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성화와 정치윤리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독교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특히 종교는 정치행위와 혼동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전통적 입장은 ‘정치신학’을 통해서 확실하게 공격받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이 정치신학은 곧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자기기만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 자기기만으로 인해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종교의식이 인간 삶의 상황이라는 맥락에서 불가피하게 사회적인 삶에 정치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는 자리를 간과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삶에 자리 잡고 있는 유력한 단체 중에서 정치적인 논쟁이 전개될 경우에 나름대로의 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단체는 하나도 없다. 이런 선택을 거절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방식으로 이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거절은 기존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데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피한 사태를 드러내고 관심을 갖는 일은 60년대의 소위 ‘정치신학’에 항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정치신학은 특별히 요한 밥티스트 메쯔(Johann Baptist Metz)와 연결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 신학적 의식은 반드시 정치에 가담하는 구체적인 형식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학이 늘 상존하는 사회제도를 거절하는 입장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매우 상이한 형식들이 기독교 신앙의 구성요소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는 시민의 자유와 공화주의적 제도라는 사상이 기독교의 자유사상과 연결된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데, 이 사상은 칼빈의 전통과 특별히 아메리카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경향들과의 연결이나 대립을 통해서 등장했다. 즉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기독교 시민이 가져야할 자연스러운 충성심의 한 요소로 이해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그렇다. 정치참여의 궁극적인 형식은 루터 전통의 지역에서도 역시 확산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루터교의 공권 윤리*와 특별하게 연결되었다. 이런 약간의 설명으로도 이제 우리는 정치참여가 이런 저런 형식으로 기독교 신앙과 연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참여의 이런 저런 형식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증명하지 않아도 현대의 정치신학이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근대 정치신학은 많은 형태를 통해서 아주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사회와 제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대립적인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기존의 사회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종말론을 재발견하는 작업과 연결되었다. 이런 생각은 우선 초기 바르트에게 있었다. 그는 현재의 세계를 향한 종말론의 부정적인 관계를 자신의 위기신학에서 명확히 했는데, 이 위기신학은 곧 하나님이 이 세계를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르트는 후에 자신의 윤리학을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독론 및 교회와 ‘시민공동체’ 사이의 실증적인 관계와 유비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몰트만(J. Moltmann)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는 바르트의 이런 후기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가 초기에 강조한 종말론과, 또한 기존의 세계에 대한 종말론의 대립이 갱신되었다는 점이다. 몰트만이 바르트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해하게 된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무시간적 영원성과 그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오는 그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의 세계와 대립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그의 나라는 평화와 정의로 특징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오늘의 사회적 사태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현대의 정치신학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확보한다는 사실의 파악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 이 문제는 몰트만과 거의 마찬가지로 리챠드 숄(Richard Shaull) 사상에서도 발전되었다. 숄은 변증법 신학의 영향을 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한 인물이지만 훗날 혁명신학의 태두가 되었다. 변증법 신학의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세계내(內)적 혁명을 변호하는 그의 변화는 자기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별로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현대의 정치신학이 기존의 사회 질서를 비판하는 기준은 이 사회가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증법 신학이 자연적 세계에 대해서 원칙상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그 근원이 중요하다. 이런 입장은 이 사회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에 위임해버리기 위해서 이 사회가 이룩한 참된 평화와 참된 정의의 업적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공권윤리(Obrigkeitsethik)라는 표현은 루터 윤리학의 토대에 놓여 있는 두왕국설의 한 축을 가리킨다. 즉 이 땅의 질서는 하나님에게서 그 권한을 위임받은 공권력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두 왕국설에 기초한 루터 신학에 의하면 교회가 세속 질서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지만 제삼제국 이데올로기가 이런 루터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여러 차원에서 정치 참여에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한국 신학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유는 몰트만이 튀빙겐 대학교에서 여덟 명의 박사 과정에 있는 한국학생을 지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신학 자체가 종교사회주의적 성격이 여전히 남아 있는 초기 바르트 신학의 사회 변혁적 요소 때문이다. 특히 7,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불의한 정권이 심판에 이르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희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 신학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몰트만의 신학이 8,90년대 들어서서 삼위일체와 성령론과 창조론의 변증법적 성격을 강하게 보인 것처럼 한국 신학이 이 세상을 단지 변혁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데서 머물지 말고 그 세상과 역사의 존재론적 성격을 훨씬 심층적으로 확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곧 과학과 타종교 문제가 우리 신학의 중심적 담론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종말론적인 이원론의 두 번째 요소는 현재 세계를 상대화함으로써 이 세계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궁극성 앞에서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를 기독교가 희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서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종말론적인 전망에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현재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요를 밖으로부터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강요의 토대를 기존의 사회 제도의 내적인 긴장과 문제들로부터 세우는 것은 쉽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변증법 신학의 전망에서 이런 토대를 세우는 일은 자연신학이라는 정원에 열린 금단의 열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쓸데없는 일이었다. 