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기독교와 불교 사상의 만남을 위한 인간학적 담론-

유럽사회에서 지속된 근대화의 과정은 개인주의적 구성원들이 점점 더 소외의 감정을 강하고 폭넓게 경험하고 있다는 데서 확인될 수 있다. 산업화와 관료주의의 발전은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현대사회를 유별나게 복잡하고 익명적인 체제로 형성해나가고 있다. 이런 체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과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며,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가정과는 달리 전통적 사회의 통합적 구조가 파괴되거나 축소됨으로써 개인들은 자주 고향을 잃은 것 같은, 그리고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더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심연에서는 이런 느낌이 훨씬 심각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개별적 인간의 정체성이 문제로 대두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심리학자들의 도움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그런 의미심장한 삶이 그들의 행위의 결과로는 야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자아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의 내용은 별로 확실한 게 못되며,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삶의 내용은 임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이런 방식으로 의혹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불교의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불교의 명상 훈련을 통해서 평화를 발견하고 싶어 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자아의 유약성과 무상성에, 즉 자기에게 허용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욕망과 이로 인한 고통에 몰두한다. 이런 평화의 약속은 개인적인 정체성과 진아*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불교의 가르침과 심리분석은 여기서 이웃지간이다. 물론 이들의 영역은 다르다. 심리치료가 자아를 강화시킨다면 불교는 자아의 요구와 갈망을 체념하게 한다. 이 두 방식은 오늘날 참되고 권위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평화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진아(眞我)는 독일어 das wahres Selbst의 번역이다. 독일어 Ich는 ‘나’, 또는 ‘자기’로, Selbst는 ‘자아’로 번역되는데, 자기는 어떤 객관적 관계성 속에서 규정되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자아는 훨씬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사람의 참 모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 글에서 전통적 의미의 인격주의를 비판하면서 바울과 루터의 극단적 변형론에 근거해서 불교와의 일치점과 차별성을 인간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역자는 가능한대로 이 두 단어를 구별했지만 간헐적으로는 문맥상 적당한 쪽을 선택했다.  

현대의 개인들은 이 세속 사회에서 스스로 소외된 자로 경험되고 있는데, 불교의 영성은 최소한 잠정적으로 이런 개인들의 영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매우 명백하게 중요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참회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제시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유럽의 기독교는 이런 참회 중심의 신앙심을 여러 생명 형식으로 각인시켰다. 불교의 가르침은 개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자기의 삶과 사회 환경의 열악한 상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회개하라는 말은 개인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그런 방식에 늘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 안에서 획득하는 자기 자신과 남에 대한 경험은 개인들이 익명의 사회 체제 앞에서 무력하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과거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하게 고수되었던 도덕적 기준이 이제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든지 아니면 해체되었다. 왜냐하면 개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스타일이 다원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역시 대다수의 개인들은 죄를 고백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자기 삶의 확실한 경험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여전히 그 문제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Selbst)를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에 돌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매우 인위적이고 곤란한 형식이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들은 주로 인위적으로 생산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으로 명증하게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의 복음을 아주 단호하게 인간 경험의 차원과 연결시켰다고 보는 게 옳다. 죄의 개념은 우선적으로 개인적 자기 경험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경험을 해명하는 차원에 자리매김 된 것이다. 경건주의 전통이 주장하듯이 모든 개별 인간은 그가 신실하다면 자기를 직접적으로 죄성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기독교인의 자기 이해는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기울어지는 우리 행동의 분명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직접 죄인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이 경험이 신율과 도덕률의 개별 조항에서 허용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하게 된다면, 이 개별 조항은 늘 이렇듯 신율적이고 도덕률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미 인간적 주관성을 완전히 명확하게 내면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죄인으로 경험하는 것의 기초이다. 중세기 교회와 종교 개혁 시기에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기독교 교리의 이러한 내면화가 일반적으로 전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다른 진술에 대한, 더구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말씀이나 또는 이것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한 경험적 토대를 획득하기 위해서 개개인들에게 자기의 죄를 의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선교와 기독교 선포의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의 문제점을 전반적으로 통찰할 수 있다면 죄론은 결코 기독교의 다른 사안들을 서술하거나 해명하는 가치로 자리를 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죄 개념을 해석 범주로 오용하게 되면 당연히 인간의 주관성 구조를 다른 식으로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토대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관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런, 또는 저런 형식으로 특징화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은 기독교와 불교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적합한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다소간 다른 종교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에 인간학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의 대화는 거의 직접적으로 신관으로 집중될 수 있다. 힌두교와의 대화에서는 인간학적 질문이 현실성 일반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 빠져든다.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대화에서 그 배경이 된다. 