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헤겔철학의 체계
 
이 장에서 헤겔 철학의 모든 체계를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헤겔의 중요한 기본 사상과 변증법적 처리에 대해서 전형적인 예를 통해서 살펴보고, 또한 그의 사상이 신학에 미치는 중요성과 동시에 신학자의 입장에서 제기된 그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다루게될 헤겔의 작품으로는 우선 1807년의 <정신 현상학>이며, 다음으로는 1812년의 형이상학적 <논리학>(제2쇄 1833년), 끝으로 헤겔 사상 중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실재철학(Realphilosophie)으로서 한편으로는 자연철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 철학이다. 이것은 곧 종교철학과 역사철학을 가리킨다. 헤겔의 <법철학 개요>(1821)는 이와 달리 참고적인 의미에서만 다루어질 것이다.
<철학백과전서>(Encyc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 1817, 2.Ausg. 1830)에 담긴 그의 사상적 대계(大系)도 역시 여기서 상세하게 다루어질 수는 없다. 이 책의 제1부에는 논리학이 간결한 형식으로 제시되었고, 그 다음에 제2부로 자연철학이, 제3부로 정신철학이 제시되었다. 제3부에서는 주관적 정신을 다루고 있는 한 장(章)이 인간론을 해명하고 있으며, 또한 부분적으로만 “정신 현상학”의 구상과 연관된 심리학과 의식론을 해명하고 있다. 객관적 정신을 다룬 장은 법철학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기도 했는데, 이것은 1821년에 다시 이러한 주제를 다룰 때 훨씬 자명하게 표명되었다. 반면에 “절대정신”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은 예술, 종교, 철학을 간단한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장의 해명은 한편으로는 “정신 현상학”의 마지막 장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주제에 대한 마지막 강의와, 특히 종교철학 강의와 비교될 만하다. <백과전서>가 말하려는 바는 논리학이 헤겔의 전체 사상적 구상의 기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철학적 체계의 전체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의 각 분과는 논리적 기본 사상의 적용으로만 이해되면 안 된다. 논리학과 실재철학에 대한 질문은 헤겔 철학을 해석할 때 가장 첨예하게 논란이 된 질문이다. 헤겔 논리학을 다룰 때는 이런 주제에 대한 입장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 이외에 이제 논리학에 등장하는 체계의 기본을 논하기에 앞서서 종교철학과 역사철학이 다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고양되어 자연 조건을 뛰어넘는, 특히 감각경험의 소여성을 뛰어넘는 기초 상(像)이 이런 분과에서, 즉 <정신 현상학>에서 지각되기 때문이다. 논리학 논쟁은 이미 비판적 반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 반성은 신학이 헤겔 철학을 수용하도록 하며, 또한 헤겔 사상이 신학적 전망을 위해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그 마지막 절로 연결된다.
 
1. 개요와 첫 시도
 
앞선 장에서 이미 헤겔이 칸트의 철학과 연관되었다는 점이, 특히 예나 시절의 첫 작품에 이르기까지 칸트의 실천 철학과 연관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헤겔은 1800년의 체계적 단편에서 이르기를, 이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일 년전과 똑같은 일인데, 종교는 인간이 “유한한 생명으로부터 무한한 생명으로” 고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Nohl 347). 즉 다양함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하는 “전체 정신”(Geist des Ganzen)으로 고양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결합과 비결합이 결합하는 것”(Verbindung der Verbindung und der Nichtverbindung)이다. 이런 문장은 대립의 순간을 “전체”라는 사상에서 포착하는 것인데, 인간은 종교 안에서 이 전체로 고양된다. 헤겔은 1800년에는 “무한한 생명”을 종교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곧 1801년 철학적 절대 직관이라는 사상과 통한다. 이 사상은 쉘링과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며, 적대 직관은 “제한의 총체성”과 달리 전체성의 총체성을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종교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의 전체는 이로써 철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이 된다. 헤겔에 따르면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 직관과 반대로 철학적 직관의 객관성은 반성을 통해서 제기된 대립이 유한의 영역에서 지양되는 것으로 증명어야 한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이 대립은 직관을 통해서 자기 내부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단일성이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헤겔은 “대립적인 것의 종합”인 직관을 “사변”이라고 일컬었다. 사변은 이 사변 안에서 “모든 대립이 지양되는” 한에서 “직관”이다. 철학적 지식은 이 양자를, 즉 직관과 반성을 포괄한다. 이렇게 규정된 철학적 지식을 가리켜 헤겔은 1802/02년 이후로 “개념”이라고 일컬었다. 대립과 제한은 반성을 통해서 제한된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절대와 관련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를 통해서 절대는 “일종의 객관적 총체성이 된다. 즉 절대가 지식 전체가 되며, 인식의 체제”가 된다. 헤겔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이상과 실재의 대립을 고착시킨 유한자로부터 비약해서 절대를 얻지 않았다는 점에서 쉘링과 달랐다. 즉 “돌연히 절대적인 지식을 직접적으로 얻게 되는 무아지경”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이러한 대립으로서의 모든 유한 안에서, 즉 “유한성”을 통해서 이미 더불어 정립된 절대는 이러한 유한을 통해서 규정되었다. 여기서 절대는 자신의 대립 안에서 결합하는 단일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자기 내부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반대에 직면하는 무한의 영역이 총체성을 향해서 갖추게 되는 “체제”다. 헤겔은 이런 방식으로 절대(개념)을 각기 유한자 안에서 제시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부분의 내적인 반대를 반성하는 과정이 끝나는 자리에 등장한 것은 대립을 완전하게 하는 단일성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념은 그때마다 “다른 존재”로부터 발전되어 나온다. 즉 “스스로 재생산되는 상등성이나 자신에게 있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반성은 그러한 근원적인 동일성이나, 직접적인 동일성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상등성이나 반성이야말로 참(Wahre)이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의 길은 간단없이 유한을 뛰어넘어 무한과 절대로 고양하는 형식이다. 이것은 우선 “정신 현상학”(1807)에서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이 작품은 헤겔이 아직 예나에 머물러 있을 때 집필되었다. 이후에 그는 프로이쎈이 8년에 걸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함락된 다음에 뉜베르크로 갔으며, 하이델베르크에서 아주 짧은 기간 강의(1916/17)를 마친 다음에 1817년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으로 갔다.
원래의 표제지(表題紙)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의식 경험의 학”이라고 일컬어져야만 한다. 사실상 이 작품에는 대상에 대한 경험이 다루어졌는데, 이 경험은 자기 스스로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의식의 실제적인 내용이 제 각각마다 참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과 늘 동일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 의식은 자기의식으로서 자기의 진리 요청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자신과 조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의도된 진리와 실제적인 내용의 단일성에 대한 이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시도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자명성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이 새로운 단계에는 의식의 진리 지향성과 새로운 형태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내용 사이의 대립이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의식의 경험이 하나의 길을 찾게 된다. 이 의식의 결과는 결국 철학적으로 형성된 의식이거나, 혹은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절대 지식”이다. 이런 표현은 흔히 오해되었다. 그는 개체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학적 의식의 형식을 자신에게서 완성되는 반성적 의식의 형식으로 특징화 하려는 것 뿐이었다. 이런 의식의 진리 지향은 자기의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정신 현상학은 “자연적 의식”을 진리로 간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감각적 경험의 대상적 세계를 지향하는 일상 의식이 바로 자연적 의식에 해당된다. 참된 현실성(Wirklichkeit)은 그것을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 안에서 발견한다. 즉 “자신을 반대하는 대립적 사물에 대해서, 또한 그 현실성을 반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 이것은 이러한 자연적 의식의 거점에 대한 특징이다. 자연적 의식의 기초는 그 대상에 대한 “감각적 확실성”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헤겔은 감각 인상을 모든 경험의 기초로 생각하는 경험주의에서 이러한 의식 형식을 철학적으로 적응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헤겔은 경험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이런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의식의 경험” 자체를 표현해보고자 했다. 헤겔은 결코 사상을 추상적으로 규정하는 철학으로 우리의 생각을 감각적 경험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이럼으로써 그는 감각적 경험과 경험주의 철학의 의미를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헤겔은 “자연적” 의식에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반대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기를 뛰어넘어 배우며, 진리를 다시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런 지적에 대한 착상은 의식이 늘 진리를 요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형성된다. 진리가 고유한 내용과 이루는 조화나 의식이 그 대상과 이루는 조화에 대한 개념은 진리와 상관된다. 이로써 의식은 자신의 내용이나 (대상)이 진리이어야 할 경우에 그 의식과 그 내용이 조화되고 있는지 아닌지 질문해야만 한다. 이 의식의 실제적인 내용은 그것 자체가 “즉자적이거나 참된 것으로 설명되는 것”(71)에서 측정된다. 이를 통해서 의식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그 내용의 진리에 대한 생각을 뛰어넘어 추구된다. 이 경우에 진리에 대한 요청은 절대가 유한한 의식 안에 현재하는 것으로 증명되는데, 이것은 내용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고양됨으로써 가능하다. 의식의 진리성에 대한 기본적 질문 아래서 그 내용을 반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의식의 진리성을 각각 일시적으로 규정하는 등급이 발생한다. 또한 이 의식을 진리로 간주하는 것과 그 의식의 실제적 내용 사이의 모순을 대립적인 요인을 종합함으로써 지양해보려는 시도가 등급화 된다. 즉 드러난 대립을 자신이 제거함으로 의식의 진리를 표현하는 이러한 모든 종합은 다시금 진리에 대한 의식의 생각으로 증명된다. 이 진리는 여전히 반복해서, 비록 새로운 단계이긴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실제적인 내용과 대립해 있는 것이다.
