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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사순절 조회 수 19052 추천 수 1 2011.03.21 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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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세기 9:8-17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창세기 9:8-17, 사순절 둘째 주일, 2011년 3월20일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지난 3월11일 오후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 그리고 원전 사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재앙 앞에서 그 일을 당한 일본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확인된 사망자와 실종자가 5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아들,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 오랜 병마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을 겁니다. 온갖 사연이 다 담긴 이들이 이렇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장애를 입은 이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삶의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런 대재앙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고,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이런 대재앙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재앙을 당한 이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걸 다 안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발언은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 벌써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면서 심리적으로 도착적인 증세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경솔하고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을까요?

     우선적인 대답은 그들의 세계관이 이원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완전히 분리합니다. 자신들은 선이고 세상은 악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조건 선이고 타종교는 악입니다. 이성애자들은 무조건 선이고 동성애자들은 무조건 악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조건 선이고 공산주의는 악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는 거의 모두 악으로 분류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들은 많았습니다. 그리스도교 백인들은 유색인종들을 뭔가 부족한 종족으로 여겼습니다. 민간요법으로 치료행위를 하던 미망인들을 마녀로 몰아갔습니다.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은 미국은 선이고, 별로 없는 중국이나 일본은 악입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으로 타종교를 무시하는 발언과 행동을 서슴없이 쏟아냅니다. 이들은 일본이 당한 참화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도 이런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줄만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아홍수 이야기입니다. 창 6:5-8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을 없애버릴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홍수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40일 동안 비가 쏟아져서 땅의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 가족과 짐승들만 예외입니다. 성서의 설명에 따르면 노아 가족이 살아난 이유는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아 가족 이외에는 모두가 악하다는 것인가요? 그래서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 이전에 상식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노아 전승에 참여한 이들은 왜 이 끔찍한 재앙을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대홍수 이야기는 성서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바벨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비슷한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홍수 설화의 원본이 구약성서와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로 전승된 것으로 봅니다. 구약성서의 홍수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고유한 영적 시각에서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시각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연 재해는 두려움의 극치였습니다. 우리의 처지와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진과 해일의 지질학적 현상을 상당히 분석할 수 있습니다. 예측도 하고 예보도 하고,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도 쓰나미가 덮치는 장면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장면을 3천 년 전에 살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우리의 원시 조상인 유인원들이 생각납니다. 여러 유인원들이 아프리카에서 출발해서 유럽과 아시아까지 와서 살았습니다. 지구에 천천히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추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먹을거리도 줄어듭니다. 노약자들은 살기 힘든 생태로 변합니다. 생존의 위기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던 지역을 떠나서 조금이라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 할지 말입니다. 마치 이번에 3.11 대지진의 최대 현안인 후쿠시마 제1원전 소동과 비슷합니다. 목숨을 담보하고 원전의 최악 폭발만은 막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대원들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20km, 또는 80km 멀리 떠나야 합니다. 외국인들은 아예 일본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대재앙은 과거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어떤 재앙을 만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빙하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때가 되면 적도 부근에만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큰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피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지구의 판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용암이 지구표면을 덮을 것입니다. 외계인이 출몰해서 지구를 공격하는 일도 없으란 법은 없습니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대재앙만이 아닙니다. 개인은 곧 죽음이라는 대재앙을 맞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모두 쓸어가는 지진이요 해일입니다. 절체절명의 대재앙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종족 멸절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지개 이야기

     노아홍수 이야기는 두려움만을 전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이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공포 가운데서도 바로 그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런 영적 시각이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창 9:8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대홍수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노아에게 앞으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증표는 무지개였습니다.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활은 고대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또는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무기였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생물을 살리는 증표였습니다. 구약성서의 사람들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기억했겠지요. 그 약속에 근거해서 개인과 민족에게 밀려드는 대재앙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을 겁니다.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삶의 흔적이 바로 성서입니다.

