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행위로부터의 해방   (4:1-12)
                          
아브라함
앞서 3장 마지막 단락에서 믿음이 율법을 해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세운다는 바울의 결론은 믿음과 율법이 등가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그 앞에서 율법은 상대적이지만 믿음은 절대적이라는 점이 누누이 강조되고 있듯이 믿음은 칭의론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문제를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브라함과 연계시킴으로써 유대인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합니다.  
구약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면 원역사, 족장사, 이집트 생활, 광야 생활,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 바벨론 포로기, 귀환입니다. 원역사는 전설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한다면 족장사입니다. 이 족장사의 문을 여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원래 팔레스틴 출신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 출신입니다. 그곳은 바로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인 이라크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 내외와 손자, 즉 막내아들 하란의 아들인 롯을 데리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쪽 지역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이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은 구약성서의 문명사적 배경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창조나 노아홍수 같은 설화는 성서와 바벨론 문헌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에덴 동산 설화도 역시 바벨론 문명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도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이 태어나기 십여 년 전에 이미 자기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 태어났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은 배다른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 설화에는 어떤 면에서 우유부단했던 아브라함과 두 여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매우 비인간적인 증오와 원한이 사무쳐 있습니다. 늙을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는 자신의 몸종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과 남편을 동침하게 함으로써 남편의 후손을 잇게 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후손 번식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여러 명의 여자를 두는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종을 통해서라도 남편의 씨를 잇게 해야겠다는 사라의 생각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있긴 했습니다만, 사태가 약간 꼬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마음도 역시 변질되고 맙니다. 이 일은 하갈이 두 번에 걸쳐서 집을 떠나게 되는 불상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한 번은(창 16장) 하갈이 임신 중에 사라와 갈등을 빚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대로 임신한 하갈이 임신 못한 사라를 업신여겼는지, 아니면 사라가 공연한 열등감으로 남편에게 하갈을 무고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하갈은 집을 뛰쳐나옵니다. 사라의 학대가 견디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또는 이렇게 배짱을 부리면 후손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서 사라와 아브라함이 자신을 붙들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는지도 모르죠. 어쨌든지 도망가던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다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와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십 수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다음, 예상 밖으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되자 이 두 여인 사이에 또 하나의 갈등이 싹트게 됩니다. 하갈의 아들이며 이삭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사라는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 하갈 모자를 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모든 일이 사라의 요구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요청에 따라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내어 쫓았습니다(창 21장).  
옛날에는 비일비재했을, 요즘도 있을법한 이런 사태의 중심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성서 기자의 의도가 아니라 단지 객관적인 독자의 눈으로 아브라함의 행동거지를 판단한다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다른 나라에 잠시 신세를 지러 갔을 때도 자기에게 어떤 위해가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유약했던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공정하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하갈과 사라 사이에 벌어진 예민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마 아브라함으로서도 난감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가 약간만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자기 주장을 명확히 했더라도 이 두 여인들의 문제를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이 아니라 원만한 방식으로 해결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이슬람인들과 이렇게 원한에 사무친 전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노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근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창 21:11).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 모리안 산에서 아들에게 칼 겨눔으로서 영적 카리스마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브라함에게도 그 이면의 그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작위(作爲)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고 인정받은 게 아니라고 단언합니다(2절). 물론 아브라함에게 본받을만한 행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목초지 문제로 조카 롯과 갈등이 벌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원하는 지역을 먼저 선택하라고 양보했습니다.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고,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겠다." 그 당시는 목초지가 바로 자신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본받을 만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나그네를 접대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러 가는 천사를 만나게 된 것도 이렇게 지나가는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단정적으로 확증합니다. 만약 행위로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낮추어 잡아도 좋은 건가요? 우리 주변에 이렇게 선한 행위들이 있기 때문에 고단한 인생살이 중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장애시설을 찾아가서 봉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나누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호스피스들의 수고를 보면 인간다움의 극치를 느낍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뒤늦게 사회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엠에프 이후로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에게 끼니를 해결해준다거나, 때로는 외롭고 병든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있습니다.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는 개신교 복지기관으로서는 가장 대중적인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병원까지 개원했더군요. 교회가 내부 소비에 머물러 있다가 그래도 밖을 향해서 관심을 돌렸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선한 행위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게 아닐까요? 물론 이런 행위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듯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전제할 때만 인정됩니다. 