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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성령강림절 조회 수 9930 추천 수 0 2009.11.16 16: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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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엘 2:21-27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욜 2:21-27)


오늘 설교의 본문인 요엘서는 예언자 요엘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엘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그가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욜 1:1)만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요엘이 예언자로 활동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연대가 달라지는데, 대략 기원전 5-4세기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의 형편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한 뒤에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을 자기나라에 동화시켜버리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일제 강점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대세를 따라서 결국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제국과 피식민지 나라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50년 뒤인 기원전 538년 이후에 몇 번에 걸쳐서 포로 송환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이 고국에 돌아와서 왕조를 새로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복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는 국력을 점점 잃게 되고,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탓인지 요엘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자연재해와 하나님의 심판이 반복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망각되지 않았습니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요엘은 하나님의 묵시적 약속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복지사회

21-23절에서 요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을 셋으로 묘사합니다. 첫째는 땅입니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21절) 땅이 마치 설교를 듣기나 하는 것처럼 요엘이 말합니다. 땅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땅이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땅이 두려워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또는 자연재해 같은 거겠지요. 요엘은 묵시사상에 근거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팥충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요즘도 간혹 해외 토픽으로 등장하는 메뚜기 때의 습격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농작물을 먹어 치웁니다. 땅이 두려워할만한 일들입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릴만한 일들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땅도 두려워할만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요엘은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둘째는 들짐승들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 2:22) 들짐승들이 요엘의 설교를 알아들을 까닭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문학적 수사입니다.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들짐승마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장면을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는 짐승들의 생존 노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뭄이 들기 시작하면 각종 짐승들은 호수로 모입니다. 그 호수마저 말라버리면 또 다른 호수를 찾아 나섭니다. 모든 호수가 말라버렸는데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들짐승들의 불안은 고조에 달합니다. 그 순간에 비가 옵니다. 들짐승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을 받았으니까요.

셋째는 시온의 자녀들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욜 2:23) 시온의 자녀들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앞에서 땅과 들짐승들에게 한 말과 똑같습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4) 땅이 두려워할 정도로 심각했던 재난이 여기서 다시 언급됩니다.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는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원상으로 복구시켜주신다는 겁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엘의 이런 설교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 있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생존 위기를 일상으로 느꼈습니다. 어디 유대만이겠습니까. 우리의 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오랜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습니다. 1,2백 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6.25전쟁이 있었던 1950년대에도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엘이 설교를 하던 시절은 지금부터 2천4백 년 전입니다. 하루하루 겨우 삶을 버텨내던 그들에게 요엘은 앞으로 풍족하게 먹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테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요엘의 설교는 그대로 성취되었을까요? 유대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우리는 유대나라, 즉 이스라엘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세계역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엘의 설교와는 정반대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계속해서 주변의 강대국에게 지배를 당했습니다. 기원후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뒤로 2천년 동안 나라도 없이 전 세계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살았고, 가는 곳곳마다 미움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해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앞으로 풍족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요엘은 왜 실현되지 못할 예언을 선포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거나, 아니면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요엘의 예언 내용을 잘 보십시오. 거의 모든 것이 복지 차원입니다. 23절이 말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표현은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농사가 아니라 목축으로 살았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중요하지 않고 푸른 목장과 잔잔한 시내가 중요합니다. 어쨌든지 요엘은 지금 농사 풍년을 머리에 그리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하나도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풍족히 먹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풍요로운 사회복지가 완전히 달성된 북유럽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일까요?