이 두 종교는 인간과 자연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달리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종교 사이의 대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학에 집중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듯 우주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학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 두 종교가 비록 상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이 세계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는 이미 1960년대에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인간 실존의 내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르게 대답하는 데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인간 실존의 목표(telos)를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모색하는 반면에 불교도들은 니르바나(Nirwana)*에서 모색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언급은 당연히 비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진리순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보려고 한다. 틸리히는 불교가 개인 너머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방식인 반면에 기독교는 개인주의적인 사유방식이라고 대별했다는 점에서 옳게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규정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과 그 사태를 단지 윤리적 언어학에서만 서술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폴 틸리히는 트릴취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셈이다. 트릴취는 서양의 “윤리적”(ethisch) 종교를 동양의 “존재론적”(ontologisch) 종교와 구별했다. 이 두 종교는 실존의 목표를 내용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만 구별되는 게 아니라 이미 실존의 구조 내지는 인간의 주관성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틸리히는 주관성 범주의 구조적 분석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를 내놓았다. 이 주관성 범주는 근대 불교 사상이 불교의 입장을 서술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니르바나는 불교의 최고 목표를 나타내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열반(涅槃)이라고 번역된다. 열반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주로 번뇌를 초극한 정신의 평화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순간(Wahrheitsmoment)이라는 단어는 독일어 ‘진리’와 ‘순간’의 합성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우리말로는 약간 어색하기 들리지만, 본문에서 틸리히의 주장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론적 차원에 대한 강조라고 보면 충분하다.    

히사마추 쉬니키(Hisamatsu Shinichi)는 “무신론”을 다룬 한 논문에서 종교, 또는 종교성의 세 유형에 대한 도식을 제시했다. 중세기의 이질적(heteronom) 종교성, 근대의 자율성, 그리고 근대이후의 “이질적” 자율. 이질적 종교성이 권위적 요청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율적 자아는 전승된 권위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본래적인 인간의 자아(Ich)에 대한 본성이나 체질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이제 자아의 구조는 자기 자신을 유한한 주관의 하나로 알게 됨으로써 부정성의 한 요소가, 즉 자기 부정이 자기 구조에 속하게 된다. 유한한 주관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성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부정성에 대한 지식은 자아를 벗어나서 자아에 대한 준(quasi) ‘이질적’ 구성으로 전환된다. 절대적인 주관이나 또는 비교할 수 있는 법정을 통해서 말이다. 히사마추는 자기의 이러한 준 ‘이질적’ 구성을 불교적 가르침과 연결시켰다. 진아는, 즉 각성된 자기는 경험적 자아와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서로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히사마추의 유형적 도식은 교양이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질적, 자율적, 그리고 신율적 문명이라는 폴 틸리히의 유형론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틸리히 사상의 전체 발전은 인간 주관성의 종교적 재구성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유발되었다. 이 인간의 주관성은 자율적 주관을 초월시키며, 따라서 모든 주변 환경과 더불어서 존재의 신적인 근원의 토대를 갱신시킬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훗날 틸리히가 존재론적 언어를 선호하게 된 것은 신율적 문화를 추구하는 국면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틸리히는 독일 이상주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점으로서의 주관성 구조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틸리히가 인간적 숙명의 현실화를 문명 세계와의 일치에서 찾아보려고 했지, 개인의 실존적 고독 가운데서 찾아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틸리히는 신학 발전의 마지막 국면에서, 즉 조직신학에서 주관성 구조의 모델을 존재론적 언어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본질과 실존이라는 용어는 주로 신화적이었다. 틸리히는 자율적 주관성을 인간의 인격에 대한 신율적 해석과 통시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의 이런 이론은 별로 철저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틸리히는 단순 자율과 대립해 있는 신율을 기독교와 불교의 대립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영역에서 윤리적 종교성과 존재론적 종교성의 대립에 대한 도식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자율과 대립하는 신율의 개념은 불교의 자아철학에 대한 집중적 분석에 이르는 길을, 또한 자율적 주관성의 근대 원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철학자 마사오 아베(Masao Abe)는 이 두 종교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짤막하게 서술했다. 불교의 깨침과 기독교의 회심은 양자가 인간의 죽음을 구원의 본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베가 생각했던 바울 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게 될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사상의 인간학적 적용은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드물게 인식되었다. 바울은 새로운 아담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자아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할 인간의 운명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있지 않은가? 경험적 자아와, 또는 경험적 자기의 상태는 무엇인가? 로마서 7장 22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하나님의 법을 반기고 있는 ‘속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기에 대한 지식 가운데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경험적 자아인가?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인가? 바로 이 두 번째 추정은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반항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과 근사하다. 루터는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언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아서기 이전에 겪었던 인간적 갈등이라는 근대의 주석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속사람’이 소위 ‘자연적 인간’의 자기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운명의 빛에서 언급되는 바로 그 인간의 인격이 여기서 관건이다. 이런 전망에서 언급되는 인격적 자아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 눈으로 나의 자아를 찾아내는 것과도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다시 일치한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소외된 과거와 일치됨으로써 옛 아담과의 싸움에서 참된 자아의 은폐된 현재를 전제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현재 자기가 만족해하는 이런 참된 자아의 부족한 흔적을 이미 이전에 자기 자신이었던 인격의 ‘가장 내면적 자아’의 해방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정체성의 증거로 삼는다.

