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만찬을 토대로 한 신앙심
-기독교인의 새로운 일치 경험-

어떤 사태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갱신해 나가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의 정신적 자유가 앞장에서 언급된 참회 신앙심의 틀에서 해방된다면 어떤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전통적 생명 형식에 대한 심원하고 실질적인 의미 내용이 새로워지는 일은 참으로 드물다. 그러나 그것의 내용이 충만한 의미로 새로워지면 원래부터 잘 알려져 있거나 믿을만하게 보였던 것들의 새로운 차원이 발견되고 획득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회에서 실행되고 있는 성만찬적 신앙심을 갱신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생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 이러한 예전을 갱신해보려고 노력한 이들은 그 생기의 혁명적 영향력을 별로 의식하고 있지 못했다.  

*독일어 Ereignis라는 단어는 ‘일어난 일’, 혹은 ‘사건’을 뜻하지만 신문 보도처럼 단순한 사실(Tatsache)이나 사건(Geschehen)이 아니라 의미가 포함된, 어떤 변증법적 가능성이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生起)로 번역했다.

신앙심의 새로운 유형을 흡사 설계도를 그리듯이 제도판 위에서 그려낼 수는 없으며, 또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부각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중심적인 경건 유형에는 어떤 대안적 신앙심에 대한 발전과 잠재력의 씨앗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으로 내려온 신앙의 전형이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여러 면에서 제공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인 것들을 시대적 위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즉 그 잠재성을 이미 현존하는 신앙 형식의 강점, 약점과 비교함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경건주의적 참회 신앙심의 강점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추호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위험성은 자기를 억압한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위험성은 확대되었다. 전통적 참회 신앙심의 또 다른 한계는 그것이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데에 있다. 일견 이러한 지적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경건주의는 새로운 종교적 통일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거의 지칠 줄 모르는 원천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경건주의는 실제적인 경건의 결합에서만이 아니라 선교 조직과 복음화 운동, 또한 간병과 다른 사회봉사라는 실천적인 사랑 행위에서 그런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경건주의의 신앙심은, 특히 각성 운동의 신앙심은 개인의 구원에만 일차적 목표를 두고 있었다. 개인적인 구원을 목표로 다른 이에 대한 강력한 열성이 이것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견해와 모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증한다. 이들의 경우에 타자(他者)는 바로 일종의 다른 자아로 나타났는데, 이 자아는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생활태도에서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특별히 경건주의의 초기에 에큐메니칼 정신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에서 특징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신학적 장광설과 종파분쟁에 대한 혐오감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보편 공동체라는 확실한 기초 구상이 발전되기 힘들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공동의 신앙적 기초라는 점에서 독립된 개인들의 종합과는 다른 무엇이었으며,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프로테스탄티즘에 나타난 영성 운동의 또 다른 주요 흐름이라 할 기독교 휴매니즘이 이와 똑같은 난제를 갖고 있었다. 비록 기독교 휴매니즘이 인간과 그 존엄성을 규정하는 데 기독교적 견해가 세속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게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적 전승과의 관련성을 확실하게 확보하기에는 그 관점의 정체성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분명히 기독교 휴매니즘은 종교적 일치와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일에서 경건주의나 각성운동의 경우보다 그 기여도가 훨씬 미약했다. 기독교 휴매니스트들이 교회에 소속되는 경우에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핵심적 사안은 다층적 관계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성은 훨씬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거론된 이 두 신앙 형태가 기존의 개인주의라는 한 점으로 집중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오늘날 양측 모두에게서 훨씬 취약해졌지만, 원래는 그들의 근대성에 대한 반증이었다. 경건주의와 기독교 휴매니즘이라는 이 양자는 근대 사회가 종교에 위임해버린 바로 그 자리를, 즉 개인적인 확증과 개인적 참여*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이다. 이것은 공적인 삶의 기구들이 종교적 확증에 독립적이라는 근대 견해이기도 하다. 이런 근대 선입관과의 조화 가운데서 우리는 근대 기독교 신앙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두 유형의 강한 요소와 취약한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강한 요소는 바로 종교와 사회의 근대적 이해와 그 관계를 긍정할 수 있다는 점에 있으며, 취약한 요소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가 단지 주관적인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한계다. 이는 곧 근대 기독교가 종교와 정치 질서의 원리적 분리에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망상적 성격을 파악해내서 그 가면을 벗겨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상응한다. 근대 기독교는 근대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신(神)중심적 문화가 출현하게 할만한 능력으로 증명되지 못했다. 근대 프로테스탄트 영성을 가장 강력하게 각인시킨 이 두 형태가 이러한 신중심적 문화를 조성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이러한 전개과정에 적합하지 못한 외적인 조건과 아울러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이 두 형태에 내재해있는 고유한 한계 탓이기도 하다.

