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4:18-25, 번제에 담긴 다윗의 마음

조회 수 11144 추천 수 0 2009.07.31 21:45:09
 

1995. 6.18. 설교 

번제에 담긴 다윗의 마음

삼하24:18-25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을 기준으로 지도자의 옳고 그름이 판단될 정도였습니다. 사무엘 상서 16장으로 부터 시작된 다윗의 대하 드라마는 이제 사무엘 하서 24장으로 끝나게 됩니다. 뒤이은 열왕기 상서의 초반부에도 약간 등장하지만 열왕기서는 솔로몬이 주인공으로서 다윗의 역할은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이스라엘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기반을 닥아놓은 다윗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일군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늙은 다윗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이스라엘과 유다지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요압을 중심으로 각료들은 다윗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만, 다윗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단 동편으로 부터 전국적인 인구통계를 시작했습니다. 삼하24:8,9절에 보면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조사가 끝났는데, 그 결과를 보면 이스라엘인 중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가 팔십만이며 유다 중에서는 오십만이었습니다. 그때 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편차가 별로 심하지 않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인구 조사가 끝나자 다윗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예언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갓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벌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칠년의 기근, 둘째는 석달 동안의 추방, 셋째는 삼일 동안의 전염병이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왜 죄가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현대 국가는 이런 정확한 인구조사를 통해 국가정책과 미래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있어야만 국가경영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재정을 들여서라도 4,5년 마다 한번 씩 인구조사를 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인구조사를 죄악시 한 것은 아마 그런 방법으로 군대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이 교만한 행동이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핍된 행동이라고 여겨진 까닭인 것 같습니다. 요압이 세달 가까이 조사한 인구통계를 보고하면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뒤늦게 후회를 했습니다만 때가 늦었습니다. 다윗은 예언자 갓에게 삼일 동안의 전염병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혹시나 하나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결과 칠만 명이 죽었으며, 예루살렘 까지 전염병이 전파될 지경이었습니다. 전염병을 몰고간 천사가 예루살렘 근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그 징벌을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걸 보고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벌을 내리지 말고 자신을 벌하라고 외쳤습니다. 칠만 명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도 마음을 돌이키시고, 전염병을 택했던 다윗도 더 견딜 수 없어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행, 인간의 고통은 인간의 교만과 죄로 인해 발생하지만 하나님이 그걸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 갓은 일단 전염병의 창궐이 그쳤지만, 이 사실을 아직 다윗이 알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칠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걸 무척이나 괴로워 하고 있던 다윗에게 하나의 제언을 합니다. 죽음의 천사가 전염병의 손을 거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을 대동하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향해 갔습니다. 아라우나는 자기에게 오고 있는 다윗왕의 일행을 보고 놀라 뛰어나가 맞이했습니다. 국가를 명실공히 통일시킨 대왕 다윗, 아직 소년이었을 적에 골리앗을 물맷돌로 물리친 전설적인 인물 다윗이 농사꾼인 자기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오는건지 그는 달려나가 넓죽 엎드리며, “대왕이 어찐 일로 이곳 까지 납시었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자네 타작 마당을 사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이 나라에 임한 재앙을 거두시게 할 작정이네.” 아라우나는 왕에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까 그냥 사용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22,23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라우나는 왕이 자기에게 온 것만 해도 황공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기 타작마당이 앞으로 성소가 된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아니더라도 고대 사회에서 모든 국가의 재산은 왕에게 속한 거나 진배 없기 때문에 땅과 소와 땔감을 왕께 드리겠다는 아라우나의 제안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의 제언을 거절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요. “왕이 아라우나에게 아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인지상의 왕이었지만, 또한 아라우나의 충심어린 제언이었지만 그는 백성으로 부터 땅을 그냥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이익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을 사랑했고 정직하려고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게 뭐 대단한 거냐, 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자기가 알아서 그냥 준다는 데 마다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여기에 다윗의 위대성이 드러납니다.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불로소득을 챙기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지도자상입니다. 사람들이 왜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까? 백성들을 진정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일까요? 명예심과 아울러 높은 자리에 무언가 이권이 따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노동부 장관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업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겉으로 들어난 것 만 해도 수천 만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리의 은행돈을 기업에 빌려 주면서 기업으로 부터 돈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고 하진 않았겠죠. 기업에서 알아서 고맙다는 인사조로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관행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당사자들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보다 더 심한 사람도 많은데 자기만 억울하게 사법처분을 받게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거의 똑같을 지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걸 받아 챙길 수 있는 자리에 가면 출세했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만연한 불의, 관행이 되어서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불의를 떨쳐 내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바로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일 주일 여 후에 있을 지방자치단쳬 선거에서도 우리가 선택할 기준은 무엇 보다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후보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는까,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최대한 이런 기준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필요한 부분은 능력이 아니라 진정한 도덕성입니다. 다윗 처럼 남의 것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걸 마다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말입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사심 없이 사랑했다는 점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성서기자의 판단기준이었습니다. 다윗은 실수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기에 그는 백성들 앞에서도 진실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가르치는 바른 삶의 순서이며 자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아라우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은 오십 세겔로 그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에게 은 오십 세겔이 부담되는 돈은 아니었습니다. 아라우나의 정성을 생각해서 그냥 받아서 번제를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 없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바로 다윗의 위대성입니다.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자 하는 다윗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신실성이 요청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세가 과연 바르게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도 우리가 성실하게 준비하지 못합니다. 5분, 10분 늦게 허겁지겁 달려나와 무슨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나와 앉아있으면서도 머리 속에 온갖 세상 관심이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가? 우리는 말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 사실은 세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요령껏 잘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는 아주 인색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겠다는 건 지나친 욕심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성실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걸 경제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윗 처럼 신실하려면 너무 계산적으로 사는 길로 부터 일단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고 살겠다는 결심을 갖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 분 앞에서 진실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 손해를 보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윤택하게 살지 못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우리가 다윗 처럼 “값 없이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맡고 있는 크고 작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치열하게 진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모두가 쉽게 사는 방법을 찾는데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 죽어도 되는 걸까요? 다윗은 어쩌면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려고 했습니다. 값 없이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는 게 그런 다윗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은 내팽개치고 오직 교회 일에만 충성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일만이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교회 일은 모든 세상 일과 더불어 하나님의 일에 속합니다. 교회 일이든 교회 밖의 일이든 하나님께 진실하기 위하여 최선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그랬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사무엘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 성서기자는 위대했던 다윗의 일생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의 시련의 역사가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들로 인해 유지될 수 있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고대 이스라엘 처럼 전염병이 창궐하는듯한 시대입니다. 여기서 값 없이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는 다윗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진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재앙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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