아닙니다. 복지와 풍요는 이집트와 바벨론과 가나안의 신이고, 자본주의를 숭상하는 현대인들의 신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가장 깊었던 때는 반대로 삶의 조건이 가장 어려웠던 출애굽 이후 광야시절입니다. 그 시절에 유대교의 신앙은 모든 토대를 잡았습니다. 예언자들은 가나안의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을 극단적으로 경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물질적인 풍요에 기울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신약은 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항아리에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난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풍년들이 들어 창고를 늘리겠다고 야무진 꿈을 꿨던 부자의 어리석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가 물질을 혐오하는 종교라거나 가난을 미화하는 종교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물질은 부정하고 영혼은 순수하다는 이원론적 주장은 초기 기독교가 이단으로 배척한 영지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도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숭배하지 않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물질 숭배에 기울어집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적당한 선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게 쉽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에 대해서 긴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만 기억해도 됩니다. 모든 인류의 꿈인 복지사회가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면 잡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부자가 한번 되어 보는 것이 평생 꿈이라고 생각할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일

그런데 본문에서 요엘은 왜 이런 복지사회를 하나님의 구원인 것처럼 선포했을까요? 그는 사이비 예언자인가요? 그는 바알 숭배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엘의 예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복지는 정말 극빈자들에게만 구원의 징표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많은 장애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지금 요엘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의 형편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끼니가 필요했습니다. 생존 조건이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본문에는 문학적인 수사로 멋있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은 지금 절대 빈곤층이 국가로부터 최저생활비를 받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물질과 소유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둘째, 요엘이 정작 여기서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1절에도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한 일은 놀라우며 큽니다. 모두 굶어죽어야 할 지경에도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살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그 혹독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요엘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배불리 먹는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백성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는 고백과 똑같습니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부름과 놀라운 일입니다. 어디에 방점이 찍힐까요? 당연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만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일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엘은 앞에서 땅과 들짐승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일과 세상 소문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서로 맞물려 있는 사태입니다. 세상일과 소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요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우리도 온갖 일로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일은 궁극적으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성서는 늘 그 사실을 지적합니다. 창세기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서가 그 사실을 근거로 말합니다. 욥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욥의 재난이 누구의 책임이냐 하는 논란으로 분분하던 욥과 친구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대한 설명 앞에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세상 창조라는 사실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일과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으로는 우리가 찬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마치 어른이 되었는데 용돈은 얻은 것과 비슷합니다. 용돈을 좀 많이 받으면 어떻고 적게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이외의 것은 아이들과의 놀이에서 왕 역할을 맡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찬송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 놀이일 뿐입니다. 놀이는 그냥 즐겁게 놀면 됩니다. 그러나 찬송을 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셨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워하고, 찬송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십시오. 씨앗이 땅에 심겨져 싹이 트고 탄소동화작용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여러분,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의 수능시험 결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종플루를 조심해야겠지만,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 하나님은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송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00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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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김용남형제

November 16, 2009
*.162.14.11

아멘. 결국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깊은 이해로 세상의 염려를 없애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건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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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6, 2009
*.120.170.243

용남 군이 설교 요약을 잘했네.

박수를 쳐 줘야겠군.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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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November 16, 2009
*.164.231.24

'그 이외의 것은 아이들과의 놀이에서 왕 역할을 맡은 것과 비슷합니다.'

요 부분이 공감이 많이 됩니다.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치열(?)합니다.

 아기가 되고 , 형이되고 , 엄마, 작은할아버지, 큰할아버지, 선생님, 강아지까지 되어서 놀이합니다.

요즘은 술 마시는 놀이에 빠져서는 큰할아버지맡은 친구가 한마디 합니다.

"자, 건배! 캬! 좋다." 하면 모두 좋다고 깔깔댑니다.

꼭 큰할아버지가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친구도 있고, 강아지가 되서 '멍멍' 하며 좋아하는 친구도 있어요.

형이 하고 싶지만, 시켜주지 않아서 못하는 친구도 있구요.

힘이 센(?) 배역을 맡고 싶어하는 친구끼리는 형아에서 아빠, 작은 할아버지, 큰할아버지까지 갔다가

결국엔  '그럼 난 예수님! 합니다.

그 때 다른친구는 '야, 하나님이 더 크거든!' 하며 쾌거를 외치더라구요.

아이들 놀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놀이일 뿐인데 여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인지.

인생이 놀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만큼 두려움과 염려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될까요?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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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6, 2009
*.120.170.243

선영 양이 내 설교의 한 토막을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였소.