     좀더 진지하게 질문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운명을 건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것 말고 우리가 지구에서 생존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지구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칼 세이건 같은 물리학자는 그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주 공간 어딘가에 후손들이 이민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유일한 토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인간은 실제로 태양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우리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입니다. 성서는 이를 가리켜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종이 한 장만 눈을 가려도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주파수가 너무 높거나 낮은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결합된 세상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은 그 세상 너머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45억 개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줄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어린아이와 비슷합니다. 퍼즐을 만든 존재만이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하나님의 약속에 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원의이니셔티브(주도권)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노아 홍수 전승이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몇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약속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입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노아홍수에서 언급된 약속은 이와 달리 일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노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앞으로 홍수로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창조사건과 비슷한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이나 요구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독자적인 의지로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노아와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앞으로 인간의 행동을 보고 당신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고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노아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미래를 걸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디서 생명을 지키는 약속의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이 이미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궁극적인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무지개가 손에 잡히지 않듯이 이 사실도 멀게만 느껴질지 모릅니다. 다른 것들이 우리의 영적 시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것들은 우리 자신을 성취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입니다. 자신 연민이고, 자기 의입니다. 저의 예를 들자면, 교회를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는 욕구와 제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욕구들이 바로 저의 영적 시각을 막는 다른 것들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것들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뜨겁게 기도하거나 성경을 백독한다고 해서 극복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어떤 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평생 감수해야 할 영적인 숙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떨 때는 무기력감을 느낄 정도의 일들도 일어날 겁니다. 거기에 투쟁하십시오. 다른 이의 당하는 불행 앞에서도 투쟁하십시오. 무죄한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연대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도, 즉 지구에 생태적 대재앙이 임하는 순간에서도, 또한 개인적인 죽음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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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happypig

March 22, 2011
*.181.33.172

안녕하세요, 목사님!

이렇게 글을 올리긴 처음인데 참 좋은 말씀을 듣고 읽으니까 마음에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오네요.

그리고 일본의 대지진(사실상 그동안 일본뿐만은 아니었죠!)으로 인한 쓰나미현상으로 순식간에 모든 생명체들이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 "아! 저것이  우리의 모습이로구나! 인간은 참으로 무능력한 존재구나! 우리의 희망은 정말 예수그리스로구나"했는데 목사님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해주셨네요.투쟁!! 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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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2, 2011
*.120.170.250

행복한 도야지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온다니 저의 마음도 평안하군요.

투쟁과 기다림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말할 때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이 현실의 삶에서 투쟁합니다.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을 위해서 투쟁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그분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기다릴 줄 알아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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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새하늘

March 22, 2011
*.126.124.175

창조에 반한 것들에 대한 영적 투쟁.

그러면 그럴 수록 자꾸만 자신감을 잃어 버리네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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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2, 2011
*.120.170.250

새하늘 님,

창조와 반하는 것들에 영적으로 투쟁하되

하나님이 행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그것을 파괴하는 것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해야겠지요.

나도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

실제의 삶에서는 혼란스러워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랍니다.

새하늘 님 말처럼 늘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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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March 25, 2011
*.142.136.234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가리우고, 그 약속이 멀게만 느껴지게 하는

 내 안에 상존하고 있는 옛사람의 본성들..

  그것이 목사님은 번듯한 교회, 쓴 책의 베스트셀러화 라고 하셨죠?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이 가슴에 와닿는군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평생을 통한 안간힘뿐이라고요....

 

어제의 승리가 오늘을 보장해주지 않는 매일 매일의 이 영적전쟁속에서

매 순간 자기를 말씀에 쳐 복종시키는 선함 싸움

이것이 신자된 자의 인생이요,  삶이요, 소명이요, 목표요, 기쁨이요, 자랑이겠죠?

 

이것을 놓치게 되면 예수 믿는게 뭔가 ...  예수 믿는 게 이런거란 말인가? ..

갈등과 회의속에 가난한,  곤곤한 신자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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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5, 2011
*.120.170.250

부스러기 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선한 싸움"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집니다.

복종시킨다고 해서 비굴한 것도 불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용기 있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겠지요.

누구나 똑같이 70,80년을 사는데,

똑같이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살 뿐이고,

비슷한 양의 공기를 마시고 사는데,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선의 삶이겠지요.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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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March 26, 2011
*.115.208.234

고난과,고통은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 나신다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생각 나네요.. 