*여기서 ‘개인적’이라는 말은 ‘사적인’(privat)이라는 뜻인데, 근대 이후 사회는 종교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으로 내몰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교의 토대를 인간의 ‘절대의존감정’에 설정했던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근대이전까지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확실한 영역을 확보했던 기독교가 상당한 오류의 역사를 되풀이 한 결과로, 또한 이 사회의 계몽주의적 여파로 인해서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퇴각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현재의 상황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세계적 경향을 통해서 특징화된다. 이런 경향은 마르크시스트를 비롯한 여러 형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가 부각되고 지속적으로 견인됨으로써 명확해진다. 이러한 경향은 서유럽 국가의 하층 문화를 대변하는 청년 운동에서, 특별히 개인의 정체성 발전에 대한 사회적 정황이 끼치는 구성적 의미를 이론적으로 진술하는 데서도 드러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족과 같은 전통적 사회 구조와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삶의 기구들은 동시에 그 토대를 상실했는데, 이것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인간 일치와 사회적 삶의 순전하고 비억압적인 형식들에 대한 불명확한, 그러나 심원한 갈망이 등장한다. 이런 갈망은 많은 이들을 사회주의적 관념과 프로그램과 조직을 추종하게 했다. 비록 그것들이 기만적이기도 하도, 또한 그것들의 다양한 변형들을 우리가 지난 수세기 동안 자주 보아왔지만 말이다. 오늘날 두 세대의 경험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여러 형식의 사회주의가 관료적 지배체제를 제고시키는 경향을 보였으며, 또한 자주 정치적 억압 구조의 발전을 비호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정적 차원에서 작용하는, 가장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으로 작용하는 욕구가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믿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인간적 사회는 개인들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갱신해 나가며 억압적이지 않은 공동의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일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들의 생활태도와 여기에 필요한 수단들이 실제로 공동으로 운영되는 소그룹의 보다 온화한 분위기를 선호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성적 불평등 사회의 소외로부터 개인들이 해방되는 것을 모색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인간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일치에 대한 진지한 기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자주 실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그룹에서 경험하는 삶으로부터, 또한 인간적 결합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이 기대되며, 더구나 이러한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제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이유는 인간의 일치 경험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욕구가 종교적 본성의 궁극적 목표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이상의 모든 언급이 옳다면 우리 시대의 종교적 욕구에 상응하는 신앙심의 어떤 형식을 생각해내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규정된 공동의 삶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려는 여러 실험들은 사실상 주목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영역에서 나오는 대개의 예들은 다소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참회적 신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참회에 대해서 반응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소그룹이 종교적으로 규정된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받는 훈련은 공동생활의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한계를 갖고 있다. 개인들은 이러한 공동생활로부터 자신들의 인격적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토대를 기대한다. 이 소그룹들의 일치정신이 회원들의 개인적인 미숙과 경쟁심에서 질식되지 않으려면 이 일치정신이 일반적인 목표설정에 기인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설정의 포괄적인 형식은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일치를 지향해야만 한다. 실제로 인간의 일치는 인간적 얼굴을 한 모든 것에 대해서 열려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어딘가 다른 대륙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갖게 되는 인격적인 책임감에서 자주 표명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감에서부터 실제로 놀라운 행위들이 연속적으로 발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감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 사는 세계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자신들이 책임질 것 같은 태도를 취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들 국민들과 국가의 명예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말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적 일치라는 표상은 당연히 강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종말론적 희망에 근거해서 이제 그 상징에서 발생하는 영적인 힘을 아주 특별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와 상징들이 갖고 있는 의미들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상징들과 상징적 언어를 통해서만 개인들이 속해 있는 보다 큰 일치가 경험과 행동에서 현재 하게 된다. 국기, 애국가, 국경일의 경축 행사는 특별한 경우에 국가의 단일성을 가시화할 수 있다. 사회의 공식적 기관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서 불가피한 상징적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확보한다. 왜냐하면 관료들이 요구하고 발견하는 순종은 사회의 단일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국면에서 이러한 상징적 연출은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에서 포괄적 일치를 이루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참여하고 헌신*하도록 자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참여와 헌신이 늘 아주 밀착된, 그러나 훨씬 제한적인 일치에 부속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헌신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전쟁을 위해 소집된 군대라 할 수 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일치감을 나누었는데,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역시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상징적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다른 단체들처럼 교회가 개개 신자들에게 상징을 통해서, 즉 십자가와 같이 모든 신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다가간다는 의미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교권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정치 권력자들처럼 신자들을 대표함으로써 교권이 상징적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교회의 경우에 이러한 일치는 상징적이다. 기독교의 일치는 다른 일치에 대한 상징으로 존재한다. 즉 실현된 정의와 확고한 평화를 통해 특징화된 사회에 있는 모든 인간의 포괄적 일치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한 일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기독교인에게 희망을 두고 있다. 기독교인은 인간의 포괄적인 일치가 아직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 인간의 통치나 정치 혁명으로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정치 혁명이라는 것은 인간 통치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며, 여기서도 역시 몇몇 소수자들이 사회 질서를 요구하며 나머지 사람들과 대립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 통치는 정치력이나 또는 그 합법성이 적은 숫자의 개인들에게 수락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파생된다. 따라서 정치 지배는 모든 곳에서 다소간에 큰 불의라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참된 정의와 그로 인한 평화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이런 이유 때문에 성서적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 통치의 모든 형식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모든 인간이 세계적 차원에서 일치하는 일은 정치적 형태에서 이미 적절하게 획득되지 않았으며, 또한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도 역시 구현되기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일치는 상징적 형식으로만 사람들에게 현재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상징적 일치에서 현재적 형태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세계적 차원의 인간 일치는 하나님에게서 선택된 유대인들에게서 한 형태를 이루었는데,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의 선택은 전체 인류의 축복에 해당된다. 교회도 역시 그 역사적 뿌리가 이들 유대인들의 선택에 놓여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 구체적이고 특별한 민족인 반면에, 또한 전체 인류에 대핸 상징적 기능을 부차적으로만 갖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상징적 일치 공동체로 자리매김 되었다. 선포된 예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인간이 미래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 말고는 교회의 실존을 거론할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토대가 없다. 따라서 예배가 어떤 의미에서 교회 생명의 핵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는 이미 이 순간에 상징적인 형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기리는 것이다. 즉 새로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전체 창조의 종말론적인 갱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완성된다고 말이다. 이 새 예루살렘은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상(像)과 다르지 않다.
