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로마서 1:26-27)
동성애자들의 비윤리성과 관계되어 교회 안밖에서 자주 논쟁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므로 정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로마서의 저 본문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재고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진리로 간주된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바울의 편지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브리즈 역시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고자 한다. 왜, 바울은 저 구절을 남겼는가? 저 두 구절은 1:18-32절의 본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아가 로마서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바울의 신학적 주장 안에서 위의 두 구절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막상 질문은 던졌지만 사실 브리즈가 가진 능력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꼭 해야 할 질문을 잊어버려선 안 되겠다.
다른 서신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로마서의 주제를 인식하는게 중요하다. 편지라는 특성상 거의 예외없이 주제가 도입부에 나온다. 브리즈는 1장 16절을 로마서의 키워드로 이해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모든 믿는 자”, 새삼스럽지만 여전히 감동적이다. 바울의 주장이 군더더기 없이 표현된 이 한 구절을 곱씹으면서 로마서 읽기를 끝내더라도 브리즈같은 초신자 수준에선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머지 부분은 세상 모든 사람 [유대인+이방인(헬라인)]에게 예외없이 예수가 필요한 이유를 변증하는 것이다. 특히 (수 천년 동안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왔던) 유대인들이 왜 예외가 될 수 없는지를 설득하는 과정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2-3장).
먼저 1장 18절에서 32절까지를 읽으면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고자 한다: (1) 본문에서 누가 책망 또는 비난 받고 있는가? (2) 무엇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는가?
첫번째 질문의 답은 쉽다. 여기서(1:18-32) 책망/비난 받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이방인”들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이토록 강하게 비난 받고 있는가?
바로 진리를 가로막고(18절),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며(28절),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감사를 드리지 못했기(21절) 때문이다.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들의 이와 같은 삶은 우상숭배에 다름아닌 것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3절)”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을 읽으면서 브리즈가 던졌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자. 누가 책망받는 죄인들이며, 그들의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한 죄인들은 바로 이방인들이며 그들은 지금 우상숭배라는 가장 근본적인 죄로 인해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 주어서(19-20절)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음에도 그 진리를 억압하고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23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26절과 27절에서 응징받고 있는 동성애 행위와 29절과31절에 나열되어 있는 악한 행위들의 리스트는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 동성애를 포함하여 거기에 지적된 불의한 행위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18절)를 일으키는 죄목들인가? 결코 아니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든, 역사 비평적으로 읽든, 현대의 사회, 문화를 고려해서 읽든 답은 똑같다).
26절부터 31절까지 나열된 행위들은 순전히 이방인들이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25절)” 죄의 결과이며, 이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내어 버려 둬서(24절, 26절, 28절)” 그들의 삶에서 보여지는 행동들인 것이다. 26절에서 바울이 말한 문제의 “부끄러운 욕심 (즉, 동성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아니라 죄로 인해) 받은 벌이라는 점은 “--- 우상으로 바꾸었노라(23절), 그러므로 ---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두사(24절)---, 이는 저희가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25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26절)”의 문맥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게다가 27절의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라는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동성애는 우상숭배에 따른 하나님의 벌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동성애(죄-그릇됨) 때문에 동성애(부끄러운 일)를 벌로 받았다고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죄(그릇됨-우상숭배)의 댓가에 상당하는 벌(부끄러운 일 – 동성애)을 받은 것이다.
