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요 4:13,14

조회 수 6209 추천 수 133 2004.11.14 23:49:58

(요 4:13,14)

사마리아 여자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에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미 1장에서 ‘빛’에 대해서 언급하더니, 2장에서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급기야 4장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만난 사건의 전말을 매우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꼼꼼히 읽다보면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영적 시각을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흡사 우리가 티브이 멜로드라마를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치부하듯이 본문의 이야기도 그렇게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매우 넓고 심층적이기 때문에 책 한권으로도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로 ‘물’이라는 메타포를 중심으로 이 이야기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야곱 우물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는 길에 시카르(수가)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겠지요. 예수님이 이 우물가를 찾은 시간은 정오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행길에 잠시 쉬기 위해서 그 우물가로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마침 그 때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여자들이 물을 길러 나오는 시간은 땡볕이 내리쬐는 정오가 아니라 시원한 오전과 오후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이렇게 한적한 시간을 택해서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가능한대로 그냥 지나가려고 합니다. 주로 13,14절의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그는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치고 나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는 건 예의범절에 벗어난 게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분고분 하지 않은 이 여자의 태도가 보기에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런 태도 때문에 오히려 이제 무언가 새로운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이 알았다면 당신이 그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거요. 좀 엉뚱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순히 물러설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따지고 듭니다. 선생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무슨 물을 주겠다고 큰 소리 치시는가? 이 우물은 야곱과 그 후손과 가축까지 목을 축이게 해준 생명의 샘물인데, 당신은 야곱보다 훌륭하다는 말씀이신가? 이 여자의 논리는 매우 정연했습니다.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자기주장을 강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의 궁금증을 남겨두도록 합시다. 가능한 빨리 예수님의 말씀인 13,14절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우물물
예수님은 약간 건방진, 그러나 전혀 틀린 데가 없는 이 여자의 반론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13,14).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자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야곱의 우물물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진단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아무리 깊고 그 물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말입니다.
지금이야 수도꼭지만 틀면 사시사철 찬물 더운물이 얼마든지 나오지만 고대 팔레스타인은 이 물이 곧 생존의 절대조건이었습니다. 창세기의 몇몇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 족장들은 그 지역의 맹주들과 수원(水原)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도 역시 물이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몇 지역은 물부족 현상이 대단합니다. 유엔의 보고에 의하면 금수강산으로 일컬어진 우리나라도 역시 물부족 국가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바닷물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고대사회처럼 물전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물을 자랑하는 이 사마리아 여자의 큰소리는 공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우쭐한 기분에 김을 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우물물을 아무리 마셔도 여전히 목마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약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말씀하신 이유는 늘 고상하고 영적인 쪽으로만 생각하다가 이 사태를 희화화(戱畵化)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우물가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예수님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좋은 우물을 갖고 있어서 좋겠다 하고 덕담이나 하셨겠지요. 지금 예수님이 트집 잡듯이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사마리아 여자의 속마음을 뚫어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읽어 가다보면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 명씩이나 갈아 치워야 했던, 말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여자들이 떼로 모여 남의 소문을 퍼 나르는 우물가로 나올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오에 나왔습니다. 우물가에 나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이 여자는 또 하나의 ‘목마름’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마리아 여자와 비슷한 목마름을 경험할 것입니다. 외롭다거나 우울하다거나, 좀더 나쁜 방향에서는 분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이런 목마름의 증상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문화활동이나 종교활동을 합니다.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음악회장에 가기도 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조금 더 자극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술을 찾는다거나 노래방을 찾는다거나 아니면 주식투자에 정신을 파는 행위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테니스를 그렇게 즐기고 있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을 채우는 길입니다. 그것이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길일 수 있고,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고, 문화적인 만족감을 채우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목마름이 해결되겠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그런 목마름을 잊을 뿐이지 그런 것으로는 여전히 공허한 그 무엇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즐겁게 지내다가도 결국 우리는 혼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영화를 볼 때의 기분은 그럴 듯하지만 아주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테니스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같지만 금방 우리는 테니스 라켓을 손에 놓고 살아야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찰떡궁합처럼 재미있게 살아도 역시 자기는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인간의 ‘목마름’은 여전히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아주 재미있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목마름’을 잠시 잊어버렸을 뿐이거나 목마름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목마름’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목마름의 근원이 우리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만들어내는 지구의 기울기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목마름의 근원도 역시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어떤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영혼의 샘물
그렇다면 예수님이 곧 이어서 말씀하신 목마르지 않은 물은 무엇일까요? 사람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한다는 그 영혼의 샘물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신 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주신다는 물은 곧 예수님 자신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영생의 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그렇게 믿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목마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마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목말라하는 사람을 제가 정확하게 분간해낼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은 신앙의 심화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이 깊어져야 하는데, 그런 경험 없이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만족감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를 빌린다면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많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마음을 썼지 하나님 자체를 깊이 아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종교를 무거운 짐으로 가르쳤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영혼 속에서 샘물이 솟아남으로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부단하게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 그래서 하나님과 친해진다는 경험을 늘 새롭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런 경험이 너무나 새롭게 신비롭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에 별로 큰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궁극적인 관심을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우리의 신앙적 태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신비주의자 같네.” 할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곧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비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형식으로, 혹은 율법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는 것, 예수님의 신비에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혼 속에서 샘물이 솟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와 그의 선생님이신 설리반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설리반 선생이 어린 헬렌 켈러에게 사물과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 깨우쳐 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헬렌 켈러는 모든 사물에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설리반 선생이 헬렐 켈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티알이이’, 즉 나무라는 단어를 알려주고 이어서 실제로 나무를 만져보게 해도 헬렌 켈러는 손바닥의 영어 단어와 촉감으로 다가온 나무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것입니다. 어느 날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로 데려가서 시원한 펌프물을 손으로 만지게 하고, 이어서 손바닥에 ‘워러’라는 단어를 써주었습니다. 그 순간에 헬렌 켈러는 모든 사람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그 이후로 학습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물을 통해서 어떤 세계의 깊이를 맛보았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기독교에 대한 정보의 양은 늘어나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이 표면적인 데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신앙적 열정은 여전히 우리를 목마르게 할 것입니다. 그 목마름이 또 다시 우리를 신앙의 외형적 열정에 빠지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났던 것 같은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그런 물이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헬렌 켈러가 자신의 손바닥과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을 통해서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들어간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이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신비로 매순간 심화되어가는 일입니다.
<위의 성구 명상은 '아름다움' 교회 2004년 11월14일 오후 찬양예배 설교임>

