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953 추천 수 1 2011.07.04 09:54:13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11/dawp_0703.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10703.wmv 
성경본문 : 로마서 7:15-25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로마서 7:15-25, 성령강림절후 셋째 주일, 2011년 7월3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갈림길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결국 유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그리스도교의 주체 세력으로 나섰습니다. 그 전통의 중심에 바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는 거의 바울에 의해서 체계가 잡혔습니다. 칭의론, 교회론, 종말론이 다 그렇습니다. 27권 신약성경 중에서 10권 내외가 바울의 편지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친 사람입니다. 건강도 시원치 않은 가운데서도 용맹정진의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받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신앙, 신학, 영성, 선교,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요,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을만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예상을 깨는 발언이 나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아무리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실수를 한다는 뜻일까요? 그래도 표현이 너무 심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는 말은 철없는 아이들의 반성문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이런 표현을 오늘 본문에서 반복합니다. 18b절은 이렇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전 13장에서 사랑예찬을 기록한 사람이 ‘선을 행한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어서 1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는 발언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파렴치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의 부도덕성을 까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기를 쳤다거나 간음을 행했다거나 누구를 모함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수준의 잘못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 같은 수준의 영성가요, 신학자들의 자기 고발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성철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거의 평생을 암자에서 구도 정진하던 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저질렀다는 말인지 이상할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절대 진리 앞에서 자기의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왈가왈부가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과 죄

     그것을 알려면 로마서 전체 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의(義)의 문제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삶을 끌어가는 규범입니다. 예를 들자면 십계명이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율법에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거기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인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는 말 그대로 율법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율법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우리에게는 실정법입니다. 온갖 종류의 법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칙이 있고, 군대에도 군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법은 바로 율법입니다. 대학교 법학과 교수들과 변호사, 검사, 판사들은 서기관들이면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법이 바로 서야만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법치국가라는 말은 옳습니다. 문명국가들은 거의 모두 이런 법에 의해서 지탱됩니다. 일인독재 왕정국가로 조롱받고 있는 북한도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법치국가입니다. 그들 나름의 법으로 북한 체제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법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지는 별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평등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불평등한 일들이 많습니다. 요즘 사법개혁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국회 법사소위와 본회의에서 통과된 형사소송법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검사장 급의 검사들이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의 권위는 지금 땅에 떨어졌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관이 너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게 사법개혁의 핵심입니다. 법은 이처럼 양날의 검입니다. 정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야 할 율법이 오히려 불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평생 율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자기를 가리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 율법의 요구 앞에서 인간은 절망에 빠진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이 있다고 합시다. 그걸 지켜야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으면 전체를 못 지킨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죄책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안식일을 돈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돈이 많아야만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율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돈은 있다가 없기도 합니다. 결국 돈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이 원천적으로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율법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규범들입니다. 지금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율법과 법은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죄이고, 거기서 사람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누가 건져냅니까? 바울은 25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대답은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다 말한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는 복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율법은 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의로움을 얻어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건 바울의 실제적인 신앙 경험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롬 6장) 불가능한 율법을 지키려는 수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고한 대가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단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정의롭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면 그동안 율법을 지키려고 수고한 이들의 손해는 어떻게 보상받느냐고 말입니다. 노력한 것만큼 반대급부를 받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전히 율법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노력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공짜로 숨 쉬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 은총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 현상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잘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존이 곤고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감사하리라’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죄의 법

     여기까지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25b절이 이상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미 결론을 다 내린 상태에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듯이 말합니다. 죄의 법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고통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걸까요? 글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은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를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이고, 죄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 두 법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기만 하면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가능하면 죄의 법을 죽이고 하나님의 법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기 때문에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죄에 빠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동과 교육의 문제를 하나님의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해방과 인간 교육이라는 큰 방향은 말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질서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성 문제도 그렇습니다. 청교도들은 금욕주의를 바른 성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그것 자체의 질서에 따라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 순간이 투쟁적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죄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감사하리로다.” 하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도 죄의 법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 가지 법의 세계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두 세계에서 긴장하면서 삽니다. 그 긴장을 벗어날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마십시오.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벗어나서도 안 됩니다. 특히 죄의 법을 섬기는 것 때문에 갈등을 겪을 겁니다. 거기서 실수도 할 겁니다. 죽을 때까지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거기에 구태의연하게 길들여지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한 축인 죄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투쟁하며 살아가십시오.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profile

[레벨:2]imagoDei

July 05, 2011
*.102.239.246

정용섭 목사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항상 들려서 보기만 하다가 오늘 회원가입해서 댓글을 남깁니다.