이리와,양이 함께 눕는 세상,  염소와 곰이 함께 뛰노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과연 존재할런지 저는 왜 이사야가 그런 비유를 들면서

이런 일들이 장차 일어날것처럼 말하였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목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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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6, 2011
*.120.170.250

별달 님,

좋은 토요일 보내셨나요?

내일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고난, 고통이 하나님의 창조에 어긋난다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말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의 묵시적 예언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가

세상의 질서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기자가 말하는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과 비슷한 개념이지요.

예수님의 재림이 그런 세상의 완성이고,

거꾸로 그런 세상의 완성이 곧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런 세상이 과연 올까요?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되겠지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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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백두한라

March 27, 2011
*.225.149.149

목사님께서 유인원을 우리의 원시 조상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해가 안되는군요.우리가 오랑우탄,침팬지,고릴라의 후예란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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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7, 2011
*.120.170.250

백두한라 님,

안녕하세요?

닉네님이 멋집니다.

백두는 장백이라고도 한다지요?

침팬치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의 조상에서 갈라진 동물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성서적으로 보아도 이상한 게 하나도 없답니다.

하나님이 사람만 만드신 게 아니라

모든 동물과 식물을 다 만드셨는데요.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모든 원천이 하나님이에요. 

모든 것들이 다 형제, 자매들이라는 뜻이겠지요.

침팬치와 내가 형제라는 게 나는 기분이 좋아요.

물론 그들과 내가 지금 같이 살기는 힘들지만

언젠가는, 내가 실제로 하나님과 일치하게 될 때는

그들과도 실제로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겠지요.

아, 그때가 언제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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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31, 2011
*.239.93.193

오랫동안 달리다 죽음의 나무 그늘로 들어가서 고삐를 나무에 묶는 순간 손뼉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고 당신이 달려오는 시간 만큼 여기서 나도 기다렸노라...

죽음의 끝을 모르고 달리던 때에 생각나던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제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 믿음과 약속과 희망에 나를 기쁘게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가 등뒤의  시커먼 쓰나미와 내가 죽음의 경주를 할 때 과연 난 어떤 행동을 할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때도 희망의 무지개를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새로움에서 나의 역할을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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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리움

May 02, 2011
*.148.210.12

목사님 ... 인사드립니다 .

노아의홍수 는 자연재해의 차원이지만 고대 유대인들의 영적시각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볼수밖에 없다고 하신말씀에 동감합니다 ...

목사님도 비유로 후쿠시마 원전사태와 쓰나미를 한 예로 들어주셨구요 .. 노아와 가족만이 의인이라 그들만을 택하셨다고 생각하는건 상식선에서도 불가능하다는 .. 

그런데 두번다시는 물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주셨다는것은 말 뜻으로 볼때 노아의홍수를 직접 행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는데요 ..

그렇타면 성서기자들이 이번에도 역시 노아의홍수 를 하나님의 관여로 받아 들였듯이 무지개약속 역시 고대 성서기자의 영적시각일 뿐 이라고 보는것이 옿은판단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전자의 노아의홍수 는 자연재해 인데 그렇타면 후자인 무지개를 통한 하나님말씀은 등장할수가 없는 근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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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2, 2011
*.120.170.250

리움 님,

안녕하세요?

홍수와 무지개를 동일한 잣대로 봐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홍수도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무지개도 자연현상입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런 자연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고대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글쓰기였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눈에는 분명한 물리적 현상이

고대인들에게는 신비로운 능력의 개입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성서기자들이 (무식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도 고대인들보다 더 많은 걸 아는 게 아닙니다.

도토리 키재기에요.

홍수와 무지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려고 한 성서기자들의 시도를

오늘 우리의 잣대로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아닌 건 아닌 것으로 알아야겠지요.

하루종일 황사가 심했는데,

오늘밤에 가라앉았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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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1933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961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06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2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4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1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5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4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1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5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2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69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1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3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7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6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7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7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3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3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1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3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1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3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3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6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3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9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4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1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5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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