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3.26. 설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고후4:16-18)


헬라인들은 인간의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은 참되고 영원하지만, 육은 거짓되고 유한하기 때문에 바르게살기 위해서는 육을 무시하고 영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육체적 욕구 때문에 많은 죄가 행해지는 인간의 삶을 보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그들은 두 가지 정반대되는 삶의 태도로 나갔습니다. 하나는 금욕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인간의 육체란 근본적으로 악하니까 철저하게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금욕주의이며, 악한 육체에 아무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영혼만 깨끗하게 다스려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여 방탕하게 사는 것도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주장이 쾌락주의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영혼은 깨끗하고 육체는 부정하다는 생각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보이는 육체는 악하다는 생각입니다. 중세기 수도원처럼 인간의 모든 문화를 부인하고 순전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걸 뜻하는 걸까요? 이 말씀을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누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만을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비록 구별될 수는 있어도 나누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하나로 결합될 때만 인간일 수 있습니다. 육과 영으로 된 인간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걸 뜻합니다. 그게 무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라는 도시와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헬라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해 주는 교통 요지입니다. 고린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남북왕래가 불가능했습니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서 겉으로 매우 번창한 도시였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고린도의 아클로폴리스 언덕에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 세워졌는데, 그곳에는 1천 명의 여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거룩한 매춘부 역할을 했습니다. 낮에는 신전의 여사제지만 밤에는 고린도 거리에 내려와 몸을 팔았습니다. 고린도는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된 그런 도시로서 헬라인의 쾌락주의적 삶의 모형이 꽃피우던 곳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되어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바보같은 것이었겠지요. 인간이란 그저 자기가 살고 있던 그런 시대정신 속에 파묻혀 버리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별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전제 도시와 그들이 추구하던 문명이 허물어져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의 시대정신에 빠져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삶의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의 허위와 거짓과 쾌락적 삶의 모습이 바로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고리도 시대처럼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듯이 오늘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에 의지해서 사치스럽고 탐욕스럽게 살아가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듯이 오늘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의 그런 삶을 <보이는 것을 따름>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예외는 아닐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자랑거리, 겉으로 보이는 소유물에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을 찬찬히 돌아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보인 것에 빠져서 살아가는 지를 말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질적인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에 치우쳐서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도 각박해 지고 욕심에 빠지게 됩니다. 안 그런가요? 제 경험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 보다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남 보다 많은 걸 갖고 살아야 하고, 남의 집 아이 보다 나의 집 아이가 뭐든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다보면 우리의 생각이 지나친 데로 나가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요즘 젊은이들을 X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항상 자신만만하고 독창적이고 자발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치하고 이기적으로 즉흥적입니다. 이들은 자기만 멋들어지게 살 수만 있다면 최고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7,80년대처럼 사회변혁을 향한 관심이나 정열도 갖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치우쳐 살아가는 그런 삶의 형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TV나 여성잡지에서 온갖 여성용 의류나 속옷, 그리고 화장품에 이르기 까지 별의 별 선전이 다 있습니다. 특히 여성잡지는 거의 삼분의 이가 이런 광고로 채워집니다. 이렇게 비싼 광고를 무지막지 하게 싣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광고가 여성들의 소비를 부추기고, 거의 무감각하게 구입하게 만듭니다. 수입품이다, 뭐다 해서 사치스러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개의 여성들이 능력만 주어진다면 그런 쪽으로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과연 아름다운 여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그저 보이는 것에 마음이 온통 빠져 있는, 그래서 자기를 치장하고 가꾸는 일에 지나칠 정도로 마음과 돈을 쏟아 붓는 그런 사람은 결코 아닐 겁니다. 진정 아름다움이 무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젊은이나 여성,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런 보이는 물질, 그것의 소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살지 못해서 부러워하는 그런 경향 때문에 우리 내적인 세계는 점점 궁핍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발생한 김성복 교수의 부친 살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무얼 생각했습니까? 자식도 조심해야겠다는 걸까요? 자식 교육 잘못시킨 부모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작년에 부모를 방화살해한 박한상 군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둔 오늘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육, 우리 사회 전체와 상관되어 있습니다.

