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26-30, 만사형통의 길

조회 수 6233 추천 수 21 2008.08.05 21:38:26
 

1995.1.15. 

만사형통의 길 (롬8:26-30)


<죽음에 이르는 병>과 <불안의 개념>을 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불안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거나 죄지은 놈은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우리 웃 조상들의 지혜에 따라 생각해 보면 죄가 불안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바도 역시 인간의 불안은 죄에서 출발합니다. 아담이 숲속에 숨어 하나님의 낯을 피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윤리적인, 혹은 종교적인 불안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내가 하는 사업이 잘될까,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앞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할까, 우리 식구들은 건강할까, 하는 염려와 불안이 우리를 횝싸고 있습니다. 이런 염려를 하기 시작하면 정말 끝이 없습니다. 출근한 남편이 자동차 사고는 나지 않을까, 산업재해를 당하지는 않을까, 계를 든 게 깨지지는 않을까, 심지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모든 게 사실은 걱정거리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까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들린 뉴스에 따르면 어느 공장의 압축용 쇠바퀴가 공중으로 날아가 신호대기 하고 있는 승용차에 떨어져 두 명이나 죽었다는 날벼락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입니다. 요즘처럼 대학입시철만 되면 우리의 사랑 많고 불쌍한 어머니들이 자녀들 입시를 위해서 노심초사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좌불안석 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비췰 때 마다 인간이 얼마나 불안해하는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런 저런 걱정과 염려 때문에 영적인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는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일이 잘되는 길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사형통의 길>이 있다면 누구나 앞장서서 그 길을 가려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서 28절에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우리 표현으로 바꾸자면 “만사형통”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이렇게 만사형통으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누가 근심을 하고 불안해하겠습니까.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불안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게 잘된다는 성서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을 들여야 보면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기도도 하고 스스로 다짐도 하지만 많은 일들로 인해서 염려하고 불안해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성서의 가르침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우리의 실제적 생활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씀일까요? 우리는 오늘 바울이 말하는 “만사형통의 길”은 무엇인지 좀더 냉철하게 생각해 보고, 우리의 신앙을 그 말씀에 기준하여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예수 믿고 복받는다>는 말을 단순히 오래 살고 재물을 모으고 건강하고 자식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봅니다. 만사형통이란 말을 모든 게 자기의 마음 먹은대로 풀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바울의 말씀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아직 미숙한 신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급의 종교일수록 그런 약속을 많이 합니다. 전형적으로 무속신앙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병치료와 액댐과 부귀만을 약속합니다. 그것이 사실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런 것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개의 사이비 종교는 그런 틀을 유지합니다. 믿기만 하면, 바치기만 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작년에 한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영생교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아직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아픔의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는 몽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가오게 될 불행도 알며 고난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당하는 불행을 자기만은 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만사형통>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가 한 말을 좀더 자세히 드려다 보십시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이 결국 궁극적으로 형통의 길로 인도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인생이 결과적으로 좋게 인도된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끝 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좋게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도 나중에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살아갈 수 있을 때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나쁜지 알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좋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나쁘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반드시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매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옛날에 사둔 땅이 개발지역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졸지에 떼부자가 됐다고 합니다. 모든 식구가 기뻐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남자는 이제 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은행 이자만 받아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시사철 비지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겠습니까? 그 남자는 이리저리 놀것만 찾다가 놀음에 빠져들었고 결국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이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당장 부자가 된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결과는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6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우리는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궁극적으로 무엇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따라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무작정 성취하려고 매어달립니다. 어린 아이가 재미있다면서 자꾸만 칼을 달라도 한다면 어른들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칼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어른들의 눈에는 너무 위험스러워 보입니다. 우리 집 두 딸 중에 큰 아이는 어렸을 때 구강상태가 너무 나빴습니다면 작은 아이는 현재 아주 좋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큰 아이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가 껌을 많이 씹게 하였고 치솔질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빨에 나쁜 껌이나 쵸코렛이나 사탕 같은 것을 유독히 좋아하고 반면에 양치질을 귀찮아합니다. 우리는 이런 어린 아이 처럼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유익한 건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자기 생각에 좋은 것만을 달라도 기도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처음에 드린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불안해하는데 그 이유는 일이 잘될까, 잘못 될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잘되고 못된는 판단의 기준이 순전히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합하여 선하게 이루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결코 불안하게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소유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 영적인 평안을 유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의 결과에 지나치게 민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한 곳으로 인도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정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는데 있으며, 미리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우리의 기준에 따라 결정해 놓았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사형통을 허락하시는 데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바꾸는데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거의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우리의 인생이 지배받는다고 보아야 정직한 말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어. 나는 결코 아무에게도 영향받지 않고 나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어.” 그러나 과연 우리의 인생이 그러할까요? 우리가 최선으로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잘 살펴 보십시요.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지 뒤돌아 보십시요. 겉으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더라도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 강요하려고 한다면 그건 결코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약간 웃기는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대항 운동 시합이 있는 경우 서로 자기네 팀이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였을까요? 대학입시 철에 교회마다 자기네 교회 입새학생들의 합격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면 그게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인간은 거의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려고 기도를 하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지나치게 그때그때 벌어지는 사 건 마다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낙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의존시킬 때만 인간은 평안을 소유할 수 있으며 만사형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소박한 기대를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그렇게 비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세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고나 병으로 죽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렵기는 해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허둥대지만 지나고 보면 그런 엄청난 시련들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한다면, 저는 국민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었고 그 뒤로 가정이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어려움도 역시 저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여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은 대신에 청각이 예민해진다고 합니다. 출세하지 못했다면 그것으로 더욱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소아마비에 걸렸다면 건강한 사람들이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시간에 훨씬 유용하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만 갖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파괴할 그 무슨 세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앙적인 삶입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경우에만 영적으로 자유하고 평안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다른 교회 보다 뒤쳐질까 하는 염려와 불안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교회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1995년 한해 내도록 우리는 모든 염려와 불안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합시다. 그때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는 새로운 차원에서 만사형통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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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8.08.09 10:23:36

희노애락애오욕으로 얼키설키 요지경세상에 살면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여 탄식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한일을 시작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시고
매일 매순간 감각과 이성과 지성의 촉수를 생명을 움직여 가시는 성령님의 움직임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나의 작은 몸부림 하나에 우주 생명세계를 움직여
만사형통으로 화답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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