이 첫 단계에서 피력되는 바는 감각적 확실성의 참이 그 확실성의 생각대로 지금, 여기(Hier und Jetzt)에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헤겔이 생각하고 있는 “여기”와 “지금”은 매 순간마다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단지 “여기”와 “지금”인 한에서 의식의 실제적인 내용은 능가될 수 있는 구체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바로 여기와 지금이다. 따라서 의식은 실제로 보편적인 것과(“여기”와 “지금”) 소여된 것들과의 연관이다. 즉 보편적인 규정을 감각적 소여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지각”이라는 이름은 이런 복합적인 사태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89). 사물에 대한, 그런 속성과 상태에 대한 지각은 감각적 의식의 참된 형태다. 이제 지각은 참을 사물에서 획득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반면에 지각 의식에 대한 반성은 이 사물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으로 조건화 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지각 의식은 따라서 자기 진리를 직접 사물에서 획득하지 않고, 칸트가 말한 바처럼 사유와 오성에서 획득한다.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보편적 형식들은 우리의 오성 행위 덕분이다.
오성은 “물자체” 안에서 자신의 진리성을 획득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물들은 오성에 의해서 파악된 현상 뒤에 숨어 있는 것이며, 또한 오성 행위를 통해서 단지 주관적인 조건 방식으로만 (또한 현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와 구별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지각 의식은 그 토대를 (피히테가 말하듯이) 자의식에 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물을 우리와 구별한다는 사실이 이런 자의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의식도 자기 자신에게 자유롭고 비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진리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획득하는 게 아니라 타자에게서 획득한다. 즉 주(主)는 종 덕분에 자유를 획득하는데, 이는 역으로 종이 자기의 본질을 주와의 관계를 통해서 획득하는 것과 같다. 다만 다른 것은 주가 자유의 조건에 대해서 종을 통해서 오해한다는 사실을 종이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자의식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거슬러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제한된다. 자의식이 대자(對自)존재에서 갖는 자유 감정은 역사적으로 볼 때 스토아 철학에서 그 형태를 획득한 대로 그것과 똑같은 자유 의식이며, 그런 면에서 그 감정은 옳다. 이러한 보편적인 자유 의식에서 서로 다른 개인들은 평등하다. 그들의 평등성은 통치와 예속의 차이에 대항해서 소극적으로 규정되었다(153). 그러나 이런 보편적이고 평등한 자유는 단지 추상적일 뿐이다. 이 자유는 단지 사유의 요소에서만 발생하며, 사회적 리얼리티에서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 따라서 이 자유는 회의주의의 희생물이 된다. 이 회의주의는 스토아 철학의 자의식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사실적인 우연성, 의존성, 가변성에 눈독을 들이는데, 이 스토아 철학의 자의식은 불변적이며 (확고하게) 자유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회의론적 비판의 결과는 자의식의 배가(倍加)다. 이 자의식은 자신의 진리를, 즉 자신의 자유를 모든 것과 동일한 자유라고, 자신의 사실적인 상태와 구별된 것이라고, 요컨데 사실적인 실존의 피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운한 의식이다. 이 의식은 자기의 진리와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적인) 피안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불운하다. 이것은 추상적 피안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구체적인 역사적 세계의 이성과 정신으로서 자의식의 진리를 가리킨다. 물론 인간의 역사적 세계는 de facto(사실상) 개인적인 관심과 공동의 관심으로 찢겨있다. 따라서 이제는 세계의 진리는 절대를 인식하는 영역에서만, 즉 종교, 예술, 철학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그러나 절대는 더 이상 불운한 의식의 단계에서 단순한 피안으로 생각되는 게 아니라 차안을 관철해내는, 즉 차안에서 형태를 획득하는 진리로 생각된다. 즉 이 절대는 그리스인들의 예술 종교에서 표현되며, 다음으로는 “계시” 종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표현된다(521ff.). 물론 계시 종교의 의식도 그 진리성을 자의식과 상대하고 있는 타자에서 획득된다고 믿는다. “절대의 실제적인 자의식은 의식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의식의 형식과 내용은 그 내용의 표상에서 자신과 구별됨으로써 산산이 갈라져버렸다. “절대 정신은 표상의 내용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런 단순 형식을 지양하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의식은 절대정신을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이런 내용 안에서 자기 외부에 있는 타자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549). 계시 종교의 철학적 해석에서 이렇게 의식이 자기 자신과 일치될 수 있다. 자신의 진리로 여기는 것과 실제적인(de facto)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대립은 철학의 “절대 지식” 안에서 지양되었다.
정신 현상학은 의식이 어떻게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자신을 뛰어넘는 진리 의식에 도달했는지를 묘사한다. 반성 운동의 매 단계 마다 의식이 지신의 진리로 여기는 것을 실제로 그 내용인 것과 비교함으로써 말이다. 이 양 측의 연결은 결과적으로 의식의 자기 경험에 매 경우마다 새로운 단계를 일으킨다. 따라서 감각적 소여 안에 자신의 진리가 담겨있다고 여기는 대상적인 의식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절대 진리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식에 이르기까지 고양된다. 이 경우에 이런 고양의 길은 동시에 총체성 의식을 경험하는 “조직”(Organisation)이기도 하다. 즉 전체 길의 결과로서만이, 그리고 그 조직이 의식 경험의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에서 종교와 철학은 절대 진리를 의식할 수 있다.
 
 
2. 실재 철학과 논리학
 
정신 현상학에서 의식의 자기 경험에 이르는 길이라고 묘사된 바로 이 의식 운동은, 즉 감각적 소여를 뛰어넘어 절대를 향해서, 혹은 (헤겔이 말했듯이) 참된 보편을 향해서 고양하는 운동은 헤겔의 종교 철학 강의에서 종교가 자신의 역사 안에서 발전되어 가는 길이라고 묘사되었다. 여기서 매 단계적 발전 안에서 종교 의식은 이미 절대 의식이다. 이것은 분명히 종교 의식의 특수한 모습이다. 종교는 이를 통해서 다른 의식 형식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는 종교 의식이 우선적으로 자연적 사물의 직관 속으로 빠져들었으며, 그것을 신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헤겔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 종교의 단계를 가리킨다. 헤겔은 종교가 계속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이루어가는 유형의 단계를 종교사의 길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일련의 단계들은 인간이 직접적인 소여를 뛰어넘어, 또한 자연적 소여성을 뛰어넘어 감각적 직관에 대한 정신의 현상학적 과정과 유비적으로 절대정신의 단계로 고양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종교사에서 배우는 것은 절대, 즉 신적인 것을 자연과 구별하고, 또한 가시적으로 주어진 모든 대상적인 것들로부터 구별하는 의식이다. 또한 이런 대상적인 것들을 타자의 표명이며, 비소여의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배운다. 자연적인 소여와 달리 신성은 “정신적인 주체성의 종교” 안에서, 즉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로마인들의 경우 처럼, 인간적 주체성과의 유비 관계에서 자연을 초월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성을 이해하는 길이 그 신성의 절대성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나타난, 또한 개체적인 유한자로 타나난 유한한 현상이 무한자, 혹은 절대자에게 속하느냐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대상은 유한자에게 지양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무한성에서 계시되었다.