29절에서 31절 사이에 나열되는 “합당치 못한 일들” 역시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28절)”라는 구절에서 그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고 있다. 그 합당치 못한 일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나는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29-31 )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브리즈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시말해 26-31절에 나타난 모든 비윤리적 행위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지 진노의 원인이 아닌 것이다. 진노의 원인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18절부터 31절을 통해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1.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 당신을 보였음에도 이방인들은 그 진리를 아는데 실패하였으므로 핑계대지 못한다. 2. 그리하여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3. 그로인해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비윤리적 행위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바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혀 낯설지 않을뿐더러 천여년간 그들이 줄기차게 주장하거나 들어왔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로서 유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내용 다음에 뒤따르는 자신들을 향한 선택과 약속 그리고 희망에 관한 선언이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우상숭배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때론 닮아 가(려)는 유대인을 책망하기도 하였으나 그 끝은 항상 유대인에 대한 선별성과 희망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방인 정죄(우상숭배) – 유대인의 선별성(언약)이라는 대조의 틀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유대인들이라면 지금쯤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1장 16절의 키워드에서 이미 밝혔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에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함을 예시하였다. 이방인의 죄인됨은 쉽게 밝혔으나 우상을 섬기지 않는 유대인들의 죄인됨을 밝히는 것은 바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1:32절에서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면서도 비윤리적인 일들을 행하고 또한 장려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악한 행위를 행하고 인정하는 자들을 비난한 후(1:32), 이제 눈길을 이방인의 악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당연히 의롭고 선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 에게 돌린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에겐 당혹스럽게도), 바울이 이방인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역시 함께 비난한다는 점이다! “남을 판단한다”는 이유에서다 (2:1).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들어왔던 말씀의 형식(이방인에 대한 비난 – 유대인에 대한 약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앞서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비난할 때 사용하였던 “핑계치 못할(1:20)” 일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2:1). 이때쯤 편지를 읽는 유대인(기독교신자)들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다가오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바울이 남을 판단한다고 비난하는 대상은 자기도 비난받을 일을 하면서도 같은 일을 하는 남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시작되어 2장의 이어지는 본문과 3장 전체를 통하여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예외없이 하나님 아래서는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로 이어진다. 즉, 3장 20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요점은 죄에 관한 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9). 2장 1절부터 3:20절까지는 율법(의 준수 여부)으로 남을 정죄하는 유대인의 죄에 관한 내용이다. 1:18-1:32는 이 유대인의 죄인됨을 끌어내기위한 도입부로서 사용된다.
사실 로마서 1:18에서 3:20까지는1:18의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를 설명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바울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1:18-32)와 유대인들의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행위(2;1-3;20)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방인(죄인) – 유대인 (구원)]의 틀이 깨어지고 죄인의 부류에 유대인까지 포함시키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다시말해 바울은 모든 인간이 철저하게 비참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당연히 이방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찬란히 비추는 광명이 있으니 바로 3장 11절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인간(죄인)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움 아래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세상 모든 사람(유대인+이방인)이 죄인 – 믿음 (구원)]의 새로운 대조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상의 어설픈 성경 읽기로 동성애와 그에 관련된 구절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브리즈의 개인적 견해가 충분히 드러났길 바란다 (글의 목적이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지 남을 설득하는게 아니므로). 로마서 1:26-27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때문에 나에겐 그 어떤 특별함도 주지 못하는 부분이다. 여전히 브리즈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곧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을진데, 다행스럽게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라는 복음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희망의 소식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8-39)”는 구절에서 정점을 이룬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죄인들)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의 이러한 확신은 복음서의 “누구든지”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과 공명되어 메아리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태 10:32)”,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가 9:37)”,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가 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 7:37)”,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한 10:9)”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리고 “누구든지”에 그 어떤 예외나 조건을 끼워 넣을 여지가 있다고 보는가?
그런데 제가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평(범한)신도, 그것도 왠만한 건 다 용서가 된다는
공포의 "초신자"인 관계로 큰 부담없이 올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거나, 고쳐야 할 것들, 문제점을 지적받는데 있어서 아주 편안합니다.
처음 말씀하신 24절은 18절을 잘못 타이핑 하셨지요?
어쨌든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네요. 저 '초신자'인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저는 17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18절의 불의도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움"에 반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진노의 원인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19-25절에 나타나는데 모두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로막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19, 20, 21절이 영어성경에선
모두 because, for 등의 단어로 시작되어 진노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음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두번째 언급하신 부분도 참 어렵네요.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제게 붙어다니는 문제거든요.