교회는 인류의 운명이 하나님 나라와의 일치를 위해서 이미 현재적으로 제시되는 게 틀림없는 상징적 친교로서 국가의 정치적 조직과는 다르다. 이러한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국가가 공동의 복지를 책임지는 반면에 교회는 모든 개인들의 종교적 필요만을 채운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국가의 차이는 여러 업무나 관심사를 구별하는 것과 관계된 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교회의 실존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도록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규정해나가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지만 교회는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인간의 공동체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런 작업을 펼쳐나간다. 분명히 교회의 실존만이 국가가 인간의 정치적 운명을 완전하게 현실화시키지 못한다고, 혹은 그 최종적 형태를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오직 교회의 실존만이 현재의 국가가 국민들의 삶에서 요구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형태의 합법성을 제한시킨다. 이것은 왜 교회와 국가 사이에 일어난 긴장의 역사에서, 즉 국가의 권위가 아직 확립되지 못한 곳에서 기독교 교회의 실존과 연관된 국가의 요구가 제한 받았는가를 설명해준다. 교회는 인류의 정치적 운명이 교회 안에서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현재화함으로써, 더구나 상징적 형태로서 현재화함으로써 국가와 구별된다. 반면에 국가는 사회의 정치적 질서를 직접적으로 실현하며 따라서 그 자신의 형태 안에서 잠정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교회도 역시 잠정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다. 유대인들이나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걸어두고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에는 그 어떤 성전도 없고 교회도 없다. 교회의 잠정성은 교회가 자신의 실존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야할 자기 위치의 궁극성에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일치하게 될 인류의 운명을 서술하는 상징적 성격과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징이나 징표는 교회의 모든 조직과 실천을 관통한다. 그리고 교회 자체의 본질을 생성하는 이러한 상징이 인식되지 않거나 혹은 망각된 곳에서는 성직자 중심 정치의 권위적 형식이나, 또는 때에 따라서 전제적인 형식의 교권적 교회로 변질된다. 교회의 도그마도 역시 상징적 기능이 있다. 도그마의 상징적 본질이 망각되면 도그마는 아주 쉽게 신앙을 강제하는데 오용된다. 교회의 주교단은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둔 자신들의 보편적  단일성을 지역 교회의 삶에서 상징화하고 대표한다. 교회 행정의 상징적 본성이 망각되면 전체적 교권 형식이 교회 행정에 연결되는 위험이 초래된다. 즉 관료적 지배는 형식으로만 등장한다는 말이다. 예배 시에 사용되는 예전의 상징적 본질은 비록 모든 개개 예전과 관련해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지만 아주 명백하다. 또한 예전의 상징적 의미가 망각되면 그 예전은 죽은 의식이 되고 만다. 그 예전은 부활절의 기쁨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없이 단지 의무 조항이 될 뿐이다. 더구나 교회의 사회적이고 박애적인 봉사도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기능이다. 이는 흡사 예수의 치유 행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나, 혹은 복음서에 보도된 대로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된다는 표징 행위와 같다. 만약 교회의 박애 행위의 상징적 성격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분명히 세계 경영의 형태에 대해서 모범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 다행이다. 교회의 박애 기능이 갖고 있는 상징적 성격을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성서의 진리를 교회가 망각하게 된다. 더구나 교회의 박애 행위를 더 이상 징표로서만이 아니라 가난, 굶주림, 질병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주는 단초*로 생각하는 교회는 공허한 도덕주의의 자기기만을 자기의 본령으로 여기게 된다. 이 도덕주의는 교회에 속한 그 신자들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기독교인의 거짓된 죄책감에서만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교회의 사회봉사가 본질적 기능이 아니라 상징적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지적은 지나치게 사회의 구조적 개혁에만 관심을 보이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만이 아니라 그런 행동주의적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사회봉사를 교회의 근본 업무로 여기는 현대적 교회에도 해당된다. 그들은 사회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와 경쟁을 벌일 정도로 집착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교회일치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든지 소극적이다.  

