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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우리의 평화!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746 추천 수 3 2010.08.16 10: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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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베소서 2:14-18 

주는 우리의 평화!

(엡 2:14-18)

 

    초기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지금 우리 눈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으로 교회가 분리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이방인은 그 이외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원수처럼 생각했고, 이방인도 유대인을 해괴한 짐승처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떤 문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이유가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성서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자리를 잡든지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지켰습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유럽에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일으켰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반유대주의가 있었고, 지난 2천년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만 아는,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각인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비인간적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이 유대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는 이런 반유대주의에 힘입어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여러 곳에서 살해했다고 합니다.

     2천 년 전 초기 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토라 문제에서 불거졌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대표할만한 인물이었지만 신앙에서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입장에 섰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유대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그리스와 로마 교회가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여기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역사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원수처럼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방인 교회 안에서 일치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일치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일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단순히 서로 화합하자고 말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극복되는 건 아닙니다. 출발은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신학적인 인식의 문제입니다. 에베소 기자는 그것을 오늘 설교의 본문인 2:14-18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원수 된 것

     에베소서 기자는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은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16절에서도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원수 된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종교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한 규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가리킵니다. 신생아 남자 아이들은 7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부정한 음식이었습니다. 피도 마시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런 율법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정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절대규범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두 집단이 한 교회 안에 머물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아니면 이방인들이 율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집단은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율법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런 것들은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인 고민과 투쟁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원수 된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교회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는 절대규범과 이데올로기들이 없습니까?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원수 된 것은 교황제도일지 모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을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정교회와 개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문자주의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역사적으로 비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합니다. 성서문자주의는 한국교회의 일치를 가로막는 담이고, 원수 된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 주일입니다.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금년에도 8.15를 맞아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공동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문을 예배 중에 함께 읽었습니다. 남북통일은 한민족에게 지상명령과도 같습니다. 지금 기차를 타고 개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섬이 아니라 대륙에 속한 나라 중에서 이렇게 육로가 막힌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겁니다. 앞으로 2백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부끄럽습니다. 남북통일은 별로 시급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당장 취업을 해야 하고, 집도 사야 하는데, 통일 문제는 오히려 귀찮습니다. 가난한 북한과 통일을 해봐야 우리가 손해나는 일이니까, 그냥 현재 이대로가 좋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자신의 생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에베소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둘로 하나를 만드신다는 겁니다.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뜻으로 새겨도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신자라고 한다면 둘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남북을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갈라놓았고, 지금도 갈라놓고 있을까요? 그 원수 된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천지차이가 날 겁니다.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정권이 바로 원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만 무너지면 금방 통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합니다. 60년 동안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많은 분들이 감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저 놈은 좌파 빨갱이, 저 놈은 수구 골통 하고 서로 비판합니다. 앞으로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 분단 100년은 되어야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 사람들보다 시대를 좀더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수 같이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를 이룬 초기 기독교에서 배웁니다. 이건 단순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반복해서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에베소서 기자는 유대인이 옳다느니 이방인이 옳다느니,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지만 대개는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것만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입니다. 에베소서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시켰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엡 2:14-18절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골 1:15-20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송영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무슨 근거로 이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셨는지는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유대교 고위층과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이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유대교 고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종교적 체제의 중심에는 율법이 있습니다. 유대교 당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그냥 두면 체제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로마권력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는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서른세 살의 삶을 접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율법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실패입니다. 율법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단순히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부활생명이야말로 새롭고 참된 생명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생명을 얻으셨다는 것은 율법의 무효선언입니다. 율법으로는 부활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속성에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결국 자기 의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리나 죄인들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더 경건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것도 역시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의 행태가 이렇게 굴러갑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학벌과 돈벌이에서 자신의 의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남한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북한 체제는 남한보다 더 유치한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합니다. 서로 자기 의에 빠져서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 파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의를 세운다고 착각합니다.

     에베소 공동체를 비롯하여 초기 그리스도교는 생명을 얻는데, 즉 구원을 얻는데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것이 전혀 새로운 길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율법의 속성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는 거짓 의입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자기 의에 집착하면 다른 이들을 대상화, 타자화, 도구화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즉 율법을 무효 처리합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건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성적의 차이, 인종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생명, 그의 현존, 그의 영광 앞에서는 원수 같은 관계가 하나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의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으시나요? ‘당신 말’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에베소서가 노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이 평화로 바뀌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직 태양의 빛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자기 촛불만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태양 빛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영적인 눈으로, 성서의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원수 된 것을 허물어서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한만의 주님이 아니라 북한의 주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평화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의 것이기도 합니다. 금년은 해방과 분단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치인들이 뭐라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천리 반도에 평화통일의 기운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합니다. 이것이 제가 성서로부터 배운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 8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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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August 17, 2010
*.62.26.26

성서문자주의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역사적으로 비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매우 동의가 됩니다. 심지어는 사탄이라느니, 성서를 안 믿으면 뭘 믿느냐느니 하는 말도 하니까요. 더 큰 문제는 성서문자주의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평화주의, 버림,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하느님나라의 전복성, 예수를 믿음과 복은 관계없음에 대해 말하는 성서의 문장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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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0
*.120.170.243

바우로 님,

잘 지내요?