로마서 안에서만 언급한다면 8장 23절의 "이뿐 아니라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에서 답을 찾고 싶군요. 죄에서 당장 거두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미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지만 모든 죄지음으로부터의 자유는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친밀함(교제)은 아직 아니며, 이미 은혜를
맛보았지만 그 온전함도 나중에 누리게 될 것이고, 오늘은 희뿌연 유리창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지만
그 날이 되면직접 마주 대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아직 로마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꼭지글은 동성애 문제에 한하여
과연 로마서의 저 구절에 근거하여 "믿음을 가진 동성애자 형제/자매의 신앙을 내가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신학자들이,
(나는 피해나가야하니 다르게 말해서)
신약학자들은 이제 먹고살기 힘들겠소이다.
자칭 초신자가 저렇게 로마서의 중심을 파헤치고 다니니 말이오.
여기 다비안 중에 자칭 초신자가 또 한 사람 있는데,
이후로는 브리즈나 바로 그 초신자나 초신자라는 말은 떼버리로 합시다.
만약 브리즈 님이
다른 전문적인 로마서 주석이나 이와 비슷한 책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이 글을 썼다면
타고난 성서학자요.
헬라어 원어를 보충하기만 한다면
신약학자의 글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소이다.
물론 신약학자 중에서는 정 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분들도 없지 않겠지만요.
자연과학자의 치밀성이
성서 본문의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구료.
그렇군.
자연과학자와 성서학자는 다를 게 없지.
둘 다 과학이오.
과학(Wissenschaft)!
김용준 선생이 <인간의 과학>이라는 글모음집에서
과학(사이언스)를 인간의 앎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던데,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소만.
인문학자가 아닌 자연과학자가
저렇게 놀라운 인문학적 힘으로 성서를 풀어내고 있으니,
놀랍소.
잘 해 봅시다.
아자.
그나저나
이러다가 이제 성서본문만 아니라
조직신학 문제까지 치고 들어올까 겁나는구료.
다시금 열어 음미하며 뭔가 감사의 댓글을 달아야지 했는데
역시나, 그사이에 정목사님이 모자람 없이 찬사를 보내셨네요.
저도 목사님 뒤편에서
힘찬 박수 보내드립니다 ㅉㅉㅉ~~
최소한의 다비안적(이란 말이 좀 모호하긴 하지만) 진지함조차 소홀히 여기며
성경과 인간에 대한 피상적이고 단조로운 이해에 기댄,
개인적 감상에 갇힌 신앙을 반복적으로 자신있게 주장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요즘의 살짝 수상스런 다비아 시국(?)에 비추어볼때
(이 발언이 또 문제가 좀 되려나....?)
평신도인, 그것도 초신자를 자처하시는 브리즈박사님께서
진정한 사유의 힘이 무엇인지,
성경을 대하는데 있어서 왜 엄정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시니
참으로 시의적절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분석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브리즈님이 보여주신 그 태도와 방향성을 가르침 삼아
느리지만 꾸준히,
한발 더 깊은 세계로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내겠습니다.
올려주신 글 진심으로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타고난 유머감각과 함께 로마서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는 진심으로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어떤 예외나 조건을 끼워 넣을 여지가 있다고 보는가?”
아멘!!!!!!!!!!!!!!!! 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은 조건이나 자격이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한가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살짝 한다면
"믿음을 가진 동성애자 형제/자매의 신앙을 내가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
최근 거듭 나오는 이 문제의 요점은
제가 보기에 그들 (동성애자 형제/자매) 이 구원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적인 삶과 고민에 대한 각각의 입장과 의견들이 분분하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서로 자기들의 생각에다가 더 강조를 두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혹 판단이나 비판적으로 보여진것은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
우리가 그런 부분들을 해결할수도 없고 딱히 도울 방법도 별로 없는거 같습니다.
