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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바쳐라!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209 추천 수 0 2011.06.26 2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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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세기 22:1-14 

아들을 바쳐라!

창세기 22:1-14, 성령강림절후 둘째 주일, 2011년 6월26일

 

     오늘의 제1 독서인 창 22:1-14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이 사건을 신문기자가 취재했다면 아들살해 미수사건으로 다루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그는 자식을 신에게 잡아 바친 광신도쯤으로 간주되었을 겁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삭 번제 이야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딱 이 한 마디를 들은 것뿐입니다. 왜 번제로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생리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아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 아들을 양이나 소처럼 불에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서 필요한 장비를 갖춰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어떻게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은 뒤에 이삭을 거기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따려는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칼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던 숫양을 잡아 아들을 대신해서 번제로 바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아들의 목에 칼을 대라고 요구하는 신은 너무 잔인합니다. 이런 신은 정의롭다고, 사랑이 충만하다고, 인자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시험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욥의 이야기도 그 한 가지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을 시험하겠다고 하나님께 허락을 받습니다. 사탄의 농간으로 욥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재산도 없어지고, 욥은 심한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욥은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자기 몸을 기왓장으로 긁고 있었습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주장과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주장을 물리친 욥은 결국 그 이전보다 더 좋은 삶의 조건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욥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자식까지 죽게 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성경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걸까요? 그게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선 이 본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들을 번제로 바쳐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믿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까지 바쳤는데 당신들은 무얼 바쳤느냐, 뭐가 아깝냐, 하고 노골적으로 압박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용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라는 지명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람이 볼 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요구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신다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부족해서 우리의 것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지 우리가 하나님의 부족을 채우는 게 아닙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당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재산을 다 바쳐서 교회당을 지었다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당이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헌금도 필요 없고, 교회당도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서도 밥이 없으면 굶어야 하는 것처럼 헌금이 없으면 교회 운영이 불가능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주장은 근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미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자식을 번제로 바칠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바칠 바에야 자기를 바칠 겁니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당연히 이삭이 아니라 자기를 번제로 바쳤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지정했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이삭이 그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오직 이삭에게 달렸습니다. 이삭이 없으면 자기의 재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신앙의 위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을 보십시오.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미래를 설계하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받습니다. 그게 모두의 관심사라는 뜻입니다. 요즘 서울과 서울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우스 푸어’라는 신조어가 유행합니다. 집을 가진 가난뱅이라는 뜻입니다. 일부 자기 돈과 일부 대출받은 돈으로 집을 샀지만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이자만 물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집은 한국 사람들에게 미래의 담보물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가 자기 이름으로 된 교회당을 마련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최근에 서울의 아무개 교회는 땅값 포함 2천억 원 상당의 교회당을 건축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무리하게 교회당을 건축하느라 부도를 내 교회도 많습니다. 대학의 반값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대학도 역시 미래에 대한 설계입니다. 사람은 늘 나름으로 미래를 준비하며 삽니다. 성실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미래인 이삭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이게 잘한 일인가요? 잘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하고 있겠지요.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딜레마입니다. 미래를 포기하라는 성서의 요구와 미래를 준비하라는 세상의 요구 사이에서 힘들어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자신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세상의 삶을 포기하는 듯이 삽니다. 반면에 성경의 요구를 완전히 묵살하고 세상살이의 요령에만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그 중간에 엉거주춤한 태도로 살아가겠지요. 성경의 요구에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하고, 세상의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거북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본문을 어느 정도 마사지해서 듣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일은 아브라함 같은 위인들에게만 가능한 거지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저 이야기를 전승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기서 구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거기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자신들의 설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이 되지 않지만, 외아들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 아브라함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설계에 두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 확실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도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닙니다. 그걸 부정하는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도 분명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일들이 세상에 흔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어긋나는 일들이 세상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는 정말 힘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아들 이삭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통치, 그의 섭리가 막연하거나 혼란스럽고, 더 나가서 비현실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출애굽과 연관해서 수많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났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굉장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사건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이런 사건들이 그렇게 명백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계속해서 애굽을 그리워했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분명한 게 아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에서 실패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실제 역사에서 아들을 바치는 행위는 신앙의 오류입니다. 성서는 인신제사를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광신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에서 사람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으로부터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 그 요구를 하시고, 이를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칼을 이삭의 목에 꽂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동작을 멈추게 하셨던 하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님 덕분으로 하나님의 미래에, 즉 영원한 생명인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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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27, 2011
*.239.93.193

목사님께서 제가 나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아니고, 안 맡기는 것도 아닌 상태를 지적하고 계시니 당황스러웠습니다.

