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7-22, 유대인의 왕

조회 수 5534 추천 수 0 2009.07.11 22:38:25

 1995.4.9. 설교

 

유대인의 왕

(요19:17-22)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희대의 오판이라 할 재판사건이 바로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로 부터 고소를 당했으며,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리므로서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재판은 법에 의해서만 진행되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이 아닌 다른 요인들이 재판을 다른 방향으로 끌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당할 만한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2천 년이 지난 오늘 확실하게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만 분명히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란 결국 힘의 대결로 압축됩니다.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그 사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형 판결이 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관련해서 대표적으로 두 세력이 충돌했습니다.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로마의 총독입니다. 대제사장들은 목요일 밤에 예수님을 사사로이 결박하여 자기들의 종교법에 따라 밤새도록 일차 심문을 마친 후에 새벽에 득달같이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을 죽여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에 대해, <권세>에 대해 논했습니다. 로마의 총독 까지 오른 사람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로마법에 의해 처형할 만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건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왕>이란 말의 의미가 가이사를 대적하여 이스라엘 독립을 위한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6절 후반절에서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이렇듯 그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서 예수를 석방할테니 유대인들의 종교법에 따라 알아서 처리하라고 여러번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으니까 죄수를 사면해 주던 습관대로 총독의 권한으로 예수님을 풀어주어야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여 유대인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보려고 했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겠다고 작심한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을 감언이설로 자기의 뜻대로 이용했습니다. 큰 무리를 지어 총독을 위협했습니다. 더구나 가이사만이 자기들의 왕이라면서 총독의 약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총독은 가이사 이외에 다른 절대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총독이 결국 그를 죽여야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알력과 대결은 아주 엉뚱한 것에서 재연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청형당할 십자가를 끌고 가능한대로 멀리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서 처형장으로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이 결국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도록 했습니다. 이 명패의 글씨는 세 나라의 말, 즉 히브리, 로마, 헬라말로 적혔습니다. 그런 일들이 그 당시는 흔했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 거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어울려서 살았기 때문에 공지사항이 두 개, 혹은 세 개 언어로 선포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를 본 대제사장들이 발끈하여, 빌라도에게 요구하기를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앞서 예수님을 석방하는가 아니면 사형에 처하는가를 두고 팽팽하게 줄다기리기를 하다가 결국 대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했던 빌라도가 이제는 이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도 아닌 것을 두고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대제사장들이, 이번에는 빌라도가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를 달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왜 이 명패에 민감하게 반응했을까요? 자기들의 속셈대로 그동안 골치 아파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큰 성공 앞에서 그 명패가 뭐 큰 일이라고 마지막 까지 빌라도를 물고 늘어졌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앞서 자기들의 입으로 로마의 가이사만이 왕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강요에 억지로 예수님을 심문하고 백성들 앞세 세웠습니다. 그때 그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내가 너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묻자, 발을 빼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대제사장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후). 대제사장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건 정말 낯 뜨거운 일입니다. 그들은 로마로 부터 철저하게 식민지배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심기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황제만이 자기들의 왕이라고 말한다는 건 상식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로마 총독을 요리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가이사를 들먹 거린 마당에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한다면 패역무도한 죄인과 자기들을 동일시 하는 꼴이 됩니다.

두번 째 이유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자기들에게 모욕이며, 치욕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가 어떻게 자기들의 왕이 될 수 있는냐는 항의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사실 하나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과 그가 전한 말씀들, 그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에 대제사장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 당하게 된 예수는 모세 이후로 율법에 의해 유지되던 이스라엘 신앙에과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영광스런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일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이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아니 위대한 시온을 건설해야 할 막중한 과제 앞에서 예수님은 불순분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를 보았으니 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결국 내용적으로만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유대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고한 대표적인 세력인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상호 알력으로 대치하다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심으로는 아닙니다. 겉으로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달았지만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진정으로 <유대인의 왕>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왕>이 되었다는 일종의 역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자 하는 그런 세력에 휩싸여 있으며, 어쩌면 우리도 그런 무리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처구니 없는 판결을 내린 빌라도, 그리고 빌라도를 사주한 대제사장들의 음모는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정치와 그런 종교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처형하듯이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자기들의 안전과 이익만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런 세력은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힘에 의존합니다. 그들을 끊임 없이 자기 분야에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만족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만족을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런 힘을 키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 자기들의 의도에 걸림돌이 되는 대상은 그 무엇이라고 제거해 버리고 맙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한 것 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와 경제 지상주의라는 물결 속에 같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걸 목표로 합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누구나 국회나 지방의회 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모든 사업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6월에 지방 자치 선거가 있게 되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설른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들이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한다면야 정당한 선거절차를 통해 일군으로 뽑힌다는 게 나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겉으로만 국가와 지방민을 위한다고 하지 실상은 개인의 입신양명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그런 욕심을 하나도 갖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지역에서 발생했던 ‘두성부도사건’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일부라고 보는게 좋겠습니다면 우리의 경제윤리라는 게 바로 그와 같습니다. 작은 사업체를 알차게 꾸리며 평생 노력하는 걸 무능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쨋든지 크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정치나 경제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힘을 키우는데 방해가 되는 대상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라고 제거해 버리게 됩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는 이런 세력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자기들의 힘을 키우는데 예수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만한 죄목을 발견할 수 없었읍니다만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 권위적인 정치와 종교의 실상입니다. 작년 8월에 전국연합의장인 이창복 씨가 범민족대회강행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10월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이북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6일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습니다. 이북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국가 권력은 자기들의 세력확장에 방해거리가 되는 사람을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립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노래 테이프를 파는 장애노점상 최정환 씨가 자신의 몸에 시너를 뿌리고 죽었습니다. 그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일 자리를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노점상 단속과 관련된 일입니다. 대구시내에도 그런 노점상들이 많은데, 구청 등에서 단속반원이 나오면 허둥대며 쫓겨 다닙니다. 때로는 단속반원들이 채소나 과일이 담긴 광주리를 발길로 차 버립니다. 우리는 법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에게서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지 우리 주변 어디에나, 그리고 온 세계 도처에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도 그렇게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대제사장이나 빌라도들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이란 자기의 뜻대로 모든 걸 처리해 나가는 지위입니만,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온통 내다 버렸습니다. 대제사장과 빌라도는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피나는 암투를 벌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왕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남의 뜻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도 분간할 줄 모르고 악에게도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의롭게 살아가야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 모르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빌라도가 예수님의 입장이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들의 입지조건만 중요하게 생각했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제사장이나 빌라도 처럼 살아가려고 합니까? 그런 힘과 권력과 지배욕이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심판하던 2천 년 전 예루살렘 빌라도 총독 관저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누구 편에 서 있습니까? 대제사장, 그들에게 매수당한 무리들, 총독? 아니면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를 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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