다만 그들의 입장에서 분명 도울것은 도와야 하겠지만
그것을 묵인하거나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이 과연 상대적으로 소외된자들을 위한것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좀 비약적이기는 하겠지만
알콜중독에서 고통받는 그들에게 그들의 형편을 이해한다고
그들의 손에 술병을 쥐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아프고 가슴이 짠하지만
그저 그대로 두고만 보는것이 정말 위하는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이와같은 일뿐이겠어요
우리 모두에게
누구든지에 해당하는 모든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주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주석이나 전문서적은 없지만, 다비아의 많은 글들, 그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들 그리고 성경공부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메모해 놨던 노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관점들 속에서 나름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하는 과정을 통해 '취사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부분만은 제가 한 일이겠네요.
격려의 '당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의 게으른 성격상, 당근만 낼름 받아 먹고
제자리서 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답니다.
힘들고 바쁠텐데도 강의안도 올려주고 또 여기까지 방문해 주니 고맙고 기뻐요.
어려운 삶 속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용기내어 주시고 또 그 용기 나도 좀 나누어 주시고.
댓글 잘 읽었습니다. 차분하고 따뜻하게 진심을 담아주셔서 저 또한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을 정리합니다. 글이 아무래도 설득조로 흐르니, 이 점 양해바랍니다.
동성애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나는 저들에 비해 좀
낫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리거든요. 사실 그들 대부분은 나의,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철저한 무관심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묵인 또는 인정해주는 방향”이 좋은 것인지 걱정하셨습니다만, 욕심 같아선 그런 생각도 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욕심이 과하죠?). 내가 누군데 누구를 묵인하고 인정하고 말고 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내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시기하는 자들, 자랑하는 자들, 탐욕스런 자들, 간음하는 자들, 남을 판단하는
자들과 섞여서 잘들 지내면서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또 나 역시도
그 중 한명임에 틀림 없으면서도 동성애자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주변이 온통 깨끗해진듯 성경 말씀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저는 솔직히 이해 못하겠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에
어떤 가치 판단이 아니라 ‘이해 못하겠다’고 솔직히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만 보더라도 가장 중요하게, 길게, 자주 언급되는 죄가 무엇이던가요?
바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위” 아니던가요?
믿음을 가진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을진대, 그들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죄인처럼 보인다면 그들을 탓할 게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하겠지요.
알콜중독자의 예를 드셨는데 님도 비약적이라고 하셨지만 실제 비교 대상이 아예 아닙니다.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고 언제 기회가 있겠지요.
작은자님의 조심스런 댓글을 핑계삼아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마구 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은자님은 이해해줄 것으로 믿고서 말입니다.
브리즈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경솔했군요^^
생각도 단편적이고요~
맞습니다. 누굴 도와야 한다는 생각마져 버려야 한다는 그말 가슴에 팍 들어오네요^^
전적으로 브리즈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한테 감사하셔야 해요^^
"작은자님의 조심스런 댓글을 핑계삼아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마구 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은자님은 이해해줄 것으로 믿고서 말입니다."
이렇게 가지 안전장치를 하셨는디요^^
워떻게 이핼 못하겄어요^^ ㅎㅎㅎ~
도리어 제가 내 의견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는 주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학교도 그렇고 또 학교 주변의 상가 중에는 동성애자 전용 카페도 하나 있지요.
아마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선 동성애자를 찾기 힘들 것입니다.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는 동성애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공식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고 후보 교인이 있는 것은 아니구요. ‘예비’하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다비안들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우리가 교회안에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같은 교인으로서 동성애자 교우들에게도
성령이 함께 하시고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령은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는지 그들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제가 들었던 설교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미리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듣는 대화는 듣는 것도 아닐뿐더러 대화는 더욱 아니다.”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한 설교 중에 나온 이야기였지만, 동성애자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모든 대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단, 저는 작은자님과 댓글을 주고 받으면서 대화보다는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설득하는 방향이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더욱 작은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성서공부는 시켜야죠. 문제는 '초신자'들이라니깐요.