급진적 변화에 대한 신(神)적인 요청을 기존 사회의 비판이나 내용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에 연결시켜 본다면, 변증법 신학에서 도출된 종말론적 이원론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분석은 당연히 연결될 수 있다. 바르트주의의 활동 영역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에 해당되는 부분은 매우 다층적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정치신학의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의 특별한 순간으로서 바르트신학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현재 세계의 급격한 변혁으로 기대된다면 사회와 인류의 억압받는 민중이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분명히 현대 세계에서 이러한 종말론적 혁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성서의 하나님은 억압자에 맞서서 억압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으셨는가? 또한 그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엑서더스 이래로 억압당한 자의 해방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셨는가? 칼 바르트는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인간의 의도를 전부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심판에는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가들도 해당된다. 그렇지만 훗날,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행한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라는 그 유명한 강연에서 그는 사회주의적 사회에 대한 이전의 편애로 돌아섰다. 그는 이 사회주의적 사회를 유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타락한 자를 돌보신 결과라고 주장했다. 종말론적 위기의 부정성(否定性)은, 곧 심판사상의 보편성은 아날로기아 원리를 통해서 순화되었다. 바르트는 이런 아날로기아에 담겨 있는 이중성을 통해서 별로 불안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놀라울 정도로 이러한 이중성을 무시했다는 것은 신학적 논증을 전개하면서 그가 인간의 ‘자연적’ 경험과 그것에 소여된 증거들을 일반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그가 종말론을 현재의 인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사실이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런 경향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도 작용한다. 그는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사명과 근대 역사의 혁명적이며 천년왕국적 운동 사이에 친족관계가 있다고 말했으며, ‘인류의 사회주의화’를 정의와 인간의 인간화와 전체 창조의 평화와 더불어 기독교적 구원 희망의 전망으로 보았다. 1964년에 몰트만이 강조한 이러한 입장이 비교적 온건한 형식이었다고 한다면 1967년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비록 인간 해방의 혁명적 과정에서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가장 현대적인 국면으로 본 것이다. 또한 1972년에 몰트만의 ‘십자가의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des Kreuzes)은 사회주의를 가난의 악순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상징으로 특징화했다. 해방신학자들이 <희망의 신학>의 새로운 종말론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정치의 결정적인 관련에서 토대를 삼았다는 것은, 또한 혁명적 해방의 마르크스 운동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비록 모든 ‘유럽’ 신학과의 차이를 벌림으로써 이러한 관련성을 제거해보려는 경향이 점차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문제를 희망의 신학과 명백한 연속성 가운데서 다루었다는 뜻이다. 물론 해방신학의 종말론적 관점은 사회 현실성과 그 발전 전망을 보다 더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근거해서 해석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과정의 신학적 해석은 억압적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논증해보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논증은 정치신학을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상으로부터 갱신하려는 노력과 연관해서 발전된 것이었다.

*종말론적 전망의 부정적(negativ) 성격이라는 말은 기독교 신학이 이 세상의 모든 구도와 설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오늘의 사회가 꿈꾸고 있는 최상의 복지사회가 우리에게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지평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인다. 이런 종말론적이 전망이 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끊임없이 변혁시켜나가는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노력을 부정함으로써 역사의 단절이 야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세상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역사성을 담아낼 수 있는 방향으로 작용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단지 신학적 담론에 기여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기독교적 삶을 새롭게 주조하는 해방의 영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기독교적 삶은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민족의 해방에 참여하는 방식에서 새로워진다고 말이다. 구티에레즈에 따르면 여기서 관건은 억압받는 민중과 무시당하는 민족과 외세에 의존적이고 지배받는 나라를 향한 기독교의 이웃사랑이다(192). 따라서 원래의 전통적인 점에서 해방 영성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이 가난한 자와 불의에 시달리는 자를 향한 성서적, 그리고 기독교적 참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비싼 윤리적 원리들을 지불하고 얻게 되는 해방신학의 사회혁명적 프로그램의 결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교회 역사에서 교회를 견인해온 요소들과 얼마나 심각하게 구별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해방의 혁명적 영성이 가장 중요한 토대로 여기고 있는 전통적 흐름은 천년왕국설*인데, 이것은 최소한 형식적인 면일지라도 사회제도의 혁명적 변화에 대한 비슷한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천년왕국설(der Chiliasmus)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기 전에 이 땅에 꾸려질 천년 동안의 잠정적 나라를 가리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심판 이전에 천년왕국이 시작되는지 아니면 이후에 시작되는지에 따라서 전천년설과 후천년설로 구분되며, 더 나아가서 그런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의 무천년설도 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무효화되는 나라인 반면에 천년왕국은 현실 역사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역사가 유효한 나라이다. 따라서 이 천년왕국설에서는 역사 변혁 내지 혁명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역사를 변혁시키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의 정치신학은 그 밑바탕에 이런 천년왕국설을 두고 있다는 판넨베르크의 지적은 옳다.
