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인간학을 향하여

 

 

1. 헤겔 이후의 철학적 특징

 

인간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라는 호소는 특히 좌파 헤겔주의를 가리키는 일종의 암호였다. 그런데 이런 방향 전환은 이들을 뛰어넘어서 헤겔 이후의 철학적 상황에서 일반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철학적 흐름의 토대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 절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체가 세계와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토대로 간주된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기점이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한 사유로 축소된다는 사실도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런 경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키에르케고오르 같은 이들에게서 일어났는데, 이런 움직임도 역시 인간학적 착상의 권위적 토대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만 했다.

보편적인 문화의식에 자리를 잡은 인간학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이 요구의 전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훨씬 과거로 소급되고 있다. 이 책 제6장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전쟁이 끝난 다음에 17세기의 유럽에서는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이미 딜타이가 설명한 대로 법질서와 국가관을, 또한 도덕과 종교를 그때까지는 나름대로 그 사회의 토대로 작용하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근거해서 새롭게 자리매김 하려는 노력이 17세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거기서 지적되었다. 그들은 문화 체제와 사회 체제의 토대를 갈아 끼움으로써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토대를 제공하는 주제의 순환으로부터 이제 종교적 논쟁의 빗장을 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간과 이성 및 자연의 현존과 특성에 대한 마지막 근거가 인간 및 세계의 창조자인 하나님 안에서 모색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했다. 또한 인류를 그 생명의 기초에 보편타당한 형식으로 보장하는 일이 철학의 업무였다.

인간과 사회가 사유와 삶의 문제에서, 또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간학으로 방향을 트는 일은 데카르트에게서, 또는 그의 뒤를 잇는 철학적 발전에서도, 그리고 로크나 그의 경험주의적 후계자들에게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흄이나 칸트도 역시 이러한 방향 전환을 의도하지 않았다. 비록 경험의식의 단일성이 완전히 인간에게 토대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의식의 단일성이 인간에게 토대하고 있음으로써 이론적 이성에 대한 칸트의 사유에서 신관이 변두리로 밀려나서 이 신관의 무용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지만 말이다. 하나님 신앙에 대한 칸트의 도덕적 확증이 아주 취약한 것으로 증명되었을 때 이런 방향 전환이 실제적으로 발생했다. 자기의식은 그 입장에서 볼 때 이것보다 앞서있는 절대 근원에서 진지하게 확증될 필요가 있다는 피히테의 통찰과, 인간의 세계관계에 상응하는 일이, 또한 인간의 주관적 자유의지가 자기보다 선행한 객관적 자연 세계와 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상응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쉘링의 인식은 다시 한번 모든 주관적, 객관적 현실성이 절대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보증의 길을 열었다. 이는 곧 고전적인, 그리고 체계적으로 완성된 현실성의 형태가 헤겔 철학 안에서 발견된 것과 같다.

인간학을 향한 방향 전환은 헤겔에 대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발생했는데, 이것은 19세기 중엽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에 인간 본성을 사회의 토대로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철학에서는 어느 정도 데카르트를 통해서, 또한 로크에게서 연유한 경험주의 전통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거명하자면 칸트와 초기 피히테를 통해서 준비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사상적 체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인간을 향한 방향전환이 새롭게 과격성을 띠게 되었다. 로크나 칸트, 혹은 피히테도 역시 하나님을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일이 칸트의 이론 철학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면 이런 결과는 그의 사유를 견인하는 의도와 신학적 동기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제 헤겔의 입장과 달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체해버리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포이에르바흐, 슈티르너, 마르크스, 니이체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비교적 후기 쉘링의 무언가 미약한 노력을 접어둔다면 헤겔의 체계는 문화의 공적 의식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토대를 두려고 최선을 다한 철학의 마지막 시도였다. 특히 인간의 참된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이로써 헤겔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철학적 체계 구상의 말미에 자리한 셈이다. 이 체계 구상은 실제로 공적 문화에서 종파적으로 논쟁만 일삼는 종교의 입장을, 그래서 기능적인 면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종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 조직으로서의 구체적인 교회에 전해져온 종교의 상존적인 중요성이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승인될 수 있다고 해도 역시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사색적인 철학자의 작품에서 절대 관념의 기초 구상이 설명됨으로써, 이제 절대 관념의 기초 구상에서 병합되고 발산된 인간의 유한성이 터무니없이 인간 자신의 추상성을 구체적인 현실성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헤겔을 향해서 자신의 권리를 반환해 달라고 청구한 것이다. 자신의 사유 결과를 초인간적인, 신적인 진리라고 칭하는 것이 불손에 해당되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말이다.

앞장의 말미에서 언급된 비판적 숙고로부터 이제 다음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헤겔이 죽은 후 10년 동안에 일어난 그의 사변 철학체계에 반하는 방향전환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정당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사실상 절대 관념과 그것의 자기 전개를 진술하면서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즉 반성하고 구성하는 철학자의 유한성을 더 이상 주제로 삼지 않았으며, 또한 고양된 고유한 유한성이 절대 관념으로 지양되어서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방향전환은 헤겔을 반대하는 포이에르바흐에 의해서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상이한 갈래와 강조점에 따라서 막스 슈티르너와 키에르케고오르 및 뒷날 니이체와 딜타이에 의해서 효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서 이루어진 방향전환은 뒷날 철학 발전에 단초가 되었다. 이에 해당되는 20세기의 철학을 들자면 딜타이, 키에르케고오르 및 니이체에 의해서 수행된 실존철학이다. 이런 방향에 별로 명백하게 적용되지 않는 철학적 흐름들도 역시 헤겔 이후 철학의 인간학적 전환점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을 향한 전환은 19세기 중엽 이래로 칸트 철학을 갱신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여전히 우리의 경험知에 대한, 또한 이로 인한 우리의 세계 관계에 대한 토대가 인간적 주관성에서 비판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수고로 인해서 칸트주의자들은 대표적인 실증주의자들과 구별되었다. 신칸트주의에 속한 대다수 파들은 인식비판이 형이상학과의 대립적인 면에 따라서, 또는 자연과학적 기본개념의 토대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칸트와의 편차를 노출시켰다. 이로 인해서 인식 비판적 반성의 의미가 밀려났다. 왜냐하면 이 반성이 더 이상 칸트의 경우에서처럼 형이상학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학문성의 전제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학문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식 이론적인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자율적인 방법적 의식에 기초해서 발전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비판철학적 반성은 실제로 인간 주관성과 학문적 세계인식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었다. 이 경우에 학문적인 세계 인식이 자신의 궁극적 토대를 인간적 오성 기능의 자발성에 둔다는 가정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볼 때 아직 주제화되지 못한 형이상학적 요구를 포괄한다.

인식 비판적 기초가 다져지는 자리에서 비인(Wien) 학파의 소위 논리 실증주의, 혹은 “新실증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형이상학적 동감으로부터 자유로운, 또한 형식화 될 수 있는 대상언어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 시도는 결국 모든 문장을 의미 충만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입증해야 한다는 요구가 감각적 사실 앞에서 관찰과의 연관을 통해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에 분쇄되고 말았다. 그래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자기 사유의 두 번째 국면에서 규범언어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 철학은 개개의 해석하는 형식 언어가 규범적 일상 언어에 필요하며, 따라서 형식언어가 규범언어로 되돌려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규범언어 철학은 철학적 언어사용을 소위 경험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규범적” 언어사용의 표준에서 측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을 견지했다. 물론 이러한 프로그램은 오늘날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낱말의 뜻이 유약하고 역사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규범적” 언어사용은 그것과 다른 언어 형식의 준거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칸트주의의 인식론적 추구와 20세기의 기초 철학적 언어학에 기울인 노력 사이에는 여러 가지 비교될만한 점들이 있다. 이 두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논리 실증주의가, 또한 규범언어 철학이 더 이상 상이한 인식 기능과 이 인식 기능의 언어사용이 덧붙여져 있는 인식주체의 법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 다른 경향들과 구별된다. 언어는 오히려 애초부터 간(間)주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현재의 상황에서 인식론과 기초 철학적 언어철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이제 개개의 기초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헤겔 이후의 철학이 전개되는 과정에 등장한 인간학적 전환에 대한 범례로 주목받는다. 이 기초 철학적 입장은 관념론 철학을 절대 개념과 연결했다. 이 경우에 철학적 반성 다음에 오는 인간적인 전망을 인식 실행에서, 혹은 언어에서 찾는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또한 막스 쉘러(M. Scheler)에 의해서, 특히 헬무트 플레스너(H. Plessner)와 아르놀드 게엘렌(A. Gehlen)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발전된 철학적 인간학처럼, 인문학적 훈련에 집중하는, 모든 포괄적인 인간학을 언어 및 인식을 이해하는 토대로 요구한다는 것도 역시 부차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언어가 모든 인간적 의사교환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식의 마지막 조건임이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기능에 대한 반성적 지식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 안에, 그리고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 안에 깊이 파묻혀 있다. 그래서 기초철학인 언어분석의 단초는 인식론의 언어 분석적 단초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양자는 철학적 반성이라는 전망에서 인간학적인 기초쌓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칸트주의자들의 인식 주관이나 일종의 실체화 된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이러한 기초쌓기가 없다.

헤겔 이후 철학의 흐름 중에서 마지막으로 거명된 것은 그것이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끼친 영향이 별로 없기 때문에 여기서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 즉 신칸트주의가 종교철학에 끼친 기여는 오늘날 전통적인 실증적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면에서 과도하게 언어분석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그리고 종교적 논의의 대상관계를 감정적인 기능에 축소시켜 보려한 자신들의 흥미를 상실해버렸다. 또한 언어분석을 수단으로 삼으면서 지난날의 형이상학적이며 신학적인 전통의 재고(在庫)를 양식 삼아서 지탱한다. 그런 점에서는 인간학은 신학을 위해서 중요하다. 신학이 세속주의적인 조건하에 있는 경향과 대립해서 인문학적 연구와 인간학적 이론화에서 발생하는 종교적 주제의 현혹을 극복하려면 인간의 동일성을 위한 종교적 삶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런 반성이 구성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견지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철학적 신학의 전통에 대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학과 인문학을 참조할 경우에는 신론과 계시론이 직접적으로 다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반적으로 합리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놓는 안전장치가 다루어진다. 이러한 노력은 철학이 헤겔 이후에 인간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적 전통과 갈라섬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작업이 되었다.

철학의 기초 주제인 인간학을 향한 방향 전환이 인간 이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와 결합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이미 포이에르바흐와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이런 관찰방법을 시도했다. 이제 인간과 그 특성을 자연과의 연관 가운데서 바라보는 일이 아무 의심 없이 사실적으로 제공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로 무엇보다도 진화론이 인간을 자연의 산물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늘 인간적 지식으로 남아 있었으며, 모든 자연주의는 (헤겔의 절대 관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장소인 인간 주관성에서 언급되었다. 이 부분이 간과된다면 자연 연구의 소여된 자리가 자연의 객관성과 혼동될 것이다. 마치 자연 현실성에 대한 학문과 가르침이 미래를 지향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인간의 생명에 항존적인 요소가 자신의 열려진 미래를 뛰어넘는, 또한 자연으로부터의 유래를 뛰어넘는 생명의 차원이라고 간단히 기만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생명철학은 인간에 대한 숙고가 우리의 인간적 현존을 뛰어넘는 생명 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는 삶의 기쁨에서 생명이 이해되었다. 이것은 생명철학의 다층다기한 개념이 여러 종류의 사상가들에게, 즉 한편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이체에게서, 다른 한편으로는 빌헬름 딜타이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베르그송에게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유효하다. 베르그송의 사상은 화이트헤드의 작품에서 정점에 달한 과정철학의 분기점이 되었다. 생명 및 과정철학은 헤겔 사망 이후에 등장한 인간학적 전향의 토대에서 다시 한번 형이상학적 접근을 이룩한 몇 안돼는 철학 경향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말은 베르그송이나 화이트헤드에 비해서 딜타이의 생명철학이나 그에게서 출발한 실존철학에는 별로 타당하지 않다. 화이트헤드는 형이상학 개념을 다시 한번 전혀 치우침 없이 철학의 과업이라는 특징으로 정립했다. 그는 여기서 형이상학자들의 업무를 “상상력이 넘치는 일반화”라고 묘사했다.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이 인간의 자기 경험에 대한 여러 일들의 일반화에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런 한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도 역시 관념론 이후의 전체 철학에 나타난 특징인 인간학적 전환의 토대에 근거하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새롭고 극단적인 의미에서 철학의 기본 주제가 되어 있었다. 물론 헤겔은 이미 앞서서 이런 입장에 대해서 심각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이런 입장이 이미 자기 시대의 경향으로서 확고한 길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곧 칸트 철학에 의한 결과였다. 헤겔은 여기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절대의 차원으로 높아지려 한다는 사실을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하며, 따라서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한의 절대화는, 특별히 인간의 절대화는 헤겔에 의해서 인간이 유한한 소여를 깨뜨리고, 어쨌든지 절대 사상으로 고양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간주되었는데, 옳은 판단이다. 인간이 절대를 자기 자신과 (그리고 모든 유한자와)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혹은 그 어떤 다른 유한자를) 절대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유한자의 절대화를 통해서 절대의 세계에 올라서겠다는 이런 뒤틀린 형식은 그들의 방식으로, 비록 원하는 바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지 종교적 주제가 바로 인간의 생명 실행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루터는 이미 동일한 통찰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사유 대신에, 이는 헤겔과 비슷한 주장인데, 신뢰의 관점에서 이를 언급한 바 있다. 즉 인간은 어디서든지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신뢰를 궁극적으로 어디에 토대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참된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상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절대 철학을 기피하려는 흐름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미리 앞당겨져서 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피는 헤겔이 죽은 다음에 인간을 최고 존재자로 간주하려는 인간학적 흐름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제 다음 항목에서는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헤겔과 결별하면서 부각된 가장 핵심적인 명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 다음에는 그것과 연결해서 인간 상황을 새롭게 규정하는 기준의 방향에 대해서 다루어질 것이다. 여기서는 20세기 철학의 개요를 살피는 것이 관건은 아니다. 에드문트 후설(E. Husserl)에 의해서 설립된 현상학과 같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발전은 결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해석학 철학이 딜타이와 연관해서 언급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신칸트주의와 언어 분석적 경향이 여기서 더 이상 다루어질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앞서 밝혔다. 지난 십 년간 확대된 학문 이론적 논의도 역시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반면에 새로운 자연철학에서 확대된 인간학적 집중에 대해서, 그것은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서 실행되었는데, 또한 이런 철학적 착상이 새뮤얼 알렉산더(S. Alexander)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계속해서 작용한 것에 대해서도 좀더 상세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과정철학은 관념론 이후 상황에서 다시금 자연철학의 주제를 받아들인, 그리고 그것에 연유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받아들인, 그래서 북아메리카의 과정신학 안에서 신학적 효과를 불러일으킨 매우 드문 철학적 경향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 헤겔로부터 일탈한 철학의 새로운 착상