성서문자주의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는 건 사실이지만

일종의 퇴행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결국은 도태되고 말 겁니다.

단지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지요.

진리의 영에게 우리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고

리드미컬 하게 춤추며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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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정병선

August 17, 2010
*.80.145.13

정목사님, 잘 읽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주님만이 평화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때문에 갈라서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줄을 긋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평화통일의 기운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인 공감입니다.

태양의 빛 앞에 선 자들이 촛불 가지고 싸울 이유가 없는거지요.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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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0
*.120.170.243

예, 정병선 목사님,

목사님이야말로 늘 태양빛을 외치고 계시지요?

이 세상이 감언이설로 그럴듯하게 유혹하는 자리에서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자리로 나오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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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August 17, 2010
*.109.153.1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솔직히 현실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내 주변이나 속해 있는 모든 이와 평화를 이루고 있는가?

아니 평화를 생각해보기라도 했나?  전혀 아닌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남북한간의 평화? 이건 뭐 먼 남의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는거죠

그래서 이번주엔 잘 집중도 안되고 그 정도의 영성도 안되면서 뭘 내가.....

평소 진보적인 못한 성향까지 탓하면서 괜히 마음까지 불편해졌습니다.

근데 오늘 다시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그런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건 제가 아직까지도 예수그리스도가 어떤분인지

잘 모를뿐만아니라 그의 존재를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도들의 고백과 전승가들의 기록, 한정된 계시만으로 그 엄청난 예수사건을

믿기에는 저로선 솔직히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지는게 사실입니다

물론,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제대로 공부하거나 노력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죠

원인을 알아내긴 했지만 결국 풀수있는 답은 못찾았고 여전히 숙제만 남았습니다.

믿음은 은총이라고 들었는데 불쌍한 자를 위해 은총 좀 빨리 주시면 안될라나요ㅜ.ㅜ

책을 잡으면 한장도 못가서 졸음 마귀와 싸워야하는 이 게으르고 우매한 자를 위해

부디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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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0
*.120.170.243

방랑자 님,

하나도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시는 군요.

문제를 자기로부터 바라보는 것도

아무에게서 쉽게 주어지지 않는 귀한 성품입니다.

대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방랑자 같은 분에게 설득력이 없는 설교라면

그건 정말 죽은 설교라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제가 좀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방랑자 님이 '그런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하셨네요.

그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랍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들듯이

구구단을 외우면서 그걸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거지요.

예수의 부활과 재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사람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 사실을 교리문답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결국 우리의 영성은 속이 비어버립니다.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낀다고 하셨지요?

좋은 조짐입니다.

그런 경험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경험은 저도 느끼고 있답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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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August 17, 2010
*.112.18.49

이번 여행 떠나기 전날밤부터 시작하여 사흘간 잠잔 시간을 다 합해도 서너시간이 안될 만큼
잠을 못자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시간에 얼마나 졸립던지....제 살을 고집으며 졸지 않으려고 애썻건만 .....그만 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딱 한 말씀이 제심장에 꼿혔습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다"
이 말씀을 수없이 들었을테지만 그말씀을 듣는순간 아~이거다!
듣는 순간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제 일생 다하는 순간까지 이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ㅎ ㅎ
목사님 대구샘터교회에서의 예배와 교제시간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대구에서 예배드리고 다시 서울샘터교회에서 목사님 예배마치고 다시 대구로 내려
가시는 모습뵙고 마음이 짠 했습니다

서울과 대구를 하루에 오르내리시면서  보수도 없이 수고 하시는 목사님 죄송스럽고 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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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0
*.120.170.243

눈꽃 님,

피곤할 때 잠이 오는 건

건강하다는 징조입니다.

신자들의 영혼을 피곤하게 하는 것보다는

졸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구요.

아무리졸아도 설교의 핵심을 잡았으니

다 들은 거나 진배가 없습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구원의 초석이고 평화의 토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돌아서는 게 '회심'이구요.

제가 지금 서울샘터교회 예배를 인도하러 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의에 제 영혼을 맡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푹 쉬시고,

좋은 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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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August 17, 2010
*.97.184.50

대구 샘터교회에서 드린 예전 예배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태양앞에서 촛불의 밝기차이가 의미가 없듯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그러하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새겨지더군요.

오랜만에 나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떠나

우리민족의 아픔과 과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구요.

흐르는 강물이신 하느님께 우리민족의 역사를 맡기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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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7, 2010
*.120.170.243

웃겨 님,

'흐르는 강물이신 하느님'이라, 음,

멋진 표현이군요.

우리는 모두 비방울이지요?

그분에게 용해될 날이 다가옵니다.

이미 그 날이 시작되었지요.

