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살해 사건(출 32:27,28)

조회 수 7860 추천 수 193 2005.12.01 23:41:39
집단 살해 사건

모세가 그들에게 일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명하신다. ‘모두들 허리에 칼을 차고 진지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형제든 친구든 이웃이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 레위 후손들은 모세의 명령대로 하였다. 그 날 백성 중에 맞아 죽은 자가 삼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공동번역, 출 32:27,28)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에 일단 성공한 모세 앞에는 지금까지의 어려움보다 훨씬 험난한 길이 놓여 있다. 파라오와의 싸움은 그 목표가 정확했지만 40년 동안 광야를 횡단해야 할 대장정에서의 싸움은 그 목표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외부의 적은 적절하게 전략을 세워서 대처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은 대책을 찾기 힘든 법이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내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율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이 숙제를 안고 시내 산으로 올라간 게 아닐는지. 그는 40일 동안 그 산에서 야훼와의 맞짱을 통해서 급기야 십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을 받아낼 수 있었다.
히브리 민중은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될 때까지 기다릴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모세가 꽤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의 일환인지 모르겠지만 모세의 형 아론을 졸라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야훼는 이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겠다는 뜻을 모세에게 전한다. 모세는 강력한 어조로 야훼에게 용서를 구했다. 야훼 하나님은 계획했던 재앙을 거두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문제를 일으키는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드린 모세와 그 기도에 따라서 관용을 베푸신 야훼 하나님 이야기는 두고두고 새겨들어야 할 미담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전개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이미 야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낸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보인 행동은 오늘의 독자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둘러싸고 춤추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이미 예측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벼락같이 화를 내며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태우고 빻아서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다. 모세는 지금 왜 이렇게 ‘오버’하는 것일까? 백성들이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약하게 행동했기 때문일까? 만약 야훼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이전이라고 한다면 그의 자비심에 얻어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을 심하게 다룰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끝난 문제 앞에서 이렇게 야단스럽게 군다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모세는 이런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십계명을 깨뜨리고, 금송아지 물을 마시게 하고, 아론을 책망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무장한 아론 후손을 시켜 자기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집단 살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형제, 친구 이웃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손에 걸리는 대로 죽이라고 했다. 성서는 그날 맞아 죽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보도한다. 백성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렇게 죽일 수 있을까?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모세가 가장 잔인한 지도자였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무자비한 일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삼천 명을 때려죽이면서 그것을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라니. 자신의 잔혹한 행위를 신의 이름이나 민족이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한 폭군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자주 보았다. 십자군 전쟁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마녀사냥도 그랬고, 21세기에 벌어진 미국의 이라크 침략도 역시 그렇게 합리화되었다. 그렇다면 모세도 그렇고 그런 난폭한 지도자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지기 쉽다. 성서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무조건 미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행위를 사회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서 비판할 수도 없다. 모세의 잔인한 행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일종의 역사적 미스터리라 할 이런 사건을 왜곡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서 한 마디 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모세의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들어가야 할 모세의 정신적 부담감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우리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아무리 느린 걸음이라 하더라도 두 달이면 충분했을 미디안 광야의 횡단에 40년이나 소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아마 진퇴유곡의 암담한 현실 앞에서 자기 민족이 이 광야에서 몰살당하는 악몽에 시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밖에는 없었다. 야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만이 그것이다. 시내 산에서 그것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긴급한 순간에 히브리 백성들은 그것에 반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백성들을 잘 타이르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일벌백계가 필요한지를 말이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그것만이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잘한 일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망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권적인 행태가 모세시대에 있었던 생존의 몸부림은 아닐는지.

[레벨:1]똑소리

2006.11.18 18:00:19

목사님!
기회가 되면 출애굽 홍해사건도 한 번 다루어 주시죠?
홍해사건이 실제 사건의 진술인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인지
그 실체가 궁금하거든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1.18 23:57:44

똑 님,
본인이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아마 답이 나올 걸요?
홍해라는 단어는 갈대밭이라는 뜻도 있답니다.
모세는 그곳 지리에 빠삭했지요.
출애굽 사건에서 중요한 건
하나님이 오합지졸이었던 히브리 공동체를
천하무적 바로 기마병들로부터 보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놀라운 일이지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성서를 읽을 때 늘 실제 팩트냐 아니냐 하는 관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일부러 팩트를 무시하라는 게 아니에요.
성서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 팩트의 객관성이 어떨는지는 짐작이 갈 텐데요.
그런 걸 조금 더 전문적으로 찾아내는 작업이 성서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능하면 폰 라트의 <창세기> 주석을 읽어보세요.

[레벨:1]wjdrnjs

2007.05.16 2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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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 23:20-33, 고난 극복의 지름길 [레벨:100]정용섭 2009-07-11 5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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