놀이로서의 삶에서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배워야겠지

좋은 계절 가을을 잘 보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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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November 17, 2009
*.183.92.105

설교를 듣고 문득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적당히 부요한 사회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그릇이 달라서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것도 제각각이기 마련이지만 사람이 살면서 좀더 하나님나라를 경험한 확률(?)이 높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사회적 조건에 모든것으로 간주한다면 기독교의 존재이유가 없는 것이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고통의 해방으로서의 복지가 반듯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듯이 필요한 복지의 범위란 어디까지를 말할까? 이런 구체적인 부분에서 한국 기독교 공동체의 논의가 있어야 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설교 본문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많겠지만요..  이런부분은 평신도들이 하는게 좋겠군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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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7, 2009
*.120.170.243

설교자가 말할 부분이 있고,

그 설교를 들은 평신도들이 실제 사회에서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병훈 선생의 말은 정확한 지적이오.

설교가 모든 문제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소.

대글에서 말한 그 문제는 기독교 윤리와 실천의 차원에서 논의하려면

아마 끝이 없을 거요.

이미 거기에 대한 신학적 논의와 실천 프로그램도 많이 나와 있소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은 늘 변하는 지라

그런 논의를 그대로 대입시키기 어렵다는 게 문제요.

진지한 고민을 안고 사는 게 우리의 최선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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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November 17, 2009
*.123.6.154

두려움과 염려로 자유로와지는것 간절한 바램이지만 현실적으로 정말 어렵죠ㅎ.

이것이 진짜 믿음인데 믿음의 리트머스?

그런 자유함속에 살아 간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겠죠. 죄로부터 자유함도 자연히 보너스로

얻을수 있겠구요.  기도 해야 겠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성령님은 하실수 있으시니깐요

 

오늘날 우리들이 물질에대한 탐욕(간음), 세상 사랑 (우상숭배), 형식적 신앙(율법주의), 기복신앙 

바리세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다고 봅니다. 더 무서운것은  진리의 신앙이 왜곡되어 스스로

 가려져 볼수 없다는게 문제죠. 회개를 할수 없쟌아요 바리세인도 몰라서 회개못했죠.

 

목사님 한가지 여쭤 볼께요.  만약 5000년쯤 지나서 다시 성경이 누군가에 의해 하나님께서

쓰신다면 오늘날 우리들을 뭐라고 평가 하셨을까요? 칭찬은 고사하고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에게

강한 어조로 독사의자식 이라 했는데 우리에겐 더심하게 하시지 않으실까요?

그리고 그 잘못된 1차적 책임을 누구라 하실것 같습니까?

 

목사님 한번 이걸주제로 설교 한편 써주시죠?ㅎㅎㅎ

5000년후 이시대를 조명한 새로운 성경 

근데 생각해보니 그 판단은 하나님 영역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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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7, 2009
*.120.170.243

참믿음 님,

아마 성경이 다시 쓰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것도 사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요.

지금의 기독교가 역사를 그대로 이어간다면

이미 경전으로 자리한 66권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말이에요.

그것을 대체한다면 이미 기독교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앞으로 1만 년 후에도 지금의 기독교가 지속하리라는 보장이 있는지는

물론 논의의 대상이긴 합니다.

무엇이든이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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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November 17, 2009
*.207.250.115

저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말씀을 처음 접하고,

사도행전 기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궁금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Magnalia Dei)!

오늘의 설교에서 해답을 찾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큰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기독교 중심의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말씀들도 많이 듣지만,

그러나, 제가 아는 목사님은 초지일관,  

한결같이 기독교의 중심(복음의 중심)에서 한 발치도 양보 안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콤파스의 축 하나가 중심에 붙박이로 붙어 있는 것처럼요.

이제 알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삶도 크고 바른  원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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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7, 2009
*.120.170.243

앗, 내가 기독교의 중심 복음에서 한 발치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라구요? ㅎㅎ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문제는 내가 여전히 그 복음의 중심을 잘 모른다는 거 아닙니까.