*로마서 7장에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에 이중성이 작용하고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롬 7:18,19).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찰 방법의 극단적 함축성은 후기 기독교 인간학에서 전혀 인식되지 못했으며, 인정받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시간의 의미가 무시되었다.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옛 아담이 행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옛 아담과 동일시된다. 반면에 후기의 기독교 사상은 로마서 7장이 언급하고 있는 “속사람”을 이성의 능력 안에 정치시켰다. 마치 모든 ‘속사람’이 이와 똑같은 법정의 모든 시간에 놓여진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신학은 늘 자연적 인격이 은혜를 통해서 초월된다는 점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서 은총은 부가적인,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했다. 즉 인격의 중심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이미 실존하는 인격적 자아에 부가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도 서양 기독교 사상에서 인간적 인격은, 즉 이성적 개인과 자유로운 결단의 주관은 원상태에서 죄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으로 진행되는 과정의 지속적인 기초에 해당되었다. 루터의 비판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루터가 신약성서와, 특히 바울의 신학과 일치될 수 없다고 옳게 보았던 자리가 은총의 관계에서 여전히 자연적 주관의 자유로운 의지에 주어졌다. 루터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울에 따르면 거듭나는 사건에서 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변화된다고 말이다. 바로 여기에 루터의 유명한 명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우리는 엑스트라 노스(extra nos,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말이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뜻이다. 신앙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옛 자아를 뛰어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신뢰함으로써 우리 실존의 토대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임하는 바로 그분에게 놓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그분에게 맡긴다. 완전히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능력이 놓여 있기 때문에 신앙의 행위는 단순히 옛 주체의 행위로만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사건에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을 일종의 충격받음(Ergriffenwerden)이라고, 즉 우리를 우리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영적인 엑스타시의 생기(生起)*라고 서술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위한 루터의 싸움을 이해해야만 한다. 루터는 선택 능력이 늘 인간적 인격실존의 상이한 특징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택 가능성의 등급은 행위하고 선택하는 주체의 한계를 통해서 한정되어 있다. 완전히 새로운 인격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에 속한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자유를 발견하며, 앞서 우리 자신이었던 사태를 뛰어넘어 우리의 참된 자아존재를 발견한다. 그렇지만 구원하는 사랑으로 인해서, 그리고 죄인을 향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의 고유한 자아는, 즉 지난 날 우리 자신이었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도달 가능한 인격의 참된 정체성은 그 어떤 외적인 한계로부터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옛 자아의 한계로부터도 자유롭다.

