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담과 그리스도    (5:12-21)


               오늘 본문은 로마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에 속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유형론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죽음과 생명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논리가 자기만의 독특한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에 이미 비슷한 논리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논리를 따라잡는 작업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우선 바울이 오늘 말하려는 요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인류가 당하게 된 죽음은 실제로 아담과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인해서 실제로는 그리스도처럼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역시 생명의 길이 주어졌다." 오늘 본문을 단지 교리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아주 따분하고 자기 중심적인, 그래서 전혀 보편적 설득력이 없는 궤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억지 주장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며, 그저 논리를 위한 논리의 공소성에 빠져들지도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다루어진 문제는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이며, 그 두 관계는 어떻습니까?

죽음
바울은 오늘 이렇게 진단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12절). 죄의 결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 주장은 현대인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멈추고 뇌 활동이 멈추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이 죽음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노화되든지 또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인 주장은 부분적이거나 또는 매우 추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노화하고 죽을병에 걸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원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서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바울의 증언을 지나치게 도덕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잘못도 있습니다. 죄가 인간의 삶에서 숙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면 자유의 세계에 들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인류사는 이런 죄론으로부터 벗어난 사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들에 의해서 인간의 자유가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니체는 이미 인간의 죄를 공격하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믿지 말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인간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는 신이 죽어야만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해방된다면서 "신은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노래했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그런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또한 자유의 훼손은 기독교 신앙을 사회적 책임감으로부터 물러나서 개인의 문제로 제한시켰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책임감도 없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바울이 오늘 이런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주제를 분석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인간학을 죄론에 근거해서 구성해보자는 시도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현실 교회가 인간의 죄를 공격함으로써 인간성을 훼손시킨 그런 역사적 행태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의 핵심은 죄가 아니라 은총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또한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죄가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거나 열등감에 빠지게 하려는 계산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인 도덕성과 심리상태를 물고늘어지는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며 통찰이 바로 성서와 기독교의 죄론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는 것도 이런 심층적 인식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분리를 죄라고 생각하는 그런 관점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면 당연히 죽는 게 아닐까요? 거꾸로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보면 인간이 생명과 단절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신구약성서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생명의 영인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인간은 죽는다는 이런 진단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명제가 현대인들에게 별로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돈을 벌어야 하고 좋은 음식이나 보약을 달여 먹어야 하고, 자식들 교육을 시키는 일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영이라는 말은 너무나 추상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기껏해야 기복적인 차원이나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할 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설교자의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청중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지만 설교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전해야 한다는 그 딜레마입니다. 이는 흡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부엌일에 정신이 없던 마르다에게 "네 동생이 좋은 것을 택했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무죄한 자의 죽음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이 옳다고 한다면 아담과 똑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도 죽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렇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비록 모든 인간이 창세기에 묘사되어 있는 선악과 사건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아담과 동일한 죄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 현실은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리적인 의미가 있듯이 아담의 범죄는 그런 대리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분리를 시도합니다. 생명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근원으로부터 조명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그런 생명을 모색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사실에 대한 반증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리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실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생명의 근원과 끊임없이 분리를 시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 옳다고 하더라도 "무죄한 자"의 시련과 뜻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 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어린 생명이 파괴되는 일들 앞에서는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만약 죽음이 반드시 죄와 연관되어 있다면 이런 무죄한 어린아이들의 죽음도 역시 그런 죄와 연결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게 맞는 말일까요? 물론 쉬운 대답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그 아이의 죄가 아니라면 그의 부모들의 죄 때문이라거나, 또는 그 사회 구조의 악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렇다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주장은 참으로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성서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는 게 훨씬 솔직한 자세입니다. 욥기서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대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신앙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만 그런 논리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궤변이었습니다. "자네가 당한 재난은 자네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 때문이다. 그러니 회개하라." 대충 이런 논리였습니다. 욥도 나름대로 자기의 정당성을 피력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긴 논쟁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인간의 짧은 생각과 혀로 자기 합리화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것인지 인간의 인식으로는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기다리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이렇게 추궁하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욥 38:2). 욥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3,5).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비참한 죽음을 비롯한 이유 없는 고난을 모두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밀 한 알이 썩어야만 열매를 맺게 되는 현상은 알지만 그 이유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신비에 속한 일들을 억지로 설명하려다가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모른다고 말하는 게 옳습니다. 이렇게 모른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궁극적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없도록 숨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이게 뭐꼬?"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지만 기독교는 이미 선취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17절). 이 한 구절에 기독교의 주장이 무엇인간에 대한 대답이 모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 생명을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은총입니다. 물론 본훼퍼가 지적했듯이 기독교가 이 은총을 너무 쉽게 자기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값싼 은혜"로 치우칠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 두었다는 점에서 은총은 기독교의 자기 해명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명의 은총 운운하면 뭔가 아주 이상한, 흡사 별나라에서나 통할 것같이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삶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삶이 선물이라는 말도 자주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니까 자기가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 세상에 나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와서 흙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창세기의 진술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숨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니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은 육이든지 영이든지 결국 다른 데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현실 삶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볼까요? 위대한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늘 영감에 가득 차 있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느슨해지는 때도 있고 긴장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만약 이런 영감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이라면 늘 일정 수준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그 작용이 달라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능가하는 생명의 힘이지 우리 인간의 내면적 실존 안에 한정된 어떤 감정적,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값진 것들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생명의 빛이 반사되는 것이지 빛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의 빛을 반사시키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빛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인간의 빛이 되려고 하고, 어떤 조직이나 이데올로기가 그런 빛으로 자기를 주장합니다. 주변 세계를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서는 교회도 다른 게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가 중심이 되거나, 심지어는 어떤 목회자가 중심이 됩니다. 카리스마가 강한 목회자일수록 신자들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목회자는 결국 신자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기보다는 자기를 부각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듯 자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죄가 아닐까요?

영원한 생명으로의 길(21)
바울은 17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은 사람은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21절에는 은총이 "군림한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아마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옛 에온이 끝나고 새 에온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바로 새 에온의 특징이며,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악한 세력이 통치하지만 미래에는 진리와 생명이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가리켜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에 이르는 것이 곧 구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말씀의 결론부분에서 죄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 모든 사람을 ...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영생이 무엇일까요? 과연 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합니까?
우선 이 단락에서도 역시 우리의 인식 능력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영원하다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듣습니다만 실제로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마음 자체가 늘 변화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자기 목숨이 붙어있는 시간 안에서만 타당한 말입니다.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가 앞으로 50억년 후에는 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영원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우주 전체의 나이가 대충 120억 년이라고 하는데, 이 시간도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가시적 사물과 자연의 시간적인 연장을 영원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길게 시간을 늘려 잡아도 여전히 그것은 유한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듯이 어느 때가 되면 불이 이 세상을 태우고 다시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며, 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는 의미에서 영원한 시간이 가능한 걸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니체도 영원회귀 사상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 어떤 상태가 반복해서 발생한다는 의미로 영원한 무엇이 가능하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늘 나라에서는 배고픔도 없고 목마름도 없는 행복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도 생각하는데, 이런 똑같은 조건이 반복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멋지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곧 실증을 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지 않으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의 연장이나 확대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생명으로서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거나 시집가고 장가가는 삶"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삶"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생명 형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지상적인 삶은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 학자들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역사라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미래의 완성된 생명사건이 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영생을 인식하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진정한 해방이 성취됩니다.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런 영원한 생명이 인간 공동체 안에서 확산되도록 최선을 다 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 해방의 길이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한 인간의 운명을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으로 인해 은총으로 주어졌다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