나도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니까요.

어쨌든지,

하나님의 큰 일에 우리의 영혼을 기울여봅시다.

그러면 세상이 딴 판으로 드러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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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November 17, 2009
*.68.157.228

앗!! 이런 표현을 읽다 보면

어째 목사님의 이미지와 영 매치가 안 되는 건 왜일까요? ㅎㅎㅎ

on-line과 off-line의 차이일까요?

 

성경을 읽으면서 가끔씩 생기는 질문이기도 해요.

과연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건지..

감사합니다.  목사님!  여러 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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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7, 2009
*.120.170.243

모래알 님,

앗!!이 왜 제 이미지와 매치가 안 된다는 건지요.

생각 좀 해봐야겠군요. 음.

제가 보기에는 모래알 님이

성서와 기독교의 세계를 제대로 알아가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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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November 18, 2009
*.109.153.10

이번주도 어김없이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제 머릿속에서 맴맴도네요

전에는 늘 입버릇처럼 주일 설교말씀이 한주간의 영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잊어 버렸는데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늘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합니다.

현실의 삶속에서 그 말씀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고 어떤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인 것인지

고민해보는데 그 분별이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분별할만큼 영성이 깊지 않으니까 당연한 거겠죠

이땅에서 사는 동안 두려움과 염려없이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면 풍족하지 않아도 의식주에 별 개의치 않고 그야 말로 용돈없이도

찬송하며 살아 갈수 있을 것 같은데 가족, 특히 자녀 문제에서 만큼은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잡아 주지 않으면 삐뚫어 질 것 같은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고민하고 그저 신앙을 잃지 않고 평범한 어른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에 지나지 않을 걸까요

그동안도 없진 않았지만 특별히 저번주부터 아이 문제로 고민이 깊어지다가 이번주 설교말씀을 대하고

보니 과연 그 말씀을 현실속에서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바른 신앙적 태도인지 궁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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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8, 2009
*.120.170.243

방랑자 님,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관심과 염려를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실제로 자녀들에게 큰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염려가 되지요.

그렇지 않은데도 과도하게 염려하는 건 불신앙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삐뚫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잘 점검해봐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건지,

아니면 부모의 과민인지를 말입니다.

대개는 후자의 경우가 많더군요.

저의 설교를 무조건 실제 삶에 억지로 적용시키려고 하지는 마세요.

신앙적인 방향을 전하는 것 뿐이니

각자의 영적 능력에 따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참고만 하세요.

우리의 선생은 오직 성령 밖에는 없습니다.

멋진 늦가을 오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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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새매

November 19, 2009
*.133.16.207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때에, '나도 사람인지라..' 혹은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지금 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비겁한 변명이고 자기합리화로군요.

"물질만능주의를 혐오하지만, 돈없고 힘든 시절이 길어지니 '나도 사람인지라' 지치고

힘들어서 돈좀 많이 벌어 보았으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무슨일이라도 할수 있는데.."

"삶 구석 구석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지키고 싶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철옹성같이 단단할

수는 없네요.."

수많은 핑계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전, '주님께 사랑받는 사람'인데 말예요.

앞으론 누구와 이야기 할때에, 머릿속으로라도 늘 '주님께 사랑받는' 사람 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절대, 부끄럽지 않게 되겠죠. 말도, 그 말이 만들어낼 행동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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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9, 2009
*.120.170.243

새매 님,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앞서

주님께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커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구요,

또 사람받는 사람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도 더 생각해봐야겠지요.

그 모든 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니

우리의 영성을 예민하게 단련할 필요가 있겠지요.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온 영혼를 화염으로 불사르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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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아우

November 19, 2009
*.223.87.83

아멘입니다.

 

전반적으로 대충 이해가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정리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해 봅니다.