교회의 본질은 완전히 상징적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생명이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복음 선포와 예배 생활에서 경험되어야 할 빛나고 영감에 찬 역동성이 고갈됨으로써 교회 본질의 상징성을 지속적으로 민감하게 인식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각은 교회의 영적인 본질을 분별함으로써만 갱신될 수 있다. <상징적>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 징표, 또는 효과적인 징표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예전적 본질에 대해서 훨씬 적절하게 언급할 수 있다. 교회의 기구와 행위는 그 상징성이 경험되는 곳에서만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상징적’(simbolisch)이라거나 혹은 표징적(zeichenhaft)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활동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표징과 상징에는 활동성이 없다고 말하는 고집스런 편견이 있다. 그러나 상징은 돌이나 권총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또한 행정 수단이나 기구의 강화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이런 효과적인 징표를 예전적으로 드러낸다면 교회의 본성을 상징적이며 표징적인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전적인 면에서도 역시 아주 명백하게 언급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교회의 <예전>이라는 표현을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연상과 연결시킨다. 이런 부정적인 연상은 지난 날 종파 논쟁과 연관되어 있는데, 물론 부분적으로는 이런 과거 경험에 뿌리를 둔 편견이 이런 연상의 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예전의 쓰임새가 자세하게 설명될 수 없는 곳에서 이런 표현은 당연히 거부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예전 개념이라는 의미에서 교회를 오고 있는 하나님 통치의 활동적인 징표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게 아니다.  
성찬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또한 성찬식이 교회와 교회의 생명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 틀을 획득하기 위해서 상징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연적이다. 교회의 생명을 견인해나가는 성찬식의 중요성은 교회의 상징적 성격이 전체적으로 충분히 고찰되지 않을 경우에 당연히 의심스러워진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노력이 아주 진지하게 추구되어야만 한다. 또한 이런 점에서 종교 개혁의 교회론은 성찬식을 폐기처분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종교 개혁자들은 복음 선포를 교회 생명의 핵심이라고 간주했다. 더구나 참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에 철저하게 지배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결과적으로 예배와 교회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그리고 표준적인 자리가 설교자에게 돌아갔다. 물론 당시에는 교회론이 아직은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종교 개혁자들의 책임을 덜어줄 수 있다. 그런데 루터의 초기 문헌에는 그리스도의 성만찬의 중심적 의미가 교회를 이해하는데 유효하게 작용한 짧은 순간이 있었다. 비록 예전의 수용이 여전히 사죄의 강화와 연관됨으로써 후기에 성만찬이 율법과 복음 도식에 따라서 참회 신앙에 근거해서 형성된 설교의 다층적 관점에 정초되었지만 말이다.
성만찬의 교회론적 의미에 대한 통찰은 거룩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신체를 숭배하는 성례전과 형제됨에 대한 루터의 설교에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1519년에 행한 설교였다. 여기서 루터는 이런 예전의 의미가 이중의 친교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즉 하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이런 묶임이 참여하고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의 단일성에서 상호적으로 묶여 있는 그 모든 것 아래에 있는 친교이다. 이런 논증은 성만찬의 기독교적인 의미를 명증하게 서술하고 있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디다케로부터(9, 4) 의미심장한 단어를 끌어왔다. 이에 따르면 많은 밀가루가 성례전 집행 때 쪼개지고 분배되는 빵의 형체를 이루는데 공동으로 쓰인다는 것은 신자들이 예전을 통해서 한 빵과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친교 가운데서 한 빵, 한 잔, 한 몸이 되기 위해서 서로 간에 하나로 묶인다는 의미이다. 루터의 이 말은 성찬식의 에클레시아적인 상징에 대한 아주 심원한 차원의 이해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년 후인 1520년 신약성서 설교에서 루터의 논증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미 1519년에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변수로 여기지 못했던 한 착상이 새롭게 규정되었다. 즉 이 착상은 바로 성례전 집례자가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이 약속은 성례전에 참여한 이들에게 사죄를 확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해석을 통해서 이제 성찬식의 축제와 참여는 칭의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고 변화된 참회 중심의 신앙심으로 편입되었다.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포괄적이고 교회론적인 스펙트럼은 이제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교회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성찬식의 특별하고 유일한 의미는, 기독교 예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아주 밀접하게 에클레시아적인 상징과 한 짝을 이룬다. 교회 생활과 그 예배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 그 어떤 다른 생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고유한 현존과 본질의 토대가 기념되며 상징화될 뿐만 아니라 또한 효과적으로 갱신된다. 1519년 루터가 인식했던 것처럼 신자들의 사귐 가운데 있는 교회의 본질은 신자들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토대를 놓는다. 성찬식이 거행될 때마다 교회가 뿌리를 두고 있는 이런 현실성이 갱신된다. 그리고 이러한 갱신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는 방식으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토대하고 있는 신자들의 사귐인 교회의 본질이 현재 생생하게 살아있는 성찬의 상징 능력에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교회의 예배에서 비록 설교가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성찬식이 훨씬 근본적인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요청에 의해서 설교하기 위해서 설교단에 올라선 설교자의 종교적 개성은 예배의 중심에 서면 안 된다. 설교는 교회 생명 가운데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섬겨야만 한다. 설교는 성찬식에서 기념되는 그리스도의 현재를 섬겨야만 한다.
성찬의 상징이 충분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따라서 충분하게 평가되지 못하면 교회 생활과 예배에서 성찬식이 갖는 핵심적 의미가 혼란스러워지고 퇴색된다. 예배의 성찬식적 상징을 민감하게 포착하지 못함으로써 성찬식에 대한 태도에서, 또한 성찬식 사건의 해석에서 참회적 신앙이 앞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런 사태는 성찬식의 근본적인 의미가 왜곡되어 있는 로마-가톨릭의 전통에 해당된다. 사제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바치는 속죄 제물이 실제로 변형된다는 그들의 주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칼빈주의의 성만찬 역사에서도 성찬의 의미는 왜곡되어 있다. 즉 성만찬을 죄인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거룩한 공동체의 표시로 거행하는 경우에 그렇다. 루터교회에서도 역시 이런 성만찬의 의미가 왜곡된다. 즉 성만찬이 무엇보다도 개별 신자들의 사죄가 가시적이고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으로 거행됨으로써 그렇다. 성찬 예식의 상징적 구조에 따라오는 이런 여러 왜곡은 참회신앙이 다양한 방식으로 끼친 영향 탓이다.
