때나, 동창회로 모일 때 제일 많은 대화의 주제가 자기 남편이나 자식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줌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남자들이나, 더 나아가서 학교 선생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대학 총장이나 학장들도 역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일들을, 간혹 쓸데없는 일들을 펼칩니다.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다음에 단체장들이 자기의 업적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전시행정을 펼친다고 합니다. 대통령도 이런 위험성이 큽니다. 내가 있을 때 무언가를 이루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작용합니다. 물론 나에게도 이런 자기 자랑이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런 경향이 아주 강한 것 같습니다. 대개는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다는 자랑거리입니다. 가끔 장로 장립식이나 헌당식 같은 행사에 참여하다보면 명분으로만 예수님의 영광이지 실제로는 사람들의 영광을 찾는 것 같이 보여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사심 없이 수고한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내고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온통 사람들의 자랑거리를 나열하는 데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루어놓은 업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칭의론"입니다.

율법의 토대로서의 믿음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용도 폐기되는 것이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믿음을 통한 의로움이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존중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미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완성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문자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늘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을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율법의 차원에서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피기 위해서 이 믿음이라는 사건을 다원적 시각으로, 특히 타종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은 단지, 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다는 사실이 바로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옳은 것입니다만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은 잣대를 강요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앞서 몇 번 강조했듯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율법 있는 사람과 율법 없는 사람에게 다르게 적용되듯이 예수님의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똑같은 내용을 강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종교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벗어나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여기 한 통의 수박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수박의 속살을 맛본 사람들이지만, 수박 그림만 본 사람들은 맛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직접 먹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들도 역시 수박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박을 중심으로 한 집단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습니다. 직접 수박을 먹어본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들에게 그림만으로, 또는 수박 껍질만으로 만족해하지 말고 직접 그 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해버리는 것은 오직 한 분인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신앙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박 그림이나 껍질만 아는 것은 결코 수박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잘못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나쁠 수 있기 때문에 타종교와는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종교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종교적이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율법을 절대화함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안에도 이런 율법 종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타종교 안에도 진리의 영에게 마음을 열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사실 근본주의적 믿음은 진리의 영을 자기들의 전통 안에 문자적으로 가두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우리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이 되겠습니다만, 이러한 개방된 마음은 동양종교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유유자적하는 관조뿐이라거나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꿈꾸는 깨달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명백한 목표를 움직여 나갑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그리고 선교의 목표는 구원의 초석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타종교인들에게, 또는 일반인들에게 어떤 보편적 진리로 이해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사물을 신처럼 섬기는 삶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부활의 생명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해명할 준비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독단으로 변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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