 

a.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와 칼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흐(1804-1872)는 1823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가,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또한 헤겔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다음 해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는 1828년 에어랑엔에서 De ratione una, universali, infinita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 논문은 개인과 대립하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이성의 신성을 논증하고 있다. 그 다음 해에 포이에르바흐는 에어랑엔에서 venia legendi(교수자격)을 획득했다. 10년 후에는(1839년) “헤겔 철학 비판”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정부에 속한 학자가 아니라 민간 학자로서 세계 현실성을 절대 이성의 자기 발현에 의한 산물이라고 보는 헤겔의 견해와 상반된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볼 때 헤겔은 이런 견해를 통해서 단지 추상의 연쇄에만, 즉 “오직 사유된 존재에만” 도달했을 뿐이다. 이런 와중에 포이에르바흐는 초기의 범신론적 관념론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범신론적 자연주의로 돌아섰는데, 이것은 초기 쉘링의 자연철학과 여러 면에서 어울리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1830년 익명으로 출판된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생각”이 바로 이렇게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길목이었다. 포이에르바흐는 헤겔 철학의 비판에서 구체적인, 생동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의 현존은 사유의 토대인 철학 안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2년 후에(1841년)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전망에 기초한 인간학을 종교적 표상의 토대이며 원천이라고 제시했다. 또한 신관을 인간적 자기 의식이 소외된 형태라고, 따라서 참된 (무한한) 자기에 대한 인간 표상이 상상의 하늘에 투사된 결과라고 피력했다. 따라서 인간과 상이한 신성에 대한 표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논증에서 헤겔의 제자인 포이에르바흐에게는 다음의 사실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났다. 즉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고양은 자기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무한 사상을 향해 전개되는 고양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어디에서 무한 사상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포이에르바흐의 대답은 인간이 개체로서는 유한하지만, 유(類)로서는 무한하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기 자신을 유적 존재로 의식한다면 유로서 인류의 무한성이 인간과 완전히 다른 무한한 존재와 혼동되는 데서 하나님 표상이 발생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흐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이러한 혼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개인들의 이기주의는 개인들이 유에 속한 고유한 무한성을 유한한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에게도 역시 낯선 본질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이것은 곧 1828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다음에, 어떻게 개인들이 유에 해당되는 불멸성을 자기를 위해서 요구하는가에 대해서 역으로 설명해야만 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아주 특이한 논증이라 할 수 있다.

박사학위 논문도 역시 관념론적 징후들이 있긴 하지만, 유(類, Gattung)가 개인을 뛰어넘는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징후는 1830년에 집필한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생각” 이후로 변했다. 인간 유의 무한성에 대한 표상이 자연주의적으로 전환되었는데, 이것은 1841년에 제기된 종교비판의 토대가 되었으며, 1849년에 집필한 “종교의 본질”에서는 좀더 분명해졌다. 이 사이에 포이에르바흐는 1843년 “미래의 철학 원리”에서 자연 범신론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 자연 범신론은 육체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존재인 인간의 인간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인간이라는 유(類)의 특징인 무한성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의 생각은 칼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초기 문서에, 특히 국가 경제와 철학(Nationalökonomie und Philosophie, 1845)이라는 파리 초고에 수용되었다. 마르크스는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비판도 떠맡았다. 개인의 이기주의라는 포이에르바흐의 암시는 인류의 무한한 본질이 인간과 상이한 신성을 향해서 구체화되는 동기로서 마르크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대신에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의식의 종교적 자기 소외 안에서 파괴되는 근거가 인간 실존이 인간 사회의 지상적 관계에서 실제적으로 파괴된다는 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런 사회 안에서 사유 재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소외된다. 왜냐하면 노동 가운데서 그 본질이 표현되는 생산품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소외의 극복을 역사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유로서의 인간이 역사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발현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로서의 그 역사는 전체적으로 인문주의적 주제와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무계급의 사회가 실현됨으로써 인간이 지상에서 당하는 파괴와 소외가 극복된다면 종교적 소외가 결국 사라지리라고 기대했다. 인간의 사실적인 사회적 소외는 바로 이 종교적 소외에 반영되어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개인들이 누리는 현재적 삶의 행복이 당연히 유로서의 인간 목표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미 이론적으로 포이에르바흐의 초기 명제가 개인이 아니라 배타적인 의미에서 유의 불멸성만을 거론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b. 막스 슈티르너와 죄렌 키에르케고오르

 

막스 슈티르너(1806-1856)는 포이에르바흐의 헤겔 비판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주저 “유일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에서 유(類)관념을 거부하고 인간의 무한성을 무제한적으로 자기 긍정적인 개인의 주관성에서 되찾음으로써 포이에르바흐와 구별되었다. 헤겔적인 절대 관념의 보편과 달리, 또한 포이에르바흐의 유적(的) 열광과 달리 개인과 그 개인의 실존에서 철학적 반성의 토대를 찾는다는 점에서 키에르케고오르(1813-1855)와 막스 슈티르너는 연결된다. 그러나 이 두 사상가 사이의 일치가 이미 고갈되었다. 왜냐하면 슈티르너는 여전히 포이에르바흐와 함께 무신론에 결부되어있지만, 키에르케고오르는 이 무신론에 대해서 대립적인 자세를 갖고 개인은 자신의 자명성에 대한 변증법에서 이미 항시적으로 영원과 관계되어 있다는 명제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비록 키에르케고오르가 모든 헤겔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사상에 동의하고 있지만, 즉 인간이 자기의 고유한 유한성을 뛰어넘어, 이것은 자신을 유한한 존재의 하나로 의식함으로써 실현되는데, 무한성을 소유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무한자가 개인의 실존이 실현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진 않았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타자, 즉 절대로서의 무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헤겔과 생각을 같이 했다. 이러한 인간은 무한에 대한 관계이며, 영원에 대한 관계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무조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 키에르케고오르의 사상을 자세하게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경건주의적 종교성과의 연결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키에르케고오르는 개인적인 삶의 주제를 데카르트와 똑같이 발전시켜 나갔다(De omnibus dubitandum est, 1843). 즉 회의는 생활형식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 생활형식의 다기성은 키에르케고오르가 익명으로 저술활동을 했다는 사실에서 반영되고 있다. 그는 이런 생활형식을 “인생행로의 제단계”(Stadien auf dem Lebensweg, 1845)에서 등급화 했다. 즉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와 기독교 신앙(“Religion B”).

키에르케고오르에 따르면 개인들은 자유를 실현해 가는 제형식에서 영원과 연관되어 있다. 키에르케고오르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서라 할 수 있는 저서에서, 즉 “불안의 개념”(1844)과 특히 그의 주저인 “죽음에 이르는 병”(1848)에서 가장 인상 깊게 설명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기독교적인 죄론의 지평에서 자유의 자기 과오를 다루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을 정신, 혹은 자신이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정의는 관념론적 주관성 철학의 전통에 자리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전환이기도 하다. 즉 “자신(das Selbst)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있는 유한한 본질로서 무한이나 영원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관계에서만 자기의 본질을 갖고 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본질로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데, 이 자신은 바로 유한이 영원과 맺는 이러한 관계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종합”으로서 고유한 유한성의 토대에 실존해야만 한다. 즉 이런 토대에서 종합을 실현해야만 한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존재할 자로 창조되었지만, 즉 무한과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정립되었지만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즉 자신의 유한성을 무한과 “종합”하거나 관계를 이룸으로써 고유한 유한성의 토대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면, 그는 어쨌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자기 실존의 근원적 자리매김과 모순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오르는 총체적인 절망이라고 성격화될 수 있는 이런 상황에 탈출구가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이다. 키에르케고오르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기독교 죄론에 대해서 가장 인상 깊은 현대적 해석을 가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유 안에 거함으로써 이런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이 자기 관계 안에서 자기를 구성하는 상황에서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역설은 영원한 행복이 일종의 역사적 분기점에서 설정되어 있듯이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곧 “철학적 단편”(1844)과 “궁극적인 非학문적 메모”(1846)가 다룬 문제다. “반복”(1843)의 주제나, 미리 주어진 진리의 “획득”이라는 주제가 실증적으로 이런 문제에 상응하고 있다.

진리와 그것의 획득에 대한 관계를 경험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중재하는 것은 그 입장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서 다시 특징화되는 것인데, 이 역사적 중재는 이 항목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게될 사상가인 빌헬름 딜타이의 생명이라는 주제를 조형했다.

 

c) 빌헬름 딜타이와 역사 경험의 해석학

 

딜타이는 더 이상 직접 헤겔의 입장에 서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딜타이는 자신이 죽던 해인 1911년에 출판된 논총 “정신적 세계”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처음으로 철학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헤겔의 관념론적 단일론은 자연과학의 군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1833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50년대 초 베를린에서 대학 공부를 한 딜타이의 가장 중요한 경험은 베를린 대학교에서 만개했던 독일 역사학의 성과였다. 여기서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랑케(Ranke)였으며, 그 외에서도 몸젠(Mommsen)과 드로이젠(J.G. Droysen)도 함께 활동했다. 딜타이의 생명주제는 “보편사적 고찰”의 인간학적 토대에 대한 질문이었다. 즉 그 고찰이 독일의 역사주의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랑케와 드로이젠은 헤겔의 역사철학적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는데, 드로이젠보다는 랑케가 더욱 그랬다. 그러나 “보편사적 고찰”의 토대로서 무엇이 과연 궁극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드로이젠의 역사학 개요(1858년에 읽혀지기 시작해서 1868년에 출판됨)는 역사를 규정하는 요소인 “도덕적 세력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이 언급하려는 바는 “관념”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언급의 효과는 역사의 과정을 규정하며, 또한 이 과정에서 그 효과를 벗겨내는 것이었다.

딜타이가 베를린에서 전공한 분야는 신학이었지만, 그는 그 당시의 신학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베를린 초기 낭만주의의 범신론적 경향에 대해서 차라리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특별히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 강연에 대해서 강한 동질감을 가졌다. 그는 1856년 신학부의 졸업시험이 끝난 후에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헤겔 비판가인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A. Trendelenburg)가 그의 지도 교수가 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관심이 그를 새로운 국면으로 견인했으며, 1860년에는 결국 쉴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을 다룬 논문으로 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는 동시에 쉴라이에르마허의 서한을 편집하는 일도 했는데, 그 묶음집이 1861년과 1863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업이 끝난 다음에도 딜타이는 쉴라이에르마허에 대한 열심을 늦추지 않았다. 대단한 정성을 기울여서 집필한 “쉴라이에르마허의 삶” 제1권이 1867/70년에 출판되었으며, 제2권은 딜타이가 죽을 때까지도 아직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결국 딜타이의 유고에 근거해서 1966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었다.