합당치 않게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참회신앙이 특이한 방식으로 교회 현실의 성만찬을 왜곡시켰다. 바울이 이렇듯 준비 없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경고할 때는(고전 11:27 이하) 그 자리에 있는 개개인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해져야 한다는 게 핵심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미리 참회하고 완전해져야 한다는 게 핵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과의 사귐에 상호간에 연루되어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따라서 합당치 않게 성만찬을 대한다는 것은 바로 성찬 예배의 교회론적 차원이 고려되지 않고 단지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자기만의 구원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에 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 관건은 아니다. 따라서 참회와 사죄의 특별한 행위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면 성찬의 친교적 의미는 퇴색된다. 주의 만찬 자체가 이미 사죄를 약속한다. 마틴 루터는 훗날 이런 주제에 대한 진술에서 이 사실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옳다. 비록 성만찬 참여를 이런 전망에 한정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성만찬을 이렇게 한정시키게 되면 곧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가리키고 있는 시각을 상실하게 된다. 바울의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일으켜내는 사회적 귀결과도 연관된다. 이 사귐은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한 이들의 사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결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고 이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즉 이런 사람은 주의 만찬이 갖는 의미와 그 상징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축제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성찬식 거행에 담긴 사귐의 중심 의미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과 그 신자들 상호간의 사귐이라는 이중적 특징에 있는데,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교회에서 종파들 사이에 벌어진 성만찬론 논쟁의 유형이 무엇인지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귐의 동기는 오늘날 모든 종파적 한계를 가로질러 다시 인식되고 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만찬을 거행하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틀에서만 성만찬 축제의 성례전적 의미가 역시 두 번째 동기로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관점이 오랫동안 종파적으로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성만찬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희생제사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오히려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그의 헌신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헌신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토대이며, 따라서 신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헌신은 다시금 예수 공동체의 지체들 사이에 사귐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세계 구원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틴 루터도 역시 신자들이 예수와 그의 사명에 동참하여 삶을 헌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이 경우에 성만찬 축제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담지된 성례전적 동기는 성례전적 상징이라는, 즉 종말론적 상징이라는 세 번째 동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가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아직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앞서서 결정적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오신 목적이 희생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희생 사상이 세계 구원을 위해 그가 오셨다는 사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다면 죄로 가득한 인류를 향해 아버지가 품었던 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예수가 희생당해야만 했다는 전통적 표상은 우리 인간을 잘못된 길로 끌어들이는 게 틀림없다. 이 전통적 표상은 아버지 스스로 예수를 보내신 장본인으로 나타나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일어난 사죄와 그의 희생의 장본인으로 나타나는 신약성서의 기본적 이해를 담지 못한다. 예수가 세계 구원을 위해 보냄 받았다는 사실에 헌신함으로써 사실상 자기를 보낸 아버지에게 자기 생명을 바쳤다는 점에서 예수의 희생이 아버지에게 드려졌다는 표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희생이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인류를 사죄하기 위해서 아버지 자신에게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과 분리되면 안 된다. 오히려 자기 사명의 완성이라는 시각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 십자가를 졌다는 시각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유대인들에게 이해되고 있는 희생이라는 언어를 메타포의 방식으로 해석하도록 영향을 받은 이런 영적인 정황에서, 그것은 이미 헬라적 유대세계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는 바인데, 예수의 죽음이 이런 언어관용에서 해석되었다는 사실은 이해될 만하다. 이런 언어관용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잘못된 게 틀림없다. 즉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가 바로 사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희생 사상이 퇴색시킨다는 것이다. 진노하는 하나님의 사죄가 아니라 세계의 사죄는 예수에게 주어진 사명의 내용이었다. 아버지에 의해서 인정받은 그 사명에 예수가 헌신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헌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희생사상은 성만찬과 분리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자기의 사명에 헌신했다는 것은 최후의 만찬을 베풂으로써 그 토대를 놓은 성찬만찬적 사귐*의 근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성만찬적 사귐(die eucharistische Gemeinschaft)이라는 표현에서 Gemeinschaft는 ‘사귐’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결합, 공동, 일치라는 뜻도 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성만찬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일치, 그리고 신자들 상호간에 맺는 일치라는 두 차원에서 그 근본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도 성만찬에서 그런 부분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두 차원의 사귐과 일치가 형이상학적 틀에서 다루어지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 개인의 사죄 문제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성만찬이 갖는 사귐과 일치 성격이 사회와 자연의 지평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만찬의 성례전적 축제에 담긴 사귐 성격에 대해서 새로운 감수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감수성은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서 로마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에서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서도, 더구나 독일 교회에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숫자가 분명히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프로테스탄트는 이런 발전 국면에서 결코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성만찬 축제가 프로테스탄트 주일 공동예배 순서의 중심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여기에는 아마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심리적인 요인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성만찬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의 특수성이라는 어떤 종파적 한계가 그런 두려움을 자아낸 것 같다.