불안하고 뭔가 나약한 상태에 빠져 있음이 노출됩니다.

예전에는 나의 나약함이 내게서 발견될 때마다 동시에 표출되는 위험한 또 다른 나약함이 노출되었습니다. 나의 나약함을 지적한 상대에게 즉답을 요구합니다. 그가 해결책을 주겠지..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상대에게 뭔가에 홀린 양 종속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휘둘리고 저렇게 휘둘리면서 살아 왔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내 나약함의 해결책을 미리 케이스에 넣어서 키로 잠가놓은 곳들이 아주 많음을 봅니다.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마치 답이 있는 양 여러 가지로 광고 합니다.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믿어라가장귀에 잘 들어오는 말은 한곳은 점쟁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고 부활에 참여하는 데 굽은 길을 놓습니다. 좁은 길을 놓습니다.

 

나의 미래를 한계를 똑같이 지닌 우리들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과거의 나와 지금이라도 재림하시면 언제든지 못박을 존재인 나를 믿지 못합니다.  인간을 지나서 구세주 예수님께 나의 미래를 전부 맡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내게 새로운 또 다른 생명, 지금부터 그 때까지 나를 살아가는 새 생명입니다. 주님께 받은 내 미래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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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7,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나를 믿지 못합니다."는 정확한 고백입니다.

저도 저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만이 우리가 의존해야 할 유일한 길이지요.

이런 말이 단지 신앙 정보가 아니라

우리 삶의 알맹이가 되는 차원으로

구도정진 해 봅시다.

자기 부정이 첫걸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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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June 27, 2011
*.182.131.202

목사님 안녕하세요. 요간 방문이 뜸했네요.^^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것 만은 분명한데, 아직 구체적인 실천요강을 찾기는 여전히 어렵네요.

'그냥 예수사건을 믿기만 한다'는 것은 다시 원론에서 부터 각론의 서술이 필요한데 여기서부터 신앙의 자리가 멈추어 있습니다.성경의 대부분의 사건이 가르키는 곳이 사복음서의 십자가사건이라며 다시 여기서부터 이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냐는 명제를 전개시키는데는 전혀 새로운 분야인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의해서 이부분이 연구되지않는다면 오히려 절대적인 복음은 얼마든지 악용될수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상태가 어떤 나의 생활에서 드러난다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말씀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시키고 예수그리스도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참 유익한 것 같아요.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이 자극될수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인것 같아요. 그러한 딜레마의 선두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목사님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봄에서 초여름을 관찰하면서 '생명현상'을 느낄수있었어요, 그것이 나를 작아지게하며 하나님을 볼수있는 고요로 인도하는 것 같아요.

목사님 새로운 아이콘 갈수록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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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1
*.120.170.250

삐죽이 님,

반갑습니다.

생명현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축소되는 걸 느끼겼다구요?

영성의 바른 길입니다.

그 마지막은 자기 무화겠지요.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확장시키려는 본능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만 참된 자유가 보장되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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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June 27, 2011
*.62.0.143

정확한 의미상으론 '존속살해 미수'가 아니라

'비속살해 미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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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1
*.120.170.250

jclee 님,

그렇군요.

존속과 비속은 대립되는 개념이네요.

그런데 비속이라는 말로 바꾸기도 좀 그렇네요.

님이 말한대로 잘 안 쓰는 단어라서요.

그냥 '아들 살해 미수'로 바꿀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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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June 27, 2011
*.159.144.211

자기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난 이삭, 하나님의 침묵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이 말씀을 접하면서 예전에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을 준비해 놓으심을 뜻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 나는군요.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바라며...

목사님, 메아리 때문에 하양에는 피해가 없으신지요.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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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1
*.120.170.250

박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바로

궁극적인 여호와 이레군요.

저는 생각 못했는데,

한수 잘 배웠습니다.

하양은 이번 메아리에 아무 이상이 없었음을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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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새하늘

June 28, 2011
*.126.124.163

아들을 바쳐라는 언어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의심이 듭니다.

아브라함에 전달되는 이 말 한마디만 의지한채,

살인 직전까지 갔던 아브라함이 우리가 우러러 보는 믿음의 조상인가요?

 

물론 아브라함도 수없이 고민을 했겠지요?