  
이러한 정치적 해방이 말하는 새로운 천년왕국설은 중세기의 천년왕국설이 중세기 교회생활에서 부단히 주변적 현상으로 밀려났던 것처럼 오늘의 기독교적 스펙트럼에서도 주변적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의미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천년왕국설과 관계된 중세기 교회와 현대 교회의 차이점은 첫째로 현재의 기독교에서 어느 한 개별 교회 조직이 중세기 교회처럼 강력한 연대적 실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으며, 둘째로 현대 세계에서는 세속적 천년왕국설인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있다는 점이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현대 기독교의 천년왕국설과 자연적인 동맹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천년왕국설의 종교적 형식과 세속적 형식 사이의 동맹이 실제로 그렇게 ‘자연스러운’(natürlich) 것인지 아닌지 질문해야만 한다. 셋째, 위에서 언급된 두 가지 차이점들로 인해서 오늘날 결국 기독교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민중들이 정치적 해방의 이러한 새로운 천년왕국설에 감동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사회와 관계를 맺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서구세계의 사회질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현상들과 더불어서 매우 위험스러운 경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기독교가 주로 기존의 사회 질서와 반대되는 이념을 선택하는 데 호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독교계 내에 있는 현대 천년왕국설의 무게를 중세 기독교 때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만드는 이런 모든 요소들과 더불어서 이제 특별히 프로테스탄트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한 더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치적 천년왕국설과 칼빈주의 사이의 근친관계(물론 동일성은 아니지만)이다. 무엇보다도 에른스트 트륄치가 ‘신칼빈주의적’ 발전 형식이라고 일컬었던 관점에서 그렇다. 이런 근친관계로 인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르크스적 천년왕국설을 용인하고 합법화시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정치 해방의 새로운 천년왕국설이 오늘의 개혁신학 발전 국면에서 부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이런 신학 발전은 바르트와 몰트만으로 대표되는 현상이다. 바르트와 몰트만은 동시대의 여러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이들 여러 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분명한 종파적 근원에서 수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략은 동시대의 경험이나 성찰을 드러내주는 작업에도 합당하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의 진리요청이라는 점에서도 합당하지 못하다. 오늘날 기존의 종파적 전통에서 이런 근원들을 찾아내려는 작업은 신학적 논쟁의 합법성도 없으며, 또한 그런 타당성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각각의 종파적 성향이 여러 신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현안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 종류와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종파적 유산이 우리의 사유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뒤돌아보고 이를 통해서 각각의 전망에 들어있는 제한적인 일방성을 뒤돌아보는 작업은 분명히 자기 비판적 의식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런 일은 전승된 견해와 성향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각각의 신학자가 자기의 종파적 전통*을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비판적 시험에 맡김으로서만 발생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바르트와 몰트만의 칼빈주의적 입장이 마르크스적 천년왕국설을 용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종파적 전통(die eigene konfessionelle Tradition)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자기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네바에서 신정국가를 실현해 보려했던 칼빈과 달리 루터는 두 왕국설에 근거해서 세속 정부의 권위를 고유하게 인정하고 있다. 물론 다음 패러그래프에서 판넨베르크가 두 왕국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기 하지만 이런 입장의 루터 신학에 영향을 받은 판넨베르크는 정치적인 점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에 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말은 단지 진보와 보수라는 이원론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보편사 신학의 관점이다.    

이 소위 ‘신칼빈주의’와 현대 정치적 천년왕국설의 근친관계에 대한 논쟁이, 또는 마찬가지로 그 차이에 대한 논쟁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신학-정치적 사유의 이런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 루터의 전통적 두왕국론를 반드시 변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독일에서 수많은 루터교 신학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단점을 인정할 준비도 없이 오히려 이 두왕국론이야말로 기독교 신앙과 사회 질서의 관계를 끌어나가기 위한 최선의 학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이 두왕국론의 취약점이 매우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루터 학설의 문제점과 한계를 그렇게 자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 놓인 차이점에는 분명히 변치 않는 요소가 있다. 이런 요소는 모든 세속 질서의 잠정성에 대한 의식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루터 학설의 가장 핵심적인 한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놓여있다.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과 대립적인 세속 질서가 당연한 것처럼 인정되며, 거꾸로 기독교 메시야니즘과 구원론적 희망에 연루되어 있는 정치적 요소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공동체적 인간 삶의 정의로운 형식에 기초를 놓거나 특히 갱신시키는 일에 충분할 정도로 작용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가 자유사상의 징표에서 정치적 삶을 새롭게 주조해낼 수 있게 하는 작업은  루터교가 아니라 칼빈주의에서 출발했다. 에른스트 트륄치는 이 문제를 그의 고전적 작품인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의 사회이론’(각주 7에서 인용됨, 역주)에서 지적했다. 이런 사태를 심사숙고 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세속적 천년왕국설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이들의 혼돈을 동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사회생활의 현안을, 그리고 그것의 근본 구조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에서 풀어보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전통적 루터학설의 토대에서 가능한 것보다 훨씬 진지하게 수행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속 천년왕국설을 선호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참여 뒤에 남겨진 종교적 열정은 불가피하게 비극적 실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동정을 보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거부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정치의 이런 동일화에도 역시 진리 순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어거스틴이 이 두 세계를 구분한 것에 그 뿌리가 있다. 어거스틴은 신앙과 정치적 비젼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노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이 전체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라고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적 정치 윤리를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여가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적 유산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칼빈주의에서, 그리고 침례교적 전통에서 도출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기독교의 정치윤리는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상과 침례교적 이상에서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에 영적인 나라와 세속적인 나라를 구분하는 루터교 전통은 교회 질서의 잠정성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국가의 잠정성*을 이미 교회생활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고 축제화(祝祭化)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열광적으로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단지 종말론적으로 유보시켰다. 최종성과 잠정성 사이의 차이는 분명히 근본적인 문제이지 그저 일반화 시켜버리면 안 된다. 또 다른 문제는 기존의, 또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정치 질서의 우상숭배적 신화(神化)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전에 또는 이후에 그 리얼리티가 분쇄되고 말 환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부터 이제 사회제도 및 교회구조의 갱신을 위한 잠정적이고 유한한 모델을 획득해낼 수 있는가, 라는 필연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이런 질문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에서 볼 때 칼빈주의적 전통이 훨씬 숙고될 만 하며, 또한 훨씬 생산적이다.

*어거스틴이나 루터 모두 영적인 나라와 세속적인 나라 사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이유는 그들이 현실적 삶을 등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국가의 잠정성(Vorläufigkeit)이라는 신학적 구도에 따라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속 사회의 삶을 완벽하게 변혁시켜나간다고 해도 기독교가 전망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그것의 잠정성을 여지없이 노출된다. 이런 잠정적 기구에 기독교의 모든 운명을 걸어둔다는 것은 그 노력이 아무리 치열하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근본과는 거리가 멀다. 요즘 한국 도시 교회가 경쟁하듯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복지활동도 역시 이런 잠정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판넨베르크가 밝히고 있듯이 이런 잠정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런 잠정성을 전제하고 교회와 사회의 구체적인 갱신 모델을 찾아야 할 필요는 있다.  

