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눅 4:22)

조회 수 7983 추천 수 134 2006.02.07 13:42:55
성구묵상                      거룩한 분노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공동번역, 눅 4:22)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노기 띤 얼굴’을 본다. 이런 분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자라고 부르는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현상이다. 부처나 공자에게서 이런 노기 띤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영성의 대가나 신비주의자들에게서도 인간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분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나 마더 테레사에게서 평화의 얼굴을 예상할 수 있을지언정 분노를 예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모든 평화의 영성이 발원하는 예수가 그답지 않게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은 이 사태의 전말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안식일에 예수는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기만 하면 즉시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마음으로 그려보라. 한쪽에는 인간다운 삶이 처절하게 허물어진 장애인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스스로 나왔는지 아니면 예수를 고발하고 싶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일종의 미끼로 그곳에 끌려나왔는지 성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 장애인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긴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다른 한쪽에는 종교적으로 세련된, 그리고 교양이 철철 넘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흡사 덫을 놓고 노루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예수가 함정에 빠지기를 엿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하다. 그 무엇보다도 이유 없는 고난이 우리의 현실이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현실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생각은 없다. 그냥 암시 정도로만 짚어보자. 극한의 빈곤이 우리 주변에도 있으며, 동남아와 아프리카 쪽에는 지천이다. 미국의 무력 침략에 의해서 손이 오그라든 이라크는 21세기 인류사에서 벌어진 가장 잔인한 고통의 현실이다. 어디 이런 비극뿐이겠는가. 자연재해나 사고, 질병 같이 불가항력적인 사건들도 넘쳐난다. 이유야 어디 있든지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손쉽게 떨쳐 내버릴 수 없는 숙명과 같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숨 막히게 하는 것은 이런 불행만이 아니다. 아니 이런 불행은 진실한 태도로 서로 연대하기만 하면 상당하게 극복할 수 있으며, 설령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이런 불행을 이용해서 자신을 성취하려는 힘들이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북한의 불행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으며, 남한 정권의 실정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현 정부를 향해서 툭하면 북한의 빨갱이들에게 이 나라를 넘겨주는 정권이라고 성토하는 사람들, 전교조 교사들을 향해서 청소년들의 심성을 훼손하고 김정일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친북단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 평화추구라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훨씬 힘든 사회봉사를 하겠다는 ‘양심적 군거부자들’을 비난하는 기독교 지도자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국가를 누란에서 살려야겠다는 애국심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사명감에 불타서 사학법 반대투쟁에 앞장서는 한나라당과 한기총 관계자들에게도 이런 명분이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명분에서는 하나도 밀리지 않는다.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가 감히 안식일을 범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들은 안식일이라는 종교규범을, 즉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그런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순교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손 오그라든 사람을 앞에서 두고 예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예수는 못 견뎌하셨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예수도 역시 대충 그들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로서 ‘관용’을 잃어버리면 모든 걸 잃어버린다는 걸 예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폭발했다. 하나님의 아들답지 않게 그는 인간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노출시키고 말았다. 아마 뒷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리지 않았겠는가. “예수도 별 볼 일 없는 친구군. 그까짓 일로 저렇게 흥분할 게 뭐야!” 그런 빈정대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화가 나는 걸 어쩌겠나.
예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다. 거룩한 분노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보다 훨씬 심층적인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태도이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이념, 개념, 관념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긴장이 있다. 아무리 숭고한 가치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확실한 토대가 놓여야 한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도 대라는 말씀도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그런 정도의 경지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오른뺨을 맞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왼뺨도 대야한다고 충고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뺨을 때리는 사람과 싸워야 할 것이다. 이런 거룩한 분노가 없이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종교적 자기만족과 다를 게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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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먼지

2006.02.08 16:50:46

예전에, 한성영님이 “우리 모두 예수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그 때 정목사님은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라고 답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목사님의 그 말씀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고 “이 독사의 무리들아!”라는 폭언을 하셨다 해도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구나 라는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그동안 목사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목사님은 9.11 테러 같은 폭력적 항거 역시 ‘거룩한 분노’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제가 간디의 비폭력 노선에 희망을 걸어두는 이유는 그 길이 성스러워 보인다거나 훌륭해 보인다거나 하는 감성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실용적인 차원에서입니다.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말을 저는 믿고 있거든요.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군요.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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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2.08 23:58:57

