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부활뿐이다  (4:13-25)
                          
법이 문제다
지난 번(4:1-12)에 이어서 오늘도 역시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까다로운 주제를 풀어나가는 적당한 역사적 재료인 것 같습니다. 창 17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는데, 바울의 이런 지적에 대해서 토를 달 유대인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바울의 논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갑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이 세상의 상속자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런 바울의 지적은 아주 사실적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당시에 이 세상에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율법을 벗어난 여러 민족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을 훨씬 보편적인 지평에서 변증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그 조건에 해당되는 시금석을 믿음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정당화시켜준다는 논리를 좀더 극단적인 명제로 설명합니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습니다."(But where there is no law, there is no disobeying of the law.)(15절). 이런 문장이 바울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아포리즘(경구)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왠지 노자와 장자의 글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장자가 이 사회의 모든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오늘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법 무용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장자는 사회 질서만이 아니라 예술과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모든 형식을 거절합니다. 전문적인 영역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이것이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습니다. 변호사와 판사는 법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적용시킴으로써 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약간 다른 시각이지만 톨스토이도 "예술론"에서 소수의 예술가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발레 한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조연과 스탭, 또는 익명의 사람들이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투자된 노력에 비하면 그 예술 행위는 허무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법이 없는 상태는 단지 법에 대한 냉소주의라든지 또는 무정부주의는 아닙니다. 질서가 없이 창조적인 게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법이 없는 상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가 지배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질서인데, 이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믿음의 질서와 똑같습니다. 법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 이 두 차이를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질서는 전혀 다른 토대를 갖고 있습니다. 법의 질서는 타율적이고 인간 중심적이지만 은총의 질서는 자율적이고 신 중심적입니다. 법은 자기 성취에 관심을 두지만 은총은 절대적인 생명의 힘에 자기를 맡깁니다. 법은 생명에서 반사되어 적용되는 흔적에 불과하지만 은총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창조의 질서
아브라함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17절). 바울은 여기서 또 다시 기독교의 신앙을 보편적이고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바로 부활과 창조의 행위자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기 성취인 법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자가 베풀어주는 은총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스스로는 부활과 창조의 지평에서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말입니다.
요즘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해서 거의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더라도 그 사람의 세포 하나도 그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배양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술 자체가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지만, 설령 먼 미래에 그런 기술 문제가 극복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명복제가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생명은 선천적으로 어떤 성질을 갖고 태어나지만 후천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한 인격체를 유전자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식능력도 변하고, 감정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기 때문에 기계적인 유전자 조작만으로 동일한 인간을 복사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런 생명 복제 문제는 창조론과 연결됩니다. 물론 이 창조론은 창조가 완성되는 종말론과도 연계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창조 사건의 본질에 대한 매우 귀중한 발언을 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17절)는 표현에서 바울이 궁극적인 존재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하나님이 곧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성서의 창조론이 바로 이런 뜻이며, 이런 점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있는 것과만 상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과도 상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왜 존재하는 것들은 있으며, 그 이외의 것들은 없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흡사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색깔이 있고 들어오지 않는 색깔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귀에 들리는 소리의 파장이 있고 그렇지 못한 파장이 있는 것처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은폐"입니다. 하이데거는 없음으로서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존재라고 말했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이데거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그 인식의 층이 깊어져야만 합니다. 궁극적 생명의 세계인 부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숨어있는 세계이지만 어느 때가 되면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잠정적인 생명 형식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부활의 현실들을 우리의 삶에 완전히 실현시킬 수 없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오늘의 삶에 이런 부활의 빛을 비쳐주십니다. 바울에게는 이런 세계가 너무나 확연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추앙하면서 그를 본받으려고 애를 씁니다만 그 믿음의 실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배경으로 삼은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났는데도 아이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삭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인들이 아브라함처럼 이런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 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기적들도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생명의 근원을 따라가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 결정적인 의미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성서의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고대인들의 생각이 그렇게 밖에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늘 그런 식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온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바울의 증언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하게 하나님의 관심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에 그 무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삶의 토대가 전혀 다른 것으로, 즉 절대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의 일에만 치중합니다. 