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심리적인 망설임이 완전히 씻겨지려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이며, 또한 교회 생활에서 성만찬의 근원적 의미가 갱신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예배를 통해서 얻어진 성만찬 축제의 중심 의미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은 기독교인이 모든 종파적 틀을 뛰어넘어 사귄다는 새로운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감수성이 특별히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문서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나뉘었던 교회의 사죄 과정과 재통합 과정에서 성만찬 예배의 근본적인 의미를 점차 확실하게 인식하고, 강조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역시 자신들의 예전 문헌에서 성만찬 예배의 사귐 성격을 아주 명백하게 강조했다. 이 경우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부 항목에서, 특별히 설교가 예배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는 점에서도 역시 종교개혁의 고전적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비록 성서의 가르침에 철저한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아주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소위 성찬의 사귐 성격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세력 안에 있는 참회신앙의 경향 때문에 그 신학적 인식에 상응하는 성찬적 신앙심을 실제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돌파구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성만찬 영성이 열어 보이는 세계는 지극한 약속을 담고 있는데, 이런 영성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이루어진 합동 성찬식 경향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운동의 위대한 영적 의미가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합당치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분명히 이런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합동 성찬식에서 일치 과정의 목표가 확실하게 선취(先取)되는 경우에 상이한 교회의 교권적 조직 사이에 상존하는 대립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이 상호간에 간과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성만찬의 공동 집행과 교회 일치가 불가분 공속적이라는 점이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위험성도 있다. 성찬적 일치가 신앙 문제와 교회법에서 이미 달성된 완전한 일치를 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일치되는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성만찬 축제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 단일성의 주제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런 단일성을 저해하는 아주 심각한 이유가 있게 되는 경우에 성만찬에 함께 참여하는 일은 경솔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만찬적 일치의 경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종파적 틀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인의 연대와 일치에 대한 새롭고 구체적인 경험을 하도록 했다. 이런 경험은 결과적으로 교회 일치 과정에서 결정적이며 필연적으로 기여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이런 틀을 뛰어넘어 우선적으로 영적인 역동성을 갖게 한다. 이 역동성은 성만찬 축제를 열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비정규적인 합동 성만찬을 확대하는 일에 종종 제한적으로 반응했던 가톨릭 주교들은 이런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과 경험의 영적인 의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더욱이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에 대해서, 즉 새로운 성례전적 경건성이 발전되도록 그들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 말이다.
수세기 동안 성만찬적 경건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전혀 기능하지 않거나, 또는 아주 미약하게만 기능 했다. 반면에 참회 경건과 예배에 대한 견해는, 특히 참회 경건과 연관해서 설교에 대한 견해는 모든 다른 요소들을 제압했으며 성만찬을 교회의 예전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래서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성찬적 경건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구별되는 특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찬적 예배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해와 강조는 사실상 종교개혁이 방기했던 동기에 집중되어 있다. 특별히 사제가 미사를 세계의 사죄를 위해 하나님에게 바치는 희생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십자가 희생을 실제로 반복하는 게 아니라 예전적 형식에서만 부각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만찬적 영성은 개신교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역시 매우 심각하게 이전 세기의 성만찬적 경건과 차별화 된다. 이 차별은 새로운 성만찬적 경건의 영이 그리스도 안에 토대가 놓인 일치와 완전하게 연관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중세기 이후에 형성된 로마 가톨릭의 성만찬적 경건 형태에서는 신앙으로 성만찬의 빵을 받는다는 것이 미사 참여와 완전히 구분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미사를 드리는 것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희생을 드린다는 사실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만찬적 경건의 다른 형식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바라는 기도에 해당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미사 희생에 집중하는 것은 죄인과 진노하는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사 희생은 이런 성향의 핵심적 표현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다른 표현 형식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주변의 다른 요소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독립적인 성만찬적 경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와 달리 사귐과 일치를 상징하는 성만찬에 근거한 성만찬적 경건은 교회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조직화하는 중심이 될 수 있다. 