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아들(눅 4:22)

조회 수 8811 추천 수 196 2006.01.05 23:44:58
요셉의 아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공동번역, 눅 4:22)

오늘 본문은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을 배경으로 한다. 예수의 활동에 대한 소문은 이미 여러 곳으로 퍼진 상태였으니까(눅 4:14) 고향 사람들도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향을 찾은 예수는 마침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 해방과 자유에 관한 이사야의 말씀(사 61:1,2)을 읽었다. 그 당시 랍비들이 행한 일반적인 처신을 참고한다면 예수는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것이다. 그 설교의 결론이 곧 21절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의 설교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말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이 질문은 사실판단인가, 가치판단인가? 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트집 잡자는 말인가? 예수가 곧이어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고 말씀하신 거나, 결국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화가 나서 예수를 산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다는 걸 보면 후자의 경우가 맞는 것 같다. 고향사람들의 눈에 예수는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들은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듯이 예수를 동네에서 내쫓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이 왜 이렇게 흥분할 수밖에 없었을까? 본문의 보도만 따른다면 예수가 고향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을 했다는 데에 그 대답이 있다. 예수는 신유 기적을 행하라는 고향사람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했던 엘리야와 엘리사 사건을 거론하면서 자신도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실제로 예수에게 그런 요구를 했는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지금 잘 모른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와 고향사람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아야 한다. ‘요셉의 아들’이 요셉의 아들답게 행동하지 않고 ‘신의 아들’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딜레마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요셉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은 도저히 병행될 수 없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설화에 따르면 마리아와 요셉이 동거하기 이전인 정혼 상태에서 마리아가 임신했다. 그의 임신은 남녀의 성적 결합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개입으로 인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침묵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보도하고 있는 ‘동정녀’ 문제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까 일단 접어두자. 마태와 누가의 보도에 따라서 예수의 출생이 요셉과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복음서는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며, 따라서 다윗 가문이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또는 메시아라고 진술한다. 예수의 정체성에서 일종의 뜨거운 감자 역할을 하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 말에는 무슨 역사적 실체가 담겨 있는 것일까?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관한 신약성서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신약성서 기자들이 요셉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의 출생과 연관된 짧은 담화에서 잠시 등장할 뿐이다. 신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요셉에 관해서 거의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복음서에서 마리아도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요셉에 비해서는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설명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복음서는 오직 예수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옳은 대답이다.
다른 하나는 신약성서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강조한다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곧 요셉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와 다윗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신약성서 구절은 아주 많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윗이 자치하고 있는 그 비중을 놓고 본다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받아들였다는 건 아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다윗 왕조와 메시아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요셉에 관해서 이중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요셉이라는 자연인에게는 관심이 없으며,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요셉에게는 절대적인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이 내막은 예수의 역사성에 있다. 성서기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메시아의 역사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손이며, 요셉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곧 역사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메시아적 행위들이 실행되는 그 역사를 우리는 ‘Historie’와 구별해서 ‘Geschichte’라고, 그런 시간을 ‘크로노스’와 구별해서 ‘카이로스’라고 부른다. 구원과 역사의 신비로운 일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 했던 고향사람들의 행렬에 끼어들 것이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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