일반적으로 루터 교리의 초기 형식과 칼빈 신학의 중요한 차이점은 칼빈이 성화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고 자주 일컬어졌다. 그러나 분명히 루터도 역시 처음부터 참된 신앙은 참된 업적을 수행한다고, 또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한 일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강조했다. 간혹 루터는 기독교인이 영을 통해서 몸을 죽임으로써 신앙적인 진보를 이룬다고 언급할 수 있었으며, 또한 영이 몸과의 투쟁할 때 율법이 영을 돕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은 참회를 개인의 삶에서 성취되어야 할 갱신이나 ‘회심’의 과정으로 묘사함으로써(Inst. Ⅲ, 3,5) 이런 생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제화 했다. 루터는 이와 달리 참회를 신앙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피안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옮겨놓게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참회를 심리적인 관점에서 개인적 삶의 과정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루터보다는 오히려 중세기 스콜라학자들이나 멜랑히톤에게 훨씬 접근해 있었다. 사실 칼빈이 이런 방식으로 새롭게 조직화한 칭의론이 원래 루터의 주장이었는데 말이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 영혼의 변화인 회심 사건은 우리의 칭의 만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까지 포함한다(Inst. Ⅲ, 3,6f.과 11,1ff.).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의 단일한 사태이다. 양자는 다함께 그리스도가 자기의 영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칼빈은 회심을 개인적인 삶에서 성취되는 정신적(seelisch)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 자기 자신을 고유한 성화경험으로서, 그리고 예정의 징표로서, 또한 이러한 자기시험의 증명으로서 경험한다는 그의 진술은 당연하다. 칭의와 성화를 회심과정에 속하는 요소로 본다는 것은 칼빈이 교회 안에서 도덕훈련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인은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개인적 회심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 자기의 성화에서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화에서도 역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비록 성화의 적극적인 과정이 개개인들에게서 우선적으로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갱신과 성화의 과정이 어떻게 인간의 공동 삶에 대한 정치적 조직과 연관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런 질문은 칼빈의 저술에서는 별로 자명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서 거룩하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영과 세속 정부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별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설명된 것처럼 성화는 교회 안에서 원래 개인의 영적인 갱신 과정이지 교회의 친교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는 기독교인의 친교와 세속 통치가 매우 적극적으로 상응하고 있다. 첫째로 칼빈은 세속 통치가 사회질서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간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반적 돌보심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와 은총을 필요로 하는 봉사로 간주한다. 이 경우에 핵심은 물론 교회라는 범주에 제한된 상태에서 갱신하고 구원하는 영의 기능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 창조에서 활동하는 영의 특별한 형식이 관건이다. 그런데 그 영은 신자들에게 완전한 능력으로, 구원하는 능력으로 계시되는 영이다. 둘째로 칼빈이 말하는 대로 모든 세계 통치는 그리스도의 왕권, 즉 영원한 왕의 통치를 모형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이다.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영역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계의 통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왕 되심과 영적인 왕홀(王笏)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세계 통치자들이 십계명의 제2계명만을 주시하고 솔선수범할 게 아니라 제1계명에 충실하기를 기대했다. 말하자면 이런 세계 통치자들은 참된 종교를 진작시키고 유지하고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치의 합법성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복종 여하에 달려 있다. 따라서 칼빈이 비록 전반적으로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세속 사회를 구분하긴 했지만 루터에 비해서 훨씬 이 양자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켜서 생각했다. 즉 어거스틴 전통보다 훨씬 밀접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칼빈 사상이 이렇게 특별한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은 칼빈 신학이 구약의 신정(神政)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칼빈 사상에 영향을 끼친 구약성서의 권위는 세속 정부의 이상적 형태에 대한 칼빈의 표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정 출현에 대해 비판한 신명기사가(史家)의 입장과 마찬가지로(삼상 8:7f.) 칼빈도 역시 왕정 통치형식을, 특히 세습 왕정을 완강히 반대했다. 칼빈은 왕정 통치가 세속 통치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할 정치적 자유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칼빈이 선호한 공화정 형식은 물론 민주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귀족주의적인 것이었는데, 이 문제는 당시의 법률가적 휴매니즘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이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칼빈은 모세와 판관들이 민중들을 지도하던 카리스마가 곧 세속 통치를 이상적인 형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신(神)적인 패러다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그가 ‘영적으로 생각하는’(pneumatokratisch) 관찰방식을 일반화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는 곧 그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경우에 개개 기독교인의 성화과정과 세속통치의 기초구상이 의미심장한 차원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비록 이 두 영역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성령의 행위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공동 작업에서 같은 자리에 놓인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마땅히 세속통치 영역에서도 신적인 영이 활동하는 일에 참여해야만 한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유명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근대 자본주의는 칼빈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개개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성화 과정에서 합리적으로 정리되고 훈련된 삶을 성취해나가야만 하며, 또한 금욕적인 삶의 스타일을 발전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스타일은 그들의 소명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과 성화가 성과를 냄으로써 소명과 선택이 보증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이런 삶의 스타일에 동기를 부여했다. 베버는 이런 주장을 통해서 구체적인 종교적 동기가 근대의 경제제도가 출현하는 데 매우 큰 의미를 감당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조는 너무 일방적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적 기독교인의 태도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경제문제에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분명히 청교도 윤리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사적인 태도의 전망을 간과했다. 이 청교도 윤리는 기독교적 친교만을 목표로 한 게 아니라 정치질서를 신정(神政)주의적 형태로 새롭게 바꿀 것을 목표로 했다. 에른스트 트뢸취 이래로 이런 일방성은 많은 관점에서 연구되었는데,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미카엘 발쩌의 작품과 약간 비판적인 면에서 문제를 제기한 제임스 아담스의 작품에서 이런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성화를 위한 청교도들의 노력은 개인적인 생활영역에만 해당된 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정치 질서가 새롭게 주조되었다는 사실이 칼빈의 영성을 언급할 때 중요한 요소였다. 사회의 세속적인 삶은 기독교의 원리가 도저히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인과 교회는 이런 영역에서 자연법의 일반적 원리가 고려된다는 사실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히 기독교적이고 신정주의적 기초구상은 세속통치의 관리들을 판단하는 준거로 작용하는데, 사회제도 일반의 정치 형식에서도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견해는 천년왕국설과 다르다. 왜냐하면 칼빈 사상은 정치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왕국을 이 세상에 현실화시키려는 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교회와 세계의 차이는, 그리고 성화와 정치의 차이는 원칙상 보존되었다. 칼 바르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칼빈의 정치 윤리가 현대에 제시될 때 이런 차이는 시민사회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단순한 유비를 통해서 표현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늘 잠재적인 위험성이 놓여 있다. 즉 이런 차별화가 신정주의적 원리의 역동성으로 인해서 제거된다는 위험성 말이다.