[레벨:6]유희탁

2004.11.15 07:52:23

네..아주 잘 읽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목마름이 있는 것같습니다...
목사님이 제시한 대로...아마도 저에게도 경험과 앎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물을 만나기 이전의 헬렌켈러와 같은 모습 때문이 아닐까..생각합니다...
저의 목마름도...예수님을 통해서 또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 요4:19-26, 영적으로 살자! [3] [2] [레벨:100]정용섭 2009-07-31 10907
12 요3:16-21, 세계구원의 공동체 [레벨:100]정용섭 2009-07-31 7282
11 고후 6:3-10, 궁핍 속의 부요 [레벨:100]정용섭 2009-07-11 8607
10 요 9:1-7, 누구의 죄냐? [3] [1] [레벨:100]정용섭 2009-07-11 7871
9 요 19:17-22, 유대인의 왕 [레벨:100]정용섭 2009-07-11 5533
8 요16:5-11, 죄 의 심판 [레벨:100]정용섭 2008-08-07 5772
7 요셉의 아들(눅 4:22) [레벨:100]정용섭 2006-01-05 8811
6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5] [레벨:100]정용섭 2004-12-16 7675
» 물, 요 4:13,14 [1] [레벨:100]정용섭 2004-11-14 6209
4 가상칠언(架上七言) (6), 요 19:30 [레벨:100]관리자 2004-06-30 4828
3 가상칠언(架上七言) (5), 요 19:28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763
2 가상칠언(架上七言) (4), 요 19:26,27 [레벨:100]관리자 2004-06-30 5346
1 봄과 들음 (요 8:38) [4] [레벨:100]관리자 2004-06-14 646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