절대의 계시가 단지 피안으로서만이 아니라 차안으로서 자신과 일치해서 나타나는 유한한 모습이 바로 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알려진 본질로서의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이해함으로써 이런 유한과 모든 유한을 뛰어넘어 절대를 향해서 고양되는 것과 연관된다. 이 유한한 모습이 자신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고양되는 유한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피안을 포기함으로서 정말 무한자가 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헤겔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하나님의 인간되심에서 보았으며, 그런 결과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단일성에서, 특히 예수의 인간됨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완전히 받아들여진 인간성에서 보았다. 이것은 헤겔의 경우에 사죄론의 내용이며, 따라서 인간되심과 사죄는 바로 그런 기보 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종교적 예배의 의미가 충분히 채워진 것이다. 이 의미는 인간을 신성과 연결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이제 헤겔은, 거의 쉴라이에르마허와 흡사하게,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일컬었다. 특 종교 일반의 본질이 그 안에서 완성된 바로 그런 종교라고 일컬었다. 기독교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인간되심과 사죄가 실행됨으로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되었기 때문에 절대 종교다. 즉 기독교에서 이해된 하나님은 더 이상 추상적인 무한성에 갖혀서 유한자와 대립하는 게 아니다. 참된 무한자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내줌으로써 유한적인 것과의 차이를 자기 내부에서 지양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의존성을 극복하고 고양된다는 사상은 당연히 헤겔의 역사철학을 규정한다. 헤겔은 인간의 자연 상태를 자연법적 전통이나 루소과 반대로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부자유한 상태로 파악했다.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자유 안에서 자기 자신과 함께 존재하게 되는데, 이 자유는 우선적으로 습득되어야만 한다. 헤겔은 이런 순수한 자유를 개인적인 자유 의지와 첨예하게 구분했다. 개인들은 참된 자유를 보편 속에 있는 통찰을 통해서 획득한다. 이러한 자유의 토대는 종교 안에 있으며, 그 구체적인 형태는 국가 안에 있는데, 헤겔에 따르면 이 국가는 종교에 기인한다. “이렇듯 국가는 자세하게 규정된 세계 역사의 대상이다. 이 안에서 자유는 그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객관성을 향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법이 자신의 진리성 안에서 정신과 의지의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법을 따르는 의지만이 자유하다. 즉 의지는 자기에게 이끌리며, 자기 자신과 함께 하며, 그래서 자유롭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이성의 본질이라고 규정한 자유는 매 국가 형태 안에서 실현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가 타당하다. “가장 위대한 자유가 있는 국가야말로 최선의 국가다.” 그렇다면 자유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특수와 보편을 일치시키는 이성의 기준에 따라서 철학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가 바로 그것인데, 헤겔에 따르면 이것은 종교 안에서 진보해나가는 역사의 참된 과정 속에 있다. 따라서 헤겔에 따르면 세계사의 대상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이런 역사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인간 의식 안에서 자신을 해명하는” 세계정신으로서 “절대정신이라 할 신적인 정신”에 상응한다. 그런데 이 신적인 정신은 세계 정신과는 구별된다. 하나님은 이 절대 정신을 통해서 인간과 함께 하시며, “개개인의 의식 안에 나타나신다.” 세계정신은 다시금 개개인과 연결된 보편으로서 공동의 정신과 민족의 정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헤겔은 이를 가리켜 민족정신(Volksgeist)이라고 불렀다. “민족정신은 특별한 형태로 나타난 보편 정신이다. 민족정신은 즉자적으로 이런 형태를 초월하지만, 이 민족정신이 존재하는 한에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헤겔의 경우에 종교사는 종교적 유형의 순차에 따라서 제시되었는데, 이처럼 세계사도 역시 매 경우마다 어떤 분명한 민족이 신기원을 이루는 국면의 순차에 따라서 제시되었다. 이런 일은 이런 민족이 하강한 다음에 다른 민족으로 통해서 해체됨으로써 일어나는데, 이런 하강은 역사를 통한 정신의 길에 새로운 원리를 구현한다. 이런 길을 목표는 정신이 인간의 의식에서 자기를 이해함으로써, 또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안에 있는 자유가 실현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의미에서 헤겔이 보는 세계사의 과정은 자유 의식의 진보다. 이런 과정은 종교사의 제시에서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현존에 담긴 자연 조건을 뛰어넘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성육신(Inkarnation)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통일 되어서 자신의 극치를 이룰 때까지 자연으로부터 구별된 절대와 인간이 연결되는 것과 아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이 인간과 절대의 연결은 물론 단계적으로 종교사에 현실화 되어 있다.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일치됨으로써 모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헤겔의 경우에 세계사와 종교사의 과정은 이처럼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그 유명한 세계사 구분이 이해된다. 그 세계사 구분은 다음과 같다. 첫 단계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하다. 즉 왕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들의 경우처럼) 몇몇 사람만이 자유롭다. 즉 노예가 아닌 자유인들이다. 역사의 세 번째 단계에는 기독교로 인해서 시작되었는데, 하나님이 인간으로 성육심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워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한 인간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즉 인간성 전체를 받아들였고, 그 본성과 연결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인간의 자유는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한 자리매김 되었다. 이 원리는 모든 자유의 형태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필요가 있다. 헤겔은 종교개혁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루터의 학설에서 이 일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통찰이 근대 입헌국에서는 완전히 실현되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헤겔은 정신 현상학에서, 종교사와 세계사를 설명하면서 의식이 감각저긍로 규정된 직접성을 뛰어넘어 절대와의 단일성으로 고양되는 것을 썼다. 이런 절대와의 단일성은 종교와 예술과 철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헤겔은 직접적인 소여를 정신으로 고양되는 출발점으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늘 자연적 소여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감각적 확실성의 경우처럼, 종교사에 대한 설명에 나오는 자연종교의 경우처럼, 그리고 헤겔의 세계사 철학에 나오는 동양 제국의 경우에서 처럼 말이다. 현상학이 말하는 자연적 소여는 동시에 추상적 보편이다. 즉 감각적 확실성의 여기와 지금은 이러한 추상적 보편으로 증명된다. 그의 추상적 보편성에 나오는 각각의 주제는 다른 작품에서도 반성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즉 법척학(1821년)에서도 개인들의 권리를 그것 사이에서 출현하는 구체적인 차이를 간파함으로써 형성해가는 “추상적인” 법이 나온다. 논리학(1812년)에는 절대 일자의 직접적인,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서의 존재가 나온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는 이 안에서 사라진다. 이 두 경우에 반성의 시작은 직접적으로 있을법 하다기 보다는 그 무언가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 즉 가장 보편적 개념인 존재는 반성적으로 공허하다는 점이, 또한 진리적으로 내용이 없다는 점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보편적 의지를 표현하는 추상적 법은 법의 단순한 가상이라는 점이 증명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다시금 불의와 결탁해버리는 특별한 의지의 시각에서 발생한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철학도 역시 종교사를 설명하기도 전에 전혀 구체적인 종교가 아닌 종교의 추상적 개념으로 시작한다. 종교철학은 절대 종교로 끝난다. 이 절대 종교 안에서는 종교의 본질인 그것이 바로 종교의 내용이 된다. 역사철학에서도 역시 구체적인 역사과정을 제시하는 것보다 “역사 안에 있는 이성”에 대한 보편적 논의가 앞서 있다. 이 구체적인 역사과정의 제시는 기독교 현상과 세계사적 작용의 묘사에서 정점에 달하고 있는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법으로 시작된 법철학의 마지막 부분에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법의 보편적 형태가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도덕적인 국가를 말하는데, 이 안에서 개인들과 전체가 화해를 이룬다.