먼지 님,
오늘 밤, 춥군요.
저는 샘터교회이기도하고 대구성서아카데미이기도 한 아파트에서
밤 11시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대개는 자전거로, 비가 오면 걸어서,
아주 추울 때는 승용차로 왔다갔다 하죠.
오늘은 추운 날이라 차로 왔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요.
그건 그렇고,
저에게 주신 질문이 두 가지인가요?
1. 예수의 배타성 문제- 우리는 제2의 예수가 될 수 없다고 내가 말한 적이 있지요?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이번 글에는 예수의 분노를 지적하면
우리의 영성도 그것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했군요.
서로 모순되는 언급인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성영 님과의 대화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2천년 전 바로 그 한분으로 끝난 것이라는 뜻으로
제가 말했겠지요.
위의 글도 역시 우리가 제2의 예수가 되자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영성을 분노의 시각으로 들여다본 것이에요.
그렇다고해서 예수가 분노했으니까 우리도 역시 불의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각자의 몫이죠.
이런 건 윤리의 문제니까 예수의 배타적 메시야성과는 다른 지평이에요.
우리가 제2의 예수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예수의 본질적인 정체성에
대한 것이죠.
우리가 예수를 흉내낼 수 있지만,
제2의 예수는 아니구요.
예수를 흉내내는 것 자체도 별로 의미있는 일은 아니에요.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40일 금식기도를 했으니까 나도 해야겠다는 하는 식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영성에 감동되어,
또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신의 영적 깊이에 따라서
금식기도를 할 수도 있고, 외국노동자들을 위해서 투쟁할 수도 있겠지요.

2. 거룩한 분노와 비폭력의 문제
저는 이런 윤리적 문제에 들어가면 입이 열리지 않아요.
일단 그런 사건들의 실체를 내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
즉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삶을 내가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때문이에요.
9.11 테러를 거룩한 분노의 차원에서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은 무의미할지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위의 글에서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암시하는 게 아니라
무죄한 자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즉 영성의 문제를 언급한 것 뿐이죠.
거룩한 분노의 영성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을 헤쳐나가야겠지요.
거기서 어떤 수단이 강구되는지는 각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저도 근본적으로 비폭력이 윤리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비현실적이지만 어쨌든지 군대무용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내가 남의 행동까지 재단하기는 힘듭니다.
예컨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가 이혼해야 할는지, 참고 살아야할는지
나는 개입할 수 없지요.
다만 어떤 영적인 방향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에요.
자신와 이웃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그런 방향만 말이죠.
대답이 됐는지, 내 변명이 됐는지...
행복한 꿈을 꾸세요.

[레벨:0]먼지

2006.02.09 10:33:47

감사합니다. 좋은 대답이 되었습니다.
질문을 올린 뒤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목사님께서 제 질문을 무의미하다고 말씀해 주시니
왠지 목사님께 인정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건강하십시요.

breathe

2007.01.03 10:03:41

성구 뒤에 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쓰신 목사님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중 문득 한 생각이 스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쳐 놓은 덫을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하고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덫을
알고 계셨지만 전혀 게의치 않았던 건 아닐까. 목사님의 글에서도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들을
덧붙여 주셨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단순히 못견뎌 하셨다기 보다 알면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실천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모든 걸 보이시므로써 남겨진 게 4복음서일 테니까요. 한국 종교지도자들의, 구약의 제사장으로 스스로를 구분 짓는 걸 종종 들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지만요. 그렇다면 제사장 직분으로서의 한국 목사님들은 어려운 한국적 상황들 앞에서 왜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않는지 뒤틀린 질문을 새삼스럽게, 새삼스럽지 않게 드리고 싶어집니다. 목사님 글에 비추어, 적어도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예수님의 그 당연한 분노처럼 책임을 감당해야하는 게 아닐까...... 라는 뜨거운 아쉬움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교회에서 하는 일반 성도들의 헌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바울 사도 같은 목사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요...... (생각을 부족한 글로 남기려니 힘도 들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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