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설정하는 제유형


신학과 철학 사이의 변화무쌍한 관계사를 조직적인 의도를 갖고 접근하기 원한다면 양자의 관계가 어떤 형태를 채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학과 철학에 대한 어떤 전형적인 관계 설정이 그 관계의 역사에 실제적으로 등장했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인 몇 가지 점에서 심사숙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는 a) 상반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b)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더 나아가서 c) 신학을 철학보다 우위에 두거나, 혹은 반대로 d) 철학을 신학보다 우위에 두었다. 이로써 네 형식으로 분류가 가능한 관계 설정이 주어졌다. 이것들은 곧 뒤에서 설명하게 되겠지만 철학과 신학의 관계사로부터 발생한 분명한 위치를 규정하게 된다. 물론 자세하게 고찰하게 되면 결국 이러한 형식상의 관계 설정은 최선의 경우에 미리 생각을 깊숙이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또한 철학과 신학의 관계가 그 역사에서 사실적으로 형태를 갖게된 그 방식의 복잡성에 직면해서 그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주어진 형식상의 관계 설정에 근거해서 이 실태를 파악해보는 일은 유용하다. 신학과 철학의 관계 설정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한계 가능성으로서는 이 관계 설정이 그 역사과정 가운데서 양자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의미가 있다. 신학과 철학의 관련에 대한 매우 유형론적인 고찰의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주제에 대한 잠정적인 관망을 중재할 것이며, 도한 이 책의 전체적인 틀을 위해서 어떤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1. 철학과 대립관계에 있는 신학


기독교는 철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은, 그리고 철학적 사유와 맺는 각각의 연결은 계시신학으로서의 권위를 희생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늘 터툴리안을 그 조상으로 끌어들인다.1) 실제로 터툴리안은 이렇게 기록했다. “아덴은 예루살렘과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아카데미는 교회와 함께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2) 기독교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게는 단지 믿음만이 중요할 뿐이며, 따라서 믿음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나올 게 없다. 터툴리안은 후대에 그의 말이라고 일컬어진 그 형식을 결코 각인하지 않았다. 즉 믿음의 대상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그 형식을 말이다.(credo quia absurdum). 오히려 그는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부활은 이성이 이러한 사건을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말이다.3)

신학이 철학과 대치된다는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자면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고문관이며 그 당시 신학의 변증학자들의 절대자였던 추기경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1007-1071)였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다미아니는 민수기 21:10-13에 대한 알레고리칼 해석을 제시하면서 신학자들이 철학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표명했는데, 이 민수기의 내용은 일종의 고대 이스라엘 전쟁법의 일부로서 그들이 노예로 사로잡은 여자 포로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확인이다. 우선 이스라엘 사람은 철학의 머리털을 밀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필요 없는 이론들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손톱도 (이 손톱은 의심의 결과이다)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먼저 입었던 옷을 (이방인의 우화와 신화) 벗겨낸 다음에야 신부로 맞아들여야 했다. 이 여자는 그 주인의 여종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며, 또한 여주인의 신앙을 뒤따라야만 한다.4)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중세기에 철학을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 다루게 된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양자의 관계 규정의 뒤바뀜은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이런 해석과 여전히 관계된다. 철학은 여주인의 시녀로서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하지만 옷자락을 끌지는 않아야 한다고 그 유명한 비유를 제시했다.5)  

마틴 루터까지도 종종 신앙문제에 대해서 이성이 무지하다는 생각 때문에 신학이 철학에 대해서 상대적이라는 권위적인 명제에 동의하곤 했다.6) 루터는 이성을 창녀라는 말로 첨예화시킨 적이 있는데,7) 특히 그가 신학적인 사용에서 철학을 그렇게 판단한 탓이다.8)

그렇지만 모든 신학자들은 철학에 대한 이런 냉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학 작업을 위해서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았으며 회피하지도 않았다. 터툴리안도 여러 차원에서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스토아 철학을 뒤따랐다. 특히 정신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나 정신의 육체성에 대한 스토아의 견해를 뒤따랐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육체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9) 페트루스 다미아니가 변증법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학으로부터의 무제한적인 독립만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루터는 자기가 초기에 옥캄주의자였다고 결국 고백했다.10) 신학이 철학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것이다.11)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고 모든 것이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다는 라우렌티우스 발라(Laurentius Valla)와 죤 위크리프(John Wiclif)의 스토아 명제를 하나님의 권능과 그 섭리에 대한 서술이라고 방어할 수 있었다.12) 그리고 이로써 스토아적인 숙명주의를 추종하는 일에 대해서 비난을 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루터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대한 논쟁적인 언급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판단한다. 말하자면 자연적 이성이 세계적 영역에서 특별한 권한을 갖는다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계발된 이성이 신학에 참여 한다는 것에 대해서 판단한다.13)