헤겔의 논리학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단지 그 무조건성과 절대성에서만 실제적인 것이다. 즉 무조건적인 것은 이미 칸트의 경우에 이성 인식의 특수한 대상에 해당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현상학이 끝으로 다룬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은, 즉 특수한 철학적 지식은 “논리학”의 주제다. 헤겔의 논리학은 판단과 추리의 형식을 연구하는 형식 논리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이다. 헤겔이 자신의 논리학 세 번째 책에서 다룬 형식논리학의 주제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형이상학적 전망으로 옮겨졌다.
논리학이 의식에서 절대의 직접적인 형태라 할 “존재” 문제로 시작되었다면 그 마지막 부분에서는 참된 절대라 할 “개념”이 결과된 셈이다. 존재가 반성의 빛에서 직접 그 반대로, 즉 무(無)로 증명되었다고 한다면 모든 대립의 개념이 자기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즉 개념은 자신의 반대(구체적인 특수)와 자기 자신(보편 사상)이 일치되는 것이며, 형식과 내용의 일치이며, 본질과 현상의 일치이다. 이 경우에 참된 개념은 홀로 사실(Sache)을 실제로 파악하는,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그것이다. 즉 이것은 오직 하나의 주관적인 표상이지, 실제로 사실의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사실의 객관성에서 현실화 된 개념을 가리켜 헤겔은 “관념”(Idee)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관념은 현실화 된 개념으로서 절대의 최고 형태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또는 그의 다른 저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개념의 개념, 혹은 관념의 개념은 단계의 연속에서 말미에 속한다. 각기의 단계에는 앞의 단계에서 등장했던 대립들의 종합이 다루어진다. 그래서 그 대립 자체 안에 이미 함축적으로 주어져 있는 단일성은 명시적으로 주제화 된다. 존재가 자세하게 고찰하는 보편에서 無로 증명되었다면 이 두 규정, 즉 “존재”와 “무”의 연관은 우선적으로 “생성”(Werden)으로 규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성이 무로부터 존재로, 혹은 역으로 존재로부터 무로 전이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와 무의 일치 형식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감싸는 덮개일 뿐이다. 이 일치는 “현존”이라는 확실한 자리를 갖는다. 이 안에서 존재와 무는 연결된다. 현존하는 것이, 즉 그 무엇이 다른 것 “아닌” 한에서 말이다. 그러나 종합의 각 측면에서 다시금 새로운 반대가 반성적으로 나타나면, 현존의 단계에서는 유한성 때문에, 또한 무한과의 그 대립 때문에 새로운 반대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대립은 다시 대자존재(Fürsichsein) 개념으로 지양된다. 이런 일이 계속되어, 이제 대립은 매 경우마다 개념의 단계에 이를 때 까지 보다 높은 종합의 단계를 요구한다. 헤겔에 의하면 이 개념은 현실화 된 개념(관념)인데, 이것은 앞서 등장했던 모든 반대와 종합을 자기 내부로 지양한다. 자기 자신의 “순간”으로 말이다. 이처럼 이전의 단계는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이나, 혹은 (논리학이 말하는) 사유의 일시적인 형식이 된다. 개념은 이미 “즉자적으로” 이런 형식에 포함되지만, 아직은 이런 형식으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학이 말하고 있는 이런 단계에 중요한 문제는 무조건적인 것과 절대다. 헤겔의 생각에 따르면 이것은 개념의 개념과 더불어서 결정적으로 이런 형식으로 파악된다.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은 특색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볼 수 있는 사상적 출발점의 매 단계는 늘 다시 분쇄되는 개념의 선취라고, 개념도 역시 피상적으로 이런 사태에 속하는 게 아닌 자기 사실의 개념으로서 선취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선취는 우선 관념을 통해서 상환되는데, 현실화된 개념으로서, 즉 주관과 객관의 일치로서 분명하게 정립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관념은 여전히 이런 현실화에 필요한 논리적 형식이다. 또한 논리학의 끝부분에서는 관념에서 자연으로 전이가 이루어졌는데, 이 전이의 의미가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 이것은 곧 관념이 현실서의 규정적 토대로 진지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관념에서 토대가 잡힌 것으로 제시된 한 전이를 말한다.
헤겔의 사상적 발전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가장 난해하고 첨예한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절대에 적당한 형태로서의) 개념은 그 개념이 파악되는 과정의 단계에서 “즉자적으로”(an sich)만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절대의 일시적인 형태가 등장하고 계승하고 해체되는 일이 반성적 철학의 행위가 아니라 개념의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헤겔의 철학백과전서에서 이르기를, 논리학은 직접 존재에서 그 출발한다고 했다. “사변적 관념으로부터 논리학의 자기규정이 발생한다. 이것은 절대 부정이나 개념 운동으로서 판단하며, 또한 자기 자신의 음화(陰畵)로 자리한다.” 절대관념의 판단, 즉 原-분할(Ur-teilen)은 대립적인 순간에 각기 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논리학의 전체 사상적 운동에서 늘 거듭해서 위에서 이미 언급된 주장을 부정하고, 대립적인 규정 속으로 해체시켜버리며, 또한 이런 것은 다시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 논리학의 전체 사상적 운동은 논리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절대 개념의 행위로, 혹은 바로 그러한 관념의 행위로 제시된다. 이 관념은 개념의 반대인 존재를 (“자기 자신의 음화”로서) 관념의 자기 이해를 향한 길이 전제로 삼는다. 또한 바로 이를 통해서 “절대 부정” 운동을 부각시킨다.
헤겔의 이런 주장은 참된 개념이 헤겔의 생각대로 단순히 그 무언가 주관만이 아니라 사실 자체를 개념화 한 것이며, 또한 관념으로서 사실 자체와 동일시된다는 점을 회상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사실을 이해하는 길도 역시 개념(혹은 관념)의 행위로 생각되어야지, 외면적이고 주관적인 부가물로 생각되면 안 된다. 물론 이 경우에는 개념과 사실 사이에 개재했던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인식에서 매번 마다 발생하는 경우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식행위와 인식되는 것들 사이의 차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따라서 인식 과정이 인식된 자의 자기 전개과정이 됨으로써 매번 마다의 인식이 성취되는 것일까? 이것은 사실상 헤겔의 경우에서 볼 때 절대 관념의 단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논리의 절대 관념이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에서 자기를 전개함으로써 현실화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전개 과정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부터 회고되어야할 점은 헤겔의 생각대로 논리의 현실화가 실제로 절대 관념이며, 또한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라는 것이다. 논리의 절대 관념은 존재하는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자기 내부에 자신의 진리를 단순히 논리적으로, 또한 단지 추상적으로 선취한다.
