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나님과의 평화    (5:1-11)  
                  

아브라함이 예로 등장하는 앞장에는 인간의 의로움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율법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 매우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한번 언급한 것 같은데,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 명제는 특히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 의미까지 충분히 아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만 거의 혁명적인 인식론적 변화가 없으면 이해했다고 볼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뿐이지 실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분야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만, 인식의 과정이 대개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 앞 단계를 거쳐야만 그 사람의 인식 세계 안에서 체화되지 그런 전 단계가 없으면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따라서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려면 수행하는 듯한 공부가 필수적입니다. 물론 이 공부가 반드시 신학을 전공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인 한계를 알기 때문인지 바울은 이제 5장부터 칭의론의 내용을 상세하게 해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칭의론의 개념을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다루어야 할 첫 단락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바울의 진술(1절)을 감안한다면 그가 앞서 그렇게 강조했던 칭의는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로 가기 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화는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다소간 평화에 참여할 수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틱낫한이나 법정 같은 불교의 영성이 나름대로 인간의 심연에 접근하고 있긴 합니다만, 또한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배울 게 많긴 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의 영성과는 길이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 착하게 살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결정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최초의 인류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의 마음이 흔들리게 된 이유는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이유는 인간이 자기의 피조성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야심에 있었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려는 이런 야망은 아담과 이브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어왔으며, 그런 일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정치와 교회는 하나님처럼 세계를 지배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야망은 늘 야만과 폭력과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에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숲 속에 숨어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자는 바울의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자기 절대화로부터 돌아서서 자기의 피조성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만 하나님과의 평화가 가능해집니다. 본훼퍼의 명상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지구의 손님이다."(Ich bin ein Gast auf Erden).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결코 우리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바울은 이런 평화를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까 이 사람은 현재의 은총 안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자기의 피조성을 인식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은총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합니다"(2절). 우리 개역성서로는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마틴 루터 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미래의 영광(Herrlichkeit)에 대한 희망으로 즐거워합니다."
이 영광은 우리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준비한 우리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칼빈의 용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흡사 임금과 신하처럼, 아버지와 아들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유비들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곡해할 위험성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비슷한 형체를 가진 존재로 여기고, 우리가 이 지상에서 나누는 인간 관계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그림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인간과 아무런 관계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 인간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계시입니다. 액체인 물이 고체인 나무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독점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참여하게 될 영광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영광의 실체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적 상들도 이 영광의 모든 것을 해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심리학적 용어를 통해서 표현한다면 소외가 완전히 극복된 상태, 또는 참된 자아가 획득된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바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나 언어적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절대적이고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를 머리 속으로 그려보아도 정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이라는 것은 늘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것 안에서만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완성된 생명의 세계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미래의 생명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는 희망으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적 토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누리는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희망"이 곧 그 근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진리입니까? 아니면 공연한 장광설화이거나 비현실적인 요설에 불과합니까? 일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한 무더기 꼬마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비석놀이, 고무줄, 줄넘기 등, 재미있는 놀이에 푹 빠져 있습니다. 태권도 도장에 다니는 어떤 덩치 큰 녀석은 친구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또 어떤 녀석은 구슬치기에서 비겁하게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것을 훔쳐서 달아납니다. 해가 기울자 어머니들이 나와서 자기 아이들을 불러들입니다. 자기를 아껴주고 귀하게 여겨주는 집 아이들은 놀던 것을 그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지만 돌아갈 집이 없거나 행패만 부리는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 아이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단지 내세주의이라거나 초월주의라거나 역사 냉소주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명백한 현실(리얼리티)을 직면하는 것이며, 이럴 때만 역사에 끌려 다니지 않고 역사에 참여해서 개혁과 변화에 몸담을 수 있습니다. 영광의 미래를 확신하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혁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서 희망으로
그래서 바울은 3,4절에서 현재 역사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한다고 주장합니다. 흡사 뒷말 이어가기 식으로 전개된 바울의 이 문장에 등장하는 일련의 단어는 이렇습니다. 고통, 인내, 끈기, 희망. 이러한 논리가 어느 정도 타당한지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이 문제는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결국 희망의 삶으로 승화되는 근거에 대해서만은 한번 짚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고통이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잡아내기는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당한 고통일 수도 있고,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수난일 수도 있고, 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감당해야하는 불안과 허무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든지 영광의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곧 기쁨의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앞서 아이들의 놀이터 이야기를 하면서 암시된 것이지만 즐겁게 쉴 집이 있는 아이들은 구슬이나 딱지를 잃어도, 친구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결정적으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이렇게 순수하게 정신화 시켜서 그것의 마성적 힘마저 간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 현실을 새로운 생명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현재 당하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누리는 행복한 조건에 매달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희망은 사랑이다
그런데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기독교인의 희망은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를 속이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이 희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5,8절).
사실 인류 역사에는 거짓 희망이 판을 쳤습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도 역시 인간을 기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으로 인한 해방의 시대가 온다고 역설했지만 그것은 허황한 꿈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따라가고 있는 시장경제도 역시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정부가 아무리 부동산 값을 잡아 보려고 해도 그것은 그 때뿐이지 결국은 돈벌이되는 그쪽으로 돈이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도 경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으며, 독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물론 나라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요즘 한국 교육계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NEIS 문제도 그렇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학생들의 인적, 학적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정보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교육부 관료들의 주장과 그것이 인권 침해 소지가 있기 때문에 수정, 보완해야한다는 전교조 및 시민단체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새만금 간척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시민, 종교계의 강력한 호소가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에 따라서 일백 여명의 국회의원이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전북 도지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행정공무원들과 지역민들은 간척사업을 하루 속히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평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일련의 문제들이 어떤 근원을 갖고 있는지, 따라서 그것의 치료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문제의 출발은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 사회구조에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대전제를 강요시켜놓고, 이제 와서 생태계를 보존해야 한다든지,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득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희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증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발상이 너무 안이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잘 안되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여전히 율법적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 변혁의 눈높이를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설정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며, 또한 현실 개혁과 변혁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될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변혁이 일어납니다. 예컨대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칠 때 자기 나름대로 세계의 평화를 열어 가는 행위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미국의 평화만을 지상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역사 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노조와 기업주가, 정부와 공무원이, 진보와 보수세력이 각각 역사를 보는 눈은 다르겠지만 율법의 완성이라 할 하나님의 사랑을 확대시켜나가는 방향에서 어떤 합의를 도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그 방향이 명백하다면 긴장과 갈등이 결국 우리 개인과 사회의 삶을 성숙시켜 나갈 것입니다.

예수를 통한 화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의 후반부에서 명시적으로 진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8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며(9절), 그리스도 덕분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습니다(9절). 게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1절).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게 너무나 명쾌한 사실입니다만 유대교의 입장에서, 또는 타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유대교 신학자였던 마틴 부버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질문이 그렇게 근거 없거나 남의 약점을 잡으려는 비열한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도 이 세상은 예수가 왔을 때나 오지 않았을 때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불의가 득세하고 이유 없는 고난이 있고, 특히 선천적 장애아들을 볼 때 도대체 이 땅에 그리스도가 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명된다고 믿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의 메시아로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명백하게 증명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이런 논의에서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 나간다, 또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유쾌하게 되었다는 인간론적 현상에만 매달립니다. 그런 현상들은 다른 데서도 많이 발생하며, 경우에 따라서 쉽게 "도루묵"이 됩니다. 그것보다는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변하지 않는 절대적 생명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시인들이 시의 세계에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기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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