사정상 해외에 있는 터라 인터넷으로 설교를 접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개인적으로 성서통독 겸 말씀묵상을 하다가-누가복음을 읽는 중입니다-

죄론에 대한 강박관념과 처세술이나 방법론처럼 회자되는 회개,

이에 대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나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얼마전까지 속해 있던 교회가 매번 말세를 강조하며 죄의식과 회개, 그리고 전도의 열매를

끊임없이 설교하고, 그 외에도 언급하고는 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흑백이 선명하기 때문에 힘겨운 싸움을 반복하게 되지만,

이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어서 오히려 항상 자책감, 자괴감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안 그래도 부흥에 걸맞게 '회개'를 표어마냥 쓰는 곳이 많지 않습니까.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기적절하게 오늘 이 설교를 접하게 됩니다.

 

바울 역시 이러한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의 진정성이 와 닿는 말씀 같습니다.

투쟁의 반복이지만 최후에 꼭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요.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05, 2011
*.120.170.250

이마고 데이 님,

안녕하세요?

외국에서 공부하러 갔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있는 1.5세 교포인지 모르겠네요.

한창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인생 시절을 보내고 있네요.

좋은 책을 보는 게 최선이랍니다.

이해가 잘 안 되도 일단 책을 읽어야해요.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노력해보세요.

교회가 신자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때가 있긴 합니다.

지난 청교도 시절에서 극히 심했어요.

한국교회 신자들은 청교도 신앙을 신주 받들듯하니

죄책감을 영성의 근본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에요.

외국 생활이 크게 힘들텐데,

힘 내고, 잘해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3]눈사람

July 06, 2011
*.23.36.90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너무 너무 감사한 사건이고,

그 시대에 바울이 있었다는 것도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바울의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많이 배웁니다.

목사님들께서 바울의 삶을 제대로만 알려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오늘 환갑이 넘으신 할머니 한 분이 결막출혈이 생겨서 오셨습니다.

" 당뇨나 고혈압이 있으신가요?"

"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에 검사를 안받아봐서 모릅니다.

  하나님께 병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연세보다 백내장도 더 와 있으신데....

어떤 병이 지금 생겨 있을지도 모르는데...

 

환자들이 기다림에도 그냥 그대로 보내드릴 수 없어서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비안들께서 짐작하신대로입니다.

제 말에 " 아멘 , 아멘 " 하시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가셨습니다.

 

왜 그 할머니께서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께서는 이런 것을 안가르쳐 주시는지...

 

오늘 설교를 읽으며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드렸습니다.

 

오래 오래 사시면서 좋은 설교, 좋은 글 많이 남겨주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06, 2011
*.120.170.250

눈사람 님,

오늘 특별히 중요한 일을 하셨네요.

죄의 법을 섬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법을 전하셨군요. ㅎㅎ

의료 행위는 죄의 법입니다.

이유는 아무리 몸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임시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나쁘다거나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몸의 범주에 속한다는 뜻이에요.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은

그런 질서에 충실해야겠지요.

교회가 의료 문제에 하나님의 법으로

왈가왈부 하는 건 두 질서을 혼동시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신유집회라는 걸 영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법은 판사에게,

영은 목사에게!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1]Peace..

July 09, 2011
*.189.146.188

목사님 매주 설교말씀 감사 드립니다.

이번 주에도 로마서 말씀의 <죄의 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근원적인 영적 실존의 한계를 깨우쳐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그럼에도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죄의 법을 당연히 섬겨야 한다는 표현은 실존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 너무 수동적이고 체제순응적이 아닐까요?

 

우리는 몸으로 살기 때문에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죄에 빠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동과 교육의 문제를 하나님의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해방과 인간 교육이라는 큰 방향은 말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질서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성 문제도 그렇습니다. 청교도들은 금욕주의를 바른 성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그것 자체의 질서에 따라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본문성경에 이어지는 로마서 8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죄의 법을 초월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 죄의 법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 것이지요. 하나님의 법은 차원이 다르기에, 죄의 법 중 어떤 부분은 해당이 되고 어떤 부분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영역을 총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노동 또는 교육분야에 종사하는 크리스천이라면 그것 자체의 질서에 따라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영역에서 하나님의 법이 구현되고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투쟁해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님께서도 결론부에서 투쟁을 말씀하셨지만, 실존상황적인 죄의 법이 강조되다 보니 오히려 하나님의 법은 그 영역이 축소되고 소극적인 느낌이 들어서 저의 조금 다른 생각을 말씀 드려보았습니다.