헤겔의 이러한 방식은 물론 개념의 자기 운동에 대한 명제를 비판하고 있다. 헤겔의 논리적 방식은 인간 반성의 과정이라고 증명될 수 있으며, 생산적인 상상력과 조합되어 있다. 이 경우에 반성은 사실에 의해서 견인되었으며, 사실에서 등장하는 순간을 마디마디 끊어서 정확하게 내보인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외면적으로만, 즉 사실의 외면만을 반성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반성은 분명한 주제화의 불빛에서 일어난다. 논리를 규정할 때 철학사에서 절대를 어떻게 명명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철학적 논의의 역사적 과정에서 다루어진 이러한 명명은 다른 방식에서 반성되었으며, 또한 헤겔 논리학의 반성 과정에서 발전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되며, 또한 헤겔 논리학의 반성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 진행이 그에 해당하는 규정의 사유적 내용에 피상적으로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결국 헤겔 논리학에서 발전된 반성 과정은 원칙적으로 각기 규정의 내용에 대한 여러 가능한 반성 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이 반성은 물론 사실에 의해서 견인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반성 과정은 논리학에 포함된 변증법을 향해서, 또한 대립이 그 안에서 지양되는 명제를 향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철학자의 반성이 입증하고 있는 바는 각기의 형성된 명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거나 자신을 내보이는 것과 비교해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보다 정확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립적인 순간들이 사변적 직관을 통해서 (헤겔의 논쟁 문헌이 말하는 대로) 그 은폐된 단일성 안에서 파악되며, 또한 대상의 새로운 직관과 연결된다. 이러한 새로운 직관에서 반성이 새롭게 착상된다. 이 경우에 관건은 예외 없이 반성적 철학자의 행위이지, 헤겔이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절대 개념(혹은 신적인 관념)의 행위가 아닌 것은 아니다. 반성이 뚫고 지나가는 모든 단계가 이런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절대 진리의 단순한 선취(Vorgriff)로 (그 안에서 사실의 참된 개념이 오직 “즉자적으로” 현존해 있는 선취(Antizipation)로) 증명된다면, 이것은 다시 한번 더 헤겔이 말하는 개념의 개념(Begriff des Begriffs)에 해당되는 말이다. 즉 개념은, 그것이 사실의 개념인 한에서, 오직 진리를 선취할 뿐이다. 즉 자기 자신과 자기 대상의 단일성을 선취할 뿐이다. 헤겔은 이것을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명시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관념의 논리적 형식에 해당되는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현실적인 것의 진리성을 획득하는 일이 단순히 피상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는 일이다.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사실 자체의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은 진리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작용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인식의 진행이 인간 행위를 막아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신적인 관념이 우리 안에서 순수하게 활동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가 인식할 때 작용하는 인간적 요소는, 또한 헤겔의 논리적 사유 진행에서 반성하는 철학자의 행위는 현혹될지도 모른다. 혹은 역으로 우리의 인식에서 참으로 인간적이고 유한한 것이 절대 진리의 행위와 하나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만약 이런 사태를 그리스도론적인 두 본성론의 담론에서 표현하려고 한다면 독체(獨體)론적 단락(短絡)이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헤겔이 사실적으로 예수의 길을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독체론적으로 오해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즉 헤겔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파악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범신론적이라는 의혹을 살만하다 하겠다. 이 의혹은 이상주의를 대항해서 일어난 것이며, 결국에는 헤겔을 대항해서 일어날 것이다.
 
3. 헤겔 철학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반작용
 
헤겔이 정신 현상학(1807년) 이후로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인정하면 할수록, 그리고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정신 현상학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현대 신학을 그만큼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현대신학은 계몽주의의 오성비판에 맞서서 감정의 주관성으로 퇴각했으며, “교의를 무미건조하게 만들었으며”, 그 교의의 내용을 “최소화” 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교의학적인 기본 교리가 그 큰 부분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에 헤겔은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본질적으로 정통적인 것은 특히 철학이다. 늘 타당한 명제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철학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증된다는 점이다.”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헤겔 철학에 동의한 채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인 게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경건주의적 감정신학에 머무르든지, 혹은 칸트의 후속이라할 종교의 도덕적 자리에 머물렀다. 고대 교회의 교의학을 철학적 기반에서 개념적으로 관철시키고 정당화 하는 작업은 신학을 위한 기회로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 아주 드믈기는 했지만 이런 작업을 펼친 이들 중의 한 사람은 칼 다우프(Karl Daub, 1765-1836)였는데, 그는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총자 대리를 있으면서 헤겔을 청빙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으며, 그 다음 해에 쉘링에 대한 관심을 끊고 헤겔로 돌아섰다. 1818년 헤겔이 베를린으로 떠난 다음에 다우프의 제자인 필립 콘라트 마르하이네케(Philipp Konrad Marheineke, 1780-1846)가 그 뒤를 이었다. 마르하이네케는 해가 가면서 특히 학문으로서의 기독교 교의학 기본학설(1827년)이라는 책을 통해서 신학적인 헤겔주의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1831년 헤겔이 죽자 그는 할레의 철학자 요한 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쯔(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신학 백과사전, 1831년)와 법률가인 칼 프리드리히 괴쉘(Karl Friechdrich Göschel, 1784-1861)과 함께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또한 소위 젊은 헤겔주의자들로부터의 공격에 맞서 기독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을 방어했다. 마르하이네케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시도된 헤겔의 하나님 이해를 의심의 여지 없이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젊은 헤겔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범신론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마르하이네케는 젊은 헤겔주의자보다 훨씬 더 헤겔을 잘 알고 있었다.
범신론적이라는 의혹은 초장부터 독일 이상주의를 따라다녔다. 1785년 스피노자의 학설에 대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논문이 이에 대한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레씽이 1780년 자신과의 대화에서 스스로를 스피노자주의자라고 고백했다고 말이다. 그의 이 책은 그가 의도한 바와는 반대로 스피노자주의를 위협하는 효과를 일으킨 게 아니라, 오히려 다음 십년 동안 스피노자주의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디었다. 이 스피노자 르네상스는 모제스 멘델스존과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이후로 범신론 개념과 연결되었다. 야코비는 이런 범신론을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을 통해서 분명해졌다고 보았다. 그가 볼 때 피히테의 자아철학은 이상주의에서 전도된 스피노자주였다. 그렇지만 야코비가 비판하는 주대상은 쉘링의 자연철학이었다. 그는 1807년 쉘링의 고지식한 축사로 인해서 “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라는 글을 썼으며, 또한 1811년에는 “신적인 사물에 대해서”라는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런 작업을 통해서 그는 쉘링의 자연철학에 대항해보고자 했다. 그는 이런 일련의 글에서 쉘링이 절대를 자연과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동일시는 무신론과 무신론을 내포한다는 점을 증명해보려고 했다. 인간은 무(無)냐, 아니면 한분 하나님이냐 사이에서 선택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인간의 자유는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는 하나님의 자유도, 또한 인간의 자유도 담보해내지 못한다고 한다. 쉘링은 야코비의 이 글에 대해서 1812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씨가 쓴 신적인 사물 등등에 대한 기념물, 그리고 그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속인다고 고발당한 무신론”이라는 글에서 답변했다. 쉘링은 여기서 야코비의 비방을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야코비는 이렇게 쉘링을 비방했었다. 쉘링에 의하면 자연이 모든 것이며, 자연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이다. 야코비는 자연주의와 이신론의 대안을 제시했는데, 쉘링은 이 대안에 반대해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내어놓았다. (1809년에 집필된 쉘링의 자유론에서 발전된) 자연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가정은 하나님에게 인격성을 부여한다는 전제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격성은 그 상이한 어떤 것과의 관계에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쉘링은 무신론적이라는 비난에 저항했다. 그러나 자기의 자연철학이 스피노자주의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을 제기하지 않았다.
쉘링이 신학계로부터 범신론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1809년에 쓴 자유론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스피노자주의로부터 명실상부한 분리는 “Die Weltalter"라는 논문을 쓴 1813년에 이르러서야 결론이 났다(본서 9장의 2를 참조). 특히 프리드리히 고트리프 쥐스킨트(Friedrich Gottlieb Süskind)는 튀빙겐 학파의 초자연주의적 이신론을, 이것은 철학적으로 칸트를 지향하는 것인데, 이 이신론을 방어하기 위해서 쉘링의 범신론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이런 비판은 그 뒤로 헤겔을 통한 이상주의 철학의 계속적인 발전으로 넘어갔다. 헤겔은 이런 비판을 거부하고 1827년에 발행된 철학백과전서 제2판에서 자신을 방어했다. 이 책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고트로이 톨룩(Friedrich August Gottreu)의 “Blütensammlung aus der morgenländischen Mystik"(1825년)을 참고로 해서 집필되었다. 헤겔은 “모든 것, 즉 경험적 사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도 ... 모르는, 실체성을 갖고 있는, 그리고 세계 사물의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범신론적 표상을 완전히 비철학적인, 생각 없는 관점이라고 물리쳤다. 스피노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오히려 “유한자와 세계가 ...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악도” 그렇다는 점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실체로 참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우선 “범신론”이라는 꼬리표와 연결된 비방이 잘못된 길로 빠져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실체로가 아니라 주관과 정신으로 생각한 자기 철학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보았다. 이런 전망에서 유한자의 세계는 절대 주관의 “타자”이며, 역으로 유한을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고양된다. 하나님은 세계의 제일 원인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자가 아니라 “유한자의 비존재가 절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렇게 방어함으로써,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범신론이라는 세상의 풍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각성신학 출신의 신학자들은 헤겔 철학과 논쟁을 많이 벌였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까탈스러웠던 율리우스 뮐러(Julius Müller) 마저도 헤겔은 최소한 “논리적인 범신론주의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이 세계가 논리적 필연성 때문에 신적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 아무 근거도 없은 자유 행위를 통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아주 정확하다. 즉 세계 창조에 대한 논리적 필연성은 절대적 본질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 필연성이 실제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헤겔에 대한 오해라는 말이다. 분명히 헤겔의 논증을 모르고 하는 주장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필연성은 이 부분에서, 즉 쉘링이 1813년 이후로 주장한 입장과 달리, 창조론에 포함된 세계 근원의 우연성 뒤로, 또한 이로써 모든 유한한 실재성 뒤로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태에서 “범신론”이라는 특징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년이 된 이후의 헤겔은 늘 유한한 사물의 존재를 절대 존재로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뮬러도 역시 그뿐만 아니라 야코비 이후로 일관되게 주장된 다음과 같은 비방을 범신론의 비난과 연결시켰다. 즉 이런 기반에서는 (단지 “논리적 범신론”일뿐이라는 기반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도,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도 없으며, 따라서 죄의 실재성이 거할 공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없다. 이것은 확실히 쉘링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전가시켜놓은 범신론에 대한 체계적 반론으로 인시되어야 한다. 즉 세계 초월적, 인격주의적 하나님을 주장하기 위한 표상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자유가 이런 하나님에게 상응한다.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행위로서 죄의 가능성이 이 안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율리우스 뮬러보다는 덜 까탈스러운 비판자들은 헤겔이 오직 세계에 피안적인 하나님이라는 일방적 표상만을 강조했으며, 도한 그런 표상을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즉 다 참된 무한자는 단지 유한자와 대립할 뿐만 아니라, 이런 대립을 뛰어넘어 유한자의 측면에 현재한다고 생각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범신론이라는 의혹을 확증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려고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이다.
