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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창조절 조회 수 16905 추천 수 0 2011.10.30 23:26:18
성경본문 : 마태복음 23:1-13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태복음 23:1-13,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11년 10월30일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자신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의 벽에 95항목의 신학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걸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훗날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습니다. 루터가 바로 그 날을 시점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당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의 정신일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인 95 항목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면죄부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 역시 신학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나 교황무오설이나 그 중심은 교회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비 조달을 위한 조치였고, 교황무오설 역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좋은 성당을 건축하는 노력이나, 그리고 세상의 왕보다 더 막강한 교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비성서적인 교리를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사람은 목적만 좋으면 그 수단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경함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종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누구나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졌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송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일 산기도, 또는 40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비민주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이런 경건한 포즈를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루터가 당시에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루터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가기는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인 경건에 담긴 위선은 분간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걸 따지지 않으면 교회는 순식간에 본질로부터 이탈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이들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경건의 대명사입니다. 그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자주 충돌한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신학적으로 수호하는 이들이었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가 장로처럼 거의 직업적으로 율법과 연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사두개인들에 비해서 이들은 종교적인 위선에 떨어질 개연성이 훨씬 높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3:1-12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에 그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2절)에 앉았다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아마 그곳이 회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은 받아들이고 그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은 별 볼일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이 위선의 정체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3절)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가리킵니다. 4절은 이런 행태를 더 노골적으로 묘사합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런 말은 물론 과장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죽도록 수고했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직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율법을 일반 사람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은 율법입니다. 율법의 짐이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쉽지 않습니다. 그걸 강요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억압에서 마조히즘적인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만족은 병든 정신에서 나오는 겁니다. 노예근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은 <신을 옹호하다>는 책 37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길게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에 마치 연인처럼 집착하며, 거기서 얻는 자학적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 죄책감을 떨쳐낸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질병 자체를 빼앗기는 일이 된다. 이 질병이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원적 마조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사랑받는다는 복음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는 고통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 같고,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해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멍에가 가벼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거운 사슬에 묶이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오늘 현대인의 모든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실정법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남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다보면 자신은 도덕적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바리새인이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소위 정치검찰에게서 이런 모습을 흔히 봅니다. 피의자의 피의 사실을 일일이 매스컴에 알립니다. 빨대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선고가 내리기 전에 이미 범법자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불법이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위선입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행위는 남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5절) 남에게 보이려면 우선 좋아보여야 합니다. 가치가 있어야 하고, 세련되어야 합니다. 속은 어떻든지 일단 그렇게 보여야 합니다. 기도, 찬송, 구제는 모두 그럴듯해 보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은 자랑스럽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는 모든 게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모든 경건한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부정되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됩니다. 문제는 경건을 앞세우는 삶의 태도입니다. 경건하게 사는 건 필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기도하는 건 좋지만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내세우는 건 잘못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주의의 잘못입니다.

     왜 잘못일까요? 사람이 근본적으로 경건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 대답입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한 척하려다 보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기도의 영성에 들어가지도 못한 사람이 기도하는 척하려니 위선에 떨어집니다. 저는 그것을 어떤 글에서 모범생 콤플렉스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이런 모범생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이 선물로 주는 자유와 해방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앙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공격성을 보입니다. 세상을 모두 악한 사탄의 자식들로 봅니다. ‘예수구원, 불신지옥’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규정합니다.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화론에 치우칩니다. 구원은 이미 끝난 문제이니 거기서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자는 주장입니다. 옳은 이야기일까요? 사람은 아무리 성화를 외쳐도 성화되지 않습니다.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기껏해야 단지 교양이 많아질 뿐입니다. 교양으로 사람의 근본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범생을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모범생 콤플렉스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위선이 악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파렴치한 행동으로 감옥에 가거나 부도덕한 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보다는 위선이라 하더라도 남이 볼 때 존경받을만하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주장입니다. 그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위선과 악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악은 이미 악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은 선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위험합니다. 사이비 영성이 훨씬 위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낮춤의 영성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단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자신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롭게 시작한 공동체에도 여전히 위선이 작동된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잘난 척하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선생, 아버지, 지도자 연 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한 겁니다. 사람은 선생이, 아버지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직면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결론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1, 12절) 특히 12절의 역설적 진술은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낮춤의 영성입니다. 이 말씀은 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자기를 낮춘다고 해서 나중에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높아지기 위해서 지금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자체가 이미 높아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자기를 억지로 낮출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가장 높아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종교적인 위선, 세속적인 온갖 위선에서 떠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위선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며, 그것으로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높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지만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낮은 자리가 곧 높은 자리라는 삶의 역설적 신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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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희락당