이것을 단순히 상명하복 형식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믿음안에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고개를 흔들고 싶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싫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보았을때, 여지없이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모두들 여지없이  '의심많은 도마가 말하는 것은 믿어돼'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의 역사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문자로 정리되었다지만,

한번 정도는 그의 믿음에 대해 의심과 질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너무 까칠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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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June 28, 2011
*.182.131.202

새하늘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브라함이든 도마든 그들의 선택에 가치를 부여하기 보다는 인간이 어떤선택을 하든 하나님은 바른방향으로 반응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좀더 평안할수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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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8, 2011
*.120.170.250

새하늘 님,

까칠한 것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그가 미래에 대해서 매우 불안해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어쨌든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 근동에서 일어났던 인신제사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경험하게 되었던 거지요.

오늘 우리는 어떤 점에서 자식을 인신제사로 드리고 있어요.

무한경쟁이라는 제단에 바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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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June 29, 2011
*.171.132.26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목사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았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물에 관해 무척 궁금한 점이 많았읍니다.

풀린 것도 있는데,,,,    아직 남아있는 것도 있읍니다.

 

저는 그 부분에선 모두 아브라함에 대해서만 촛점을 맞춘 설교나 글을 쓴 것만 보았읍니다.

그 때의 이삭의 고통스런 심정을 헤아려보는 성직자 말씀은 아직 못 들어보았읍니다.

 

 저는 이삭의 마음이 무척 아름답운거라고 믿고있읍니다.

그래서 저는 아브라함보단 이삭 같은사람되라고 제 자식에게 얘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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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30, 2011
*.120.170.250

lutecia 님,

안녕하세요?

이삭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하면

좀더 애틋한 장면이 많이 나오겠군요.

자식들에게 줄 교훈으로 딱입니다. ㅎㅎ

루테시아 님은 무조건 부모 말을 들어야 한다기보다는

다른 이의 주장에 마음을 두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하신 말씀이지요?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아브라함의 권위 때문에 이삭은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요.

모리아 산 사건은 이삭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모리아 산 전승에서 핵심은

'아들을 바치라.'는 불가해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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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July 01, 2011
*.112.124.37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행위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셨는데

후반에서는 " 엄밀하게 말해서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실제 역사에서 아들을 바치는 행위는 신앙의 오류입니다. 성서는 인신제사를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광신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입니다. "라고 하시니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흔히 아는바 대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씀인지,

 아님 고대근동의 무지한 광신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됬다는 뜻인지요...?

 좀더 보충설명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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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01, 2011
*.120.170.250

웃겨 님,

설교를 대충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꼼꼼히 읽으셨군요.

서로 모순되는 주장이 한 설교에 나타나지요?

아브라함이 미래를 자기 인생설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두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릴만 합니다.

이삭 번제 시도는 바로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어떤 영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였겠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랍니다.

저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이 필요한 거에요.

그걸 제가 시도한 것입니다.

모든 구약 본문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그게 필요합니다.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그런 시도를 해야합니다.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전형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사건이에요.

또한 아들 번제라는 시도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으로 설명이 충분할까요?

제가 설교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실제 설교할 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은 고대 근동의 인신제사에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기희생적인 태도는 보이는 것이

신의 노여움을 풀거나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건 판단의 오류겠지요?

사람은 늘 판단을 서투르게 합니다.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의로웠고, 상대적으로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뒤범벅이 되었겠지요.

구약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부분적인 것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잘못된 예언도 적지 않았습니다.

2천5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특히 그리스도 사건으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유대인들과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하게 된 우리는

구약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어야겠지요.

신약성서는 어떻게 대해야할까요?

오늘은 글이 길어져서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요즘 그림그리기의 경지가 점점 높아지시는군요.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순간을 한번 그려보세요.

렘브란트가 여러 편을 그렸다고 하네요.

아브라함의 얼굴 표정이 너무 확신에 차 있으면 곤란하고,

칼을 내리칠까 말까 망설임이 많은 게 좋지 않을까요? ㅎㅎ

좋은 주말,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7]아우

July 01, 2011
*.179.178.110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목사님, 설교말씀에 은혜받고 갑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도 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텐데

그는 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을까요?

속시원하게 한 마디만 해 주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01,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속시원하게 한 마디만 한다면,

야고보 사도도 모든 걸 알고 말한 게 아니라는 게 대답이겠지요. ㅎㅎ

야고보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의 전체에 대해서 좀더 넓게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적으로는 더 어리고 어립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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