*독일어 Ereignis는 일반적으로 ‘사건’이라는 의미이지만 신문 보도처럼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가 포함된, 또는 해석된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로 보는 게 맞는 번역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영적인 엑스타시의 생기라는 말은 영적인 열광 경험으로 인해 발생되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루터의 인간학은 바울 신학의 인간학적 극단화를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사상사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가 이전에는 왜 간과되었는지 물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대립된 개념이 나름대로 특별히 기독교적인 관심사에서 무성해졌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관심사가 상이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개인적 인격과 그것의 영원한 가치에 대한 흥미이다. 즉 예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흥미이다. 잃은 양이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이런 흥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흥미는 기독교 사상가들로 하여금 모든 개별적 인간 개인을 영원한 주체로 생각하게 했다. 근대의 언어적 의미에서 주체는 이런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창조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과의 유비에서 자유로운 결단의 행위를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적 인격존재의 최고치로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인간 존재의 무시간적 구조로서 구상되면 될수록 인간실존의 극단적 변형*과 자리매김을 수행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인간적 실존은 신앙행위에서 발생하며, 세례를 받음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바울과 루터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있던 상태를 다시 회복하거나 부족한 것을 보충함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뀜으로써 구원받는다. 흡사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형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인간학은 계몽이나 진보 개념이 아니라 극단적 변형 개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근대 역사의 과정과 근대 사상의 역사에서 루터에 의해 심화된 인간학적 통찰의 새로운 전망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인격주의가 자연법과 정치 철학에서 새롭게 발전되어 강화됨으로써 우위를 점했다. 그렇지만 오늘의 상황에서 개인적 자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적 정체성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으로써 아주 분명하게 어려움 가운데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단지 형식적으로만 이해된 자유의 임의성과 피상성에 대한 감정이 잠정적으로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기는 하다. 이런 감정은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우리 서양 사람들의 언급에서 철저한 자기 신뢰를 제거시켰다.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인격주의*의 한계는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인격주의가 전제하는 토대로 인해서 불교와의 심층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기독교의 전통적 인격주의의 약점은 오늘날 서양 기독교의 문화적 풍토에서 불교 사상의 매력이 부각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자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여러 관점에서 개인적 자유라는 서양의 주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심층적으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의 참된 인간학은 불교의 도전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인간학에 대한 루터의 생각과 불교 사상은 마사오 아베가 서술한 의식에서 공동의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자기(Ich)가 죽는다는 것은 구원의 본질적인 의미”이며, 또는 좀더 보편적으로 언급해서, 자연적 자기는 아직 인간의 참된 자아(Selbst)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 사상이 말하고 있는 인간 자유의 피상성에 대한 불교의 비판은 특별히 루터 교인들에게 자유의지론에 대한 루터의 비판을 기억나게 한다. 또한 틀림없이 우리의 근대적 자유철학의 휴매니스틱한 근원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갖는 그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인격주의(Personalismus)는 인격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관점으로서 헬라 철학에서는 아낙사고라스와 프로타고라스가 지식의 인간적 측면을 강조했으며, 특히 소크라테스는 인간 영혼을 모든 행위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초월적 입장과 헬라 철학의 인간주의를 종합했으며, 보에티우스는 ‘인격은 지적 본성을 갖는 개별적인 실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인 인격주의를 명시했다. 결국 이런 인격주의에는 자아가 지나치게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약점이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인격주의는 그것의 철저한 변형을 가르치고 있는 바울과 루터의 사상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뛰어넘는 불교와의 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루터의 관점과 불교의 관점이 자연적 자기를 자아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수렴된다고 해서 양자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결정적인 차이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마사오 아베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 신앙이 초월적 현실성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다는 데에 있다. 반면에 불교는 이원론적인 모든 형식을, 특별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불교도들은 자신의 자기를 초월적 너(Du) 덕분으로 거절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바로 부처의 권위를 “죽여야만” 한다. 더구나 삼사라(Samsara)*와 니르바나의 대립을 거부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원론과 대립의 모든 형식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윤회라는 뜻의 삼사라 사상은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생명체에 주입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니르바나는 그런 윤회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방식에서 이것은 선(禪, Zen)에 해당된다. 반면에 정토진종(Jodo-Shin)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 Amida)의 강조는 무언가 다른 상을 제시한다. 칼 바르트는 불교의 이런 형식이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론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확증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인 카추미 타키자와(Katsumi Takizawa)는 최근에 이런 질문과 연관해서 이 두 불교 학파 사이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타키자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신란(Shinran)*이 주장하는 아미타불은 신앙하는 자의 자기와 상대해 있는 무언가 완전히 상이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도겐(Dogen)에 대한 선의 명상 기술은 개인적인 자기의 업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개인에게서 작용하는 참된 다르마(Dharma, 진리)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이 두 학파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이라는 두 측면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인가?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루터의 전통에서 볼 때 우리와 상대해 있는 어떤 타자의 리얼리티를,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리얼리티는 신자의 자기에 대립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종교의 근본적인 구조적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차이는 기독교인이 초월적 하나님을 믿는 반면에 불교도들의 궁극적 지혜는 비움인 수냐타(Sunata, 空)라는 사실에서 가장 명백하게 돋보인다.