ㅇ런 와중에 딜타이는 베를린에서 1864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도덕 의식을 분석하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획득했는데, 이것은 출판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도덕적 생명력의 의미라는 점에서 이런 주제는 그가 역사에 기울일 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딜타이는 1867년에 바젤, 1869년에 키일, 1871년에는 브레스라우에서 초청을 받아 갔으며, 187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로쩨(Lotze)의 후임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여기에 머물렀으며, 역사와 그 이외에 다른 정신과학의 토대를 구상하고 작업할 수 있었다.

딜타이는 전문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이후로 쉴라이에르마허 이외에 두 가지 중요한 프로젝트에 힘을 쏟았다. 한 가지는 “서구 기독교 세계관의 역사”였는데, 이 기본 구상은 뒷날 현대의 문화와 정신사 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 이외에도 역사 의식의 본성과 조건에 대한 연구 계획이 있었으며, “역사적 이성의 비판”에 대한 연구 계획도 있었다. 이것은 초장부터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토대와 밀접한 이웃관계에서 구상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칸트의 업적으로 간주되었지만 뒷날 칸트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경험의 역사성에 대한 해석학이라는 방향에서 발전되어 나갔다. 딜타이는 이런 작업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인 1883년에 자신의 “정신과학 개론”(Einleitung in die Geisteswissenschaften) 1권을 출판했는데, “사회와 역사 연구를 위한 기초쌓기 시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역사학파의 원리를 ... 철학적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 인식능력의 경직된 아 프리오리”에서가 아니라 “우리 본질의 전체성에서 출발하는 발달사”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1권은 “정신의 개체 학문”에 대한 조망으로 시작하며, 계속적으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해명한다. 딜타이는 형이상학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제2권에서 언급되어야 할 문제들을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딜타이에 의해서 의도된 역사적 생명의 인식론적-심리학적 자리매김은 “기술(記述)적 심리학”의 기초 구상에서 하강 국면에 빠져버린 것처럼 역사적 경험의 해석학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어떤 결정적인 형태를 획득하지도 못한 초안들이 많은 격랑 속에서 이런 역사적 경험을 위해서 형성되었다.

형이상학과 그 해명의 역사는 딜타이가 정신과학의 기초를 닦음으로써 매우 넓은 공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딜타이의 판단에 따르면 이러한 기초닦기의 기능은 “2천년 보다 훨씬 전부터” 형이상학을 통해서 지각되었으며, 역사 의식이 발생함으로써 첨예화 된 근대가 형이상학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형이상학적 자리를 해명하는 일”(351)은 17세기의 자연과학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이후로 사회는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이해되었다.”(379). 이러한 관찰 방식은 18세기에 “그 핵심이 발전사상에 있는 보편사적 통찰”을 통해서 명예를 얻었다(380). 딜타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성이 발견됨으로써 형이상학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관(神觀)에 토대한 “논리적 세계연관”(386ff.)을 형이상학적으로 구성하는 관념이 끝장났다는 것인데, 딜타이는 이 세계연관의 원리가 기초 명제를 통해서 라이프니쯔에게서 형성되었다고 보았으며(388), 또한 그것이 헤겔의 사상 체계에서 마지막으로 실행되었다고 생각했다(390). 이러한 “논리주의”에는 자유(391)와 생명의 역사성이 대립해 있다. “인격적 경험인 우리 생명의 메타-물리만 ... 여분으로 남는다.”(384).

딜타이의 경우에 헤겔과 결별함으로써 곧 헤겔 체계의 “논리주의”에서 첨예화되는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와 결별하게 되었다. 형이상학의 끝장은 꽁트(A. Comte) 경우처럼 단순히 근대의 자연과학이 등장함으로써 대두된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역사성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이와 동시에 모든 역사적 현상의 유한성과 상대성에 대한 통찰이 주어졌다. “모든 역사적 현상의 유한성은 일종의 종교이며, 관념이며, 혹은 철학적 체계이다. 따라서 사물의 연관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여러 가지 상대성은 역사적 세계관의 마지막 언어다.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으며,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말이다.” 딜타이는 이런 결과로 인한 상대주의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길에서는 “증명의 무정부 상태”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이런 탈출로를 경험에 현재하는 생명 전체성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 찾아보았다. 그는 이 생명의 전체성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 형이상학적인 것은 형이상학적 설명이 “논리주의”에 의해서 끝장이 난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딜타이의 후기 단편에 담겨 있는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1894년 딜타이의 “기술적” 심리학의 구조개념에서 규정된 생명의 단일성은 외부로부터의 관찰 범주만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서도 경험하는 자에게 직접 현재한다. “의미”와 “함축”은 경험 개념과 연결되었다. 즉 개체의 경험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의미가 있다. 생명 전체와 연관됨으로써 말이다. 생명 전체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가치는 생명에 이르는 시간으로 인해서 밀려난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 속에서 생명의 길과 연결시키는 그 의미가 변화한다. 이로 인해서 생명의 진행에서 개별적 사건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이 이르러야만 최종적으로 규정된다. “마지막 순간이 이르러야 자기의 의미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정말 순간적으로 생명의 마지막에 등장할 수 있다. 혹은 추후로 이 생명을 체험하는 것에서 등장할 수 있다.” “생명 과정의 마지막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 전체를 전망할 수 있다. 이 전체로부터 확인될 수 있는 것은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에게서 출현하는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을 기다려야만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 완전한 질료를 차지해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미래의 목표로 삼은 게” 무엇이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목표설정은 생명 전체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한 부분과, 또한 이렇게 전체 자체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개인의 경험은 늘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개인들에게 해당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한 규정이 생명의 흐름 가운데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생명의 진행 안에서 완료될 수는 없는데, 이런 사실로부터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파생되는 게 아닐까? 딜타이는 이러한 문제를 주시했다. 그리고 “전체가 부분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체도 역시 우리를 위해서만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런 문제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다(바로 앞부분). 부분의 의미는 전체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이 답변이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무리 부분에 대해서 집중하고, 이를 통해서 (부분에 대해서) 전체의 확실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전체는 이런 부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상대주의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를 피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명이 폐쇄되지 않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체와의 관계가 부분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마틴 하이덱거(M. Heidegger)는 잘 알려진 대로 “존재와 시간”(1927)에서 현존의 역사성을 분석하면서 딜타이의 생각에 도움을 받은 바가 크다. 하이덱거가 이 책에서 역사성이 현존의 특수한 존재방식을 구성한다고 보았다는 사실에서 “존재와 시간”의 전체 구상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들은 딜타이의 사상과 연계되었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의 역사성에서 파생되는 상대주의의 당혹에 대해서 하이덱거는 딜타이의 진술을 뛰어넘는 해결책을 발전시켰다. 즉 생명 역사가 종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유한 죽음의 가능성으로 “선발”(先發)함으로써 “전체 현존의 실존적 선취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 전체 현존은 전체 존재능력으로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딜타이가 죽음의 순간에 생명 전체와 부분의 의미를 인식하기 위해서 마지막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앞의 각주 37 참조), 하이덱거는 역사의 진행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생명의 총계를 선취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셈이다. 물론 가능성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취는 뒷날의 경험을 통한 교정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이 선취는 경험의 진행에서 증명되는 한에서 상대주의와 대립한다. 왜냐하면 선취는 역사적 경험의 흐름 한 가운데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생명의 전체성과 최종적 진리를 미리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덱거는 물론 이런 생각을 개인적인 생명과의 관계에서만 발전시켰다. 반면에 딜타이는 이 의미 유보의 문제를 한편으로는 개인적 생명의 흐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삶을 간섭하는 역사연관에서 병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개인의 생명이 더 큰 생명연관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와 개인적 경험의 의미는 전체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해체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역사의 전체성을 선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이덱거가 말하는 “죽음으로의 선발”에 상응한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마지막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가는 한 중심에서 개인과 그 개인적 경험의 최종적 의미를 얻을 수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한 중심에서 모든 역사의 마지막을 현재가 되게 하는 이러한 한 사건을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의 부활이다. 그것은 곧 유대의 희망에서 기대된 마지막 사건의 선취인데, 이 마지막 사건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역사 과정의 한 중심에서 예수라고 하는 한 인간을 통해서 일어났다. 물론 하나님의 현존을 전능한 창조자로 간주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건을 역사에 사실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창조자는 “죽은 자를 살리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는 분이다.”(롬 4:17).

물론 딜타이는 생명의 전체성을, 즉 개인의 경험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모든 경험의 조건을 생명의 단일성인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딜타이의 생각에 따르면 이러한 연결이 여러 가능한 “세계관” 중에서 하나만을, 즉 철학적 세계관과 다른 종교적 세계관을 성격화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관은, 더욱이 유일신론적 종교의 신관은 딜타이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종교적 경험의 투사일 뿐인데, 인간은 이 경험 안에서 자기 의지의 독립을 전체 자연연관에서 획득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저 우연하게 초기 쉴라이에르마허의 고찰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쉴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인간이 “우주”에 대한 직관에서 한 하나님을 고려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환상이 어떤 방향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들의 환상이 자유 의식에 ... 달려 있다면, 그래서 그 환상이 근원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야만 할 그것을 자유로운 본질의 형식에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없다면, 그 환상은 우주 정신을 인격화 할 것이며, 따라서 당신들은 한 하나님을 갖게 될 것이다.” 환상이 오성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들은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이제 딜타이가 종교와 다른 입장에 있는 철학자라는 점이 꽤나 정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생명 전체에 대한 딜타이의 생각은 개인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우주”에 상응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 없는 우주다. 딜타이에 따르면 세계의 토대로서의 하나님을 철학에 개입시키는 것은 형이상학적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딜타이는 확실히 종교적 근원이 형이상학의 역사성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근대에 들어와서 그 종막을 고했다. 더욱이 모든 생명현상의 역사성이 발견됨으로써 확실해졌다. 다만 딜타이가 생각하는 생명전체가 쉴라이에르마허의 “우주”처럼 항상 형이상학적 사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만이 남아 있다. 이로써 생명의 이러한 전체가 그 단일성의 토대가 없이도 생각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전체를 향한 생명 순간의 단일성은 이러한 단일성에 연결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결국 이런 토대로부터 “우주”의 자기 충분성에 대한 표상을 다시금 포기했으며, “변증법”이라는 저서에서 “세계 없이 하나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 없이 세계도 없다.”는 명제를 통해서 명제를 통해서 그런 표상을 대체했다.

딜타이의 경우에 생명 전체 개념이 개방시켜놓은 질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생명현상에 타당한 역사성의 틀 안에서 형이상학의 역사성을 반성함으로써 철학적 통찰에서 중요한 일보를 이루었다. 헤겔까지 뛰어넘어서 말이다. 생명현상의 유한성이라는 특수한 형식의 통찰은 역사가 개방되어있다는 의식과 연결되었다. 이 생명현상의 유한성은 그것의 역사성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의식으로부터 이 개방성을 빼앗은 형이상학의 “논리주의”에 대한 딜타이의 비판도 역시 타당하다. 딜타이의 해석학적 철학은 다음에 다루게 될 항목에서 인간 상황을 유한성이라는 토대에서 새롭게 규정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데, 이 인간 유한성은 딜타이의 경우에 역사성의 관점에서 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3. 신(神)죽음 이후의 인간현존에 대한 새로운 규정

 

헤겔 이후 인간을 향한 방향 전환은 反기독교적이고 무신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이것을 니이체만큼 심층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수미일관하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20세기 실존주의 설계의 단초가 되었다. 이런 실존주의 설계는 니이체가 길을 터놓은 허무주의의 공간에서, 그러나 니이체와는 다른 방향에서 인간 현존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보려고 했다. 이 경우에 이미 키에르케고오르가 헤겔 이후의 인간학적 전환이라는 상황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토대에서 무신론적 전제를 교정해보려는 시도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동물과 인간을 비교함으로써 인간의 독특성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수고는, 또한 이를 통해서 “철학적 인간학”에 맞추어보려는 수고는 실존주의적 설계의 상황연관과 구별된다. 이 철학적 인간학은 보편타당성을 요구함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a) 허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 Nietzsche, 1844-1900)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작센의 개신교 목사였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경건한 부모에게서 양육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슐포르타의 김나지움 학생일 때 이미 이런 경건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건성은 뒷날 니이체가 “나움부르크의 덕”이라고 일컬었던 도덕주의를 통해서 성격화되었는데, 어쨌든지 이 경건성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니이체는 슐포르타에서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포이에르바흐의 책을 통해서 첫 번째로 정말 심각한 충격을 경험했다. 니이체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1864/65년에 본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기독교 역사를 배우면서 어느 정도로, 그리고 슈트라우스(D.F. Strauß)의 예수 생애를 배우면서 아주 확실하고 신속하게 기독교가 내면적으로 참되지 못하다고 확신하고, 고대 문헌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라이프찌히로 옮겼다. 그 뒤로 라이프찌히에서 열심히 공부한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라인 박물관”에서 출판된 몇몇 고대문헌학에 대한 연구로 1869년3월에 라이프찌히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이전에 이미 바젤 대학교로부터 교수 초빙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1869년4월에 그 초빙을 받아들였다. 니이체는 바젤에서 10년 동안 교수 활동을 하는 중에 첫 저서로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 der Musik, 1872)을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을 리카르트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이 책은 니이체가 행복했던 시절인 그때 바그너와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와의 친밀한 관계를 담고 있다. 1878년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출판되었다. 니이체는 이어서 건강이 악화되자 교수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그 뒤로 십 년 동안 그의 중요한 철학 문헌들이 출판되었다.