헤겔이 초기 쉘링과 똑같이 범신론자였다는 신학적 판단은 헤겔 학파의 일부가, 소위 헤겔 좌파가 헤겔 사후에 자기들 선생의 학설을 구체적으로 범신론적이라고 해석했을 때 확증된 것처럼 간주되었다. 이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첫 번째 인물들은 “죽음과 불멸성에 대해서"(1830년)를 익명으로 출판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와, 또 한 사람 데빗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ß)였다. 슈트라우스는 1836년 “예수의 생애”라는 논문에서 범신론적 입장을 하나님과 인간이 “즉자적으로 하나”라는 명제와, 또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이런 생각이 예수라는 개인에게서 확실하게 의식되었다는 명제와 함축적인 관계가 되게 했다. 1840년에 집필한 신앙론에서 그는 절대 본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바로 이런 본질이며, 그리고 그 개념의 “실재 실존이 자연”이라고 했다. “개체적인 사유자로서 자아”는 이런 자연에 속한다고 했다. 슈트라우스는 삼위일체론을 사변철학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 전통적 이신론이 “다소간에 결정적인 범신론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저자가 이러한 견해를 나누어서 헤겔 철학의 참된 귀결로 간주했다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슈트라우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쉘링과 마찬가지로 헤겔에 따르면 “아들이 초세계적인 정신적 본질이 아니라 세계, 혹은 유한한 의식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일종의 해석이다. 한편으로는 내재적이며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의 생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창조와 화해 안에 깃든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차이가 헤겔에 의해서 분명하게 고수되었는데, 이 차이를 균일하게 하며, 이로써 헤겔의 주장을 진지한 것이 되게하는 새로운 해석이라는 말이다.
헤겔학파의 한쪽 편을 통한 범신론적 해석은 헤겔 철학이 신학에 끼친 효과적인 면에서 볼 때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그 해석이 이상주의 철학에 대한 선입관을, 또한 헤겔에게 전가되는 선입관을 확증하고 고착화시킴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기독교의 헤겔 해석은 적지 않은 취약점을 갖고 있는데, 어쨌거나 이 취약점은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취약점보다는 결코 크지는 않았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헤겔 못지 않게 하나님을 인격으로 이해하긴 했지만, 삼위일체론의 도움을 하찮게 여겼으며, 또한 하나님을 창조자로서 표상하는 것에 대해서도 헤겔의 사상보다 진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쉴라이에르마허는 신학사에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부로서 자리매김 되었지만, 헤겔은 그저 주변적 현상에 머물렀는데, 이 사실은 헤겔주의를 범신론이라고 보는 의혹이 매우 철저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결과로 인해서 결국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은 헤겔 사상과는 달리 경건주의적 주관주의에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개신교 신학사에서 헤겔이 끼친 영향이 퇴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선적으로 헤겔이 고대교회에 근거한 도그마의 갱신을, 특히 삼위일체론의 갱신을 자기 철학을 통해서 자랑했다는 사실로 돌려져야만 한다. 이는 정당한 일이었다. 쉴라이에르마허 학파와 각성신학의 후계자들도 이러한 사태의 무게를 기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에 쉴라이에르마허 학파로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적극적인 토의가 진행되었으며, 그 논의가 교의학에 자라잡게 되었다. 헤겔을 통해서 (쉘링의 선례에 따라서) 문자영감설과의 초자연적 연결에서 해방된 계시개념도 역시 이런 것과의 밀접한 연관 가운데서 논의되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논의가 “내재적” 본질 삼위일체와 구원경륜적 계시삼위일체의 공속(公屬)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 학설과 헤겔 학설 사이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 사상에 토대하고 있는 공속을 가리킨다. 이런 논의와, 또한 이런 논의 과정에서 쉴라이에르마허와 헤겔의 착상을 연결하는 주변적 상황들이 도르너의 작품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으며, 또한 임시적으로 종결된 셈이다.
19세기 마지막 10년간은 헤겔에 의해서 야기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갱신이 망각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철학에서 신칸트주의가 득세했기 때문이며, 또한 알프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의 (칸트와 연관해서) 신학적 구상과 연결되어서 헬라 형이상학을 통한 고대 교회의 교의학이 지나치게 많이 교회 안에 개입했다고 보고 이를 거절한 탓이다. 헤겔으르 제거하고 또한 그의 사상에 영향 받은 신학적 발전을 제거하기 위한 일들이 함축적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시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칼 바르트(Karl Barth)는 문화 개신교주의를 향했던 방향을 전반적으로 선회시켰다. 그리고 그가 공부했던 리츨학파와도 결별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계시신학의 갱신으로 돌아섰으며, 또한 기독론적인 신론을 위해서 삼위일체론의 기본적인 의미로 돌아섰다. 이 기독론적인 신론은 여러 면에서 19세기 사변신학과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데, 굳이 거명하자면 도르너 신학과의 일치라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이로써 기독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삼위일체론과 그 중요성에 대한 강도 높은 논의를 새롭게 전개해나갔다. 20세기 후반세기에 이러한 논의가 일어났을 때, 특히 융엘(Eberhrd Jüngel)과 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는데, 늘 거듭해서 헤겔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것이 다루어졌다. 헤겔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전반적인 신론에 대한 부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실성 전체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지난 1980년대 중후반부터 10년간 진행된 이러한 삼위일체 신학적 논의는 삼위일체론이 아주 엄밀하게 계시신학적으로 기초가 잡혀야한다고 요구했는데, 이러한 요구는 어거스트 트웨스텐(August Twesten)과 칼 임마누엘 니취(Carl Immanuel Nitzsch)에 의해서 토대가 잡힌 (물론 이러한 근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하더라도 칼 바르트에 의해서 위임된)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신학적 논의는 절대 정신이나 계시의 주관인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루되고 발전되었다는 사상에 의한 결과였다.
