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세례    (6:1-14)

            
바울은 5장 끝 단락에서 은총이 죄를 능가하는 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돌입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칫 바울의 주장을 오해하게 되면 죄와 은총의 역동적 긴장 관계가 이완되어서 단지 낙관적 은총론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5:20) 임하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점을 이렇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6:1).
아주 올바른 지적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죄와 은총의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극단적 오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숙명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죄의 낙관주의입니다. 이 용어가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개념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는 지나치게 죄의 힘에 억압당하는 쪽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간과하는 쪽입니다.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손상당하며, 죄를 간과하게 되면 계몽주의에서 나타났듯이 인간과 그 역사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게 됩니다. 양측이 서로 상반된 개념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거의 인간학적 토대에 서 있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인이 가야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죄와 은총의 긴장 관계가, 또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에서 작동하는 긴장 관계가 "세례" 사건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세례는 죽음이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세례 공부와 문답을 합니다. 그런 공부를 통해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런 정도의 교리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세례교육은 좀더 철저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최소한 6개월 동안 영세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서너 번 정도의 교육으로 끝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6개월이라는 기간을 채우는 것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너무나 별 준비 없는 세례 교육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충 세례를 받고 성수주일과 십일조나 잘 드리는 신자가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죽음이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3절). 여기서의 죽음이 육체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차원의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는다고 한다면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전이나 후나 별로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이 흐려져서 그렇지 초기 시대에는 실제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도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았고 지금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은 모습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에도 역시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완전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다른 대답으로, 세례를 받았는데도 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세례를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순수한 것을 추려내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준비가 많았든지, 불충분했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례 이후에도 죄를 짓거나 시행착오를 많이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은 죄에서의 해방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7절). 죽은 사람은 그 이전의 모든 계약과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죄의 근거이기도 한 율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타당하다는 점에서 죽음은 곧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며, 따라서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말은 곧 죽음은 모든 율법적 규범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툭하면 자살을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면 그 사람이 죽으면 모든 채무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고 죄를 확증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곧 죄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지만, 이런 해명은 보다 심층적인 인간과 세례 이해를 그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앞서 바울은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식인종들에게 인간의 살을 먹는 행위는 죄가 아닙니다. 티베트에서는 지금도 죽은 승려들의 시체를 토막을 내어 독수리 먹이로 준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이 그들에게는 죄가 아닙니다.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행동도 역시 죄가 아닙니다. 법은 그 법이 인식되는 범주에서만 타당한 제도이기 때문에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가 이해하는 생명은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단절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경우에만 바울의 이 말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법과 종교적인 율법으로 규정되어야 할 이 땅의 삶에 한정되지 않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런 논리는 허구이며 순수관념에 떨어져 버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절대적인 세계와 이 세상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세례 사건을 해명하면서 전제하고 있는 이 절대세계의 논리를 이것 자체로만 생각하면 자칫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오늘의 현실적 삶을 외면하거나 간과해도 좋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의 삶이 가장 명확하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것 자체로만이 아니라 이것이 근거하고 있는 어떤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제 율법과 상관없는 세계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죽은 자는 죄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게 아니라 예수가 죽었는데도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이런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직접 죽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다
세례를 받은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점을 바울은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3,5절). 이 문제도 우리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나요? 전혀 다른 시공간에 놓여 있는데 말입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두 인격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세례가 바로 죽음이라는 바울의 진술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설명하기 힘들면 "영적인 차원"이라고 대답합니다만 그 영적이라는 사태가 너무나 다르게, 또는 이질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대답은 불충분합니다. 만약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변죽만 건드리지 말고 정곡을 찌르는 식으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아니지만 그가 우리를 그렇게 인정하신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이는 흡사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완전히 의로워진 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이라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이 일은 단지 예수에게서만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이니셔티브는 바로 그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는 공생애 중에서도 이런 의미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우리와 하나라고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다른 실체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어머니와 딸이 있습니다. 이 딸은 신용카드를 잘못 사용하다가 신용불량자가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이미 예측한 어머니는 딸이 모르게 자기 통장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조치를 끝내두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금융 신용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딸이 자기가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매일 불안하게 살아간다면 이보다 큰 불신은 없을 것입니다.

세례는 새 생명의 사건이다.
사실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8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습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세례를 통해서 새 생명, 즉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리라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이 우리에게 일어나리라는 사실도 역시 분명합니다. 이런 희망이 우리에게 명백하다면 당연히 지금의 삶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돌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새 생명, 또는 부활에 대해서 자주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합니다만 그 세계를 깨치지는 못하고 살아갑니다. 즉 새 생명이 정보의 차원에서는 우리와 연관되지만 실제 삶의 차원에서는 거의 무능력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함으로써 실제적인 삶에서는 자기들의 작은 경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닫혀 있습니다. 자신의 생물학적 능력을 확대시키거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나가는 것만이 곧 삶의 목표이며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른들의 경우처럼 수평으로 그어진 선 중간에 반원의 곡선이 놓인 그림을 밀짚 "모자"로만 생각하지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 구렁이"로는 절대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과 비슷합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의 생명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역동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깊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인생이 바로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 생명은 온 세상보다 귀하며, 아흔 아홉 마리의 양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역시 귀중하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불행을 당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억울합니까? 새로운 생명의 근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불행과 하나님의 존재를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선취된 생명의 세계에서
이 새 생명은 종말론적으로, 미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세계일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선취(先取)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미래가 현재 속으로 앞당겨졌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도대체 가능할까요?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지 어떻게 미래가 현재일 수 있나요? 시간을 늘 빛의 속도에 의한 기계적인 진행으로 본다면 현재와 미래가 결합될 수 없습니다만 시간과 역사가 늘 그렇게만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생명의 선취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문제는 인식론적 훈련이 필요한 것이니까 여기서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미래를 향한 희망과 그것의 선취라는 긴장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단지 미래의 희망에만 빠져 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긴장관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자기 삶의 현재와 미래를 적당하게 균형을 맞추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숨어 있으면서, 동시에 계시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총 아래서
법이 아니라 새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것의 선취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은총입니다(14절). (율)법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작용해야만 하지만 은총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기 때문에 은총입니다.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이 일에 참여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우주론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법의 질서로부터 은총의 질서로 바뀐다는 점에서,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이것은 우주론적 사건입니다.
바울은 12,-14절에서 몸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죄를 멀리하고, 더 나아가서 악과 투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기독교인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휴머니스트나 사회주의자들도 아주 뛰어난 삶의 모범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 신앙을 탈역사화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는 명백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타노이아(회심)가 우선하는 것이지 그 회심 이후의 살아가는 방식이 우선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욕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다"고 증언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은총 아래 있는 사람만이 실제로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따라서 이 사회에서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의 제목을 "우주적 사건으로서의 세례"라고 잡은 이유는 세례가 곧 이 세계와 우주 전체 구원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비록 소박한 종교 의식의 형태를 갖춘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새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혁명적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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