목사님 재삼 감사 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09, 2011
*.120.170.250

그리스도의 평화!

반갑습니다.

인터넷이 현실 공간을 무너뜨리고

가상 공간을 오히려 현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도 실시간으로 설교가 전달되니,

인터넷을 개발한 분에게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피스 님의 이견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울의 텍스트만 놓고 말하기에는

이 주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법에 대해서 바울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율법, 계명, 하나님의 법, 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명의 법 등등...

육신의 일과 영의 일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가 무슨 뜻으로 육신과 영을 구별하는지도 따라가기가 좀 어렵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도 사르크스와 소마를 번갈아 쓰는데,

당시의 독특한 인간 이해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피스 님이 인용하신 '정죄함이 없나니....'는

실제적인 게 아니라 칭의적인 겁니다.

정죄가 없다고 인정을 받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 안에서 살고 있어요.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온갖 것에 묶여 있거든요.

칭의론적인 점에서는 분명히 해방되었습니다만

실제적인 점에서는 여전히 구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음.

아마 '그것 자체의 질서에 따라 해결해아가야' 한다는 표현이

피스 님의 생각과 차이가 나는 핵심적인 대목인 것 같습니다.

제가 좀 강하게 표현한 것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세속 질서에도

일어나도록 투쟁해야 한다는 피스님의 생각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예컨데 법관이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서

모든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것 자체의 질서'라는 말은 악한 질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즉 비열하고 파렴치한 세속질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나름으로 세상에 정의를 세우려는,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율)법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마 피스 님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할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은

이원론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마치 사람이 영과 육의 신비로운 결합으로 살아가듯이

인간의 복합적인 두 영역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영역에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칼뱅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제가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마틴 루터는 농민전쟁에 대해서 뮌처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루터의 '두왕국론'입니다.

세계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좀 나이브하게 보여도

루터의 이런 시각이 훨씬 더 성서적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제 귀국하시나요.

이번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시는지요.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11]Peace..

July 12, 2011
*.189.146.188

목사님,

 

결국 같은 말씀을 나누면서도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올린 저의 댓글에

친절하신 보충 답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곳 형편상 8월 20일 이후에나 귀국할 예정입니다.

작년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고 출국하였는데,

벌써 1년이 다가오니 세월이 참 빠르기만 합니다.

수련회 참석은 아직 확실치가 안고요.

이곳 캄보디아까지 매일 묵상집을 보내주셔서 때늦게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July 17, 2011
*.220.104.49

설계를 하면서 느끼는 늘 느끼는 것이 한쪽의 두께를 두껍게 하면 한쪽이 얇아져서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든다면 호미의 손잡이를 굵게 하면 튼튼해서 좋고 손잡이에 박히는 호미자루도 그 만큼 튼튼한 것을 박을 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굵은 손잡이로 만들어 버리면 장시간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손목이 아프게 됩니다. 그래서 자루를 가늘게 하면 가늘어서 쥐기는 좋아도 돌이라도 하나 나와서 좀 세게 파게 되면 자루가 빠지거나 갈라 집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법의 관계가 마치 호미 자루의 굵기와 손잡이의 크기 사이의 상관관계처럼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설마 여기에서도 중용이 개입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엔지니어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중용적인 판단입니다.

노자의 말이 생각나서 표현합니다.

율법, 내가 디디고 있는 발 밑의 땅이요, 하나님의 법은 발 밑의 땅을 벗어난 땅입니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율법, 교회,사회가 만들어 내는 율법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살아가는 동안 내 집, 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 쉬다가 출근하고 퇴근 할 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05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380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509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32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667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579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814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863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195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929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961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879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926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980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978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10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2018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191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182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474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12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81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75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1027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320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72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63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10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148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84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74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22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40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57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52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711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631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766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30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94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74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71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25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76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535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52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754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7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838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337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50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183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38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906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58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49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6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67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07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02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8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4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28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86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65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31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235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18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145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37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96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394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6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9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4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37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4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21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5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79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5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55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68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9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9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74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47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11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98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20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10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45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48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97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14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07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72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9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63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2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65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