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의 실체 -창 22:1-19-

조회 수 9191 추천 수 155 2005.03.25 23:55:08
모리아 산의 실체  (창 22:1-19)

창세기의 아브라함 전승에서 가장 극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순간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칼을 뽑아든 장면일 것이다. 이 순간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명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을 먹고, 장작더미 위에 누워있는 자식의 가슴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하나님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강변한다면 더 이상 할말은 없지만, 조금 뒤트는 방식으로 이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묵상으로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신약성서의 인용은 대표적으로 히브리서 11장과 야고보서 2장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히 11:17, 약 2:21 참조). 반면에 기독교의 칭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신약성서 전거인 바울의 로마서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변증하고 있다. 바울이 거론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바친 사건이 아니라 백세가 된 마당에도 “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롬 4:19). 만약 이삭을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한다면 바울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바울이 히브리서, 야고보서와 다른 시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해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근동지방의 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그렇게 드물지 않았지만 유대교에서는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내가 알기로 구약성서에는 단 두 번의 경우가 있다. 한번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사사 입다의 이야기(삿 11장)이다. 사사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에 자기 집에서 가장 먼저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입다는 자기 집의 종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귀여운 외동딸이 아버지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소고치고 춤추며 달려 나왔다. 그 딸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는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결국 그렇게 희생되었다. 외동딸이 아니라 자기 종이 뛰어나왔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입다의 발상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왜 그런 이야기에서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신중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서에는 사람들의 판단과 하나님의 뜻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사람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도할 수 있다. 더구나 성서는 어떤 사실(fact)를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 너머의 어떤 영적인 리얼리티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어떤 사태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그것은 단지 어떤 한 민족의 종교사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지 입다가 자기 외동딸을 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근동의 다른 종교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교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창세기의 보도를 그대로 따른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리신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창 22:2). 그 뒷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까?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근동의 신들처럼 사람을 제물로 받기 원하는 존재로 오해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오늘 본문은 사람 제물이 아니라 믿음이 핵심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 제물은 이 믿음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로 등장할 뿐이다. 비록 주변적인 요소라고 하더라도 이런 본문을 통해서 이미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모리아산 사건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고대 근동에 자주 있었던, 당연히 히브리인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제물의 관습으로부터 그들을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한 그런 투쟁의 전승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주변의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것처럼 사람을 바쳐야할지 모른다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건이라고 말이다. 더 나아가서 야훼 하나님은 사람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더라도 자신의 백성들과 맺은 약속을 폐기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오늘 우리는 모리아 산 이야기에서 어떤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인식, 그리고 인간의 해석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한 역사적 흔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심층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뿐이다.

[레벨:6]유희탁

2005.06.11 07:18:39

색다른 해석 근동지방의 잘못된 관습과 문화로부터의 단절을 위한 투쟁.
생명을 존중하며과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써 본문이야기를 이해하신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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