니이체는 그의 선구자이며 모범자인 포이에르바흐가 신관을 이론적으로 파괴시킨 것에 대해서 그것이 이미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보다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내는 가장 위대한 사건”은 뒷날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단지 포이에르바흐와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니이체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더욱이 칸트의 이성비판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의 판단에 따르면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형이상학은 쓸데없고 증명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의 현존을 용납할 수 없다는 최종적 문제제기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허용될 수 있다고 한다. 즉 “한 하나님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으며, 또한 무엇을 통해서 이러한 신앙이 자신의 비중과 크기를 유지했는가”에 대한 사실이 말이다. 이것은 포이에르바흐의 논증을 가리킨다. 그 뒤로 하나님의 죽음은 분명히 최종적인 사실이 되어서, 결국 하나님을 찾고 있는 “미친 사람”도, 즉 대낮에 저자 거리에서 등불을 든 사람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소리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해했다. 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이다.” 니이체의 주제는 “유럽 전역에 그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이 사건을 수미일관하게 견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땅에 묻히게 된 다음에, 이제 돌출하게 된” 그 모든 것의 “단절, 파괴, 침몰, 와해”를 줄기차게 “채워나가고 이어나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신앙 위에 건설되고, 그 신앙에 기울어지고, 그 신앙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全유럽의 윤리를 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세계 부정의 원리에 해당되는 허무주의 개념이 이러한 단절과 파괴의 과정으로 출현한다.

그렇다면 니이체 자신의 철학은 자신의 그림자를 “극복하기” 위해서 神죽음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허무적인 게 아닐까? 사실상 니이체는 최소한 때때로 자기 자신의 학설을 “허무주의”라고 일컬었다. 이 사실은 니이체 사상의 전체 발전에서 보여주었던 생명을 긍정하는 경향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 것일까?

니이체는 1887년 여름에 집필한 한 논문에서 기독교 도덕은 세 가지 관점에서 허무주의로부터 인간을 보호했다고 언급했다. 첫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 가치를” 주었다. 둘째, 기독교 도덕은 세계에게 완전의 성격을 부여했다. 셋째, 기독교 도덕은 인간에게 절대가치를 알게 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도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무시하거나, 반생명의 입장을 취하거나, 깨달음을 의심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서 기독교 도덕은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허무주의를 막아낼 수 있는 확실한 방어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의무는 이런 도덕에 속하는 문제인데, 이 의무는 결국 그 토대를,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파괴했다고 한다. 도덕 계보학(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정직한 무신론은 “지난 2천년 동안 배양되어 온 진리에 대해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재난”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거짓말을 막아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니이체에 대한 유럽의 허무주의가 걸어온 역사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토대를 둔 가치가 생명을 부정하는 허무주의 앞에서 사람들을 보호했다는 확신에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앙이 끝나게 될 때 허무주의가 자기 길을 달려간다는 확신에서 니이체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모든 전제를 재생산해보려고 마음먹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것이 진실해야 한다는 의무를 비판가들이 위반한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니이체는 분명히 근대 무신론과 그 옹호자들의 증명에 대해서 비판적인 “앙심”을 품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이 청산된 후에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게 될 게 틀림없는 도덕에 집중시켰다.

니이체는 “서광”(Morgenröthe)의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선과 악에 대해서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숙고되었다”고 진술했다. 더욱이 니이체 자신은 이미 두 번째 주저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878)에서 심리학적인 “도덕적 느낌의 역사”를 다루었다. 그런데 그는 이 주제를 1887년에 아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 작품이라 할 “도덕 계보학”에서 비상할 정도로 날카롭고 심각하게 다시 적용시켰다. 이 책에서 하나로 묶인 세 원고 중에서 첫 논문은 선과 악(Gut und Böse)의 대립을 선과 저열(Gut und Schlecht)이라는 “점잖은” 차별화로 대체한다. 니이체에 따르면 선과 악의 대립은 눌린 자가 강한 자에게 갖는 생래적인 원한이다. 두 번째 논문은 죄의식의 유래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죄의식은 책임감에 대한 인간학적 현상에 의해서 제거된다. 이 책임감은 “약속이 가능한” 그런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특징이다. 그런데 죄개념은 이와 달리 “채무법”에서 기원한다(6). 말하자면 공동사회에 상대적인, 결국 조상이나(프로이트를 참조할 것!) 신성에 상대적인 개인들의 의무가 “구매자와 판매자,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에”(8) 위임되었다는 것이다(19f.).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저열한 지식”이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해당되는 문제는 인간이 사회와 평화의 명령에 최종적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자신의 공격 충동이 자기 내부로, 즉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이다(16). 신성에 대립해 있는 죄책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점에 달했다(20). 또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에게 충실하려는 전제조건으로서 자학에 대한 의지와(22) 연결되어 있다. 니이체에 따르면 바로 무신론이 이러한 종교적 “노이로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적 이상(理想)에서 말하는 생명에 대한 적개심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피안의 삶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라고 설명하는 성직자들에게서 이러한 금욕적 이상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 경우에 성직자는 사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죄책감을 이용하고 그것을 강화시킨다(20). 그러나 니이체는 금욕적 이상의 작용에서 적극적인 결과들을 획득해내기도 했다. 즉 “2천년간 이어온 진리의 배양”은 결국 기독교의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인데,(27) 이것이 그런 결과에 속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욕적 이상의 업적이 무엇보다도 이런 고통을 감내하게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소유함으로써 구원받았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욕적 이상은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적이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더 나아가 동물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감각에 대한 혐오와 이성에 대한 혐오는, 또한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고 모든 외면, 변화, 진행, 죽음, 소원, 요구를 멀리하려는 요구는, 이 모든 것은 무(無)에 대한 의지를 달성하고 反생명적인 의지를 달성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 ”(28).

니이체가 유럽의 허무주의를 밝혀보기 위해서 도덕 계보학을 연구한 결과로 얻어진 소득은 그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했다. 즉 허무주의가 이미 앞서 신(神)죽음의 결과였기 때문에 이러한 진단은 기독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심화되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난제다. 니이체 자신은 이런 난제들을 완전히 은폐하지 않았다. 이 난제들은 기독교가 영지주의와 이원론적인 세계상이라는 선상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한다면 훨씬 축소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계보학”이 출판된 해에 니이체가 생각했던 것처럼(각주 58 참조) 그가 허무주의적인 모티브로 되돌리려고 어느 정도 애를 썼던(각주 64 참조)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에 대한 기독교 사신도 그렇지만, 더구나 기독교 창조 신앙은 기독교에 대한 허무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안에서 제시된 원리가 수미일관하게 전개된다면, 그래서 하나님 살해라는 허무주의적 근원행위의 결과들이 핵심으로 등장하지 않게 된다면, 허무주의의 역사에 대한 그림이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훨씬 확실하게 끝장나게 되리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니이체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神죽음의 결과로 인해서 단절과 파괴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는데, 이것은 곧 이를 통해서 결국 생명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다는 명제일 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4) 이후로 니이체의 적극적인 사신의 세 가지 표제어가 이것과 연관된다. 즉 하나님은 죽었다 이후에 설정된 초인상(像), 권력을 향한 의지의 양식,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론.

짜라투스트라는 권력을 향한 의지를 우연하게 “자기 극복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다룬 게 아니다. 그것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살아있는 것이 있는 곳에는 권력을 향한 의지가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남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이것이 권력을 향한 의지의 현상 형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몬티나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옳다. “권력을 향한 의지”는 결코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다만 생명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즉 생명에 대한 다른 종류의 정의일 뿐이다.” “현존을 향한 의지”라는 표현양식은 니이체에 따르면 이런 목표에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것들이 생명 자체보다 훨씬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 ”(짜라투스트라 a.a.O.). 이것의 기초는 생명이라는 것이 “늘 자기 자신을 극복해나가야만 하는”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자기극복은 권력을 향한 의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이것은 초인에 대한 진술과 연관된다. 짜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 따르면 인간은 초인에 이르는 과정을 “넘어가기도 하며 거기서 몰락하기도” 한다. 초인은 인간이 자기를 극복할 때 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무엇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를 집필하던 시기에 나온 단편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때는 바로 그가 삶의 권태라는 병에 깊숙이 빠져 있을 시기였다. 니이체는 자기가 “생명을 긍정하는 초인이라는 관점”에서 삶을 견뎌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n.3) 짜라투스트라에게 맹세시키는 말을 할 때 생명을 긍정하라고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땅에 충실하라. 그리고 너희들에게 초지상적 희망을 말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니이체처럼 이러한 희망을 차안적 생명에 대한 부정으로 생각하는 이는 땅에 충실하기 위해서 초지상적 희망을 말하는 이들을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의 권태라는 고통과 욕망 앞에서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비용을 치른다.

니이체는 영원회귀 사상에서 이러한 생명긍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생명긍정은 한편으로 “허무주의의 극단적인 형식이다. 무(‘무의미’)는 영원하리!”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러한 무제한적인 생명긍정을 향한 변혁이다. 이러한 생명을 다시 한번 더,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망함으로써 말이다. 칼 뢰비트는 니이체의 이 사상의 핵심은 모든 생명의 순환에 대한 고대적 표상의 반복일 뿐이며, “반-기독교적인 근대성의 첨예화”를 지향한다고 지적했다. 니이체는 그 시대의 자연 철학적 이해를 통해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고무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학설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1881년 여름에 쓴 단편에 설명되어 있다. “만물의 순환과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의(恣意)적인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나의 생각은 이렇듯 지금까지의 모든 유신론적 고찰과 대립해 있다.” 기독교의 창조자 하나님과의 대립은 여기서 다시 한번 더 니이체의 反기독교적 입장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이 경우에 니이체의 단편은 神죽음의 명제를 독특하게 밝혀내려고 한다. 왜 니이체는 단지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대안을 피하기 위해서 내적인 많은 모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에 대한 학설을 선택했을까? 그가 말하는 이 하나님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칼 뢰비트는 영원회귀 사상과 미래 지향적으로 방향을 튼 일체의 가치전도 프로그램이 짜라투스트라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곧 기독교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어떤 헬라 철학자도 이렇게 배타적으로 미래의 지평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처럼 역사적 운명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매우 극단적인 “최고의”와 “최후의” 의욕은 “유대-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세계와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한 의지를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인간적 형상이 본질적으로 의지라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경우에 기독교의 기본입장에 비자발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의 기초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의 선포와 한 쌍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복음서의 말씀들과 조화를 이룬다. 짜라투스트라는 “속죄”에 대해서 “흡사 기독교 설교자”처럼 말한다. 이 속죄의 기본 동기는 바그너가 아니라 바로 니이체에 의한 것이었다. 이 책 짜라투스트라는 “내용적으로 反기독교적인 복음 같은, 그리고 뒤집어놓은 산상설교 같은 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니이체를 19세기 후반 개신교 목사 사택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런 경건성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니이체는 결국 그런 경건성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반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스스로 이 사실을 암시한 적이 있다. 그는 “도덕 계보학”(1887년)의 머리말에서 “도덕”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매우 일찍이 “의심스러워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혼란스러움은 “내 생애에 그렇게 일찍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그렇게 거리낌없이 내 주변환경, 제단, 모범, 유래와 대립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나의 ‘아 프리오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자기 증거가 암시하는 바는 니이체의 무신론이 죄와 회개라는 기독교 도덕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에서 나왔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비록 허무주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죽음은 역으로 도덕적 가치의 전복을 전제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환기시키는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의식의 기초가 떨어져나간다는 생각은 이미 니이체가 기독교 및 도덕과 논쟁을 벌이는 초기에 등장한다.