즉 성만찬적 경건이 교회의 영성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 가능성은 한편으로 개신교 측에서 볼 때 단순한 신앙 개인주의의 개인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측에서 볼 때 교회법의 과도한 강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희생 사상의 자리는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 볼 때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교회 자체를 성만찬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성서 주석가들에 의해서 새롭게 발견된, 즉 예수의 성만찬 상징에 담긴 종말론적 차원에 해당된다. 우선 이런 종말론적 차원은 성만찬적 예배를 드리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보편적 전망을 제공한다. 이 전망은 숫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와 전체 인류의 미래에 담겨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성만찬적 경건은 대개 협소한, 배타적인 의미에서만 교회에 해당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예수가 행한 만찬의 종말론적 차원은 최근의 주석만이 아니라 신학에 의해서도 역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데도 말이다. 성만찬 집행의 의미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은 새로워진 인류의 미래적 일치가 분명하게 선취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전망이 하나님 나라에서 논증됨으로써 협소한 교회의 틀을 확실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희망한다. 이럴 때만 우리 시대의 성만찬적 경건은 기독교 경건의 새로운 역사적 유형에 토대를 놓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폭넓게 이해된 성만찬의 상징 개념은 전체 인류의 미래와 완성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개념만이 이런 영적인 힘을 확대시켜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전체 인류와의 연관만이 인격적 정체성의 순간인 개체 인간 실존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 상징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자기 사명에 헌신한 예수의 희생과 연결해서 이중의 성만찬적 사귐(Gemeinschaft)을 구성하는 원리로 제시된다. 예수가 자기 생명을 바친 거룩한 사명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사귐에 토대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소위 모든 개체 인간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 통치의 오심을 전체 인류의 결정적인 미래로 선포한 방식으로 세계와 연관된다. 예수는 자기 선포와 이에 대한 신앙적 대답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미 현재 하는 현실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멀리 떨어진 미래에 대해서만 언급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그가 언급한 하나님 나라는 그 선포의 생기(生起)에서 현재화한 현실성이다. 이와 똑같이 예수는 제자들과의 사귐 가운데서, 또한 바리새인들이나 “세리와 죄인들”과의 사귐 가운데서 베푼 식탁의 단순한 형식에서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의 현재를 축하했다. 이들 죄인들에게서 공동식사의 상징은 그들이 예수에 의해서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의 지체와 백성들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미 유대의 예언 전통에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 같은 통치가 손상되지 않는 평화와 완전한 정의를 세워나간다는 인간의 종말론적 사귐에 대한 희망은 공동 식탁이라는 상(像)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이처럼 예수는 자기 제자들과 이미 현재적으로 식사를 나눔으로써, 그리고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제자가 된 이들과 그렇게 함으로써 도래하는 나라의 종말론적 영광을 선취했다. 교회의 성만찬 축제는 예수가 실행한 이런 상징 행위의 지속인데, 더욱이 “그가 체포된 날 밤에” 베푼 마지막 식사 전승과 연결된 희생 상징을 통해서 그것을 풍부하게 한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에 대한 전승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계시되기 전까지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마시지 않겠다는(막 14:25) 예수의 말씀에 담긴 성찬축제의 종말론적 차원을 명시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성만찬적 예전의식과 성찬의 상징적 의미를 성취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운명을 선취(先取)적으로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만찬 축제에 담긴 종말론적 전망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의 현재적 구조가 인간이 사귐 가운데서 생명을 얻는 일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인간적 통치가 참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해야만 그런 생명이 획득된다. 따라서 성만찬적 예전의식과 성찬에서 이제 시민생활에 대한 사회적 요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독교인은 도래하는 메시야, 즉 도래하는 나라의 왕과 일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요청으로부터의 자유가 기독교인이 자기의 사회적 현실성으로부터 벗어나서 특별한 내적인 세계로 퇴각해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자유 의식은 기독교의 예배 축제 안에서 인간 사회의 미래적 완성이 상징적으로 현재한다는 사실에 참여함으로써 중재된다. 이 완성은 정치와 사회적 현실성에서는 단순한 욕망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정치가는 인간을 기만하는 선동을 통해서만 자기 행위에서 그것을 성취해보려고 한다. 성만찬의 상징은 인류의 사회적 운명을 확증하고 강화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교회의 성만찬적 예배를 통해서 세계 평화와 정의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아야 할 용기를 얻고 영감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참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평화와 정의 실현에 연대함으로써 성만찬적 예배의 상징은 특별히 깊이 있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성만찬적 경건의 틀에서는 사회, 정치적 참여가 성만찬 상징의 고유한 내용에 자리를 잡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이런 상징은 이 상징이 영감을 제공하는 모든 인간적 행위와 사회적 행위를 뛰어넘어 가야 한다. 이 상징이 현안적 정치 프로그램과 목표달성에 봉사하게 되는 경우에 이것은 예배로서의 성만찬 축제가 가장 명백하게 오용되는 일이다. 사회적 삶 안에 있는 인간성은 사회의 현재적 정치 질서를 통해서나 또는 이런 질서의 지상적 변화를 통해서 현실화될 수 없다. 대신 이것은 교회의 예배에서 축제가 되며, 그 예배에서 현재 한다. 비록 이것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형식을 상징적으로 현재화하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논쟁의 핵심이 교회 예배에 현재 한다는 생각은 교회의 성만찬적 예배 의미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이런 논쟁 자체에서는 그 핵심적인 것들이 결코 완전하게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예배를 드림으로써만 상징적으로 현재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이 간과된다면 일종의 종교적 예전의 형식화를 위해서 드려지는 성만찬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어진 구원에 단지 개인적으로만 참여한다는 경건한 자기기만이 되거나,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부패한다.