사업 망했다 예수 믿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과 같은 초신자들은 괜찮아요.
삶의 굴곡도 없고 평탄해 보인던 사람이 뒤늦게 갑자기 믿음을 갖게 되는,
이런 초신자가 바로 "공포의 초신자"입니다.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ㅋㅋ
브리즈님이 올려주신 글에 감탄하고 또 동의합니다. 뭐 묻은 넘이 뭐 묻은 놈 욕한다는 식으로.. 특히, 신자라는 사람들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한편으론 마냥 동감하기에. 우려스러운 마음도 조금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선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죄악의 결과로서 인간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벌 중에 하나이며,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그래서 그냥 감당하며 평생 그렇게 살아야하는 운명으로 봐야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인간이 가진 다양한 죄성, 즉 탐심, 음욕, 거짓, 위선등과 동일한 또하나의 죄성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만일, 이것을 인간의 죄된 모습의 하나로 본다면, 주변에서 정죄하는 것은 바울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해서는 안될 일이겠으나, 그들 스스로 그런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다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런 죄성을 벗어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본인들의 동성애의 죄된 성향을 벗고자 애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동성애자들과 관련한 이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브리즈님 글에서 보면, 그냥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우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
즉,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을 모두 축하해주고 부부로 인정해주는것 처럼.. 그들도 그렇게 정식부부로 인정해 달라는 그런 요구라면요. 전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성격상 원래 거짓말하는 것이 버릇이되어서 고치기 힘들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을 할테니, 그냥 여러분들이 난 원래 이런 놈인줄 알고 이해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정죄하는 것도 안되겠으나, 동성애자들이 인정해달라는대로 수긍해주는 것,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여주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엎드릴때에 파트너와 함께 나온다는 것은 조금 비약하자면, 바람피우는 남자가 자기 애인을 데리고 떳떳하게 교회에 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닌지요.
그들이 아무말 없이 그냥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교회안에서 떳떳하게 동성애자로서 예배드리게 해달라는 것 아닌가요.
남들처럼 손도 잡고, 적당한 스킨쉽도.. 그걸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제가 너무 오버하고 있나요?..)
제 고등학교시절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친구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어쩌고 하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의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건없이 받아들여주는 것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내 감정과 내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담대하게 선포하고 선한 길로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것도 신앙인이 가져야할 좋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님의 글을 읽어 나가면서 잠시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읽고 나니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군요 .
동성애가 “한 개인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에 관한 것이냐” 라는 문제를 두고 님과 저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님이 우려하는 것을 저는 고민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동성애자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동성애를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한 개인이 성적 호기심이나 쾌락이 주는 유혹에 못이겨서 사회와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거부하는 어둠 속 또는 나락으로 스스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택이냐, 아니냐”의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동성애에 대한 유전학적 근거가 있느냐로 쉽게 결정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저는 동성애가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동성애자는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밝혔다 해서 현재 동성애를 죄악시 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달라질까요? 저는 일단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애당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자에 대한 가치판단이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동성애자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보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다르다’는 것이죠. 따라서 과학의 결과를 빌려 동성애에 대한 관점을 바꾸려는 의도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 제가 동성애자들이 다른 죄성들과는 달리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얼까요? 비록 많지는 않지만 실제 동성애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부대끼는 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주로 청소년기의 성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하는”이 아니고 “되는”이라는 점에 주의하시길) 중요한 시기에 그들이 내적, 외적으로 겪는 온갖 부조리는 단순히 ‘고통’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합니다. 저는 그러한 경험 속에서 그들에게 그 어떤 ‘선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마치 이성애자인 제가 어느 시기에 내 의지를 가지고 이성애를 ‘선택’한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물론 같은 경험을 하고서 저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드립니다. 고감도님은 어떤 경험과 과정을 통해 동성애가 다른 죄성들처럼 인간이 선택한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나요?
