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0:1-7,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조회 수 25992 추천 수 0 2009.07.31 21:52:54
 

1995.1.28.  설교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창20:1-7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오늘 우리의 잣대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항상 건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때로는 파렴치하고 몰염치하며, 뻔뻔스럽기 조차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해당 인물의 인격이 허물어질 것 같은 일들도 역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났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완전한 모형의 인물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점을 알려주고 전해주고자 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치열한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멧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가운데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파노라마 중에서 야곱과 요셉도 그렇지만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받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약간 의아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편의상 7절 까지만 읽었습니다만 18절 까지 한 단락을 이루고 있는 본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한 후 여전히 방랑자였던 아브라함은 유다의 광활한 산악지대를 떠나 해안평야 그랄 지역에서 한동안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이방인으로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때문인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알려지게 되면 그랄 지방 토호들이 사라를 빼앗을 양으로 아브라함을 처치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여동생이라는 사라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당시는 여자가 물건 처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 여자로 삼기 위해 데리고 왔다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나타나시어 책망했습니다.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데리고 왔는데, 무슨 큰 잘못이 있는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사라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를 이르시기를, 사라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걸 깨닫고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곧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고 그 기도 덕으로 아비멜렉과 그 집안이 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 이하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침 일찍 일어나 신복들에게 그날밤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아브라함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저지를 뻔 했다는 걸 주지시키고 그런 쓸데 없는 말을 왜 했는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속인 것에 대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이 지역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아내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며, 셋째는 사라가 아내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복 누이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설명을 들은 아비멜렉은 상당한 정도의 재물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사라도 돌려주었으며, 거처할 땅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러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들을 치료하시어 자녀들을 낳게 해 주셨다는 말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창12장에 보면 가나안으로 옮겨 왔던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어 애굽에 가서 지낼 때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11-13절). 바로의 대신들이 사라의 미모를 놀라워 하며 그녀를 바로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대신에 아브라함은 바로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취하려 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면서 사라를 데리고 떠나라 했습니다.

창12장과 20장의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주 흡사합니다만 똑 같지는 않습니다. 12장에 등장하는 사라는 아직 젊은 여인이었지만 20장에서는 이미 늙었을텐데도 아브라함이 누이라고 속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랄 왕이 늙은 사라를 취하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12장의 상황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은 그런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리따운 아내를 데리고 타국으로 들어간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아내를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생명은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장의 상황은 12장과 상당히 다릅니다. 일단 아내의 나이가 충분히 늙었을 때였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 때문에 남편인 아브라함을 죽여 없앨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18장에 보면 나그네를 접대하던 아브라함 가정이 천사를 맞아들이게 되고 아브라함 가정에 아들이 없는 걸 보고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말을 엿들은 사라는 아브라함과 자기가 늙어서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없는데도 천사가 그런 말을 하니까 속으로 웃었다고 했습니다. 천사의 이런 약속이 있은 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게 되고, 이어서 이번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늙은 사라를 염두에 둔 까닭인지 모르지만, 12장과 다르게 20장에는 사라의 미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왜 그랄 왕이 사라를 취하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도 없고,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당시에 그들만이 알고 있을만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였고, 그랄왕은 사라를 취하려고 했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비멜렉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는 해안 지역인 그랄의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나안 산악 지대에 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자기 지역으로 넘어 왔는데, 그에게는 사라라는 누이가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마 아브라함 식구들을 몇번 쯤 만찬에 초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중에 사라가 사람을 끌만한 매력을 아직도 갖고 있었고 무언가 모른 품위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물론 왕이었던 그에게 여자가 부족하거나 했던 건 아니었겠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 여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억지로 데리고 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합법적으로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그녀와 동침하려 한 그날밤에 아비멜렉은 꿈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아비멜렉의 행위가 파렴치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다른 종족의 누이를 적절한 절차를 거쳐 데리고 온 것에 불과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남의 아내를 범하는 건 죽을 죄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비멜렉은 자기의 형편을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라를 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적당한 재물과 토지 까지 후하게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끝마무리를 보면 하나님은 사라 문제 때문에 닫아두었던 아비멜렉 여자들의 태를 여시고 자녀를 생산케 해 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라를 돌려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건 그렇게 말 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명령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꿈으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깨달아 알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많은 꿈을 꿉니까? 꿈 속에서 이런 저런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자기 주관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상을 보았다고도 하며,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고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는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런 면에서 아비멜렉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순종이 특별하다는 이유는 또 하나의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의 행위에 나름대로 합리적 근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부도덕한 마음으로 사라를 데리고 온 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들고 하나님이 시비를 건다는 건 생각에 따라서 억울하기 그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별로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기의 행위를 돌이켜야 한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비멜렉으로 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잘못됐다고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더구나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돌이킨다는 건 더더욱 어렵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신자들 사이에 별어지는 사소한 갈등이 그렇게 오래 가는 건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직접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교회의 덕을 위해 돌이킬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아비멜렉은 그랄 지역의 왕이었는데, 이미 사라라는 여자를 데리고 온 마당에 다시 되돌려 준다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아마 아비멜렉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여러 날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일개 유랑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을 고려해 줄 수 있다는 건 그의 심성이 얼마나 바른가, 하는 점을 잘 드러내 준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 세계의 평화를 세워가는 행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그런 행위들이 바로 신앙적 결단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비멜렉, 아브라함, 사라입니다. 사라는 주로 수동적인 역할만 감당할 뿐이기 때문에 별로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람에 벌어지는 흥정을 하나님이 개입해서 선하게 해결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의 반려자인 사라를 데리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이어서 중간 기착지인 하란도 떠났으며 결국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기 드물게 성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록 사라가 자녀를 낳지 못해도 구박하지 않고 충실하게 남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다만 형편상 아내를 누이라 속인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내와 약속한 가운데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그렇게 흠잡힐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창12장 가운데서는 바로에게 말 한 마디 댓구도 못하고 쫓겨났으며, 20장에서는 몇 마디 대답을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0장을 읽으면서 별로 떳떳해 보이지 않는 아브라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하더라도 자기 아내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기 아내라고 드러내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소심증을 보게 됩니다. 그의 비겁함으로 인해서 아비멜렉은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할 뻔 했으며, 사라도 부끄러움을 당할 뻔 했습니다. 고의적인 일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볼 뻔 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웅적인 인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도 고향을 떠나 가나안 까지 다달은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행착오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해서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사라를 건져주셨고, 아브라함헤에도 물질적인 도움이 있게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이 생존해 나갈 수 있었던 건 그의 위대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적 계산과 실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서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디 잘난 구석이 있는가 보십시요. 여러 경우에서 인간적인 계산과 책략을 꾸며보지만 그게 선하지 못하기 일수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있는 아브라함 처럼 세상에서 우리는 적당하게 자기를 감추고 속이고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실수로 인해서 벌어지는 상처와 시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저지른 일을 그리치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은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정도나마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우리의 약함을 채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 두 사람에 의해 벌어진 사태를 하나님이 개입해서 선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을 살면서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산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서 문제들을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 은총을 덧입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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