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4:3-8, 가려서 먹으라

조회 수 4695 추천 수 34 2008.08.18 20:38:35
1995.2.12.
가려서 먹으라.
신14:3-8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개중에는 튀는 몇몇 교회가 있습니다만 침제기에 빠졌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예컨대 대구지방회 96년도 회의록에 나온 교인 총계는 5642명이었으며, 97년도에는 5709명이었습니다. 1년 동안 32개 교회에서 67명의 교인이 늘었다는 말이 됩니다. 약 1% 약간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이 통계가 한국교회의 일반적 수치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침체현상 때문에 우려를 많이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경제를 가리켜 거품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런 거품현상으로 과대 포장됐으며 이제 90년대에 들어와서 그런 거품이 걷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까지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만, 만약 지금이라도 한국교회가 그런 거품신앙에 혹하지 않고 액기스 신앙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재도약의 기회를 잡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구원공동체로 살아남으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가까이 가야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학생들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언가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저는 교사들에게 그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서 안에서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 내야하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사들에게 좀더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평소에 우리가 잘 읽지 않는 본문을 택했습니다. 소위 <성결법전>에 속하는 먹을거리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신14:3-8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도 되는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레위기서 11장에는 좀더 자세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만 원칙적인 면에 있어서는 신명기 본문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1-21절 까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세 가지 종류의 음식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들짐승, 둘째는 물고기, 셋째는 날짐승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확실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몇 가지 기준만 찾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들짐승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원론적인 기준은 그 동물이 “새김질을 하고 갈라진 굽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두 가지 기준에 들어오는 동물만 먹을 수 있지, 한 가지 기준에라도 어울리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먹을 수 있는 동물을 봅시다. 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불그스럼한 사슴, 산 염소, 볼기 흰 노루, 뿔 긴 사슴, 산양은 먹어도 됩니다. 7,8절에 기록된 먹지 못하는 동물은 약대, 토끼, 사반, 돼지입니다. 한편 물고기 류의 구분은 이렇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먹어도 되고, 그것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날짐승 중에서도 정한 새는 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새는 먹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 솔개, 어응, 매, 새매, 가마귀, 타조, 박쥐 등은 먹어서 안 됩니다. 이 많은 동물들에 대한 구분이 항상 어떤 기준에 빈틈없이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부정한 동물들을 추려내려는 작업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이런 기준을 제시했을까요? 먹는 게 참으로 귀하던 때였는데도 이렇게 까다롭게 규정한 까닭은 무얼까요?
우선 우리는 성서에서 금한 동물들이 사람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돼지가 보기에도 불결하기도 하고 지방질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동물 중에는 죽은 짐승을 뜯어먹는 것들이 있었는데,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이 좋을 리야 없겠죠. 지금처럼 조리시설이 별로 잘 안되어 있던 그 당시로서는 이런 들짐승이나 날짐승을 먹었을 경우에 병에 걸릴 확률이 상당히 높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여러 이유로 전염병이 창궐했고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먹는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만으로 이런 문제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고기나 다 먹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보다 건강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종교의 의식에 따라 가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 종교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제의에 완전히 물들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신1:1절에 보면 이러한 명령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고대 가나안 사람들은 지하 세계의 신을 믿었기 때문에 조상이 죽어 땅에 묻히게 되면 어떤 특별한 의식을 행하곤 했습니다. 21절에 보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그 당시 이방인 세계에서 행한 우유를 통한 마술행위를 금한 것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시리아와 페니키아인의 종교의식에 산돼지가 거룩한 짐승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처럼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엄격하게 이방인들의 음식문화로 부터 멀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음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방인들과 다르게 고기를 가려서 먹게 함으로써 영적이고 정신적인 건강 까지 고려했습니다.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영양을 섭취하므로 육체적 생명을 유지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까지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지만 인간이 무얼 먹고 사는가에 따라 정신적인 가치관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식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취해야 할 자세를 엄격하고 반듯하게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역시 구약의 말씀대로 고기를 가려서 먹어야 합니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돼지고기와 개고기를 먹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채식만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도 좋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만이 아니라 개고기도 즐겨 먹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쩔지 모르지만 간혹 교역자들도 그런 보신탕을 먹으러갑니다.