지난 3월17일 서울의 명동에서 구세군 사관학교 학생들의 절제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는 구세군이 1909년 이후 매년 3월에 실시하고 있는 절제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구세군은 성탄절을 기해 실시하는 <자선남비>로 유명합니다만, 창립 때부터 절제운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도덕운동은 우리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씀을 좀더 엄격하게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치우치다 보면 마음에 욕심이 생긴다는 것만이 아니라 물질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저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쓰고 사는데 그게 어디 죄될게 있는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소비하고 살아도 죄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최소한 두 가지 방향에서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것에 치우치면 결국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다는 점입니다. 많이 벌어서 많이 쓰고 살겠다는 사람이 정의와 평화와 자유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쪽에서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것을 박탈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구의 물질은 태양처럼 거의 무한한 게 아니라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이 독점하게 되면 다른 쪽의 사람들은 궁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래부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해서 사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 까지 전한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왔지만 앞으로 올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세계는 사랑일 수도 있고, 정의와 평화일 수도 있고, 기쁨과 자유와 해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의 나라로 이끌어다 줄, 그 구원을 선물로 가져다 줄 그 힘에 의존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잠간입니다. 권력도 그렇고, 부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여성의 아름다움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때만 이 땅의 보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서 살아가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환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당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거나 물질적으로 불편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똑같이 150만원 월급을 받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매월 50만원 씩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다른 사람은 그 돈을 저금한다고 합시다. 10년 후에 한 사람은 그저 월세 방에 살겠지만 다른 사람은 집 한채 값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던 적던 우리는 헌금한 것만큼 절약하고 살아야 합니다. 똑같이 쓰면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대지 구입 중도금을 위해서 지난 월요일에 2천만원을 융자받았습니다. 처음에 헌금을 약속할 때 2년 동안 저금할 수 있는 돈을 모두 헌금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헌금을 더 해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년 동안 다른 것에 돈을 쓰지 않고 절약하는 일은 아주 잠간입니다. 사실 우리가 평생 동안 사는 것도 잠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 잠간 동안 불편하게 산다고 해서 억울하게 생각할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후배들,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준비한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2천만원이라는 돈의 가치는 말할 나위도 없이 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부러워해서야 말이 됩니까? 바울이 말하는 환란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잘살게 되는 날을 꿈꾸며 살아가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일까요?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무능력해서 가난하게 살아간다면 그건 문제이겠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서 받은 고난이라면 그걸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잠간이요, 그걸 통해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만 우리는 바울이 16절에서 말하고 있는대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우리의 <속 사람>을 우리가 실감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겉 사람이 늙어가는 걸 못 참아 냅니다. 요즘은 젊은 사람만이 아니라 늙은 사람들도 성형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주름살을 펴고 군데군데 지방질을 제거합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렇게 안간힘을 씁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흰머리 카락이 너무 많아졌다고 애처러워 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허물어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갑자기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한다면 약간 힘들겠습니다만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걸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속 사람>입니다. 정신이 늙어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약해져도 그의 중심이 강해져야 합니다. 그게 신앙이 아닐까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하나님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베풀고, 내적으로 능력을 갖고 사는 게 중요합니다. 바울은 평생 동안 궁핍하게 살았고, 육체적으로도 약했지만 날이 갈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진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사는 길입니다.

바울은 4장에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 번(1,8,16절) 합니다. 보이는 것에 빠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갈 때만 참된 용기와 인내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둡고 잔인한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9.07.11 19:29:25

저는 요즘 간혹 과거에 어릴쩍 묻던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아주 간단한 질문이지요?

 

"왜 내가 정목사님이나 사도들이 권면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지?"

 

저는 사업의 특성상 주위에 돈 많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의 삶은 행복하고 풍요로우며 그들 에게는 어두운 그늘이 없습니다.

금액으로 보자면 가난한 저보다 훨씬 기부도 많이 하고들 살고 있습니다.

적당한 선행도 하고도  제가 보기에는 엄청난 재산이 남아 있지요..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 속에서 기쁨과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죠 "그렇게 살면 하나님 나라에 참예할 수 없다"고

그들은 제게 대답합니다. 자네나 많이 보이지 않는 나라에 참예하게!!

난 관심 없다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하고 너무도 재미난 세상 아닌가!! 

짦은 인생 한평생 즐기다 가려네!

그들의 삶이 행복햇듯이 그들의 죽음도 너무행복하고 만족속에서 죽더군요.

그런 사람들의 삶이 진리이든 아니든 본인의 입장에서는 행복한 삶인걸~~

그렇게 살수 있다면 그리 산다고 해서 뭐가 그리 문제가 되는건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 고후 6:3-10, 궁핍 속의 부요 [레벨:100]정용섭 2009-07-11 8607
» 고후 4:16-1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 [레벨:100]정용섭 2009-05-05 943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