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4), 요 19:26,27

조회 수 5350 추천 수 100 2004.06.30 22:52:49




가상칠언(架上七言) (4), 요 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아주 색다른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가상칠언이 대개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사건 앞에서 구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한 외침들인데, 요한이 전한 오늘의 이 한 말씀만은 웬지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것처럼 들립니다. 아마 요한복음의 저자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사적인 이야기를 보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그 현장에 가족들과 제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접근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이 이 사형 집행자들과 안면이 있었거나 아니면 어머니 마리아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런 현장 접근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예수님은 어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어서 제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의 이런 부탁의 말씀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지할 곳 없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먼저 죽는 아들의 심정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곳에 자기가 믿을 만한 제자 요한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목수였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가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아니면 예수님보다 더 오래 살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런 저런 상황을 미루어보건데 일찍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에서도 요셉은 거론되지 않으며, 특히 예수님이 서른 살이 된 다음에 출가하게 된 연유가 일찍 죽은 요셉을 대신해서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마 요셉은 아들 예수에게 목수로서의 직업을 물려주고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뒷책임은 예수에게 주어졌겠지요. 예수님의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간혹 나오며, 특히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동생 야고보에 대한 보도가 사도행전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여자로 각인된 마리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과 연관해서 몇 대목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최초의 이적사건과 연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나선 가족의 일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있듯이 십자가 현장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부활한 예수님은 다른 가족은 물론이고, 어머니 마리아와도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어떤 면에서 보면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몸이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로마 가톨릭과 우리 개신교 사이에 마리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놓여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을 주장합니다. 그녀는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출산한 이후에도 여전히 처녀였다는 말입니다. 약간 억지처럼 보이는 이런 주장에 근거해서 그들은 마리아의 승천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로서 우리들의 기도를 예수님에게 대신 전달해 준다는 믿음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친동기간이 아니라 사촌들이었다는 설명으로 마리아의 처녀성을 끝까지 고집하고 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깨끗한 여자였다는 그들의 주장은 한편으로 매우 종교적이며 순수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신앙활동을 위해서 이런 마리아론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구원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개신교 신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어떤 그릇된 추상적 틀에 짜맞춤으로써 실체를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마리아의 처녀성과 거룩성의 관계를 검토해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마리아가 계속적으로 처녀였을지 모른다는 어떤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은 사실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너무나 종교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신(神)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을 성자로 여기면서 거의 신앙적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공동체에서 이런 신앙이 전승되면서 훨씬 많은 기대들이 부가됩니다. 결국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신화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이런 신화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가 얽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종교는 비록 신화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 하는데 반하여 하등종교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핵심적 역할을 합니다. 아마 마리아 숭배는 이런 종교적 현상에 기인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앞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 숭배를 인간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오는 작은 요소로 간주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모든 신앙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 확대된다면 미신으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저는 이런 종교학적인 문제를 거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거룩성 문제가 왜 그의 처녀성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남자를 모르기 때문에 깨끗한 여자라는 생각은 성서적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중세기의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게 아닐까요? 이 문제는 인간의 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와 연결됩니다. 제가 교리사적인 확인을 못했지만, 이 마리아 숭배와 성직자의 동정 문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교리화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 사회적인, 그리고 교권과 결탁된 헤게모니 투쟁이 깔려 있겠습니다만, 그런 요소를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성을 매개로 거룩성과 세속성을 구분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려 했다는 사실은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이런 교회사적 현실 앞에서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주장이 과연 기독교적인가에 있습니다.

성구명상을 위한 이 자리가 공연히 복잡한 문제에까지 확산되어서 오히려 우리의 영성에 방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능한 짧게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性)은 거룩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은 우리 인간의 구성요소이며 현실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거룩하거나 속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도 성(욕)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인간 현실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인간의 성도 포함됩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리비도>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성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짚어냈으며, 오늘의 시대가 인간의 모든 삶을 성욕이라는 각도로 몰아가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처리해야 할 사안이지 성을 거룩성과 반대되는 요소로 단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끝가지 처녀였기 때문에 거룩한 여자였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출산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거룩한 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생명을 잉태시키고 출산하는 그 모든 여성들의 행위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는 생명을 낳는 모든 여성들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으로 제각각 살지만 결국 생명지향적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할 우리 모두에게, 특히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징표로 삼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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