그것은 곧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3)는 바울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선한 행위가 곧 사랑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윤리적 행위를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런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딱 들어맞는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수사가 계속되고 있겠지요. 결국 그런 불상사는 오웅진 신부의 과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완전하게 의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는 행위로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다"는 바울의 진단은 옳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렇고, 남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작위적 행동이 늘 순수하게 지탱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행위는 한계가 있으며,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역시 불완전합니다. 인간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내면적 한계는 앞서 여러 번 지적된 바이기 때문에 접어두고, 외면적 한계에 대해서 잠시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가 일으키게 될 그 파급력의 이면과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인간 지식의 한계입니다. 비록 선한 의도에서 발생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에 못지 않은 어두운 면을 늘 갖게 마련이며, 더구나 그 사건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그 사람을 정말 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르시기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위(無爲)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행한 것이 없더라도 ...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5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하면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칭의론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혁명적인 발상 전환이 없으면 그것을 이해하거나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는 경건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도덕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구별합니다. 만약 이런 기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작동되는 나라가 있다고 합시다.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이 똑같이 먹고사는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나온 사람과 대학을 나온 사람이 똑같은 연봉을 받는 나라가 있다고 합시다. 이미 예수님은 그런 비유를 하셨습니다(마 20 장).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불러들였습니다. 아침 7시, 10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들어와서 일한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씩 일당을 지급했습니다. 물론 여기 저기서 불만이 터졌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들은 대개가 남보다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차이가 원천적으로 부정됩니다. 경건치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경건치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더구나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행한 것이 없더라도 그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명제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경건치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야말로 참된 믿음이며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파렴치한 행위를 변호할 수는 없지만, 그런 파렴치한 행위보다도 자신의 선입관이나 사회의 도덕률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신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고 남을 판단하는 태도 말입니다. 자신을 세계 평화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오늘의 미국은 그야말로 가장 비기독교적인 신앙의 전형이 아닐까요?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기준이라는 바울의 이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기독성(christianity)의 시금석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조바심을 느끼면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떤 규칙에 묶여서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법에 딱 들어맞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느라고 마음이 분주하고, 굳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툭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래!", 또는 "사탄의 유혹이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앞서 표현한대로 너무나 작위적입니다. 참된 신앙은 오히려 무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인간적 기준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묶어두려는 작위가 아니라 생명의 영이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이끌어가도록 자기를 내버려두는 무위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요?

믿음의 본질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각하든지 아니면 훨씬 율법적인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무감각하다는 말은 주술적이라는 뜻이며, 율법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인간의 업적과 행위에 치우쳐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예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심하게 주술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제가 시시콜콜하게 지적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그저 예수 이름만 붙들고 있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고 믿는 식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율법정신이라 할 업적주의가 믿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교회 안에 탄탄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아할 뿐만 아니라 슬프기도 합니다. 이 업적주의는 종교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곧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가치 있는 것들을 생산해보자는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술적인 문제들은 약간만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대체로 적발해내고, 따라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업적주의적 신앙은 매우 경건하고 합리적인 가면으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신자들도 온갖 정성을 다해서 십일조 헌금을 드립니다. 물론 순수한 신앙으로 그렇게 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긴 하겠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에 따르면 그것이 일종의 의무처럼 강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고도 장로가 될 수 있을까요? 오해는 마십시오. 십일조 헌금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신앙의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 가운데서 기독교의 신앙생활이 바리새인들의 율법지키기와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간 데 없고, 율법적 형식으로 고착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합니다. 해방은 어떤 책임감, 또는 성취감으로부터 벗어날 때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이루었다는 데서 얻는 기쁨이 아니라 아무 것도 이루지 않아도, 더 나아가 경건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획득하게 되는 기쁨을 추구합니다. "행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특히 자기 행위, 자기 업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의 생명 세계를 아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가 이루는 성취감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이를 이룰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살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의 토대에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전혀 다른 삶의 토대에 대한 바른 인식과 결단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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