저는 동성애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로부터 직접 들었던 적은 없었구요. 제 경험은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 듣는 누구누구가 성전환 수술을 했다더라. 누구가 자신은 동성애자라고 밝혔다더라. 그런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제 스스로 경험했던 묘한 느낌..
그러나, 그 경험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청소년기의 성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에 가졌던 약간의 혼란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큰 어려움 없이 바로 잡을 수 있었고, 이후에는 잊고 지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만일, 그 당시 동성애자들도 당당하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약간의 혼란으로 끝났을 수 있었을 묘한 느낌이 그 느낌을 더 알아보고 추구하는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좀더 비약하면, 세월이 많이 흐른후에는 아이들이 자라 청소년기가 되면 동성애 와 이성애를 선택하는 지경까지 우리들이 타락(?)하게 되지는 않을지..
동성애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수의 이성애자들인 우리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데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옳은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혼동스럽습니다.
설령 모든 동성애자들이 그들의 선택이 아니고 그렇게 '타고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그런 성향을 갖게 된 데 대해, 그들의 잘못이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의 죄가 원인이라고 인정하고 함께 아파하고 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은 선한 일로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성애를 '정상'인 것으로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교회마저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중심을 잃는 것 처럼 느껴지니까요..
암튼, 제가 복잡한 이슈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내리는 결론도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여기서 보게되니 ,,,,,
또 이 곳에서도 그러한 결론들이 내려지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전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이해되고
틀을 가지고보기 시작하면 더 큰 틀어 만들어 본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SM(사도 마조히즘)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대화를 아마도
저 만큼 나눈 분은 없을 듯합니다.
너무나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고
그로 통해 종교적 현상을 더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도 되었지요.
어떤 결론을 내어 놓고 이야기 하면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이 문제이지요.
제가 듣고 본 이야기를 내어놓으면
이야기하는 저를 미친 사람으로 볼정도 이런 문제는 쉬운게 아닙니다.
저 조차도 그들을
이해 하면서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원인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보는 관점
즉,
타고 나는 것이냐
아님 후천적인 것이냐
타고난 것이면 하나님 그들에게 죄를 돌릴 수없고
후천적인 것이면 죄의 결과라고 님이 말하신 것도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방법론적 차이도
그냥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는 것과
개선 시켜야 할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충분이 있다 봅니다.
할 말이 넘 많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댓글이 달리면
그기에 맞는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결론이 어떠했느냐를 떠나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계속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었음에도 댓글을 그만 둔 이유는 제 나름대로 '이번엔' 이 정도가 적정선이지 않나 하는 생각때문이었답니다.
꼭지글이 성경 구절의 해석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너무 벗어나는 관점들이 개입되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어요. 결국 사회/문화/심리학적 시각들이 대두되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처음 의도했던 바에서 너무 멀리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점들을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댓글에 어떤 제한을 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말씀 남기세요.















가을소풍



24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에서는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동성애나 추악, 탐욕등...)가 진노의 결과(벌)가 아니라 진노의 대상임을 알 수 있지 않나요?
24절에서 31절에 나타난 것을 보면,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에서 보듯이 죄(우상숭배)의 결과(동성애, 불의)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벌'임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박테리아(죄)에 감염되어 몸이 썩어들어가는 상태(동성애, 불의..)는 벌이라기 보다는 죄의 당연한 결과이고, 거기에서 꺼내어서 고쳐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요 벌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해석하면, 상당히 심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우리가 동성애나 불의(추악, 탐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해 주지 않은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만약 우상숭배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영접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상태에서 건져 주셨을테니까요.
성경에서 뜻하는 '시인'과 '영접'이 우리가 생각하거나 교회에서 말하는 '시인'.'영접'과 다른 것일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