니이체가 무신론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가 프로테스탄트의 참회적 경향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이 사실을 직시해야만 니이체가 자신의 지적인 의심의 날카로움을 단 한번도 근대 무신론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또는 그 사회적 조건들을 향해서 시도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이해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았던 정직의 덕은 그에게서 사실상 매우 일방적으로, 또한 부분적으로 추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앞서 암시되었던 것처럼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니이체가 기독교에 대해서 비방했던 그 거울이 비록 깨진 것이라 해도 감사해야만 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종교적 경건이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충고에 대해서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이 충고는 이 불충한 목사의 아들이 집필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도덕 계보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기독교 신학을 위한 니이체의 잠재적 중요성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의 니이체 수용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니이체에 의하면 세계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신경증적인 현상인데, 이런 것이 기독교 안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되면 안 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포괄적인 자기와 세계 긍정이라는 바로 그 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자기 긍정과 세계 긍정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창조 신앙에 들어 있다. 구속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자의 사랑과 공속적이라는 사실은(마태복음 5:45) 기독교적 경건의 의식을 규정한다. 여기서 이미 창조자의 사랑은 창조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로써 늘 변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와 그것의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완성은 하나님이 예수의 변용(變容)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를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세계를 아무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전환해버리는 게 아니라 땅에 충실하라는 짜라투스트라의 요구와 전반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b) 하이덱거와 실존주의

 

니이체에 의해서 묘사된 허무주의적 상황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실존철학의 여러 형태를 얽어매는 역할을 했다. 더욱이 마틴 하이덱거(M. Heidegger, 1889-1976)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니이체의 사상에 익숙한 상태였지만 특히 1920년대 후반 이후로 (1927년에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출판된 이후) 니이체의 허무주의 개념을 자신의 학문적 바탕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神죽음의 결과라는 니이체의 최초 언급에 기초해서 하이덱거의 사상은 일찌감치 이런 허무주의적 세력권 안에 빠져들고 말았다. 비록 그가 잇달아 이런 세력권 내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애를 썼지만 말이다.

하이덱거는 이미 고등학생 때 프란쯔 브렌타노의 작품 “Von der mannigfachen Bedeutung des Seienden nach Aristoteles”(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존재자의 여러 의미에 대해서, 1862)를 읽었으며, 1909-1911년 사이에 칼 브레이크의 카톨릭 신학 대학생일 때는 특별히 존재론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겨우 4학기를 마친 다음에 완전히 철학으로 전과했으며, 신칸트주의자인 하인리히 리케르트(H. Rickert)의 영향으로 존재론은 인식론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고자 했다. 이로써 (신)스콜라 철학적 존재론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최고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하이덱거 사상에 내재한 “神죽음”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이 배경은 니이체와 관련되었다. 신앙과 사상이 이런 발전을 통해서 구분되었지만 하이덱거는 기독교와 내적인 관계를 확고하게 유지했는데, 그 동기는 전통적인 존재론과 현상학적 존재론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교수자격논문(1915)에 나타난, 혹은 프라이부르크에서(1923년까지) 후설과의 공동작업을 펼치던 시기에 하이덱거 사상에 나타난 기독교적인 동기는 “사실적인” 삶의 경험에서 오는 존재방식에 대한 흥미와 연관되어 작용했는데, 하이덱거는 이 경험을 “역사적인 것”이라고 일컬었다. 경험의 역사성에 대한 딜타이의 분석을 뛰어넘어, 부활한 그리스도의 임재(臨再)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 “카이로스론적인”(kairologisch) 신앙이해는 하이덱거가 이해하는 역사적이며 사실적인 삶의 경험에서 심층적 의미를 획득했다. 이러한 신앙이해는 바울 공동체에 기원하는 것인데, 이미 어거스틴의 경우에 신플라니즘적인 사상을 통해서 은폐된 바 있으며, 반면에 초기의 루터는 모든 철학과 대결하기 위해서 이것을 새롭게 살려낸 바 있다. 그렇지만 하이덱거는 원시 기독교의 경험을 철학적으로 단지 역사성에 대한 범례로 다룸으로써 이 경험의 특수한 성격이, 특히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이런 경험과 맺는 구성적인 관계가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로도 하이덱거는 기독교 신앙을 늘 실존적 경험의 특수한 형식으로만 그 가치를 인정했다. 신앙 자체를 구성하는 대상 관계를 현혹하면서 말이다.

하이덱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1927년)은 새롭게 발견된 역사성의 차원이 후설과 관련해서 현상학적으로 파악된 존재질문과 연결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 현존재의 범례와 길잡이는 곧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주제인데, 여기서 “존재”의 의미가, 또한 이로써 모든 형식적, 지역적 존재론의 전제가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현존재의 미래에서 발생하는 시간성을 분석하고, 또한 현존재 실행의 역사성을 분석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일어나는데, 이 역사성은 단지 존재적인(ontisch) 모든 소여와 달리 현존재의 존재 성격을 규정한다. 이로부터 이제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로부터 차별화된다. 하이덱거는 그 뒤에서도 계속적으로 이 차별화를 역설했다. 또한 그의 생각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역사가 바로 이런 차별화의 체계적 은폐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이덱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부임 강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에서 존재를 존재자의 무(無)라고 주제화했다. 이 무는 현존재가 자기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무와 두려움의 철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야만 했다. 헤겔의 말대로 존재는 존재자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다. 즉 존재자의 무다. 그러나 그저 부실(不實)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하이덱거는 이렇게 주장하게 되었다. 형이상학은 그리스의 초기부터 니이체에 이르기까지 존재자로서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존재자의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존재를 존재자와의 구별 안에 숨겨두었다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모든 실체들과 구분하여 actus essendi(실질적 존재자)라고 일컬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또한 신플라토니즘의 존재론적 전통에 근거해서 항변을 받았는데, 정당한 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실체들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해서 그것에 등장해야만 하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비판 앞에서 하이덱거를 방어하려면 각각의 집필자들이 그에 의해 강조된 존재의 역사성을, 즉 존재자와 상대해 있는 존재의 역사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하이덱거는 존재자로서의 존재(Sein als Seienden)와 존재자의 존재(Sein des Seienden)를 충분하게 구별하지 않고, 혹은 이 양자를 뒤바꿔가며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중세기 철학의 보편 실재론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에 자기 내부에 문제가 생긴다. 즉 이런 언급은 추상적 보편인 존재 개념의 실체화에 기인한다는 의혹을 사게된다. 후기의 하이덱거는 숨거나 드러나는, 비밀 가득한 주관에 대해서 언급하듯이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했다. 그리고 하이덱거는 이런 의혹 앞에서 자신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은 채 실체화된 추상을 관건으로 다루고 싶어했다.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은 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철학적 인간학으로 수용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아주 유별난 효과를 거두었다. 하이덱거 자신이 이 책에서는 한번도 “현존의 완전한 존재론”을 핵심문제로 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현존의 완전한 존재론이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리매김으로서 불가결할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현존 분석은 (그 역사성에 내재한) 현존의 특수한 존재 양식을 끌어내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이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가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것은 출판되지 않은 이 책 제2권에서 다루어져야만 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존재를 존재자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 반성하는 데서 “존재와 시간”을 “초월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뒷날 하이덱거에 의해서 이러한 과업에 별로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포기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존재와 시간”의 조치가 이 책을 철학적 인간학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데 공동의 연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미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하이덱거의 “현존재 분석”을 철학적 인간학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불신앙적인 (혹은 신앙 이전의) 현존재의 존재 이해에 대한 범례로 다루었다. “불신앙이 인간적 현존 일반의 기본 토대인 것처럼” 말이다. 철학은 늘 이런 현상을 보지만, 그것을 불신앙으로 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가 그 안에서 구성되는 자유, 곧 근원적인 자유가 그 현상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존재와 시간>에서 묘사된 현존의 자기실현은 사실상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존재의 자기 구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고유한 죽음의 미래에 직면한 현존재는 “멸망할 상태”로부터 자신의 주변 환경이 보이고 있는 자명성 앞으로 구출된다. 하이덱거는 키에르케고오르와 딜타이의 사상을 되짚어 봄으로써 이러한 현존 분석학을 발전시켰다. 키에르케고오르에 의해서 묘사된 불안 현상은 하이덱거에게서 인간을 일상적 삶의 비고유성으로 풀어내는 기능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불안에는 개인들에게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자유가 문제로 대두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하이덱거는 키에르케고오르와 반대로 불안을 고유한 실존에 이르는 길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키에르케고오르의 경우에 불안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특색으로, 또한 자유와의 관계라는 특색으로 나타나는데, 그 고유한 유한성이라는 토대에서 자유를 획득하는 그 모든 일이 인간의 참된 동일성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절망에 빠지게 한다는 시각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인간의 참된 동일성은 인간 실존의 구성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부터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이덱거나 그를 추종하는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이와 달리 키에르케고오르가 뜻하고 있는 주관성의 허구적 실존 형식이 “자기 스스로 나름대로의 진리가 된다 ... 절망으로서의 실존에 대한 키에르케고오르의 명제는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으로 수용된다.”

하이덱거의 경우에 인간의 유한성을 영원과의 관계로 정의하는 키에르케고오르의 형이상학적 틀은 현존재의 의미 전체성이라는 딜타이의 기초구상으로 대체되었다. 이 의미 전체성은 시간적인 구조를 갖기 때문에 생명 순간의 최종적 의미가 죽음의 순간이 이르러야 규정될 수 있다. 하이덱거에 따르면 고유한 죽음의 미래를 미리 앎으로써 바로 그 길에서 자기의 유한성에 내재한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성이 추론된다. 이 때 물론 어떻게 인간이 자기 죽음의 미래에 직면해서 자기의 현존을 유한한 것으로 넘겨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아있다. 이런 질문은 “존재와 시간”에서 양심의 소리를 설명함으로써 답변되었다. 하이덱거에 따르면 이 양심의 소리 안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부르짖는다. “현존재는 양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부르짖는다.” 휴매니즘에 대한 논문에서도 이르기를, 인간은 “존재 자체에 의해서 자신의 진리성에 참여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장-폴 싸르트르는 자기 철학의 주저인 “존재와 무”(프랑스어판 1943년 간)에서 하이덱거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인간 존재의 “존재론”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 존재론은 하이덱거의 경우에서처럼 존재자와 구별된 채 인간 현존재를 뛰어넘어 존재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베르그송에 의해서 규정된 의식철학과의 관계를 유지한 것도 아니었다. 싸르트르는 하이덱거가 현존 개념을 통해서 의식을 배제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싸르트르는 의식을 사물의 즉자존재와 반대인 대-자-존재(Für-sich-sein)로 규정했다. 퓌르지히는 자유를 통해서 규정되며, 이로써 다른 모든 즉자존재와 부정적으로 관련된다. 또한 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 내부에서도 역시 존재 결핍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만약 대자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즉자존재의 토대로, 즉 causa sui(자기 원인)으로 실존하게 되었다면 이런 존재 결핍은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적 전통의 언어에서 신적인 존재에 대한 묘사다. 따라서 싸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런 목적에, 즉 즉자와 대자에서 발생하는 “총체”에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싸르트르는 1946년에 자신의 에세이 “실존주의는 휴매니즘인가?”에서 인간은 자유를 향해서 나가도록 “처분 받았다”고 썼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자유 행위에 토대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은 인간의 본질에 앞서 간다는 것이다. 싸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사상을 이것과 연결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고유한 설계를 통해서 이 문제가 전체 인류에게 필요하다는 칸트 사상으로 전환했다. 즉 “내가 나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퓌르지히 철학에 철저하게 응집되지 못한 이러한 전환은 싸르트르가 뒷날 혁명적 공산주의와 동일시되는 다리를 놓게 되었다.