*신란은 12세기 아미타불 신앙을 강조한 호넨(Honen)의 제자로서 타력적인 구원관을 강조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성급히 판단하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다. 마사오 아베는 좀 오래된 논문에서 신적인 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구별되지 않은 객관주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만 했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초월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말이다. 오히려 “초월적인 것만큼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현재적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자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그의 나라와 나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히 불교 학자의 이러한 고찰을 확증할 수 있다. 즉 부가적 무게를 획득하는 고찰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불트만의 명제가 옳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객관화된 언어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관주의도 역시 조심해야만 하는데, 객관화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객관적인 언어로 진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현실성이 주체와 상관없는 단순한 객관주의를 극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사오 아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론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확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 피안적 표상을 함축적으로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종교적 초월의 초월’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 아베에 따르면 이 교리는 니르바나에 대한 불교적 부정과 비교될 만하다. 이 부정은 대승(Mahayana) 불교의 삼사라와의 대립을 말한다. 아베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에서 기독론적인 도그마를 고찰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7절에서 언급한 그 유명한 문장을 기억해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이다. 아베는 이 말씀을 17세기 루터교 신학자들과 아주 유사하게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근대 주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향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케노시스적인’ 자기 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형태에 부여된다. 반면에 근대 주석은 자기 낮춤을 성육신 사건의 신적인 로고스와 연결시킨다. 이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형태를 최초로 구성하고 것이다. 아베에 따르면 바울의 사유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낮추고 또는 부정함으로써 육신이 된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케노시스적 부정을 통해서 “내재와 초월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었다”고 주장하는 보는 한에서 불교도는 케노시스적 그리스도를 ‘궁극적 리얼리티의 기독교적 상징’(the Christian symbol of Ultimate Reality)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의 판단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다음과 같은 기독교의 주장으로 인해서 구별된다. 이런 역설적 단일성은 역사에서 단 한번 현실화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이다. 이런 근거에서 아베는 이러한 객관화가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원론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번 더 루터의 생각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에 대한 루터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아베처럼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주의 깊게 비판하고 있는 불교 사상가의 판단을 좀더 세밀하게 고찰하고 구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가 감당함으로써 자기 부정의 길을 명확히 갔다. 기독교인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이 길을 가야만 한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의 심판에서 옳다는 사실을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다. 루터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자기 부정은 기독교 신조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관계를 아베가 그랬던 것처럼 이원론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 이 관계는 반대로 신자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통해서 특징화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특징화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서 개별 신자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일치도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의 단일성은 신자들의 친교를, 즉 교회를 포함한다. 이런 단일성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진술한다. 여기서 핵심은 분명히 아무 구별이 없는 무조건적인 단일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음으로써, 또한 자기가 감당해야만 했던 심판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아버지와 구별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약속을 자기에게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인격을 예수와 구별한다. 물론 이런 자기 구별로 인해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그리고 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숙고는 분명히 루터 자신의 구체적인 진술을 능가한다. 즉 이러한 숙고는 루터의 진술을 단순히 반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숙고는 함축적 구조를 보편적 방식으로 명백하게 하려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의 기독론적 진술에서, 특히 초기 문헌과 강의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신자들의 겸손과 밀접하게 연관시킴으로써 중세기 신학의 통상적 궤도를 떠났다. 그래서 이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맺는 영적인 단일성에 대한 직관이 이런 서술에서 발현되었다. 이런 영적인 단일성은 루터의 칭의론에서 근본적인 요소였다. 루터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원론적 기초구상의 범례가 결코 아니다. 그의 신학에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요소가 있지만, 이런 구별은 포괄적 단일성으로 통전화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이런 단일성의 항존적 조건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사상사에서 구별과 단일성이 상호적으로 소통되었다는 사실은 늘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에서 논의되었다. 