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은 일단 과거 수 십년간 성서고고학을 지배해 온 담론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많은 고고학적 해석과 학자들이 등장하지요. 자칫 관전하는 다비안들께서 생소한 인물들과 무슨 주의니 모델이니 하는 말에 지루해 할 수도 있으므로 미리 관련 정보를 제공합니다. 최근 성서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는 다름아닌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서왔던 세가지 모델을 먼저 요약합니다.

1) 정복모델 (The Conquest Model)

W. F. Albright (올브라이트)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룹. 미국과 구미에서 주류를 이루었고 여전히 강력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나 3-40년 전에 비해 많이 약화됨.

주장: 이스라엘인들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민족, 문화적으로 가나안인들과 확실히 구별된다고 주장. 성서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모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빠져나와 성경의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과정을 통해 가나안을 침공하고 점령함. 올브라이트는 특히 자신의 고고학적 발굴을 가나안 침략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사용. 기원전 13세기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된 흔적들을 이스라엘의 정복 과정의 결과로 결론내림.

단점: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내용 사이의 모순. 가나안문화와 초기 이스라엘 문화의 동질성과 연속성에 대한 설명이 빠짐. 특히 종교적 측면에서 고고학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교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제시.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초기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해 놓고도 왜 척박하고 비좁은 고원지대에 정착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함. 올브라이트가 기원전 13세기경으로 나이매긴 유적들이 대부분 기원전 12-10세기 또는 그 이후의 것으로 판명. 발굴의 결과를 성경의 기록에 강박적으로 맞추려 했던 것이 뼈아픈 실수로 남음.

2) 평화적인 침투 모델 (The Peaceful Infiltration Model)

Albrecht Alt (알트), Martin Noth (노트)

주장: 창세기 족장들 이야기 속에 어느정도 역사성이 있다고 판단. (다양한 신을 숭배하던) 유목민들이 가나안으로 이주. 이미 존재하는 가나안 도시들을 피해 고산지대에 정착. 후에 가나안 도시체계가 허물어짐에 따라 점차 낮은 평야지대로 확장. 따라서 이 모델은 점진적인 진행과정과 이스라엘민족이 복합적이 기원을 갖는다고 설명.

단점: 비록 초기 정착지 발굴 결과가 이 모델과 일치하지만, 정복 모델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물질문화와의 분명한 연속성과 종교 문화적 유사성을 설명하지 못함

3) 사회혁명설 (The Social Revolution)

George Mendenhall (멘델홀), Norman Gottwald (고트왈드)

주장: 낮은 계급 (또는 농민) 가나안 사람들에 의한 폭동. 고산지역에 비중앙집권적이고 평등적인 사회 성립.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 3세와 4세가 주위 여러 국가와 도시들로부터 주고받은 외교문서인 <엘 아마르나 서신들 (El Amarna Letters)>이 강력한 증거.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국제관계와 여러 사건도시의 통치자들의 이름과 함께 도시들 사이의 다툼과 분쟁, 그리고 그들이 이집트의 군사적 제재를 요청했던 하비루 민족의 봉기에 관한 내용.

단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기원을 두므로 연속성을 설명하고 있으나, 봉기에 성공한 자들이 왜 가장 척박하고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에 대한 설명 부족. 성경이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점도 큰 부담.

이상의 모델들을 고전적인 모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주요한 논제를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1) 초기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인의 일부였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인가? 정복모델과 평화침투 모델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인과는 별도의 민족으로 보는 반면에, 사회혁명 모델은 이스라엘인들을 가나안인들과 동일시합니다. (2)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성립은 폭력적이었는가? 아니면 평화적인 과정이었는가? 정복 모델과 사회혁명 모델은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침투 모델은 평화적인 과정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보다 최근에 이 세가지 모델들의 장점들을 취합한 것처럼 보이는 내부기원 모델이 등장합니다. 이 모델도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뉘기도 하지요. (1) William Dever 데버, Niels Peter Lemche 렘체, Gösta Ahlström 알스트룀이 한 그룹을 (2) N. Gottwald 고트왈드와 (3) 쿠트(R.C.Coote)와 휘틀램(K.W.Whitelam)이 또 다른 그룹을 형성합니다. 이들 모두에서 공통점은 가나안 내부에서 고원지대에 정착한 일련의 집단들이 단일하지 않고 또 그 과정도 아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데버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가나안 도시들과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 주기적으로 옮겨 다녔던 유목민들 그리고 에집트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소규모 집단과 같은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서 유래한다고 결론짓습니다. 렘체는 후기 청동기시대 가나안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중심으로 고원지대의 새로운 정착민들은 당시 가나안 인구의 90%에 달했던 시골 농부들이 주축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알스트룀(G.Ahlström) 은 고고학 자료에 비추어 볼 때 군사적 정복이나 농민혁명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기원 전13-12세기에 중앙 고지대에 인구가 증가하였는데 그는 "사회적 불안과 불만" 그리고 해양족속(sea people)의 침입 때문에 해안평지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산지로 이동한 한편, 요단 동편의 유리하는 "아람 사람들"인 야곱 족속이 합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중앙 산지에 정착할 당시에는 그 지역 이름이었으며 남북 분열 왕국시대에는 북왕국의 명칭이었고 포로 후기에는 종교적으로 야웨의 백성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간주합니다.

쿠트(R.C.Coote)와 휘틀램(K.W.Whitelam)은 성서를 신앙 고백적인 문서로 취급하여 제외한 채, 신고고학(New Archeology)적 방법으로 발견된 사실에 기초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지리, 풍토의 연구와 생활 양식에 근거하여 사회학적 모델을 사용하는데, 외부 유입설을 반대하고 이스라엘을 가나안과 연속된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고고학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고고학에 다양한 다른 학문들 (예:사회학,경제학,인류고고학,지리학,생태학,심리-생리학 등)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과는 약간 다른 관점을 보이면서 역시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핑클슈타인(Israel Finkelstein)입니다. 현재도 왕성하게 이스라엘에서 유적 발굴을 지휘하고 있는 핑클슈타인은, 원래 가나안 사람이었던 이스라엘인들이 기원전16세기경에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가나안을 떠나 사막부근에서 목축/유목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기원전 13세기에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기원전12-11세기까지 거의 정착이 끝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정착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위 가나안인들과 이스라엘이 구별되고 마찰이 일어나기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서쪽(해안 저지대)으로 확장을 시도할 때 부터라고 봅니다. 내부 기원 모델의 여러 그룹들이 성경의 내용을 거의 배제한 채 이스라엘의 기원을 재구성하려 한다면, 핑클슈타인은 성경이 최소한의 역사성을 보존하고 있다고 간주합니다. 다만, 그 정확한 시기와 사건의 규모등은 나타난 증거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이 정도의 고고학적 배경 지식이면 우리 다비안들께서 <느긋한 토론>을 진정 느긋하게 관전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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