 
4. 헤겔 철학의 상존적 의미와 그 한계
 
독일 철학의 역사와 그것이 국제적으로 파생시킨 효과의 역사에서 볼 때 칸트 이외에는 그 어떤 철학자도 모든 논점과 그 변화무쌍한 양식에 드러난 사상적 무게를 헤겔만큼 주장하지 못했다. 더욱이 칸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철학적 의식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가야한다는 요구를 아무도 헤겔만큼 주장하지 못했다. 이런 것과 조화되는 외연은 헤겔의 사상적 체계가 전체적으로 연계되는 것이 미미하다는 점과 비교할 때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이제 언급될 것이다. 이런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최종적 타당성에 대한 요구는 늘 거듭해서 무언가를 동시에 견인하고 자극했는데, 이것은 이 체계의 전개가 뒷날 결코 비싼 값으로 매겨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수준과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헤겔적인 “학문”의 체계는 근원적으로 다시 등장해야한다고 요구함으로써 반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체계는 모든 후기 사상가들을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철학만이 아니라 신학에게도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칸트에 의해서 발생한 현대 철학의 발전 안에서 오직 헤겔만이 최종적인 주관 의식에 대한 모든 경험의 상대화를 실제로 극복했다. 더욱이 이미 쉘링은 후기의 피히테가 이미 인식하고 있었듯이, 자기 의식의 이중 형태만이 그 형태와 구별된 단일성의 근거를 전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 세계 의식 안에 있는 주관과 객관의 모든 차이도 자아와 세계(주관과 객관) 사이에 가능한 조화의 근거를 전제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 근거는 우리 자신이나 세계와 구별되는 것인데, 쉘링은 이를 절대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쉘링에게서 이런 사상이 관철됨으로써 그가 말하는 자연철학의 설명이 어느 정도로 이런 주장을 회복해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한 우리 의식의 초월적 조건과 사유의 연결이 어느 정도로나 표현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와 달리 헤겔은 이미 1802/03년에 “신앙과 지식”이라는 논문에서 칸트를 비판한 바 있는데, 이 비판은 헤겔의 논증을 뒤따라 성취하려는 이들에게 칸트의 주관주의나 현상론에 대한 확실한 극복이다. 이런 현상론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경험 가운데서 현상만을 파악할 뿐이지 사물 자체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헤겔은 이미 “신앙과 지식”에서 칸트의 입장을 반대하면서, “단지 현상만을 인식할 뿐이지 즉자적으로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오성은 현상 자체일 뿐이지 즉자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피력했다. 그리고 정신 현상학은 칸트 철학이 “유한성에 대해서만, 더욱이 그것을 참된 것으로 안다고”, 또한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한 지식을 지고자로서의 참된 것으로 안다고” 사칭한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 헤겔이 비난하고 있는 칸트 철학의 모순은 인식의 주관과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 사이에서, 또한 물(物)자체와 현상 사이에서 오성의 구별이 절대적으로 정초된다는 점에 놓여 있다. 비록 오성 자체가 행하고 있는 구별이, 또한 칸트가 말하는 의미에서 오성에 대한 단순한 현상이라고 일컬어져야만 할 구별이 이미 거기서 관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구별은 결국 오성에 대한 표상에 효과적이어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실재성과 현상의 전체적인 대립은 사라졌다. 모든 것이 현상이라면, 또한 현상이 나타나는 주관이라고 한다면 현상 표상은 자기 자신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그 표상이 단순한 현상을 구별할 수 있는 실재가 있다는 사실에서 전제되기 때문이다. 헤겔은 그 어떤 입장도 진리의 주장을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적으로 피력했다. 이 주장은 단지 주관적으로만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 현상학의 반성 과정을 움직이게 한 기초사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이러한 진리 요청이 오직 잠정적인 효과만 있으며, 진리를 단순히 예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헤겔은 의도된 진리가 철학적 개념 안에서 결정적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념은 헤겔이 승인한 바와 같이 단순한 예기로 남는다. 우리가 우리의 의식과 우리 사유의 주장 안에서 진리의 현재를 신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또한 이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유의 유한성을 자유롭게 승인하는 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그렇지만 인간 사유의 불가피한 유한성을 반성할 때 다음과 같은 헤겔의 통찰이 고수되어야만 한다. 즉 계몽주의의 오성 비판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에서 하나님이 제거됨으로써 유한한 주관으로서의 인간이 팽창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에서 절대화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짐짓 보이기 위한 겸손으로 자기의 유한성과 유한한 내용의 의식에 제한될 수는 없다. 이러한 유한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유한성 자체를, 또한 자신의 자아를 절대화 하는 일이 없이는,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일이 없이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근대적인, 세속화 된 문화세계의 무신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특별히 계몽주의 철학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칸트의 인식비판 철학이 선택한 방향 전환에 대한 비판이다. 이 비판은 그 무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시되고 있을지라도 결정적인 문제다. 근대 문화의 중심 사상에 대한, 즉 개인적인 자유사상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가장 밀접하게 이런 비판의 무게와 상관관계에 있다. 이 개인적인 자유는 헤겔이 다른 해석에서 이르기를 자기 사상의 중심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유한한 주관이 절대성에서 팽창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현실화 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참된 자유가 파손된다. 이것은 하나님 의식에 직접 기인하는 것이며, 또한 고유한 유한성을 절대화 하는 대신에 하나님과의 연결을 의식하는 데서 발생한다. 자유가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일어난다는 기독교 사상은 근대적인 자유 감정에 담겨있는 진리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근대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자유사상의 (그리고 자유 실재성의) 몰락사(史)에 대한 필연적인 비판의 기반을 제공한다. 즉 계몽주의에서 시작했고, 오늘 이 시간까지 민주주의적 자유 파토스에서 지속되고 있는 그 몰락사를 말한다. 자유사상의 몰락으로부터 이제 불가피하게 그런 몰락에 토대를 둔 헌법과 정치상황의 몰락이 뒤따른다.
참된 무한자 개념을 통해서 신론을 설명하고자 했던 헤겔의 수고는 ‘하나님과 자유’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Nyssa) 이후로 기독교 신론의 근본개념이었다. 그런데 헤겔 이전에는 이 무한자가 유한자와의 대립적인 의미에서만 생각되었다. 비록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신비적 경험에서 하나님의 무한성에 참여하지만 말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무한성 사상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가르쳤다. 즉 그는 유한자와의 차이 및 이런 대립의 극복을 포함한다. 이것은 성육신이 참된 무한성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절대와의 일치에 토대를 놓는 성육신이 바로 이런 토대로부터 헤겔이 말하는 의미로 인간 자유의 기초라는 점에서, 헤겔의 참된 무한자 개념은 그의 자유사상과 연관된다. 이 자유사상은 신약성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에, 더욱이 성육신 안에 있는 자유에 기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요한복음8:36).
참된 무한자 개념이 유한자와 대립해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유한자와 대립하는 것으로만 생각된 무한자가 여전히 유한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유한자 개념은 존재하는 것이 타자와 대립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타자와 오직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를 즉자적으로 자기 자신의 순간으로 갖고 있는 것만이 참으로 무한하다. 이런 헤겔의 사상은 바로 성육신이 하나님의 절대를 계시한다는 결과로 끝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서 자기 자신 인간의 피조적 현실성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론의 철학적 해명이나 기독교 신학이나 모두 헤겔의 이런 사상 뒤편으로 물러갈 수는 없다.
헤겔의 다른 한 중심 명제는 질적인 무한자의 참된 본성에 대한 이런 통찰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 명제는 한 양식에서 압축되어 있는데, 이 양식을 통해서 헤겔은 자기 철학을 스피노자의 그것과 구별했다. 즉 이 양식에 따르면 절대는 단지 실체일뿐만 아니라 주체이기도(nicht nur Substanz, sondern Subjekt) 하다. 스피노자는 무한한 사물의 자명성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존재의 완전한 독립성이라는 의미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무한하며 하나님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절대를 주체로 생각했다. 이 주체는 초기 피히테의 경우처럼 타자와 맞섬으로써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식의 구조에 대한 피히테의 서술과 상응하는데, 이 자기 의식은 자아의 사행(事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자아는 자신으로서의 자기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이 자신과 자아는 동일하다. 이런 모델에 따라서 헤겔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해석했다. 아버지는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 아들 안에서 자신의 타자로서 등장한다. 참된 무한자는 자기 자신의 타자이기도 하며,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신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무한자 사상은 삼위일체론의 토대를 놓았다. 자기를 포기하고, 또한 이렇게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주체로서의 절대 사상은 형태를 내용적으로 채우는데, 이 형태 안에서 헤겔은 실제적인 무한자 사상이 요구하는 바가 이행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정립하는, 또한 자신의 타자 안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시되는 주체사상은 참된 무한자 사상과 달리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문제의 여지가 있다. 이 사상은 철학적으로 고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피히테가 후기에 시도한 지식학의 자리매김에서 분명히 통찰한 바 있듯이 정립하는 자아와 정립된 자아는 상호간에 결코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 우리의 의식에 있는 우리를 우리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자아기 자아로부터 발생하는 자기 자신의 토대를 통해서 정립된 것으로 이해되어만 한다면 이런 신적인 근원은 다시금 엄밀한 의미에서 자아나 주체로 생각될 수는 없다. 헤겔은 피히테의 사상적 전개를 자신의 결론적 입장을 뛰어넘어서 더불어서 실행해 나가지 않았으며, 본질적인 의미에서 절대의 주체성을 1794년에 피히테가 언급한 자아의 자기 정립이라는 의미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절대 주체와 자신과의 동일성은 절대 주체에 의해서 야기된 자기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 중재된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에 절대 주체는 이 절대 주체에 의해서 야기된, 곧 자기 자신과 내적으로 상대해 있는 것에 제한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유한한 사물의 세계를 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 절대 주체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정신에 대한 자연의 발전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즉 인간 안에서 자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자에 대한 타자의 차이성이 유한한 사물의 세계 안에서 절대 주체와 날카롭게 맞서 있다.