하이덱거는 자기의 휴매니즘에 대한 논문에서 자기 사상을 실존주의 개념에 부가시켜 나갔는데, 이것은 싸르트르에 의해서 실행된 작업이었다. 실존이 돌아가야 할 본질개념에 설정되었던 실존을 오히려 모든 본질 규정보다 상위로 전도(顚倒)시키는 일은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세력권 내에 있는 것이다. 즉 “ ... 형이상학적 명제의 전도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머물러 있는데,” 이 명제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망각에 머물러 있다.” 이 안에서 이러한 전도는 “이런 철학에 어울리는 제목인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하이덱거는 자기보다 여섯 살 위인 야스퍼스와 그렇게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1919년에 출판된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과의 논쟁은 하이덱거 사상이 “존재와 시간”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야스퍼스는 이 “세계관의 심리학”을 통해서 정신병학에서 철학으로 옮겨갔다. 딜타이의 세계관과 그의 심리학에 기초한 작품에 대해서 하이덱거가 제기한 비평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보다도 “한계상황”, 즉 죽음, 고통, 투쟁, 죄책에 대한 야스퍼스의 진술에 가까우며, 또한 하이덱거 자신을 “존재와 시간”의 앞마당으로 옮겨놓은 사상들에 대한 그의 실존적 각성에서도 야스퍼스의 진술이 중요하다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덱거는 야스퍼스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즉 야스퍼스의 작업을 견인하고 있는 생명의 “전체”에 대한 “선취” 개념은 “훨씬 더 극단적인 방법적 숙고”를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 분석학은 현존재를 존재 양식이라는 방향에서 연구하는 한에서 이러한 방법적 숙고를 통해서 특징화되었다. 물론 야스퍼스는 이러한 존재론적인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3권으로 구성된 그의 저서 “철학”(1932) 제1권(세계정위)에서 주관과 객관의 상호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학문적 세계인식의 한계에 대해서 숙고했는데, 이런 세계정위는 그 어떤 세계상도 이룩할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제2권(실존해명)은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는 자기존재와 자기 단일성의 “실존”을 현존재와 의식일반, 그리고 역사정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간에 대한 학문적 전망으로부터 떼어낸다. 제3권(형이상학)은 실존이나 마찬가지인 세계현존재를 대상의 측면으로만 능가하는, 그러나 한계상황이라는 면에서 고유한 실존을 의식함으로써만 경험될 수 있는 초월과 실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실존은 이 초월을 자기의 유한성에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초월과의 관계에서만 실존은 자기의 전체를 발견한다. 죽음은 다만 “나는 전체인가, 혹은 단지 끝장나는 게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제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을 초월과 상대적인 자리에 놓음으로써 하이덱거나 싸르트르와 달리 키에르케고오르의 실존분석과 확고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한 자기 존재를 영원과의 관계로 이해했다. 이 영원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자기의식과 태도에 놓인 이러한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따르면 세계현존을 능가하는 초월은 개인적 현존재가 실존주의적으로 의식할 때만 일어날 수 있지, 보편타당한 지식의 대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적 의식은 그 어떤 인식도 중재하지 않는 “암호”를 통해서만 초월 안에 있는 그 토대를 확인하는데, 이 암호는 이를테면 “초월의 진리성은 실존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진다.”는 언급을 일컫는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성서 종교의 유일신은 단지 이러한 암호일 뿐이다. 비록 잘 알려진 대로 그것이 철학적 신앙의 대상이지, 단순히 계시신앙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계시신앙은 오직 실존적으로만 구속력이 있는 암호를 “실질적인 리얼리티”로 전도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리얼리티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진리로 등장하는 것을 뜻한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기독교적 “배타적 요청”을 비판하여 이르기를 기독교가 타종교를 배척하는 원천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요청에 의해서 정화된 성서 내용을 지켜나가려고 했다. 즉 도그마의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를 지켜나가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라는 주장을, 그리고 이에 근거해서 온 세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야스퍼스 같은 이들의 비판을 통해서 기독교 사신이 타종교를 배척함으로써 일어난 왜곡 현상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또한 계시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한 신학적 지식의 잠정성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위험이 발생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야스퍼스가 제안했던 바처럼 종교적 신앙의 내용을 암호로 변경시킴으로써 신앙 가운데서 이해된 진리가 인간의 주관성으로 축소된다는 사실을, 신학이 인간학으로 축소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미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가 비록 실증적인 해석의 방식이었지만 그 사실을 주장한 바 있다. 이를 통해서 야스퍼스의 암호론은 인간 스스로 독립함으로써, 또한 이렇게 자기 실존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자유 안에서 행동할 때 자기 현존의 전체성에서, 또한 실존이 토대하고 있는 영원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키에르케고오르의 통찰에 극단적으로 휩싸여버린다.

하이덱거는 억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신들의 현현이 가능한 영역을 성자의 차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억제는 야스퍼스의 암호론과의 관계에서 훨씬 적절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이덱거는 휴매니즘에 대한 논문(1947년)에서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설정한 싸르트르의 주장을 배격했다. 오히려 우리는 성자를 우선 존재의 진리로부터 생각해야 하며, 또한 거기로부터 신성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철학은 유신론적이거나 무신론적인 게 아니다. 그렇지만 하이덱거는 1927/28년에 집필했지만 1969년이 되어서야 출판된 강연집 “현상학과 신학”에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신앙의 하나님과 엄격하게 구별했다. 이 강연집에서 신앙은 철학의 “철천지원수”로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신앙은 “全현존재의 자유로운 자기인계”와 대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신학을 “조정하는 수단”인 철학이 “실증적 학문”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한다는 하이덱거의 주장이 방해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소위 신앙은 거듭남이며, 또한 “거기서 신앙 이전의, 즉 불신앙적인 현존의 실존이 지양되기” 때문이다.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하이덱거의 관계규정은 신학의 대상이 “인간 현존재의 실존 방식”인 신앙에 한정되거나 혹은 그 안에 기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신앙은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즉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인 그리스로부터 규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진지하게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계시행위는 신학의 대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학이 하나님을 모든 존재자의 기초로서, 또한 그 존재자의 존재 원천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주제를 신관에서 풀어놓으려는, 또한 그 신관에서 완전히 대립적으로 독립시키려는 하이덱거의 수고는 그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헤겔 이후 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통해서 신칸트주의적 인식론의 형식과 후설의 현상학적인 형식이라는 조건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이덱거는 존재론적인 주제가 이런 것에 조건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갖고 당연히 신학의 대상을 신관으로부터 숙고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통해서 규정된 인간 실존으로만 숙고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신학적 사유에 편입시키기 위한 기독교 교부신학의 토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토대는 신관에서 주어진 것들을 말한다. 그러나 하이덱거의 통찰대로 인간의 신앙적인 거듭남이 잠정적인 현존재를 포괄적으로 믿을만한 실존으로 지양시켜나가는 것과 똑같이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철학의 현실성 서술과 철학적 존재론을 하나님의 창조인 세계에 대한 신학적 서술로 지양시킬 것을 요청한다. 인간의 거듭남은 자기를 피조물로서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은 철학의 “철천지원수”일 필요는 없다.

 

 

c) 철학적 인간학

 

하이덱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은, 비록 하이덱거가 기초 인간학을 뛰어넘어 존재론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실존을 이루어 가는 인간의 존재이해를 위해서 존재론적인 주제를 되돌려 받는 철학적 기초 인간학과 같은 그 무엇이다. 싸르트르의 경우에 존재론에 관한 전문용어는 퓌르지히라는 표식 가운데서 인간 실존을 해석하는 단순한 도구가 될 뿐이라는 점이 아주 분명했다. 또한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도 역시 실존 의식은 철학적 세계정위의 토대를, 또한 형이상학을 암호 언어로 해석하는 토대를 이룬다. 야스퍼스의 경우에 실존의 거점이 세계 안에 있는 인간 현존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또한 객관과 상대적인 주관으로서의 의식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역사적-공동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써 획득되는 한에서 이런 토대는 인간학적으로 규정된다. 바로 이처럼 야스퍼스의 경우에 이러한 영역의 관계가 상호적이고 개별적으로 인간 현존의 육체성에 대한 실존의식의 관계를 낮은 단계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분명하다. 싸르트르나 하이덱거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실존철학은 헤겔 이후에 일어난 인간학으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서 그 자리가 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식철학이라는 전통을 향해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반해 포이에르바흐의 후계자들 중의 하나인 니이체는 이미 정신을 육체보다 상위에 두려는 전통을 반대하고 육체와 그 “이성”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 니이체의 이런 사상은 실존철학에서 더 이상 추구되지 않았다. 니이체의 사상은 실존철학을 뛰어 넘었으며, 베르그송에게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생명 철학으로 발전되어 정신 물리학적인 연관을 철저하게 묘사하게 까지 되었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단일성이라는 특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막스 쉘러(Max Scheler)에 의해서 그 토대가 잡힌 철학적 인간학의 입장에서 제시된 과업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형식을 식물이나 동물의 그런 형식과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규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틀림없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선 나머지 생물들과 비교할 때 인간 종(種)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처음부터 모든 여타의 생물과 떼어놓는 특별한 위치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비록 인간이 다른 생물을 능가하고 있지만 말이다. 쉘러에 따르면 식물에서 볼 수 있는 나름대로의 “감정 충동”은 모든 다른 생명 형식의 토대다. 이것들은 동물의 경우에 본능적 행동과 “연상적” 기억을 통해서, 또한 (보다 고차원적 동물의 생명 형식에서는) “실천적인 지성”을 통해서 그 생명 형식을 상승시켜 나간다. 인간의 경우에는 쉘러가 특수한 의미에서 “정신”이라고 불렀던 것이 부가되며, 그리고 다른 생명 기능과의 관계에서 “억제”로 나타나는 것이 부가된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발생하는 충동적 자극의 억제가 부가된다는 말이다. 본능적 행동반응이 억제됨으로써, 쉘러에 의해서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거명된 “세계 개방성”의 토대가 놓이며, 또한 충동이 제거된 채 대상을 실질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의 토대와, 자기의 행동 정향에 자유롭게 상응할 수 있는 능력의 토대가 놓인다. 쉘러에 의하면 이러한 “정신에 의한 세계 개방성”은 자기의 생명 중심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한다. 즉 우리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게 하는 자의식을 가능하게 한다.

쉘러는 정신이 “모든 개개의 생명 일반에 대립되어 있는, 인간의 생명에도 역시 대립되어 있는 원리”라고 보았으며, 또한 그것은 그 어떤 세계 소여성에서도 끌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고의 존재 근거 자체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보았다. 쉘러는 인간의 특성에 대한 질문에서 인간의 육체성과 그 육체적인 행동으로 정향 된 철학적 인간학의 새로운 착상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정신 개념 때문에 여전히 헬라의 고대 사상으로 소급되는 몸과 영혼의 인간학적 이원론에 대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쉘러의 철학적 인간학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게엘렌은 이 문제를 피해보려고 했다. 더욱이 게엘렌은 인간적 생명 형식의 특성을 환경에 의한 속박이 아니라 세계 개방성 개념으로 설명한 쉘러의 입장을 인간과 이웃하고 있는 동물에게 적용시켰다. 그는 이런 특징에 토대하고 있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즉 인간의 지각은 그 대상을 충동적으로만 관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대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게엘렌은 인간 지각의 이러한 특성을 쉘러와 마찬가지로 충동의 “억제”로 생각했다. 그는 쉘러와 더불어서 이러한 억제의 원인을 “정신”에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에 게엘렌은 인간의 경우에 충동 체계와 대상 지각 사이에, 또한 충동과 행동 사이에 파열과 간격이 있다는 서술적 확인에 한정했다.

게엘렌에 따르면 이런 사태는 인간이 세분화된 기관의 결함으로 인해서, 또한 그런 기관에 연결된 본능으로 인해서 구체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결핍의 존재”로 보인다. 비교적 세밀하게 발전되지 못한 인간 기관에 맞물려서 인간의 본능도 퇴보했다. 우리의 지각은 결코 정밀한 본능적 반응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중요한 것만을 통과시키는 감각 기관이 여과기 구실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직접적으로 그런 충동에 관련되지 않는, 또한 그 즉시로 그에 상응해서 반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자극과 지각에 완전히 휩싸여 있다.

그래서 인간은 우선 지각의 영역에서 방향을 잡아야 할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충동적 정향의 불빛에서 방향을 잡아가야 하는데, 이 충동의 에너지는 정향의 결핍으로 인해서 “충동 과잉”으로 드러나게 된다. 게엘렌에 따르면 이 양자의 과업에 결정적인 요소는 언어의 훈련과, 더 나아가서 문화의 훈련이다. 그는 이 두 요소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이해했다. 이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생물학적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곧 자기 현존의 자연적 조건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행위에 대해서 강압적으로 작용하는 흥분의 여러 층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이 언어와 문화를 통해서 상징적인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말이다. 이 우주는 여러 가지 일의 질서를 허락하며, 자기의 충동에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게엘렌은 인간을 “행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존재는 자기의 세계를 다스림으로써 자기를 창조해나간다. “쉘러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至高한 존재근거’의 덕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반면에, 게엘렌은 인간이 언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를 창조해 나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종교와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창조로서, 세계 지배의 주변적 산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종교와 도덕은 비록 개인적인 행위와 맺는 상호관계에서 발생했지만 이제는 이런 근원과 달리 자기를 목적으로 해서 독립하며, 그런 의무적 성격을 통해서 사회적 생활 관계 안에서 개인의 태도를 정리하는 “제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엘렌은 행위개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제도가 개인들을 구속하는 힘이 그 제도에 놓여 있는 의미 내용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등한히 했다. 물론 그 힘은 개인이나 그들의 행위에 앞서서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이 인간 행위일 뿐이라면 개인들을 내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적 근원에 대항해서 자기를 목적으로 독립하게 되면 자기 법칙성으로 인해서 소외되고 말뿐이다. 게엘렌은 언어를 행위에 축소시킴으로써 그 언어를 더 이상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의미 내용을 위한 기관으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제도로부터 구속력을 처음부터 제거해버렸다. 그는 이 구속력을 개인과 관계된 행위에게 부여하고자 했다.