이러한 두 태도를 구분하기는 참으로 까다롭습니다. 인간은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시키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기와 자기의 일에 집착해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운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한국 기독교가 지금정도의 세력을 갖게 된 것은 많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헌신한 결과입니다. 교회당을 짓는 일도 믿음으로 했습니다. 내가 신학대학교 다닐 때인 1970년대 초에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부흥회를 열면 강사가 와서 한참 분위기를 "업" 시켜놓고, "천만 원 짜리 없어요?"라는 식으로 신자들을 몰고 갑니다. 결국 모두가 얼마씩 약속을 합니다. 전세에서 월세로 바꾸거나, 집을 팔고 전세로 들어가면서 그 차액을 건축 헌금으로 드립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결단하는 행위 자체는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체험은 신부가 되게도 하고 승려가 되게도 하기 때문에 이런 헌신 자체는 크게 탓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더욱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런 교회당 건축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되면서도 명분으로는 믿음을 내세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열정으로만 말하자면 기성교회가 이단을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다미선교회 등등, 이런 소종파 내지 사이비 종파는 믿음을 내세워 비합리적이고 자학적인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죽임에서 살림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제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할 하나님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라든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바로에게서 해방시킨 분이라든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렇게 진술되고 있습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곧 구원받는 길은 죽음의 일에서 생명의 일로 우리의 관심을 바꾸는 결단, 또는 신앙과 신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살림의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 인식이 바뀌면 행동도 마땅히 따라가기 때문에 개인이나 공동체나 생명과 살림의 영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런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새만금 갯벌 살리기>의 일환으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삼보일배" 고행에 나섰다고 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티브이에서 크게 다룬 적도 있고, KNCC에서는 이들의 시위에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극단적인 생태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자동차 폐기운동 같은 것은 너무나 현실에 동떨어진 이야기가 됩니다. 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주장도 역시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입장입니다. 소비지향적 사회구조로부터 존재지향적 구조로 바뀌어야 하며, 더구나 산업화 구조로부터 생태계 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삼보일배에 나선 두 분 성직자의 고행은 이런 생태학적 전망에서만이 아니라 훨씬 더 심원한 종교적 깊이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록 종교적인 차이가 있지만 마음속으로 격려를 보냅니다. 그 종교적 깊이라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생명 중심주의로 생각의 방향을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면 갯벌을 없애고 농경지나 산업단지로 만들겠지만, 생명 중심이 되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생태계의 생명 메커니즘을 살려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철저했으면 자기의 육체적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삼보일배의 고행에 나설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이외에도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장애인, 또는 양심수와 재소자, 노인과 어린이 등등, 사회적인 마이너리티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도 역시 살림의 세계로 나가는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인간의 구원에서 늘 한정적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생태계가 완전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고 합시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처럼 자연과 인간이 완전히 조화롭게 사는 공동체가 이루어졌다고 합시다. 그래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허무하고 좌절합니다. 결국 인간이 이 땅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지고지선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임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류의 딜레마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혁명가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발전으로는 인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슨 대답을 하고 있을까요?

부활의 절대성  
바울이 오늘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공동번역). 전혀 다른 삶의 형식인 부활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부활은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애벌레 이야기를 다시 한번 더 하겠습니다. 애벌레 상태에서는 아무리 먹을거리가 많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역시 애벌레의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기어다니면서 뽕나무 잎을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기어다니는 애벌레와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사도신경 해설>에서 말하듯이 바울이 경험한 예수의 부활 현실성은 "모든 지상적 생명과 완전히 다른 종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135쪽). 이렇듯 전혀 다른 생명이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성욕을 느끼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이런 지상의 생명형식으로는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허전합니다. 부활은 애벌레의 세계로부터 나비의 세계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예수의 부활만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이 지상적 삶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 동안 인간이 중요하다고 여긴 모든 삶의 형식들이 폐기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세계라고 한다면 여전히 율법이 유효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믿음만이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부활의 세계 앞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이 상대화되며, 교회도 역시 상대화됩니다. 이런 인간의 문화로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즉 우리에게는 여전히 숨겨진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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