이런 위험은 영국에서 청교도적 혁명이 진행되면서 장로교인들이 종교적 획일성의 모델을 나라 전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했을 때 큰 소동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영국의 독립교회가 장로교의 억압적 획일성의 모델을 반대하는 차원에서 종교적 자유의 원리를 제시했을 때 기독교의 정치사상에서 의미심장한 여파가 발생했다. 이 경우에 종교의 자유사상을 향한 전환은 청교도적 원리의 타협이나 또는 포기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자유사상의 성취와 참된 귀결로, 즉 밀턴(Milton)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주장했듯이 ‘종교개혁 자체의 개혁’에 대한 성취와 참된 귀결로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기독교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공속적이라는 사상은 칼빈문헌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종교적 자유사상에 부가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민중의 주권을 강조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칼빈이 동의한 바 있는 이론이었다. 종교적 다원주의와 연결된 종교의 자유사상은 칼빈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신정(神政)주의적 획일성이라는 사상과 분명히 큰 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정주의적 이상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신정주의적 이상은 바로 자유사상에 집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밀턴도 역시 ‘liberty’라는 단어가 하나님에게만 절대주권이 있다는 기본사상의 현실화라고 했다. 크롬웰은 1657년 아주 중요한 국회 연설에서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라고 진술했는데, 이 관심사의 목표는 모든 신자들이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며, 또한 이런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자유나 정치적 자유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절대주권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교의학적 획일성의 잘못된 신정주의를 기피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트뢸취가 언급한 것처럼 종교와 사회 관계의 ‘신(新)칼빈주의적’ 모델은 근본적인 종교개혁 원리를 완전히 명백하게 정치적인 차원에서 현실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천년왕국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의 토대는 홀로 통치하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피조물은 타자에 대한 군주적 통치권이 없으며, 또는 신적인 진리와 권위를 배타적으로 요청할 자격이 없다. 정치영역이나 종교영역에 있는 다원주의의 원리는 “인간은 신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사신(使信)은 아주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신에는 독특한 모호성이 있다.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기독교적 합법성은 이 모호성과 결탁해 있다. 기독교의 자유는 사도 바울과 요한복음에 의해서 구상되었고, 또한 이신칭의라는 종교개혁의 학설에서 재발견되었는데, 이 자유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어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현대적 원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속 정권의 토대에서 작용한다. 신적인 진리와 이 진리에 대한 인간적 학설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신앙을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획득하는 자유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라는 그 표현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유혹적인 모호성 만일까? 이에 대한 그럴듯한 유비는 사실 완전히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의 방종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한 자유라는 기독교인의 이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에, 또한 청교도 혁명의 경우에 기독교적인 자유와 정치적 자유 사이의 유비가 언어의 모호성에만 달려있는 게 아니라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개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의 해방이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자유는 인간의 통치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들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을 때 참된 자유를 획득한다. 그리고 인간적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종교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만 참된 자유다. 즉 그 종교적인 자유가 개개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신앙적 차원에서 신뢰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는 개개인의 양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가 없이 추구된 현대적 자유권리는 개인적 재량권의 배상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확실한 자유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개인적 재량권이 자유로 오용될 위험을 반드시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의 정치적 원리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자유권리는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개신교적 학설과 연결시켜서 볼 때 그 모호성*이 사뭇 심각하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정치적 자유는 자유의 근원인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단지 개인들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자유를 획득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 이것을 그는 심각한 ‘모호성’(Zweideutigkeit)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옛날에 비해서 오늘의 시민들은 물질적인 면에서나 건강이나 복지의 차원에서 훨씬 자유의 영역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자유롭게 산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어떤 제도와 사상과 시대정신에 철저하게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는 게 옳다. 판넨베르크가 그의 설교집 <Gegenwart Gottes>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현대인은 ‘노동’과 ‘오락’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호성은 초기 자유주의가 자유의 원리를 자연법의 토대에서만 정의하려고 했을 때 첨예화되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기초구상은 그 이념적 전체 구상에서 볼 때 사회적 삶의 천년왕국적 모델과 황금시대의 현실화에 대한 신앙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왕국설의 세속적 형식이었다. 왜냐하면 신정주의적 이상이 이제 탈색되었으며, 더 이상 자유사상의 뿌리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속적 천년왕국설은 기독교적 공동체와 세속적 공동체 사이의 대결과 상응이 정치 이론의 구조적 요소가 결코 아니라는 일반적 사실에 의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서 정치이론에서 발현된 신정주의적 기초구상은 퇴색되고, 대신 일종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로 작용하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세속적 천년왕국설이 그 자리를 잡았다. 이런 발전 국면에서 기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사이의 유비에 대한 기억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와, 즉 시민종교로서의 자유주의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독교 사상 사이의 근본적 대립을 은폐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신정주의적 요인 없었다면 자유에 대한 이해로부터 이러한 유비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기독교 한창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세속주의 앞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백기를 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담지된 기만은 이미 시민의 자유가 단지 형식적일 뿐이라고 비판한 칼 마르크스에 의해서, 또한 20세기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정당했지만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현대적 원리에 놓여 있던 부정적 요인은 간과되었다. 이 원리들은 모든 인간 법정과 모든 인간적 학설 및 인간적 통치 영역에 하나님만이 요구할 수 있는 절대권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사상의 이런 부정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문화는 암묵적으로 신정주의적 이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제 오늘날의 해방신학은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 해방신학은 새로운 주도세력이 민중 ‘해방’이라는 구실로 난폭한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아낼 대안은 못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혁명적 전복이나 전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어떤 해방신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천진난만하며, 또한 여기에 잠복하고 있는 위험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부한다. 즉 유럽의 종말론적 신학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미래와 인간행위를 통한 이 미래의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선취를 구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구별하게 되면 민중들이 새롭게 변화된 사회 모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사실상 사람들이 절대적 진리를 위해서 싸운다는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되면 열광주의는 축소된다. 이상하게도 해방신학은 혁명가들에 대한 우상숭배적 열광주의를 겁내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이 혁명가들은 적대자를 절대 진리의 원수라고 간주한다.