남북한에 진정한 평화의 기운이 가득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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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ugust 18, 2010
*.116.172.215

"주님은 우리의 평화"임이 분명한데

세상은 여전히 분열과 갈등으로 혼탁합니다.

 

해방 65 년과 분단 65 년..  참 기막힌 역사입니다. 

남북이 하나 될 수 있는 그 날이 분명 가까이 오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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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9, 2010
*.120.170.243

모래알 님,

65년이면 희년인 50년보다 15년이 긴 세월이지요.

구약의 희년 제도는 모든 체제가 원래로 돌아가는 건데요.

우리가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신앙적으로도 큰 범죄입니다.

모래알 님 말씀처럼

아무리 상황이 어두워도

통일의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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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ugust 19, 2010
*.209.173.60

"주님은 남한만의 주님이 아니라 북한의 주님이시기도 하시다"는 말씀에 덧붙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주님만이 아니라 이라크의 주님,우리 기독교의 주님만이 아니라 무슬림의 주님이시며, 

힌두교와 불교의 주님도 되신다고요

이 땅의 모든 민족의 주님 되시는 분, 아, 그 이름, 평강의 왕! 예수그리스도!!

 

이번에 지리산빨치산기념관에 가서 민가 구들장밑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보는데 참으로 착잡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렸을 때 우리는 편가르고 놀기를 참 좋아했잖아요?

그러다가 해 질녘에 "이제 그만 놀고 밥 먹자"는 어머니의 부르심에는 다들 놀던 자리 미련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요. 

우연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기념관 입구에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시비가 세워져 있더라구요.

 

" 나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목사님, 이제사 평강의 주님께서 우리의 막힌 담을 허신다는 말씀이 쬐끔 이해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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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9, 2010
*.120.170.243

라라 님,

빨치산 기념관에 다녀오셨군요.

한민족 모두에게 쓰라린 추억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비밀이 확 드러날 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힘을 내고 열심히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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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August 19, 2010
*.104.195.210

라라님, 앞뒤로 앉아서 같은 대목을 생각하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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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August 19, 2010
*.182.6.47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점을 너무 깊이 느끼고 있어서 요즘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예전처럼 성경을 많이 본다던가, 기도를 많이 한다던가, 주중예배를 간다던가, 새벽기도를 한다던가..

이런 방식으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지 못한다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째야하는거냐고 매일 스스로 묻고 있는데..답은 찾아질 기미가 보여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무겁고, 생활하는 중간에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언제 진리가 확연해지는 걸까요...

그 것마저도 아직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지난 주일에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리려고 하는데 비가 엄청나게 오더군요..

교회까지 15분정도인데..가면 속옷까지 다 젖어버릴 것 같아서 친구와 비가 좀 그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12시가 다 되어버리더군요..

어찌나 허무하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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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9, 2010
*.120.170.243

임마누엘 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로

마음이 괴롭다는 것은

영성이 살아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오.

마비가 되면 괴롭지도 않소.

그러나 자책하지는 마시오.

내가 보기에 10년 쯤 지나면

가는 길이 눈에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오.

10년 후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훨씬 젊은 나이이니 힘을 내시오. 

지난 주일 대구에 쏟아진 폭우로

아마 다른 교회 신자들도 예배에 많이 늦었을 거요.

오랜 만에 폭우를 만나고보니

정신이 확 들더군.

주일에 봅시다.  

 

profile

[레벨:19]The One

August 20, 2010
*.39.160.254

방금 여행에서 돌아와 갈급한 마음으로 설교를 급히 읽었습니다.

예전 기억 한 토막!!!

90'년대말, 북경 55중학(고등 포함) -중국어 국제학교- 에 아이들이 재학 증일때

각국 학생들에 북한 학생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연례 행사인 학예회때   북한 학생들이  아코디언, 리코드, 풍금......등 옛날 악기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면  남북한 학부모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노래한 곡조로 막간의 일치가 됩니다. .

동족애가 우리들 중심을 이어주지요. 지금, 뭉클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딸 친구가  건네는 카드에 '행복하라'  '통일되어 다시 만나자'의

글귀에서 진정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정말 실감합니다. 주님은 남한의 주님일뿐 아니라 북한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태양의 빛이 비친다면,평강의 주님께서모든 경계와 선을 무의미화 하시겠지요

 

이번 사막 여행에서도 물건을 떨어 뜨리고 약간의 움직임이 개입되면 흔적이 없어집니다

큰 공간 개념은 있어도 작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충만성 안으로 사라짐이 되어짐을 소망하며,

저도 '하나님의 의'에 제 영혼을, 주님이 제 영혼을맡으시길....   

항상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0, 2010
*.120.170.243

The One 님,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했는데요.

디원 님 역시 세계를 무대로

정말 활기차게 삶을 누리고 계시는군요.

그런데다가 기독교 영성에도

이미 눈 뜨고 계시니 내가 뭐 보탤 말이 없습니다.

잘 지내시고,

겨울 성탄절 즈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저희는 수련회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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