October 31, 2011
*.42.169.46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가로 유명한 분인데..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활동까지 하시고, 참 대단하시네요.

그냥.. 꼬투리 잡는 게 아니라, 목사님 설교를 꼼꼼히 읽다가 문득 든 질문이 있어서요.

"사람은 아무리 성화를 외쳐도 성화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도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가장 높아지는 유일한 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성화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일치를 꿈꿀 수 있는지요? 다시 말해, 성화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과의 일치는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물론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성화되겠지만, 언뜻 생각해보면 성화보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더 어려워 보여서요.

저도 목사님의 말씀에 100% 동감하고,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120% 이해하는데요.. 그래서 저도 설교할 때 그렇게 말씀을 전하긴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과의 일치가 과연 가능할까요? 너무 아득해 보여서요.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낮아질 수 없는 것이겠죠. 죽음이 우리를 강제로 낮출 때까지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죽을 때까지 위선자로 살다가 죽는게 아닐른지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가 절로 나오네요.

늘 강건하시고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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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31, 2011
*.185.31.7

희락당 님,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사태의 깊이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무엇이냐,

또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냐 하는 거지요?

그것을 성화와의 관계에서 이해해야겠군요.

하나님과의 일치는 자로 측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일치로 가는 것뿐이지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한 거에요.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가을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체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이나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지 않고도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가

바로 높은 자리인 거에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햇빛 안으로 들어가는 삶은 가장 낮은 자리지만

생명의 심연에서 보면 가장 높은 자리인 거에요.

여기서 햇빛을 하나님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겁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더 어려워보인다고 했지요?

그것을 리얼하게 경험하는 게 영성입니다.

모세에게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그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한다는 게 간단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빼놓고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아요.

그 경험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그것을 리얼하게 경험하려고

신학 공부를 하고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는 거지요.

자, 길을 더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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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October 31, 2011
*.239.93.193

목사님, 위선은 표현의 윤활제이자 전달력을 배가시키는 중요한 양념으로 제게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행동한 뒤에서야 위선이 나를 이끌어 간것을 깨닫습니다. 정말 위선이 하나님의 자녀를 악에 못지않게 끌어내림을 보면서 당하고 있습니다. 남의 위선을 잡아내는것 자체가 위선 그 자체로 출발합니다. 위선이 생명의 기운을 머리 위로 올려 보낼뿐 다시 가슴으로 배로 내려서 차게하지 못하게 해서 결국 바짝마른 영혼에 날카로움만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위선도 방어이자 갑옷이라 생각하였는데 오늘 말씀속에서 위선의 폐해가 궁극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고 사람을 틀에 묶어놓는지 구체적으로 알았습니다.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싫어하기에 힘든 결별을 하였지만 저도 얼마나 위선과 멀리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위선과의 결별이 나를 낮추고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힘든 답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하나님과 일치, 십자가의 부활, 가장높은 자리"는 연결이 잘 안되고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잘 안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31, 2011
*.185.31.7

진인택 님,

위선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을 정말 잘 표현하셨네요.

나에게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곧 반성하지만 반복되는 일입니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나 밖에서(extra nos) 주어지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가 나에게 덧입혀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힘을 내고 길을 가 봅시다.

하나님과의 일치, 십자가와 부활, 가장 높은 자리가 연결이 안 된다고 했지요?