바로 여기에 놓여 있는 핵심 문제는 해방과 억압에 대한 논의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인데, 바르트주의와 종말론적 정치신학은 이 문제를 해방신학자들과 연결시킨 바 있다. 바르트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청을 하나님의 자녀가 누려야할 자유라는 유비에서 추론해냈다. 17세기 영국의 독립교회도 역시 이런 주장을 펼친 바 있었다. 그들의 경우에는 칼빈의 경우와 아주 흡사하게 이것이 유일한 논거는 아니었다. 칼빈의 경우에 이런 유비 추론의 토대는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의 왕정 이전의 통치형태에 대한 편애를 통해서 영적이고 신정주의적인 이상과 결합해서 제공되었다. 독립교회의 경우에 그것은 자연법의 원리에 있는 민중의 절대권이라는 이상이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영이 직접적으로 통치한다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인간적 권위가 전반적으로 제한적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바르트도 당연히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인간의 권위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인간적 경험 영역으로부터 시도되는 모든 논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기독론적 주장에 근거해서 유비론을 주장하는 모호성에 빠지고 말았다. 신정주의적 요소는 신학자들의 주관적 주장에 대한 공허한 요청이 되었다. 교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희망의 신학은 세속 세계를 성서의 예언자적 약속과 대결시키기 때문에 세속 영역에서 비슷한 언어방식으로 예언자적 약속의 유비와 선취를 수용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해당되는 세속적 희망이 예언자적 약속의 내용과 실제로 비교될 수 있는지 아닌지, 또는 어떤 기준에서 그런지 경험적인 연구와 비교를 통해서 확증하지 않는 채 말이다. 전승된 신학적 언어와 기존의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현상, 상황, 희망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다분히 경솔하게 대처하는 이런 신학적 태도들은 이들 신학자들이 개인의 세계 경험, 역사 경험, 자기 경험에서 그 심리적 조건과 더불어서 신학적인 요소가 매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승인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과 세계를 대립 구조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해방신학은 이런 논증형식에 대한 좀더 많은 예를 부분적으로 제공하다. 신학적 논증의 독특한 구조문제가 이런 논증형식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선 시시한 유비를 사용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해방의 세 차원을 구분했다. 첫째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차원, 둘째로 역사 과정에서 인간이 자기를 해방시켜나가는 차원, 셋째로 성서적 자유이해. 그는 여기에 결부된 문제들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은 채 이러한 해방의 모든 기초구상이 서로 보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구상들이 대립적인 조건 가운데 있지만, 유일한 해방과정에 대한 상이한 세 가지 의미 차원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이한 현상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 ‘해방’이라는 언어로서 묶여질 수 있나?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자기해방의 과정으로 보는 기초구상이 기독교 사신과의 극단적 대립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을 신학자가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제거해버릴 수 있을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는데 말이다. 이런 과정에 있는 “의미 차원”을 간단히 언급함으로써 어떻게 이런 갈등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구티에레즈는 단 한번도 이런 조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기독교 사신과 “해방 받아야할 사회 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의 희망” 사이에는 단지 문자적인 공통점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자기의 주장을 해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이러한 사회 계급의 희망과 억압받는다고 느끼는 민족의 희망이 모든 점에서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런 희망사항이 편향된 것인지 아닌지, 또한 이런 요청이 타인의 희생을 지불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지나친 자기주장이나 자기 확대인지 아닌지는 정의의 상위준거*를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정의에 대한 단 하나의 이론만이, 모든 인간의 동일한 인간적 품위에 대한 요청과 상관없이, 개인 사이의 불평등이 불가피하다는 사실과 어떤 종류의 불평등이 타당한 것으로, 또는 최소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의 토대가 된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전체적인 면에서 사회 체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죤 롤스의 “정의론”과 그 책에서 다루어진 논의는 이러한 이론이 어떤 난제들과 투쟁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풍부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그것의 근본문제는 정의론이 사회계약에 대한 전통적 표상을 수납함으로써 개인들이 사회계약의 체결에서 완전히 동일하게, 그리고 상호간에 독립적인지 아닌지, 또는 이런 개념이 필연적으로 잘못된 귀결로 빠져드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후자의 경우에 정의 개념은 틀림없이 모든 사회제도에 대한 서술과, 그리고 표준이 되는 가치의 계급에 대한 서술과 밀접하게 연관해서 발전되었다. 나는 이런 두 번째 대안이 옳다고 보며, 또한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구조를 여기에 속한 가치정립과 더불어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구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론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즉 각자에게는 각자의 것이 있다는 그의 명제 말이다. 이것은 정의의 이상이 어떤 사회의 종교적 토대를 살펴보지 않고는, 또한 그 사회에 표준적인 문화 전승의 토대를 살펴보지 않고는 관철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정의 개념이 어떤 토대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곧 이를 통해서 획득된 토대에서만 개인이나 집단의 희망사항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 또는 지나친 것인지, 그리고 다른 이들의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아닌지 말이다. 구티에레즈는 이러한 정의의 준거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는 모든 정황에 대한 고려 없이 계급과 억압당한 민족의 희망사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집단이나 민족이 사실상 “억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지 아닌지는 정의 개념의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되어야 한다. 부각된 요청이 이러한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야말로 과도하고 부적절한 요청은 “억압당하고 있다”는 호소에 숨겨있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요청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는 죄와 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은 채 사회적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를 내세우려는 경향을 통전적 순간이라고, 또한 이기주의와 자기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의 “의미 지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해방은 말씀에 따라서 참된 자유를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정의의 상위준거(übergeordnete Kriterien der Gerechtigkeit)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역주자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아마 정의를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서로 다른 개인이나 민족의 주장, 또는 그들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게 아닐까 모르겠다. 