인간을 “행위하는 존재”로 보는 게엘렌의 견해는 초기 피히테의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피히테는 경험의식의 세계를 자아의 “사행”(事行)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 인물이다. 게엘렌은 이러한 사상을 자연적 능력이 부족한 자연적 존재인 인간에게 적용시키면서 이러한 존재가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고유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지, 또한 무엇을 통해서 자기 환경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특수성이 “단지” 정신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육체나 행위에서도 실현된다고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다른 문제다. 혹은 인간을 행동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타당한지 아닌지, “인간을 동물로 간주할 때 정신도 이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하는 질문도 역시 다른 문제다. 행위개념은 행동이 형태학상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작용하고, 이를 통해서 “이러한 존재의 생명력”을 보증함으로써 쉘러가 말하는 정신의 자리에 그렇게 간단히 등장할 수는 없다. 아돌프 포르트만(A. Portmann)은 이미 “다른 중심적 본능 체계의 강력한 증가는” 인간의 경우에 본능의 저하에 (그리고 그것에 일치하는 형태학상의 非세분화에) 대립해 있다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 본능 체계는 “뇌 껍질의 무리와 그런 길”의 증가와 상응한다. 행동능력은 인간의 지성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인데, 게엘렌의 경우에 이것은 비본능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철학적 인간학의 세 번째 형태에 대한 개념적 사유가 증명되는데, 그것은 쉘러와 게엘렌이 아니라 헬무트 플레스너에 의해서 발전된 형태를 말한다.

플레스너는 자신의 저서 “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1928)에서 환경과 유기체의 관계를 세 가지 기본 형식으로 구분했다. 플레스너는 이것을 “조정성”(Positionalität)이라고 일컬었다. 식물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환경에 적응해버리고, 그 환경에 맞서서 그 어떤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데 반해서, 동물은 자기 내부에 “닫혀진” 생명 형식으로서 자신의 환경과 상대적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 이와 달리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편심”(Exzentrizität)에 기초해서 그 특징이 드러나게 된다. 인간에게 “자기 실존의 중심성은 분명하다. ... 자기 실존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중심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경험하고, 따라서 그것을 뛰어넘는다.” 여기서는 플레스너가 육체 없는 자아의 자기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육체적 현존과의 관계로 생각하려고 했던 자의식이 핵심이다. 이로써 고유한 현존과의 관계에서 단절과 “간격”이 생겼으며,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런 능력은 영혼과 육체 사이의 차이에 토대를, 또한 인간 인격성에 대한 토대가 형성하는데, 이는 다시금 동시에 인간적인 현시대를 조성한다.

플레스너는 편심을 그 기원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은 채 인간이 현존하는 형식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인간 현존의 육체에 대한 서술을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진술은 쉘러에 의해서 “세계 개방성” 개념을 통해 주어진 것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을까? 플레스너는 세계 개방성이 본능 조건에 비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에게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편심”으로서의 그 사태를 자기의 중심에서 (따라서 다른 모든 소여에서) 거리를 두는 능력을 통해서 훨씬 잘 묘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유한 육체적 현존에 대해서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지각을 통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지각의 대상에서 다소간에 충동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수 있다. 이것은 쉘러가 세계 개방성 개념을 통해서 진술한 것과 같은 주장이다. 지각 대상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처음부터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고유한 육체적 현존을 타자 가운데 있는 대상으로 지각하는 가능성도 역시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어린이는 자기 관계를 나타내는 “자아”라는 어려운 단어의 사용을 익히기 전에 우선 다른 이들이 자기를 부를 때 사용하는, 그리고 자기에게 적용되는 자기 이름을 배운다.

지각에 의한 삶의 “세계 개방성”과 게엘렌이 주장하듯이 본능 축소 안에 있는 세계 개방성의 조건들은 플레스너가 묘사한 대로 인간의 편심적 자리에 속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그의 명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으며, 오히려 철학적 인간학의 자리매김에 대한 나머지 노력들과의 연관 안으로 편입되었는데, 이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육체를 지향한 것이며, 또한 우리의 육체적 태도에 놓인 특별한 요소들과의 질문과 연결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세계 개방성”으로 묘사된 자기 세계 내의 인간적 태도와 인간 상황의 특성은 이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 자기 관계에 대한 플레스너의 강조를 통해서 부가된 요소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게엘렌에게 볼 수 있듯이 행위 개념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용을 교정하려는 요소가 개입해 있다. 왜냐하면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의 단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편심에 기인하는 자기 관계의 파손에 대한 플레스너의 설명은 이러한 전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플레스너는 세 가지 “인간학적 근본법칙”을 통해서 인간의 “편심적인 자리”가 드러내고 있는 귀결을 보다 자세하게 규정했다. 첫째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편심적으로 조직된 존재로서 이미 주어진 자기의 본질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틀림없다.” 인간은 본성상 인위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편심적 존재로서 자기 실존과 동일한 무게를 거듭해서 우선적인 것으로 생산해 내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모든 이런 결과는 다시 능가될 수 있으며 앞지름을 당할 수 있다. 플레스너에 따르면 편심적 생명형식의 두 번째 귀결은 “중재된 직접성”, 즉 인간적 생명 실행의 모든 직접성은 고유한 존재에 대한 재귀적(再歸的) 간격을 통해서 이미 중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로 고유한 육체와의 관계에 해당되는데, 이 육체는 인간을 “표현”하는 요소를 가리킨다. 또한 이것은 “역할”을 감당하는 능력, 그리고 고유한 행위에 의한 산물을 그 인격의 “표현”으로 인식하는 능력에도 해당된다.

인간의 편심적 자리에서 발생하는 세 번째 귀결은 신학적 인간학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즉 그것은 현존의 우연성에 대한 앎이며, 또한 이로 인해서 최소한 포괄적이나마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여기서 이 하나님은 모든 소여된 것에서 멀어지고 우연성에 떨어지는 인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분이다. 인간은 간격을 두는 자기의 능력을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돌릴 수 있다. 물론 플레스너에 따르면 “본질의 상호관계”는 인간의 편심적 명제 형식과 절대적 존재로서 세계에 토대를 놓는 존재인 하나님 사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플레스너에게는 쉘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편심과 세계 개방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즉 세계에 소여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세계의 절대적인 토대를 향해, 그리고 인간적 생명 실행의 절대적인 토대를 향해서 개방된다는 말이다. 플레스너는 쉘러의 정신론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다. “자연으로부터는 결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러한 존재가 된다.” 비록 그가 간격을 두는 인간적 편심의 능력 가운데서 무신론의 가능성이 기초한다고 보았지만 그의 생각은 위에서 인용된 문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플레스너와 쉘러, 이 양자는 다른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제도에 대해서도 역시 억압의 고정화라는 제2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게엘렌과 반대의 입장을 견지했다.

 

 

4. 자연철학으로 나아가기

 

쉘러의 후계자들에게서 발전된 철학적 인간학의 단초는 인간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인간을 원인적(原人的) 본성과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본성적 발전의 연관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이미 다윈(Darwin)보다 앞서 스펜서(H. Spencer)가 관찰했던 과업이다. 이 과업은 무엇보다도 다윈의 작품 “종의 기원”(1859년)과 “인간의 유래”(1872년)가 출판된 이후에, 특히 영국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논의는 20세기에 진화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새뮤얼 알렉산더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볼 수 있듯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 철학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논의 역사에서 베르그송(1859-1941)의 업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생명을 철학적으로 이해해보고자 애를 썼다. 이는 곧 생명현상에 대한 심리학적인 전망과 육체적인 전망을 통합하고, 이로써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베르그송은 이런 노력을 통해서 리얼리티 일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화이트헤드의 업적에서 정점에 도달한 과정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인간의 자기 경험에서, 특히 시간 경험에서 생명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입구를 발견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철학은 자연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단초의 확대라고 설명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이들의 인간학적 출발점을 통해서 이들의 과정 철학적 형태는 자연철학의 다른 형식들과 구별되었다.

베르그송은 처음부터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가 “이 체계에서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느끼기 전 까지는 말이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시간이라는 사실은 사물의 가장 내적인 것이 미결정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시간은 바로 이런 불확정 자체는 아닌가?”

베르그송은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성에 대해 연구한 그의 첫 책에서 인식을 위해서는 분석적 오성 이외에, 혹은 그 이전에 직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직관 형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간 내에 있는 실제적인 것의 단일성이다. 우리 지각의 단일성만이 아니라 생생한 리얼리티 자체도 주어진다. 양자는 지속(durée)의 형식을 갖고 있는데, 그 지속은 변화와 대립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변화하며, 이로 인해서 확실히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는 것을 말한다. 베르그송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연속은 영속적인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지 고립된 순간의 연속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그것보다 우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물로, 과거의 돌진으로 경험한다. “과거는 미래를 갉아먹고, 돌진함으로써 팽창한다.” 기억은 바로 우리의 생명역사가 걸어온 이러한 축적이 저장되는 장소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전체 여정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기억된 것을 선택적으로만, 그리고 보관된 것을 기억함으로써만 작동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일지라도 우리의 기원, 의욕, 행위, 그리고 우리를 앞서 몰아가는 경향 가운데서 우리에게 현재한다. 이 경우에 “경향”이라는 표현은 어떤 목표 지향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광속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폭발력”을 가리킨다. 이는 곧 변화와 새로움을 향해서 돌진하는 생명의 충동(élan vital)이다. 그 어떤 구체적인 목표가 없이 말이다. 새로움은 역으로 과거와의 단절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 과거의 변화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새로움이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명확해 질 수 있을 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관찰한 바와 같이 부단한 생성(Werden)의 형태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이 우주의 참된 본성이 말하고자 하는 특징이다. 오성 사상은 분명히 지속적인 생성을 등한히 다루며, 다만 외부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상태의 변화만을 주목할 뿐이다. 현실성을 바르게 이해하면 사물과 상태의 전후 맥락에 연결되어 있는 생성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변화를 고정된 것으로부터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우리의 지성이 실제적인 목표에 봉사한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외계를 향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앞서 발견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게 분명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한 생성을 지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대신에 우리는 상태와 이러한 상태의 규칙적인 반복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지성을 이렇게 구성하는 질서는 공간 안에 있는 상태와 사물의 질서이며, 기하학적인 질서다. 이 질서는 모든 연역의 기초가 되며, 또한 경험지식에서 야기된 모든 법칙성의 기초가 된다. 이 양자는 “시간은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매 순간 동일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러한 자연 이해는 인공적인 구조이며, 실제로 계속적인 생성의 성격을 띤 현실성을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줄곧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생케 한다.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하듯이 상태의 단순한 연속은 그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관찰자는 여기서 상(像)의 연속을 연관된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시간 의식을 통해서 그곳에서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속적인 생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분리된 상태의 연속적인 상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산물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창조적인 생성 이외에도 생명의 형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진행은 생명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지는 곳에서 관철된다. 자발성, 에너지, 그리고 자유가 상승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된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서 묘사된 우주론적 과정의 방향과 대립해 있다. 후자가 균일한 열의 상태 (즉 열의 정지) 가운데서 결국 에너지의 흐름을 “아래로” 균등히 하는 반면에, 생명의 진화는 에너지의 축적을 통해서 “위쪽으로” 진행된다. 복합성을 증가시키고 자유를 성장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베르그송에게 생명의 진화는 무기적(無機的) 과정의 경향이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적 과정이 이에 해당하는 무게를 유인하게 된다면 생명은 그 경사를 타고 다시 올라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물질의 본질을 나타내는 엔트로피가 쇠퇴하는 경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이 운동의 상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생명 과정이 엔트로피 하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오해가 일어났다. 오늘날은 유기물에서 복합성의 증가가 환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엔트로피의 축소를 통해서 균일화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생명과정은 환경의 잠재성을 통해서 유지된다.

베르그송에 의해서 발전된 역동적인 세계관은 그 여파가 아주 강렬했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이 주장한 창조적 과정의 연속성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데는 이런 세계관이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그 어떤 만족스러운 답변도 주지 못했다. 만약 베르그송이 다윈주의에서 강조된 우연을 비판적으로 생각했다면 생성의 과정에서 연역될 수 없는 새로움의 등장은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하겠는가? 베르그송에게는 사건의 부단한 새로움은 이미 시간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우연에 대한 견해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개념이 정적(靜的)으로 굳어진 형식에 대한 표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생성의 진행에 등장하는 새로움을 어떻게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생성의 연속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 생성에서 발생하는 형태들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담겨 있다. 즉 베르그송도 역시 주장했듯이 그저 단순히 공간적인 오성의 착각 안으로 축소될 수 없는 구별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새뮤얼 알렉산더와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을 극복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상에서 베르그송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알렉산더의 경우에 베르그송은 시간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수용한 그 시대의 첫 번째 철학자라는 점에서 중요했으며,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베르그송은 고전 물리학을 통한 자연과정의 “공간화”를 올바르게 반대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생성의 과정으로 보는 베르그송의 고찰에 대해서 동의한다고 설명했다. 비록 화이트헤드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과정의 의미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알렉산더나 화이트헤드 양자 모두 자연과정 가운데서 연속적이지 않는 것의 계기를 베르그송보다는 훨씬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럼으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사건은 분리에서 연결로 나아가는데, 이럴 경우에 새로움이 발생한다. 연속성은 리얼리티 안에서 최우선이 아니라 다수와의 연결에 의한 결과다.