루터는 삼위일체론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건해보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구원의 역사에서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두 전망을, 즉 구원사와 신론을 연관시켜보려고 분명히 애를 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별과 단일성에 대한 인간학적 전망과 기독론적 전망은 포괄적 관계틀에서 연결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논쟁은 결국 기독교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오류가 있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에 모든 이원론적 책임이 있다는 불교의 비판 앞에서 삼위일체가 창조와 구원사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이런 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이라는 사실이 명증하게 해명되는 경우에 양측의 논쟁은 창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세계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도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계가 구별되는 것과 같다. 이 두 종교 사이의 대화는 인간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확실한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인데, 이런 대화는 참으로 실제적인 것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그 최종적인 결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차이를, 또한 자기와 세계 사이의 차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두 종교 사이의 차이점은 훨씬 명확하게 해명되어야만 한다. 불교 쪽에서 기독교의 생각이 이원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 그들은 비로소 기독교가 왜 그토록 명백하게 역사적 인물의 유일회성을 주장하는지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마사오 아베는 이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신자들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현실성이라 할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 데 있다고 말이다. 선(Zen)의 본질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와의 일치나 부처와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공(Leere)과의 일치에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불교가 비판하는 그 도구를 이제 그들의 선생에게 적용시킬 수 있으며, 또한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공이 늘 이원론적 개념일지 모른다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은 소박하게, 그리고 반성적인 형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비판의 소박한 형식은 불교 승려들 중에서 깨침을 얻지 못한 이들과 얻은 이들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개념적 구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질문은 이렇다. 깨달은 자의 지혜와 그가 얻은 니르바나는 생성과 흐름의 세계와, 즉 삼사라의 세계와 대립해 있는가? 경솔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을 즉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원론의 모든 다른 형식과 함께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대립도 역시 부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니르바나는 삼사라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또한 ‘공’은 바로 이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삼사라의 일상적 현실성과 대립해 있는 어떤 대안적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질문은 두 번째의, 그리고 훨씬 반성된 형태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이제 이 질문은 부정 자체의 운동을 준비한다. 즉 부정 운동은 불가피하게 일종의 새로운 대립을 부정의 모든 단계에서 구성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부정은 발생과 흐름의 세계를 경험적 자기와 연관해서 준비한다. 여기서 이제 자기와 삼사라 세계의 모든 이중성에 대한 대립된 것으로서의 니르바나 사상이 발생한다. 그 다음 단계로 니르바나 자체가 삼사라와 대립되는 한에서 부정된다. 따라서 여기서 공 사상이 나온다. 그러나 공 사상은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이원성과 대립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공 사상이 이원론의 새로운 형식을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삼사라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은 삶과 얻지 못한 삶의 이원론을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이런 이원론이 여전히 더 확장된 단계로 극복될 수 있다면, 부정의 형식은 매 단계마다 이런 것으로서 새로운 대립을 생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원론적 대립의 이러한 반복은, 부정적인 것의 부정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가 인간적 반성의 생산물로 간주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루터가 신앙의 생기(生起, Ereignis)라고 이해한 것과 아주 흡사하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뛰어넘게 하는 열광의 생기로 간주되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이런 생기에서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즉 우리를 제어하는 행위가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런 경험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신적인 현실성이라는 사상은 이미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마하야나(대승) 불교 시대의 역사는 신적인 현실성에 대한 직관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는 사상을 암시하고 있다. 계속된 부정의 방법으로부터 이제 부정적인 것의 부정에 현재하고 있는 실증적 리얼리티로 주목을 전환시키게 됨으로써 말이다.
기독교에서 신(神)이 유한한 생명에 개입한다는 신비는 인간 실존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인간 실존을 긍정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인간 실존을 영원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루터가 약속의 내용으로 생각한 것인데,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와 맺는 관계라는 사상에서 다루었다. 약속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며, 큰 기쁨이며,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영원한 긍정이라는 경험에서 이제 일련의 모든 결과들이 발생한다. 그 중의 몇 가지만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절대적 현실성(Wirklichkeit)*이 기존의 의미로서만 능동적이거나 또한 인간적으로 파악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여기에 연루된다. 흡사 사랑하는 아버지의 상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듯이 말이다.