결국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이해타산이 연결된 문제들은, 그래서 한쪽이 억울하다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호소하는 문제들은 같은 차원에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옳은 게 무엇인지를 결정해줄 수 있는 상위의 준거가 필요한데,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상위준거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이며, 생명의 영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또는 사랑이 그런 상위의 준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해방신학과 정치신학을 논하면서 이런 상위준거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는 정의의 기준으로서는 궁극적인 정의를 세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업가와 노조 사이에서 어떤 기준으로 정의의 세울 수 있을까? 물론 우리의 상식과 노동법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도 역시 사람들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 당장 어떤 구체적인 성과물이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노동법과 상식보다 상위의 준거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문제는 ‘해방신학’의 특별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흑인신학의 어떤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나스 부텔레찌(Manas Buthelezi) 같은 아프리카 신학자가 “블렉 떼올로지”의 특징을 검은 인간실존의 의미와 특별한 존엄성을 신학적으로 진술하기 위한 과업에 두었다고 한다면, 제임스 콘은 “블렉 떼올로지”라는 표현을 여기서 단지 흑인을 억압하는 자들로 나타나는 백인들을 대항해서 흑인이 정치적으로 “해방”되는 혁명적 프로그램으로 사용한다. 콘의 생각에 따르면 한 분이신 하나님은 흑인의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억압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인류의 한 부분인 흑인의 독특한 관심이 두드러지며, 또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도 확인된다. 콘의 주장은 아주 위험스럽게도 흑인의 인종주의적 접근에 기울어져 있다. 그는 이 흑인의 인종주의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흑인들이 억압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흑인들 편이다. 독일 민족도 1차 세계대전 후에 자신들이 억압받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 때문에 국가 사회주의적 인종주의의 유혹에 빠졌다. 인종주의의 위험을 막아내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그들의 피부가 희든지 검든지, 노랗든지 붉든지 간에 그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받아주시고, 또한 모든 민족과 종족으로 하여금 더불어서 교회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흑인신학이 오늘의 인류 가운데서 흑인들의 특별한 소명에 대해 질문한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들의 특별한 소명이 의미하는 바처럼 보편적 교회의 틀 안에 머물러 있어야지, 다른 집단을 향한 증오심으로 작용하면 안 된다. 콘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증오심이 억압자의 위치가 아니라 백인을 향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정의의 보편적 이론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 정의는 모든 인종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무엇이 도대체 ‘억압’이라고 일컬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판단하는 것이다.
구티에레즈와 다른 해방신학자들이 정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모든 특수한 집단들의 관심보다 상위에 정초한 준거로서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게 아니다. 실정법을 ‘상대적’ 자연법에 대한 기독교 이론과 일치시키는 작업이 해체된 이후로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기독교의 정의에 대한 이론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기독교의 사랑을 그 증거로 삼는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사랑은 정의에 대한 기독교의 궁극적 준거이다. 그러나 사랑은 정의의 개념과 연결될 때만 사회적 갈등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정의에 대한 이런 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바른 실천>(Orthopraxie)을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또한 그 실천을 전승된 교리 대신에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새로운 준거로서 제시하는 것도 역시 무의미하다. 오늘날 이 <바른 실천>으로 호소하는 일은 우선적으로 불명료하며 불쾌한 느낌에 대한 간접 증거일 수 있다. 즉 기독교 사상에는 정의의 준거가 결여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신학은 윤리학과 정의의 원리를 사회이론으로 대체했다. 이것은 당연히 이를 위해서 선택된 사회이론이 규범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경우에만 맞는 말이다. 소위 <절대적인> 자연법이라는 요인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체적 분석은 바로 이에 대한 해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민사회에서는 자연법이 그렇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유 이론에 따라서 작용한다. 동시에 마르크스 이론은 역사과정에서 일종의 상황이 출현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이 상황은 자유와 평등을, 그리고 자연법의 근본적인 원리를 완전히 현실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비록 사회 혁명이라는 방식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이러한 상황을 도달 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곧 마르크스주의가 천년왕국설적인 체계 안에 들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해방신학에서 부족한 정의의 윤리적 이론이 마르크스주의로 대체되었다는 것에 대한 이유이기도 한다. 다만 해방신학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이론과 분석이, 특별히 계급투쟁론이 기독교 신앙과 협정 맺는 것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가한 이론적 분석의 틀이 담지하고 있는 경험적 진실성은 아무리 비판을 가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경제적 가치를 배타적인 차원에서 인간 노동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인간 노동으로 소급시키는 마르크스의 세계이론은 이것에 의존적인 ‘잉여가치’의 핵심개념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잉여가치의 이러한 개념 없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의 이론적 기초가 무너진다. 즉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사용에서 언급되는 착취와 소외 개념이 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억압이나 소외를 언급할 때 우리는 경험적 전거와 이론적 해석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착취와 소외 같은 용어 사용의 정당성이 바로 이 전거와 해석에서부터 도출된다. 