새뮤얼 알렉산더(1859-1938)는 이미 비연속적으로 소여된 것의 상위(上位)를 주장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시간 개념과의 관계에서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시간을 대자적인 생각에서 비연속적인 순간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이 순간이라는 것은 우선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비어 있기 때문에 대자적으로 결코 그 어떤 연속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시간은 차이를 가져오고 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한 공간을 통해서 자기 입장에서 연속적인 진행이라는 성격을 얻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적 계기는 상이한 장소에 공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역으로 잇달아 발생하는 상이한 시간적 계기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공간화”를 오성의 작업이라고 판단했으며, 더 나아가서 전통적인 실체 형이상학의 오류에 책임이 있다고 했는데, 알렉산더에 따르면 이 시간의 공간화는 시간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

알렉산더가 말하는 의미에서 시간적 계기의 연속적인 계승은 화이트헤드(1861-1947)의 경우에 비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사건”(events)의 연속에 대한 표상과 일치한다. 이 경우에 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앞서 등장했던, 그리고 그렇게 발생하는 지속(endurance)을 반복한다. 화이트헤드는 시간의 연속과 구별되는 사건의 공간성을 어떤 분명한 모형의 지속으로 돌렸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공간에 비해서 시간이 상위라는 점을 확신했으며, “공간성”을 생기(生起)의 연속에서 실현된 모형(pattern), 혹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의 귀결이라고 간주했다. 이는 곧 생기에서 실현된 것으로서, 그 모형을 형성하는 색, 소리, 향, 기하학적 형식들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화이트헤드는 시간 진행의 연속성을 베르그송과는 달리 근원적인 현상이 아니라 끌어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생기의 연속적 과정에서 모형이 반복하고 변화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따르면 자연사건을 비연속적인 생기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는 양자론(量子論)을 통해서 알려진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그 형식의 반복과 변화를 통해서 진동의 인상을 야기한다. 자연과정은 생기의 연속에서 일어나는 반복과 변화의 연결을 통해서 어떤 “창조적인 진보”라는 성격을 획득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évolution créatrice(창조적 진화)에 해당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의 변이를 베르그송보다는 좀더 분명하게 이러한 생성의 특성에 연계시켰다. 화이트헤드는 생성의 두 기본 형식을, 즉 성장(concrescence)과 변이(transition)를 구분했다. 변이는 개개의 생기가 자신의 생성이 완료된 다음에 그 기본 요소로서 다른 성장과정의 구조에 개입하는 한에서 역시 “건너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생기는 궁극적으로 유일한 실재(the final real things)다. 세계는 여기서 발생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이르기를 원자론적이라고 했다. 비록 그것이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나 고전 물리학과 달리 쪼갤 수 없는 최소의 물질에 대한 원자론이 아니라 생기에 대한 원자론이지만 말이다. 그에 비해 형식 요소는(모형, 영원한 대상) 그 어떤 고유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기에서 발생하는 만큼만 실제적일 뿐이다. 공간적 시간의 연속체가 이에 상응한다. 즉 “광범위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잠재력”(potentiality for extensive division)일 뿐이거나, 혹은 역으로 구체적인 생기를 추상화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이 생기에서 실제적인 실체들(actual enities)과 앞서 있는 것들과의 관계가 생산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의 토대인 생기의 수다(數多)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원자론은 개개의 형이상학적 원자론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이 난제들은 플라톤이 쓴 “파르메니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Parm. 165 ef.). 일자가 없이는 그 일자와 상이한 것은 하나일 수도 없고 여럿일 수도 없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無가 된다. 많은 하나는 그것과 동일한 것에서 온 (추상적 일자라는 의미에서) 여럿이다. 그러나 잇달아 관계를 맺는 여럿이기도 하며, 또한 전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하나가 그 어떤 전체를 이루는 게 아니라면 역시 바로 그 일자를 예시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없다. 개개의 경우에 포괄적인 단일성이 전제되는 게 틀림없다. 이로써 원자는 단일성 일반으로 생각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근본적인 난제들을 결코 논의에 부치지 않은 것 같다. 비록 그가 “Adventures of Ideas”(1933)에서 원자론의 다양한 형식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했으며, 이 경우에 데모크리토스, 에피큐로스, 루크레티우스로 소급되는 학습 전형을 비판했지만 말이다. 이런 학습 전형에서 현대의 자연과학적 원자론이 유래했다. 화이트헤드의 비판은 고대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원자가 우연을 통해서, 혹은 외부법칙에 따라서 단지 외부적으로만 잇달아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 반대하는 화이트헤드는 이에 이미 1925년 과학과 현대 세계라는 저서에서 개개의 생기는 내재적인 관계들(internal relations)을 통해서 앞서의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즉 그것에 해당되는 생기 자체에 구성적인 연관을 통해서 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러한 내재적 관계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계의 수다를 자발적으로 통합하는 개체적인 생기의 “주관성”을 전제한다는 것인데, 이 관계 안에 주관성이 놓여 있다. 생기를 구성하는 내재적 관계들은 이러한 생기 주관성의 행위로 간주됨으로써 “이해”(prehension)라고 불린다. 즉 새로운 생기가 등장하는, 그리고 그 생기 자체를 통해서 연관성을 갖게 된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이해다.

각각의 새로운 생기들이 앞서의 것들과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화이트헤드의 학설을 통해서 고전 원자론의 일방성이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각개의 새로운 생기가 세계의 모든 생기를 “이해해야”(prehendieren)만 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선재하는 것으로서 생기에게 떠맡겨진 것인데, 개개 생기의 조건은 나머지 계산 전체를 통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우주는 (혹은 시공 연속체) 개개 생기에게 실재적 전체로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기가 돌입해 있는 여러 가지의 관계들을 전체로 통합해야만 하는 개개 생기가 주어졌을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기초구상은 어쩌다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을 기억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여러 번에 걸쳐서 자기의 학설이 라이프니쯔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즉 그는 단자를 생기로 여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라이프니쯔에 의해서 단자의 “창문 없음”의 자리에, 즉 상호간의 관련성 없음의 자리에 각각 앞서의 것과 내부적인 관련을 맺음으로써 구성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로 인해서 각각의 계기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계기는 라이프니쯔의 경우에 단자론의 다원론과 평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개개의 단자가 신적인 원단자에서 기초된 우주의 단일성을 반사한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라이프니쯔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에 의해서 우주의 단일성이 개개의 단자에게 주어졌으며, 이로써 그 단일성이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개개의 생기는 자기로부터 벗어나서, 즉 자기 주관성을 통해서 세계의 단일성을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욱이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우주의 단일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보증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자로서 우주에 상대해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원시적인 본성”(primordial nature)에서 모든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s)의 장소일 뿐이다. 즉 모든 대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 개개의 생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가능성의 장소라는 말인데, 이 대상이 생기를 자기 구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개개 생기에게 자기를 실현하는 데 몹시 중요한 가능성을 생기가 이루어야 할 최초의 목표(initial aim)로서 제공한다. 그러나 이 생기가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실화하는지는 자기의 “주관성”에서 결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다시금 다른 실제적 실체(actual entity)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생기 전체를 이해하는 게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원하기 때문에 이 경우 자신의 “수미일관된 본성”(consequent nature)에 따라서 우주 전체를 자신의 최종적 단일성으로 통합시킨다. 화이트헤드에게는 이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이 세계 창조자이지, 개개 생기의 현존을 발생시키는 장본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생기는 오히려 자기의 “주관성”에서 창조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기독교 신학이 특히 북아메리카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해서 기독교 신학을 새로운 형태로 정초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난제가 놓여 있다. 신학을 위해서 이러한 과정철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견인력은 전적으로 이해될만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현대 자연과학적 세계 이해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세계 개념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다. “과정철학”은 신관과 세계개념이 공속적이라는 사실을, 또한 신학에서 경건주의적 경험 주관주의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하나님의 현실성이 세계의 리얼리티와 더불어서 발산된다는 점을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이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창조자 하나님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각각의 생기를 창조하는 분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을 창조하도록 자극하는 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세계의 창조를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로서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유와 그 피조물이 세계의 형성에 끼친 창조적 기여를 통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시야를 열어준다. 세계가 우선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우주의 창조로 형성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피조물의 개체에 대해서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그 근본에서 철저한 변형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개체적인 생기의 “주관성”에 대한 그의 이해가 철저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기본적 생각은 윌리엄 제임스(W. James)의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윌리엄 제임스를 개척자적인 사상가라고 치켜세우면서 자기의 철학이 그에게 빚진 바가 많다고 했다. 제임스는 자아를 칸트의 생각과는 달리 “부동적이고 영속적인” 주관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주관은 우리의 의식에서 모든 경험의 다양함을 일치시키는 조건을 가리킨다. 즉 그는 자아를 순간의 크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의 크기는 선행하는 자기 계기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 의식과 더불어서 내부에서 통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있는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되어야 하는 생기의 연속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기본구상과 제임스의 생각을 비교해보는 일은 관심을 기울일 만 하다. 그리고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생기 주관성에 대한 자신의 학설에서 제임스의 심리학적 명제를 보편화했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명제가 보편화를 통해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설명과 들어맞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베르그송의 생명철학과 똑같이 일종의 인간학적 판단을 자연 철학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베르그송의 경우에는 지속(durée)의 시간 경험이었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에는 자아의 주관성이 순간적으로 생기하는 것이었다. 이 주관성은 자연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모델을 제공한다. 앞서의 생기와 연관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그리고 이런 연관을 고유한 동일성의 형성에 통합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각각의 생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제임스가 말하는 대로 자아의 계기를 앞서의 생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이런 필연성에 대한 사상을 통해서 화이트헤드는 모든 순간에서 새로움이 동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에 시간 경험의 연속성에 대한 베르그송의 기본구상을 고수했지만, 그러나 이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원자의 수다성(數多性)이 궁극적인 실재라는 전제의 토대 위에서 현상 관계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원자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채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전체의 단일성이 한 부분의 조건으로서,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면 안돼는 것인가? 또한 이 단일성은 개개의 생기에 못지 않은 실재로 평가되면 안돼는 것인가?

한 부분보다는 전체를 상위에 두는 관점은 화이트헤드와 달리 새뮤얼 알렉산더의 사상에 가깝다. 알렉산더는 칸트의 선험적 미학을 통해서 주장하기를, 우리는 이미 공간과 시간을 무한한 전체로 전제하지 않고서는 공간이나 시간의 그 어떤 한 부분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한 순간으로서의 생기는 무한한 시공의 제한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생기 원자론은 마지막 형이상학적 진리로는 가당치 않다. 알렉산더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의 축소를 단지 주관적인 직관 형식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에 과정 철학적으로 역동화된 스피노자주의라는 의미에서 스피노자와 이웃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즉 자연적 우주는 인간 의식의 단일성에서 잠정적인, 그리고 여전히 최종적이지 못한 형태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합하는 도정으로 발전되는 중에 있다. 알렉산더는 자연적 수다성을 통합하는 최종 형태를 신적인 것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신성”(deity)이라고 했는데, 이 신적인 것은 이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 자신과는 구별된다.

베르그송의 생명철학도 역시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다루어졌던 종교철학의 틀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신관에서 결말을 보고자 했다. 베르그송은 여기서 경직된 종교와 역동적 종교를 구별했다. “경직된” 종교의 기능은 죽음과 무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직면해서 개인의 생명의지를 사회적 생명과의 관계에서 보증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나 기독교 같은 “역동적” 종교는 인간을 신적인 사랑과 연결함으로써 그런 기능을 뛰어넘었다. 이 사랑은 우주가 창조적으로 발전해 가는 근원인데, 이것은 물질과, 또한 그것으로 인한 무상성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변화를 향해 밀고 나간다.

20세기의 과정철학은 세계 개념과 절대 관념의 공속에 대한 헬무트 플레스너의 명언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확인한다. “절대 관념을 포기하는 것은 ... 하나의 세계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무신론은 그렇게 포기한 것에 비해서 훨씬 가볍게 언급되었다.” 이와 동시에 세계 관념도 신학에서 위상에 걸맞은 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진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가? 왜냐하면 “그 이외에는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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