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3:1-7, 너는 내 것이라!

조회 수 6160 추천 수 29 2008.08.07 16:22:47
 

1995. 1.22.

너는 내 것이라! (사43:1-7)


젊은 남녀가 한창 사랑에 빠진 경우에 여러 가지로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물을 준다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아니면 직접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랑의 표현 중에서 “너는 내 거야.”라는 말보다 더 철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주 특별한 관계일 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별로 고상한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리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에 흡사 젊은이들이 쓰는 사랑의 언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절). “너는 내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어떤 관계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오래 전에 깨달았고, 그런 신앙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1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7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향해 “너는 내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교만이며 불경입니다. 그 관계가 사랑하는 연인이던지, 아니면 부모와 자식 간이던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하던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들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바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인 것 처럼 이런 창조신앙이 우리 기독교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우리가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에 있어서는 별로 그런 자세를 갖지 않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만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말할 뿐이고 실제적으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창조신앙을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유지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했을 뿐이지 지금은 별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물도 영원히 자기에게 소유된 것 처럼 여깁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 자기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면서 까지 자기 것을 챙기고 살아갑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너무 지나치게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역동성이 매우 크지만 반면에 근본적인 취약점도 많습니다. 그것은 사유의 영역이 너무나 광범위 하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벌어진 두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쓰레기 종량제입니다. 이 제도가 실시된 이후에 쓰레기가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부수적인 문제점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제가 살고 있는 집 앞 도로에 매일 저녁 열 댓개의 쓰레기 꾸러미가 정말 보기 흉할 정도로 쌓여 있기 마련인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신자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돈과 연결되기만 하면 아주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던데, 이 말을 어느 후배 목사에게 전했더니 “그것도 남의 돈이 아니라 자기 돈과 연결될 때 더욱 그렇다.”고 말을 하던데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돈이야 펑펑 써대도 자기 돈이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을 아껴라,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그 비용이 엄청나서 국가발전에 문제가 생긴다, 등등 아무리 그런 말이 외쳐져도 사람들은 별로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량제가 실시되니까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쓰레기를 줄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는 부동산 실명제실시입니다. 이 제도는 쓰레기 종량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실시한 여러 가지 개혁 중에서 아주 바람직한 것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현풍 만 하더라도 지난 연말 까지 많은 외지인들이 현풍과 유가 등지에 땅을 사러 많이 왔습니다. 그런 통에 땅값이 들먹거렸고, 실제로 많이 뛰었다고 합니다. 부동산 문제를 제가 여기서 번거럽게 끄집어 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그런 투기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소유에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의 소유도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 위에 살면서 <무소유>를 실천할 수 없겠지만, 그 엄연한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1절 후반절에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하였으며, 3절에도 “대저 나느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권을 주장하신 하나님은 바로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은 전제군주 처럼 백성들을 마음대로 자기를 위하여 부리려는 게 아니라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기에 선포된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제국에 의해 나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사야는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이십니다.

첫째는 자연재앙으로 부터의 구원입니다. 2절 말씀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이사야는 아마 출애굽 당시의 홍해나, 혹은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고대인들에게 자연이란 바로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홍수를 만났을 때, 화산이 폭발했을 때, 큰 산불이 났을 때, 폭풍이 불어 닥쳤을 때 아무 대책 없이 그들은 그런 거대한 힘 앞에 그래도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일본의 고베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수 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0조엔 가까운 재산 피해를 냈다고 합니다. 지금 처럼 인간이 별을 여행하고, 생명의 근원에 접근한 시대에도 역시 완전하게 예상하거나 억제할 수 없는 자연재앙 앞에서 고대인들이 느꼈을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리라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곳곳에 널려 있던 그런 자연으로 부터의 위협 가운데서 구원하겠다고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둘째는 역사의 위기로 부터의 구원입니다. 3절 후반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애굽을 너희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모든 역사의 위협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케 되는 거대한 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놓여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하나님은 그런 악한 힘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5,6절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 부터 오게하며 서방에서 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나그네 처럼 이곳 저곳을 유리하며 떠 도는 신세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한데 모아 그 나를 회복시키겠다는 말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온 상태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패전국으로서 말도 제대로 못하며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식들이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신세를 조금이라도 잘 이해하려면 우리의 일제 시대를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평범한 백성들은 물론이고 대개의 지식인들도 그 당시에 일본으로 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반일의식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조선 사람의 정신을 포기하고 황국식민으로 적응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친일하던 사람들이 하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절망이 저들을 그런대로 몰아갔을 것입니다. 요새 러시아 연방의 체첸이 독립투쟁을 하다가 러시아 군사력 앞에서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체첸 국민들의 심정이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의 시간 속에서 이사야는 이들을 향해 희망 찬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손을 한 데로 모아 들일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미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창조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 할까요? 이사야가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외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작 하고 싶었던 멧세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1절 후반절과 5절 전반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렵고 겁나는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시대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은 일제시대에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 군사정권 하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살벌한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역시 우리는 두려움을 삶의 한 특징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와 평안이 없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 무언가를 두려워 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 두려움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에, 비교적 복지생활이 열려져 가는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우리의 계획과 어긋나는 일이 생겨도 우리는 신경질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서울의 어느 백화점에서 바겐 세일을 한다고 하니까 그 넓은 도로가 막힐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어느 하나라도 다른 사람보다 밑지는 일이 없을까, 손해보는 일이 없을까 단 한시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단체적으로 신경증을 앓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더욱 간절히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다와 불 가운데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얼 두려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년 일년동안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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