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5), 요 19:28

조회 수 5764 추천 수 89 2004.06.30 22:53:03




가상칠언(架上七言) (5), 요 19:28



내가 목마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간적으로서 감당해야 할 마지막 진통을 신음 소리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요한은 시편 69:21과 연결지어서 이 신음을 해석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죽음에서 목마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70%가 물로 구성된 육체에서 피와 진액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십자가 처형은 물을 찾게 만듭니다. 보통 우리가 운동을 하고 난 후에 느끼는 갈증도 참기 힘든데, 실제로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경우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반국가사범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에 사용된 십자가는 원래 십자(十字)가 아니라 T자(字)로 되어 있습니다. 두 팔을 가로 막대에 벌려서 간단히 묶고 손바닥에 못질을 합니다. 엉덩이는 약간 불룩하게 나온 밭침대에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몸무게가 손바닥에 적당하게 실리게 됨으로써 시나브로 찢기면서 피가 흘러나옵니다. 사형수는 단숨에 죽는 게 아니라 며칠 씩 그 십자가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오락가락하며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6시간만에 운명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건강이 나빴든지 아니면 그에게 연민을 느낀 로마 병정이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빨리 죽게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심한 갈증을 느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갈증이 어디 그런 육체적인 것만이었겠습니까?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은 외로우며, 그 마음의 외로움은 육체적인 갈증까지 불러옵니다. 마음과 몸은 사실 하나 처럼 움직이니까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음에 갈증을 느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도 역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일반 대중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인 빌라도는 접어두고, 자기 제자들로부터도 역시 버림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젊은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참척의 슬픔에 빠진 마리아나 인간적으로 깊은 연대감을 갖고 있던 제자 요한 정도가 그 십자가 현장에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 곁에 모여 섰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처형 순간에만 갈증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이미 공생애 중에도 그랬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자기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름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모인 적도 있지만 그들은 제각각의 관심 때문에 온 것이지 더불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설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혼자였고, 공생애 중에서도 역시 혼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이며 록가수였다고 알려진 아무개 씨의 노래 제목이 "물 좀 주소"였다고 합니다. 60년대라는 국제 사회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런 목마름을 불러일으켰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목말라할 말못할사연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독특한 가사와 전혀 새로운 노래 형식으로 인해서 기존의 가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지하 씨도 젊었을 때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책을 쓴 적이 있지요. 그런 가수나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 차원에 목마름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 인간은 외롭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옆에 누가 없어서 허전하다는 뜻인데, 단순히 누가 없다기 보다는 자기와 생각을 같이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사람을 찾습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도 여기 저기 기웃거립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계>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외로움을 달래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여기 저기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과 이런 저런 이벤트를 꾸며보아도 역시 이 궁극적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인간을 따라다니는 외로움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연결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무한한 고독과 불안이 우리 인간의 실존인 셈입니다. 이런 문제는 이미 키에르케고올이 기독교의 죄론과 연결해서 자세하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간혹 서로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들이 상대방으로 인해서 무한히 행복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면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은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비아냥거리듯이 말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사랑과 정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그 사람도 십자가로 죽어야 하면, 더욱이 죽음까지 함께 통과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동반자살한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데서 외로움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참되게 하나가 되어주는 대상에게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곧 하나님입니다. 조금 바꿔 말하면 영적인 실체(spritual reality)입니다. 이 스피리쳘 리얼리티는 곧 창조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고, 부활의 영입니다. 종말에 이 세상을 완성시키는  영입니다.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도 간혹 이런 경험을 합니다. 예술적 영감을 통해서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기도 하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자연과 도가 바로 이런 영적 실체일 수도 있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경험하는 생명의 깊이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영입니다. 이런 영과의 일치가 곧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에 충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여전히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런 인간적 한계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건은 훨씬 심원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고통과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길은 진정한 구원의 길로 자리매김 된다고 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산신령처럼, 또는 마술사처럼 신출귀몰하게 살았거나 인간의 희노애락을 단숨에 뛰어넘어 버렸다면 십자가 사건은 무의미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해진 십자가의 길을 순순히 갔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선택 문제입니다. 이미 그렇게 주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서 선택적으로 가야만 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목마름"의 절박함을 경험한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목마름"에 기진한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요한은 이어서 생수의 강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원천인 예수님 스스로 목말라할 줄 알았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목말랐던 예수님은 현재 영을 통해서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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