성만찬 축제에서 교회의 신비가 표명된다. 즉 모든 이들의 일치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명된다. 동시에 이런 일치는 전체 인류의 종말론적 단일성을 상징화한다. 이런 상징에서 발현되는 힘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의 분리를 통해서 현저하게 침해당할 수 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의 방식으로 말이다. 제자들의 일치에서 증명되는 그리스도의 임재 능력이 인류가 평화 안에서 하나 되는 그 미래적 완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이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속한 교회야말로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분리된 교회를 계속해서 비방하면서 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종파 교회*의 대립적인 배척과 비관용이 충분하게 극복되었기 때문에 교회 일치를 향한 꾸준한 발걸음은 더 이상 그렇게 시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자기 만족감은 분리의 영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모르는 데 연유한다. 만약 분리의 영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게 된다면 교회들은 자기 신자들을 다른 교회의 성만찬적 사귐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다른 신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초청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지속적 분열상황은 예수가 마지막 만찬을 배설함으로써 일치와 사귐의 축제로 자리매김된 성만찬적 일치의 상호적 배제보다는 그 심각성은 덜 하다. 성만찬 일치의 상호 배제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서 이 일치의 축제는 예수와 일치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최소한 그의 역사적 현상에서 볼 때 분리되고 해체되었다. 이와 연결된 스캔들은 여러 조직으로 나누인 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다. 교회의 단일성은 기독교에서 늘 각각 있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독립 교회의 일치에 기인한다. 스캔들은 교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만찬적 예배에서 축제로 드려지는 사랑의 친교를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주의 만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는 분리된 교회의 자기주장이나 자기의(義)를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면 안 된다. 주의 만찬이 오늘날 우리의 분열된 기독교 교회 안에서 그대로 축제로 드려진다면 주님은 자기의 분열된 제자들을, 따라서 주님을 불신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제자들을 심판하는 그 자리에 현재 하실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기독교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정교회로 분리된 것만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 훨씬 세분화한 그런 분리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런 분리는 단지 상호간에 대립을 자제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만찬적 일치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영성의 위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이런 교파 분리 현상은 그 어떤 논리로도 해명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일백 여 개의 교파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의 성만찬적 생활의 어두운 측면은 성만찬적 예배의 해방하는 능력을 보증한다. 이 예배는 개개의 신자들을 사적인 영역 속으로 고립시키는 현상으로부터 해방시키며, 또한 자기 삶을 사회 제도에 짜 맞추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자주 지(枝)교회에 지배적 현상이라 할 협소한 지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 성만찬의 핵심인 식사 자리는 주님이 초대한 자리이지 교회가 제공한 자리는 아니다. 이렇듯 성만찬은 교회를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 해방의 영적인 뿌리는 다시금 성만찬적 축제와 친교의 예전적 실행이 상징화하는 데에 있다. 이는 흡사 성만찬 예배에 참여한 이들의 일치가 우선적으로 영적이고 상징적인 일치라는 사실과 같다. 이런 상징이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규정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생명활동 가운데서 활성화하면 할수록 성만찬 예배의 상징적 내용은 훨씬 잘 이해되고 타당성을 획득한다. 개체로서의 기독교인이 다른 이들이나 사회와의 관계에서, 또한 지교회로서의 교회나 모든 기독교인의 단일성을 갱신하는 과업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설정되어야 할 자리는 이를 통해서 철저하게 갱신될 수 있다.
이런 논의를 시작하려면 인간 공동체의 구조와 그곳에서 활동하는 일치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수준에서 상징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상징은 이러한 일치의 리얼리티를 구체화한다. 이것은 특별한 차원에서 교회에도 해당된다. 이 교회의 일치는 이미 상징적 성격이며, 교회가 현존하는 목적도 역시 교회를 초월하고 포괄하는 인간의 일치를 위한 상징이라는 점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성만찬적 일치의 상징적 형태는 기독교 예배에서 발현되는 잠재적 활동성을 반대하는 논증일 수 없다. 거꾸로 이러한 상징적 일치 경험은 신자들에게서 자유와 기쁨의 영을 확증한다. 교회의 성만찬 예배는 이러한 영을 이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중재시킨다. 종말론적 기쁨의 이러한 영이 표명됨으로써 상징적 서술과 행위에 포함된 놀이*의 요소가 억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만찬적 예전의식도 역시 장난스러운 과도함이 있다. 이 과도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된 영적인 자유를 표현하고 그 예전의식의 기능을 뛰어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자유는 예전의 갱신을 중재하는 데서 자주 실종되곤 했다. 이런 중재의 노력은 아주 간단히 예전적 형식에 대한 합법적이고 의전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분명히 모든 놀이는 법칙에 묶여 있다. 그래서 예전적 행위의 훈련도 역시 기독교적 자유의 영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거꾸로 예전 형식의 지배는 이런 영이 선언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조건일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면 단지 상징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전적 의전주의(litugischer Ritualismus)가 제거되는 경우에만 성만찬 축제의 상징론은 모든 자유의 영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 영은 참된 기독교적인 삶을 가리키는 기호다.

* 여기서 말하는 놀이의 요소(das Element des Spiels)는 성만찬이 행해지는 그 과정이 일종의 놀이와 같은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판넨베르크가 염려하는 것은 자칫 이 성만찬을 갱신한다는 명분으로 인해서 이런 요소가 사라지고 대신 엄숙주의만, 즉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예전적 의전주의가 팽배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1) 어거스틴의 De Civitate Dei Ⅹ,5 참조할 것. ... sacramentum, id est sacrum signum; 토마스 아퀴나스의 Summa theol. Ⅲ, 60, 1 참조할 것. 또한 칼빈의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59, Ⅳ, 14, 18 참조할 것.
2) Luthers Werke, Weimarer Ausgabe (WA) 2, 742-758, 특히 743, 754.
3) WA 2, 748.
4) WA 5, 353-378, 특히 356f. 359, 374, 376; 참조 WA 2, 744. 성만찬 때 베풀어지는 말씀인 빵과 포도주 형태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루터가 설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점을 강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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