자신을 자신의 타자에게 정립한다는 의미에서 절대를 주체로 파악하는 철학의 시도는 불충분 하다. 이 경우에 이 불충분성은 절대적 주체의 자기 연관이 관철되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인데, 모든 그 문제점에 책임이 있다. 이런 문제점에 직면해서 절대 개념이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관심과의 갈등에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절대가 자기 포기에 자신을 정립한다는 이러한 기초 구상은 신학적으로 문제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의 순수한 의미가 빗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영의 출현에 상관 없이 삼위일체적 위격들의 동일한 등급이,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과 영의 위격적인 독립성이 빗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헤겔은 삼위일체론이 영의 개념에서 (자기의식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에게까지 소급되는 서구 기독교의 오래된 신학적 전통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 마음에 있는 단일성과 상이성의 연결을 통해서 삼위일체설을 설명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켄터베리의 안셀름(Anselm von Canterbury) 이후로 자기 의식의 구조로부터 삼위일체적 진술이 파생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사유형식은 이미 레씽에 의해서 갱신되었고, 헤겔에 의해서 다시 한번 더 이런 사상적 발전의 최고점이 되었다. 삼위일체론의 이러한 설명 형식이 불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이런 판단은 헤겔만이 아니라 헤겔이 그 끝자리에 서 있는 전체 신학 전통에 해당된다. 더구나 헤겔이 주체로서의 절대 명제를 삼위일체론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그것이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역사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19세기 신학에서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 뒤까지 삼위일체론에 대한 관심을 갱신시켰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학을 위한 헤겔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헤겔은 자기 철학이 기독교의 중심 교의를, 그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과 그것에 토대를 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론을 다시금 신학의 핵심이 되게 했다고 의식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반면에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등한히 다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헤겔의 사변적 삼위일체론은 신학적으로 비판받을만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삼위일체론적 진술을 주체로서의 하나님 개념에서 끌어내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에서 아버지, 아들, 영이 한짝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진술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개념이나 혹은 절대 이념의 자기 해석에 대한 헤겔의 명제와 그가 부흥시킨 삼위일체론의 연결을 받아들이는 일은 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보될 수밖에 없다. 비록 삼위일체론에 대한 헤겔의 갱신이 19세기 신학에서 깊은 인상을 불러 일으켰지만 말이다. 헤겔에 대한 신학의 선입견이 상당한 부분에서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또한 헤겔을 반대하는 유신론적 하나님 표상이 불충분하지만, 실제적 무한자 개념의 시금석 앞에서 이 하나님 표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신학자들이 헤겔의 주장에 대해서 유보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이해될만 하다.
계시 개념은 헤겔이 신학에게 중요한 동기와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할 그 다음의 주제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를 계시하는 것은 정신으로서, 혹은 주체로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이런 주제는 헤겔의 사변적 삼위일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기계시는 타자에게서 자기를 인식하는 조건으로서의 포기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된 것과의 일치는 계시를 통해서 재생산된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이미 창조를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와 달리 이미 삼위일체론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와의 논의에서 성서-주석적 근거에서 나온 하나님의 자기계시 사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使信, Botschaft)과, 또한 그의 역사와 연관시켰다. 그렇지만 헤겔의 사상은 신학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역사에 나타난 아들과 아버지의 결합에 집중한 채 삼위일체론을 계시사건의 신학적 해설로 이해하도록 도왔다. 그래서 지난 20세기의 신학에서 칼 바르트는 계시론과 삼위일체론의 연관을 갱신했다. 그리고 그에 의해 닦여진 길에서 많은 논의들이 발전되었는데, 이 일은 계시 개념과 역사주제와의 연계가 바르트에 의해서 손상되어 버린 것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일정한 부분의 비판이 있었지만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는 곧 자기계시라는 사상에 대한 논의가 하나님과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계시개념은 근원적으로 쉘링에 의해서 계시를 기적적인 역사적 사실의 활동이나 성서 영감설로 이해하는 것의 대안으로 기초가 잡혔는데, 이런 계시 개념은 신학에서 헤겔에 의해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기독론적으로 연계됨으로써 관철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헤겔에게 상당히 감사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을 실제적인 무한자(das wahrhaft Unendlichen)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이것과 연관된 삼위일체론과 기독교 성육신 신앙의 갱신에 대해서 감사해야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이해하고,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을 이해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한다. 이상주의 철학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헤겔처럼 기독교와 이렇게 적극적인 관계를 가진 이가 없었다. 더욱이 후기의 쉘링은 베를린에서 신화론과 계시론에 대한 (1841년 이후로) 강의를 통해서 기독교의 헤겔 수용을 능가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그는 이때 헤겔의 신론에 대한 논리적 토대의 엄격성이나 차별성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또한 세계창조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기독교 교리 교육의 신학적 사태에 대한 헤겔의 종교철학에도 가까이 이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 선포와 그 역사 사이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 해석을 기독론적인 도그마의 진술과 함께 묶어서 생각한다. 헤겔은 분명히 이런 점에서 칸트보다는 훨씬 기독교 정신에 근접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칸트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에 대해서 헤겔보다 훨씬 삼가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사변적 신학자들의 세력이, 즉 신학자들 중에서 헤겔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이렇게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소위 헤겔의 범신론에 대한 선입견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이미 논의된 것인데, 다만 한 가지 진지한 사실적 근거만 갖고 있을 뿐이다. 즉 모든 것을 포괄하는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헤겔의 요구을 의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필연성은 창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사죄를 신적인 이념의 전개에서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동기로 제시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헤겔이 이런 필연성 자체를 자유로 생각해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런 헤겔이 제시가 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손상시켰다고 보았다. 또한 죄의 근원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피조적 실존이라는 점에서도 전체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불확실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의 입장은 정당하다. 특히 율리우스 뮬러는 두 권으로 된 “기독교 죄론”(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Sünde, 1838)으로 헤겔 비판에 앞장섰다. 헤겔 사상에 대해서 뮬러가 제기한 여러 비판이 빗나갔지만,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는, 그리고 이런 포기에서 다시금 자신과의 일치로 돌아가는 절대 이념에 대한 헤겔의 기본 구상이 피조물의 독립적인 현존에 그 어떤 자리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옳다. 기독교 신학에서 피조물의 현존은 단지 절대 이념의 발전에서 통과점만이 아니다. 단일 실체론을 성서의 창조 신앙에 어울리게 하려는 스피노자의 난점들이 헤겔에게서는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심층적으로는 극복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헤겔은 피조물의 독립적인 현존을 하나님의 결정적인, 종말적으로 최종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일들이 역사의 생기(生起)에서 발산된다는 것이 이것과 연관된다. 비록 헤겔이 개념은 개체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완전하다고 강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헤겔은 자신의 실재 철학 강의에서 놀라운 기준으로 경험적으로 개체적인 것을 자기 연구의 재료로 얻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당연히 이념의 논리적 필연성과의 관계에서 개체는 사소할지 모른다고 재차 설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절대 이념의 운동으로 발산되는 않는 개체의 유한성과 그 실존의 유한성은, 더구나 무언가를 파악하는 사유의 유한성은 反헤겔적으로만 효과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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