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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예수의 삶은 성공적이었을까? 이에 대한 실증적 답변을 듣기는 쉽지 않다. 예수의 어록을 담았다는 Q를 통해서도 인간 예수의 삶 전체를 재구성해낼 수는 없다. 그의 인간적인 소소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유감스럽지만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무슨 색깔을 좋아했는지,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부모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청소년기는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책을 즐겨 읽었는지, 우리는 그러한 것을 거의 알 수 없다. 물론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을 목격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예수라는 인간의 삶 그 자체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과연 십자가의 삶이 그의 삶의 목표였는지는 그 인간 예수의 삶을 통해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부활의 사신과 함께 신앙되는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는 분명하다(Ingolf U. Dalferth, Malum, p. 470-486).

우리는 교리적으로, 그리고 사도바울이 증언하는대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 죽음과 생명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감춰져있고 우리의 관심도 아니었다. 예수의 삶을 닮기를 원하지만 그 삶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활의 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절규 속에서 예수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성취나 만족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 인간 예수의 삶 "내"에서 그의 삶은 성공적이기는 커녕 극단적인 실패였을 뿐이다.

왜 이 사실이 오늘에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때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정의나 사랑을 논하고 전한다. 그리고 마치 마침내 정의가 승리할 것처럼, 끝내 사랑만이 남을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에 믿음과 희망을 건다. 아마도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추리소설의 끝에서 책 전체의 고리들을 꿰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이 보상된다고 선포되기도 한다. 분명 하늘의 상급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소망하기에는 우리 삶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다. 도대체 위선과 무엇이 다른가. 더 나아가, 제아무리 치열하게 정의와 사랑을 위해 산다고 하여도, 남들이 쉽게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시비를 바로 가려 정도를 걷는다 하여도,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며 봉사하고 산다고 하여도, "나"의 인생 마지막은 "부엉이 바위" 위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업습한다.

희망이란 단순히 저 먼 미래의 성취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런 두려움을 나는 넘어설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그 어떤 죄 없는 사람도 십자가의 절규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가 부활을 몰라 절규했는가? 단순히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소리를 질렀는가? 융엘의 말대로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절망과 분노, 좌절과 탄식이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완전한 절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순수한 희망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나 환영일 뿐이다. 그래서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구는 것이다. 일군다는 것은 미래가 아닌, 오히려 과거에 대한 바라봄이다. 희망이 미래로부터 올 수 있는 것이라면, 오늘은 어제의 희망이었다. 단순히 시간이 흘러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고 희망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오늘이 희망이 되어줄 때, 어제를 살았던 이들의 희망이 참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

1주일 전 부엉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그"(der Mensch)가 아니라 "어떤 사람"(ein Mensch)이 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어떤 이들의 죽음이어야 한다. 이름 없는 이들의 죽음. 민주주의의 기대가 상실된 이들의 죽음, 보호받지 못한 인권으로 좌절된 이들의 죽음, 첫째가 되지 못한 이들의 죽음, 가난한 자들,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의 죽음. 그 모두가 이름 없는 이들. 우리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호흡하게 해줄 수 없다. 물론 예수와 같이 부활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 예수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을 보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저 무명씨들의 죽음 속에서 무언가를 보아야만 한다. 바로 그 순간에만, 나는 나를 내내 둘러싼, 정의롭게 살았음에도 정의 없이 죽으며, 사랑하며 살았음에도 사랑 없이 죽는 오늘날의 무서운 현실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희망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며, 희망이 되어준 자들에게만 희망이다.

숲속으로 난 갈라진 두 길이 있었지.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것을 바꾸어 놓았네.


-로버트 프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