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6), 요 19:30

조회 수 4817 추천 수 71 2004.06.30 22:53:15




가상칠언(架上七言) (6), 요 19:30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전하신 말씀에 대해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고 있는 대목은 세 가지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과 목마르다는 말씀과 오늘 우리가 명상하려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굳이 이 세 말씀의 특성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의 것은 가족인 어머니에 대한 염려이며, 두 번째의 것은 개인적으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이며, 세 번째의 것은 앞서의 문제를 뛰어넘어 인류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직접 하셨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이 말씀을 전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이미 부활한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요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달리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헬라인들에게 변증하려는 편집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첫마디를 로고스론으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은 역사적 예수님을 신앙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상칠언의 한 구절인 이 말씀도 역시 초기 기독교에서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인류구원의 징표로 해석된 다음에 진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말씀의 역사성이 의심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요한에 의해서만 전승되고 있는 구절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온전히 받아들여진 말씀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부딛치는 문제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그 해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절과 관계된 주변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 말씀 자체를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이룬 것입니까? 이게 맞기는 맞는 말씀인가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끝내게 되었으니까 다 이룬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생은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다 이루어진 것이니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개인의 인생에 대한 서술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아무도 이 말씀을 이런 한 개인의 실존적 고백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명제에 대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졌다는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이 인류 구원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생각에서 이 죽음을 거룩한 종교적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한 인간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함으로써 그 이외의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고통과 구원이 일치됩니다. 흡사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다는 죄로 인한 형벌로 끊임없이 간을 새에게 쪼아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 기독교인의 의식 속에는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와 인류구원이 겹친그림으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심층심리학적인 면에서 분석을 한다면 기독교인의 구원관에는 매조키즘과 새디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 고통, 구원이 숙명론적으로 작동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고통스런 죽음으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한 것일까요? 만약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고 한다면 굳이 이런 잔인한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라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보상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즉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상으로 삼고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이론은 하나님을 너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즉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사건건 책임을 묻고 계산하고 보상받는 분으로 격하되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사건만 너무 강조하면 그 근본 의미가 상실됩니다. 만약 로마 정권이 반국가사범을 십자가가 아니라 헬라정권처럼 독약으로 죽였다면 예수님도 역시 십자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사약을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죽었느냐, 또는 하나의 가정으로서 사약을 받고 죽었느냐 하는 것은 별로 핵심적인 사안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라는 거대 세력에 의해서 매우 무력하게 죽은 예수님 자체가 중요합니다. 인간의 문명이 제거한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멧시지입니다. 이런 해석없이 단순히 십자가와 그 고통만 강조하는 것은 그 십자가 사건을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내리는 일이 됩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 구원이 이루어졌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천명하셨으며, 초기 교회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는 그런 징조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병들고, 외로워하고 실망하고 삽니다. 인간은 여전히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 있고, 외형적인 힘만을 자기 정당성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제(2003년 3월20일)부터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는 그 공격의 강도를 훨씬 높혀가고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오래지 않아서 미국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시가 그렇게 증오하는 후세인 일당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의 축을 쓸어냈다는 정의감을 자축하는 날이 오겠지요. 비록 후세인과 그 집단들이 세계 테러리즘의 온상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그런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심증으로만, 더구나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더 모색해야 한다는 유엔의 요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의견을 묵살한 채 자신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후세인 제거에 나서는 미국의 태도를 보면 이 세상의 구원은 한참이나 먼 것 같습니다. 이런 마당에 "다 이루었다"니요. 무엇이 이루어졌나요?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한 로마 제국이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는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둘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 구원의 완성이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지평에서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 세상은 십자가 사건과 대척점에 자리하고 있는 로마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지배당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제국주의에 의하면 십자가는 무시할만 하며 모멸당할 만한 죽음일 뿐입니다. 오늘의 로마는 계속해서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를 보면 십자가는 현실화로서가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으로서만 구원의 완성일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구원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종말에만 유효한 사건이라면 현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종말이 이미 현재 안으로 개입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선취(先取, Prolepse)라고 합니다. 미래가 현재로 앞당겨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는 이미 종말론적인 구원이 앞당겨져서 운행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취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구원완성은 은폐의 방식으로 이 역사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단지 힘에 의지하는 세상 사람들이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한 이런 구원의 역사를 십자가 사건에 기초해서 인식하고, 더 나아가서 희망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외면상으로는 구원과 반대되는 역사같지만 실제로는 구원의 리얼리티가 점차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합니다.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웃돌아 발생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나요? 그 당시 종교와 정치세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린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이 합격 판정으로 뒤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일종의 교리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로 삼고 있나요? 이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이 인간의 힘에 의해서 무력하고 참혹하게 패배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선취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이 역사의 비밀을 믿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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