*현실성은 단순히 우리의 일상에서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차원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범주를 뛰어넘어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참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절대적 현실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둘째, 신(神)적인 것을 유한한 현존의 압도적인 긍정으로 보는 직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재만이 최종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연루되어 있으며, 또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적 유일회성이 모든 개인적인 생명에 의미를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과 연루되어 있다. 말하자면 피조물에 대한 신적인 긍정은 개인 실존의 결정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의 토대를 무상한 생명 너머에서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희망은 곧 죽은 자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이다. 신적인 현실성이 확실하다는 기독교의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몇몇 특색을 설명할 만한 토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특색은 불교도들에는 정말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의 유일한 의미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색은 역사적 특성과 개인적인 것들의 가치를 확실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모든 개인들에게 주어진 특성은 이런 맥락과 상응한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마하야나(대승불교) 전승의 근본과 비교할 때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기독교의 긍정이 갖는 차이는 특별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생명 현실성에 대한 기독교의 긍정은 무상한 상태 그대로의 삼사라(윤회) 세계가 갖는 리얼리티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죽음과 무상성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기독교는 생명 현실성을 긍정함으로써 일종의 변형적 역동성*을 통해서 특징화되는데, 이 역동성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을 각인시키며, 또한 기독교 윤리를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전체 창조물이 미래에 얻게 될 구원의 선구자인 인간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리는(롬 8:19), 그리고 인간이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서 이 세상이 변형된다는 기독교적 열망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변형적 역동성(eine transformative Dynamik)이라는 용어는 현재의 생명 현실성이 부활의 생명 현실성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을 가리킨다.

이미 유대교적 전승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바로 이런 변형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죄를 강조하게 되었다. 죄는 생명을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로 변형시키는 영과 대립하는 모든 것의 공통 분모*이다. 이 죄는 속사람 안에 있는 이런 생명의 영과 대립한다. 이 영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이 세상에서 일구어 나간다. 따라서 죽음과 고통과 질병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의 무상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도 역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부터 이제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신앙이 죄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해명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적 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현실성에 대한 긍정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소간 약화되거나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도 설명될 수 있다. 즉 자기의 죄성을 간과한 채 단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며 걱정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의 신앙과 영에 대한 이해가 왜곡될 뿐이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영을 왜곡시켜왔는지에 대해서 그 자세한 흔적을 검토할 필요는 없다. 죄론이 그 참된 형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근본적으로 세계를 긍정하는 기독교 사신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요소는 바로 기독교 사신의 핵심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사신의 세계 긍정은 세계의 변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시간적이고 역사적 과정의 전망을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피조 세계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인간에게 허락하는 해방과 새로운 정체성이 신앙을 통해서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이기도 한다. 그런데 신앙을 통해서 이런 긍정적인 사랑과 이 사랑을 유효하게 하는 기쁨은 이제 인간의 삶에서 작용한다. 기독교에서 신앙 개념이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변형하는 역동성 덕분이다. 즉 개인에 대한 신적인 긍정이 역사적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적 인격의 정체성은, 즉 참된 자아는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의 외부에서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기독교 교리로 하여금, 진아를 모색하는 개체 인간의 역사를 포함해서 인간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연관해서 비(非)정체성과 비(非)진정성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고려하게 한다. 이 진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진아를 모색하는 길에 이미 현재하고 있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죄의 본질적인 개념을 매우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죄는 단지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이르게 하는 영과 대립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만 지향하게 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도 역시 죄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보이는 교회와 교회당을 절대화하는 하는 태도도 역시 죄다. 우리가 미처 형상화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려나가는 그 하나님의 미래에 우리의 생명을 맡기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터의 전승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경험적 자기의 자아 유지에 대한 불교의 비판을 수렴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루터의 전승은 진정한 자기 정체성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토대가 잡힌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전승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불교의 비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에 대한 기독교의 강조가 변형에 대한 확신과 연관되어야 한다. 절대적 현실성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환상은 바로 이 변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라는 루터의 학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인간이 변형된다는 선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기독교 교리를 이렇게 번역해 내는 작업은 불교의 마하야나-전통과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전통은 삼사라 세계를 (인간 자신을 포함해서) 부정함으로써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대립을 부정하며, 결국 삼사라의 무상한 세계 한 가운데서 해방된 실존으로서의 공(空)이라는 학설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루터의 학설은 유한한 현실성의 이러한 확신에 대한 기독교적 형식을 매 단락마다 명증하게 만들어낸다. 인간의 자아 경험에 집중하는 불교의 도전은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특히 루터교인의 입장에서- 죄와 사죄를 중심으로 한 신앙심에 대한 기존의 지나친 집착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집착은 복음의 기쁨을 훼손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긍정적으로 비추어 나가는 복음의 활동을 억압함으로써 종종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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