 

만일 굶주림의 극한 상황속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백성의 목숨을 지켜주신다면

이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믿음이 돈독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찬송할 기운이 날지 모르지만

만일 불신자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까놓고 말해서

죽을 고생을 해도 죽지만 않는다면 모두 감사해야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데

좀 억측처럼 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걸 좀 확장시켜 적용해 보면

지금 아프리카나 제삼세계에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에게

그래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았으니 그래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소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굶어죽은 사람에 비하면 축복일지 모르지만

조만간 굶어죽을 지경에 놓인 사람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까요?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요엘의 설교를 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요엘의 설교가 틀리지는 않았겠지요?

다만 우리에게 그런 영적 인식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좀 생뚱맞은 질문인데요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심판을 행하시는지요?

나중에 죽어서 받는 최후 심판 말고요.

술에 중독된 사람이, 간암에 걸리는 것이나

뇌물 받다가 법망에 걸려서 징역가는 것, 이런 종류의 심판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벌을 받거나 심판을 당하는 경우 같은 거 말이에요.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게 하나님의 심판인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는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요.

이게 죄책감에서 오는 심리적인 현상을 신앙과 연결지어서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

정말 정확한 영적인식에 근거해서 내린 신앙의 판단인지,

그런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거부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했을 때 실제로 그 사람을 벌하는지요?

글을 쓰면서 갑자기 생긴 의문이라 난데없이 질문을 올렸습니다.

profile

[레벨:95]정용섭

November 19, 2009
*.120.170.243

화들짝 님,

노숙자들 앞에 가서

지금 당장 얼어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성서가 말하는 생존에 대한 감사는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가르침을

일반적인 윤리의 지침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의 표현이에요.

그걸 바탕에 놓고 이 사회가 정의로운 질서를 회복하도록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가야겠지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질문했지요?

하나님이 악인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징벌을 내리는 일은 없습니다.

거꾸로 징벌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악인도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의로운 자의 고난이 그치지 않고,

악한 자가 잘되는 일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일에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기준과 전혀 다른 겁니다.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을 포함합니다.

궁극적인 심판은 종말에 가서 드러납니다.

그것이 최후의 심판이겠지요.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하는 일은 그때로 유보되었습니다.

역사 안에서의 심판은 '은폐'의 방식으로 일어나기에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의롭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profile

[레벨:16]아우

November 20, 2009
*.223.87.83

무슨 뜻인지 잘 알아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대글을 읽다보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에는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 누가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절대로 심판을 행하지 않는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지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에서도 보면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그 자식을 징계한다는 말씀도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보면 아나니아가 돈 문제로 졸지에 죽임을 당하던데

그것은 심판에 해당되는 게 아닌지요?

이건 누가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처럼 보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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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20, 2009
*.120.170.243

화들짝 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에 대한 실증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헌금으로 바치려고 땅을 팔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돈에 욕심이 나서

일부를 몰래 꿍쳐 두었다고 해서

즉사시키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사도행전 기자는 왜 그 이야기를 거기에 끌여들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초기 기독교 안에 그런 구조로 형성되었는지도 살펴봐야지요.

제가 자주 말하는 거지만

성서 언어는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인 언어랍니다.

詩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성서의 몇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건 약간 위험하답니다.

사이비 이단들이 흔히 하는 행동들이에요.

어떻게 하면 성서의 구절구절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전체의 틀에서 해석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성서해석학의 문제지요.

어쨌든지 화들짝 님의 계속되는 질문은 소중합니다.

좋은 주말1

profile

[레벨:7]流水不爭先

November 23, 2009
*.173.40.129

안녕하세요

 

설교 동영상이 지난주회분부터 안되어서

(과거분은 잘되고 있습니다)

도움 요청합니다.

도와주세요

profile

[레벨:95]정용섭

November 23, 2009
*.120.170.243

아, 예,

그건 다비아가 동영상 파일을 저장하고 사용하는

회사의 서버 용량이 꽉 찼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해결했습니다.

작년 6월까지의 설교 동영상을 모두 삭제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지난 두주일을 포함해서 오늘 거까지

동영상이 잘 돌아갈 겁니다.

학실히 도와 드렸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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