만약 해방신학자들이 거의 이런 일에 참여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이라고 한다면, 그럴 리가 없지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억압’의 상태에 대한 그들의 진단은 의미심장하고 믿을 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은 편견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구티에레즈가 말하고 있듯이 해방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계급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신학적 성찰에 앞서서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한 분석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군도(J.S. Segundo)는 <Liberacion de la teologia>(1975)라는 저서에서 이 점을 간단하게나마 솔직하게 언급했다. 모든 비판적 성찰에 앞서 앙가주망이 요구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숙명적인 태도에서는 잘 정당한 것처럼 들린다. 또한 만약 이런 요구를 전통적인 기독교 사신과 연결시키려고 한다면 이런 요구는 마땅히 해방신학자들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앙가주망에도 해당될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신학적 착상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당파성(Parteilichkeit)에 놓여 있다. 하나님이 이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명제를 성서적 근거를 통해서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당파성이 어떤 계급을 거부함으로써 얻어지는 반대급부는 결코 아니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강제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대화시키거나 아니면 현실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에서 볼 수 있듯이 계급투쟁을 통해서 획득된 자리는 또 다시 그런 방식으로 강탈당할 위험에 노출될 뿐이다.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 질서가 정의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당위이긴 하지만 그것의 현실화는 하나님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역사의 변혁 앞에서 인간의 책임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이 역사를 새롭게 견인해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런 책임은 당연히 종말론적인 불빛으로부터 끊임없이 조명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해방신학이 상존하는 사회의 마르크스주의적 서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정치신학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한 전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치신학을 이렇게 확대시키는 작업은 기독교의 구원론적인 언어와 모호한 유비적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만 그 합법성이 유지된다. 이러한 사태는,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기독교적 언어와 기독교적 신앙을 다른 관심사로 돌리고 마는 결과를 빚는다. 이 다른 관심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영성은 현전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일종의 실망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런 실망은 다양한 원천에서 자라난다. 그 중의 하나는 변증법 신학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인데, 즉 유럽의 문화낙관주의에 끼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었다. 매우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산업화된 근대사회의 관료주의적 관리구조 안에 있는 무의미성의 경험이다(P. Berger). 보다 특별한 전제조건은 소위 개발도상국의 빈곤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에서만 정치적 영성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빈곤과 고난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충분하게 해명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러한 빈곤과 고난에 대한 경험이 오늘날 정치적 해방의 영성이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는 이 현상은 종교를 단지 아편이라고 보는 비판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아편은 견딜 수 없는 정치적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많은 경우에 이런 주장에는 전승된 종교는 시시하며, 따라서 그 내용이 정치적 변화로 다시 자리매김 되어야만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모든 이러한 요소들과 더 많은 다른 요소들은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힘을 담지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그 당시의 신학에서 이런 매혹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여기서 놀랍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구상이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 지성적으로 믿을 만 하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금세기의 역사 경험에서 다음과 같이 의심받을만한 방대한 전거(典據)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해방신학자들이 해방에 대한 희망의 근거로 채택한 사회이론은 결국 어디서나 구조적 억압 문제를 날카롭게 추궁하는 것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종교적 앙가주망의 대상을 정치적으로 야기해야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학은 성화와 정치의 연관을 나름대로 강조해야만 했다. 그러나 애매한 유비를 통해서 이런 연관에 접근하면 안 된다. 이 유비는 자칫 잘못하면 원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정체성을 실제로 포기하게 만든다. 성화와 정치의 연관을 고찰하는 경우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한다.
첫째, 신정(神政)주의는 여기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원적인, 그리고 ‘에큐메니칼’ 영성의 토대에서 갱신되어야만 한다. 여기 말하는 이 영성은 교의학적 획일성과 배타성이라는 오래된 문제에서 벗어난 것이다. 신정주의적 이념이 갱신되지 않는다면 성화 사상은 사회의 종교적 기초 구조에서 그 외연을 확대시킬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신정주의적 사상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표명들이 기독교 일치의 에큐메니칼 과정에서 생성된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둘째, 성화라는 주제로부터 정치에 이르는 발걸음은 사회 정의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이론이 사회 제도와 그 기구들을 비판적으로 진술하려면 종교적 토대에 근거해야만 한다. 이 토대들은 특히 기독교에서 볼 때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달리 말해서 사회계약론 개념은 개별 사회에 대한 해석과 연관해서 선택과 소명의 범주로, 그리고 칭의와 심판의 범주로 지양되어야만 한다(R. Neuhaus).  
기독교적 정의론(正義論)의 정치적 작용은 신정주의적 이상의 갱신과 그것의 적합성 여부에 달려있다. 그리고 신정주의적 신앙심은 정의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 이론은 공동체적 현실성을 완전히 새롭게 개념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상의 틀을 사용한다. 이런 두 요소가 없는 한 <정치신학>이 어떻게 다음과 같은 유혹을 떨쳐낼 수 있을는지 명백하지 않다. 즉 복음을 하나님의 주권과 존엄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유혹 말이다.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한 그 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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