오늘 우리는 특정한 짐승을 먹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행전 16장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 율법준수의 의무가 따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 율법적 의무보다 인간의 생존이 더욱 큰 가치가 있으며, 주변 세계와의 참다운 친교가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막7:14 이하에 보면 식사예절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도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 하는 문제로 그를 판단하지 말고 그가 정말 생명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있는지, 이웃과 진정한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있는가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가르침, 특히 본문에 나온 명령은 폐기 처분되어도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잡아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지 못하는 동물을 가려서 먹으라는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방 종족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먹거리에 이르기 까지 투쟁적으로 구별해 보려한 그 삶의 태도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고대 이스라엘에게는 일종의 생존을 위한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가려서 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구별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대의 이스라엘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오늘의 새로운 의미에서 “가려서 먹는”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종교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태도로서 가려서 먹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먹는 일에 있어서는 절제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구상의 일부에서는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간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나 많이 먹어서 탈입니다. 어느 동네나 음식점이 많습니다. 현풍에도 그렇습니다만 음식점을 해서 망한 집이 없다고 합니다. 음식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먹고 사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음식이야 맛있게 먹어야 하겠지만 그것에 취해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 시대에 일부 귀족들은 호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옆방으로 가서 목구멍에 새털을 놓어 토해 놓고 또 먹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가리지 않고 먹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보강식품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여름에 보신탕을 먹는 건 우리의 전통적인 서민문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치고, 건강이나 정력에 좋다 하면 혐오식품일지라도 무엇이나 먹어댑니다. 언젠가 살아있는 곰의 간에 호수를 박아놓고 정기적으로 피를 뽑아 먹은 사건이 매스컴에 알려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음주문화는 매우 거친 것 같습니다.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2차, 3차 마시러 다니고 그래야만 남자다운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음주가 바로 죄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면 그건 즐거움이 아니라 술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기 배우와 탤런트, 가수, 사업가, 대학교수 등이 마리화나 흡연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경제적 능력이 많고 자유시간도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로 부터 도망치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무력했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시키는 대마초를 피워댔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는 흡사 이스라엘민족이 무던히 피해보려고 했던 고대 가나안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나안은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많이 즐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축제를 열고 땅에서 생산된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

가려서 먹으라는 말씀은 먹는 문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규정해주는 기준입니다. 가려서 먹는다는 말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절제”입니다. 먹거리만이 아니라 옷이나 집이나 모든 소유에 있어서도 절제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근검절약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할 때나 절제해야지 이렇게 살만한 때가 됐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절제, 절약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나 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많이 번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의 경제가 어렵다고 많이들 걱정하지만 사치품 소비재 수입은 계속 늘어간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일가요? 여성들 속옷마저 세계적 명품을 입어야만 사는 재미를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무척이나 많이 소비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모슨 상관이냐, 라고 생각합니다.
절제되지 못한 삶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입니다. 정신적 허탈감이 쌓이고 생태계는 파괴됩니다. 헬라신화에 나오는 대로 아무리 먹어도 계속 허기를 지울 수 없는 그런 운명에 갇히게 됩니다. 2천 년 전에 비해 끔찍하게 많은 소유를 갖고 사는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 보다 정신적으로 더 윤택하게 살고 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구약성서의 가나안처럼 오늘 우리의 현대문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누가 얼마나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며 사는가 하는 그런 경쟁을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과연 이런 시대정신과 다르게 살고 있을까요?
몇 년 전에 경북봉화에서 농사짓고 사는 전우식 할아버지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썼습니다. 금년에 73세이십니다. 신경림 시인이 그 책의 발문을 썼는데, 거기서 전우익씨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봉화군 상운명 구천리, 아버지대로 부터 살던 낡은 기와집에서 혼자 산다. 아들딸들은 모두 나가 살고 아내도 딸을 따라 .... “물자가 너무 흔해요. 쓸데 없이 많아요. 나만이라도 좀 덜 흔하게 살고 싶어요” .... 어쩌면 이런 전우익 선생을 시대착오주의자로 비웃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가 깊은 산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절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여기서 말한 절제란 삶의 태도라는 걸 주목하십시오. 오늘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삶의 태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학생들에게 성서가 말하는 종교의식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성서적,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려서 먹는 것, 절제의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질 때 사람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만 교회의 미래가 있습니다. 이럴 때만 21세기에도 교회는 한국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귀한 공동체로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교사의 직분을 거룩하게 수행하십시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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