내 설교문에 약간의 비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진인택 님이 그 부분에서 생각이 덜 정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위 희락당 님의 질문도 거기에 있구요.

그 답글을 읽어보세요.

보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낮다거나 높다는 것을

우리의 잣대로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가장 높다는 말을

단순한 덕담이나 위로나 교훈 정도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걸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바라봐야 합니다.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이렇게 말해요.

"모래 한 알이 우주다."

납으로 금을 만드는 비술이 연금술이 아니라

이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게 참된 연금술이라는 거지요.

오늘은 10월 끝날이자 종교개혁기념일이네요.

루터의 영성이 더 절실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니다.

어제 경동교회에서 신앙수련회를 했는데,

거기서 한 말 중의 하나를 전합니다.

보른캄이 루터 신앙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신비에 접하게 만든다."

가장 심오한 신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믿음도 실종되고 맙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루터의 '솔라 피데'(오직 믿음) 원리를

일종의 믿음 열광주의로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profile

[레벨:17]아우

November 02, 2011
*.179.178.110

좋은 설교말씀감사합니다.

근데 위의 설교와 직접관련은 없는데

세상돌아가는 꼴 보면서 의문이 들어서 한가지 질문올립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잠언서의 말씀이 타당한지.

잠언서 기자는 어떤 차원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2, 2011
*.185.31.7

오메가 님,

세상돌아가는 꼴과 성서의 가르침이 대립될 때가 많지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만

세상을 보면 전혀 그런 거 같지 않거든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에서 '그'는 하나님이지요?

세상 꼴을 보면 그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저는 시편 146편을 전했습니다.

거기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와요.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세상 꼴을 보면 하나님의 통치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두 가지로 생각하십시오.

1)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차원에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것이 보이면 모든 일에서 우리는 그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2) 세상을 통치는 종말론적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혼란스러워보이지만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습니다.

벌써 11월2일이군요.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악도 시간 앞에 굴복당합니다.

시간이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행복한 11월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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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샘터

November 07, 2011
*.49.248.148

 목사님 !이설교 mp3. 동영상 파일은 없나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1
*.185.31.7

예, 파일이 없습니다.

설교는 하지 않고 그냥 원고만 쓴 겁니다.

profile

[레벨:5]lutecia

November 25, 2011
*.55.16.12

깊은 사색을 해야할 대목인 것  같읍니다.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는 설교파일하고 설교듣기를 못하네요. 

설교문만 읽어도 감사합니다. 

많은 시간 묵상하겠읍니다.

profile

[레벨:8]하늘소망

November 25, 2011
*.28.176.159

하나님과의 일치가 뭔지 잘 모르지만..  자기자신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에게  멋져보이고싶고  있어보이고싶고.. 

자신의  감추고싶은 약점이나  부끄러운면은 철저히 감추며   억지로  잘나보이려고 하고 멋져보이려고 하는건.. 위선이겠죠.. 맞는지 모르겠네요 ::

그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거니까요..    전   이게 참 힘이듭니다..

이런나.. 못나고 추하고  수치스러운 나..  감추고싶은 약점투성이인 나를  받아들이기가..

받아들이고 싶지않은 나를  점점 인정할수록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주님의  위대함을 더욱 느끼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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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5, 2011
*.185.31.7

하늘소망 님,

하나님과의 일치를 모르겠다고 했지요?

솔직하시군요.

그건 말로 설명이 좀 어렵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시를 썼다네요.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이해가 될까요?

하나님과의 일치는 이런 시적인 표현이에요.

조금만 더 설명하지요.

하나님과의 일치는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큰 깨우침으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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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068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112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21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984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2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216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10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056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09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24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2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194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361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115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652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82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69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25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542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219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7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370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519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6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696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52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28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96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46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846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23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5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6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2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8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3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6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0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1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29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2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3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3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0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18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5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79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2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3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2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5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0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9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5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3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3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4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2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58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8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1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0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3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4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5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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