신학과 철학의 기본적인 대립을 증언한다는 그 입장은 보다 자세하게 고찰해 보면 계시 신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가 매우 팽팽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아무런 적극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 순수하나 대립이 개재한다는 이 명제는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신학은 이성을 사용해야만 했으며, 또한 철학과의 논의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다.


2. 참된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기독교를 참된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견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묘사에서 거칠게 대립시키는 극단적 대안임이 자명하다. 조금 더 정확히 고찰하자면 고대 교회 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이 양식은 철학적 신학이 신학의 명확한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으며, 따라서 실제로 발견된 철학에 대한 대립이 기독교를 참된 철학으로 묘사하는 순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양식은 2세기 호교론자들에게 이미 발견된다. 따라서 이미 순교자 유스틴(Justin)은 기독교를 가리켜 “유일하게 확실하고 유익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처름과 마지막을 보증하며, 또한 완전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철학이라는 것이다.14) 이로써 그당시에 철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이 주장된 것이다.15)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신화적 묘사가 철학적 진리를 삽화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 맞다면, 그리고 플루타크에게서 보듯이 -특별히 그가 쓴 에집트의 이지스 신화에서 보듯이- 종교적 표상에 대한 이 해석이 다른 종교적 전통에 양도될 수 있다면, 그래서 에집트의 지혜의 신인 토트(Thot)가 그리스 신의 사자인 헤르메스와 병치될 수 있다면, 이것은 곧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주장했듯이 일종의 분명한 종교적 삽화는, 즉 유대 종교의 삽화는 철학적 진리를 유일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교부들은 이와 달리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진리의 예증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을 지혜의 참된 형태라고 해석함으로써 신앙을 철학의 자리에 정치시켰다. 철학은 그 개념의 단어적 의미를 이 지혜에서 찾았다.

기독교 사상이 자기 자신을 철학으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은 곧 신학이라는 단어가 그 당시의 관용어적인 의미에서 신에 대한 가르침을 신화론적으로 특징화 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예를 들어 Platon, Staat 379 a).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에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될 것임) 신학의 개념을 다르게 사용했다. 물론 2세기의 언어관용에서는 신학을 신화론과 동일시했다. 이것은 철학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용할 수 있었는데도 무슨 이유에서 기독교 사상이 신학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렇게 주저했는지에 대한 근거이다.16) 어쨌든지 신학의 개념이 최소한기독교 신론에서 사용되었을 때 이 개념의 철학적 사용은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토아 학자들과 연결되었다. 결국 파나이티오스와 그의 학파인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35-50) 이래로 철학적 신론은 시인의 신화적 철학과의 차이에서, 그리고 국가 숭배의 논쟁적인 신학과의 차이에서 “자연” 신학으로, 즉 신론의 바로 그 형태로 특징화되었다. 이 신론의 형태는 신적인 것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이다.17)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에 의해서 자연 신학의 개념은 라틴 언어공간에서 쓰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개념은 이미 터툴리안 같은 이들의 기독교 작품에 나타나 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리에서 두드러진다.18) 실제적으로 이것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서 발전된 바와 같이 기독교를 참된 철학으로 파악해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클레멘스의 주저는 기독교 교리를 참된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체계화 시켰다.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6장(1,1)의 소제목으로 잡힌 “학문적인 제시에 걸맞는 참된 철학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다.19) 클레멘스는 이에 대한 근거를 그리스 철학은 “하나님의 섭리”이며(Ⅰ,18,4), “하나님이 그리스인들에게 빌려준 선물”이며(Ⅰ,20,1), 유대인들에게 속한 율법이 기독교 계시에 타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라는(Ⅰ,28,1ff.) 명제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클레멘스의 “못자리”(Teppiche)는 그리스 철학의 가르침을 신앙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신앙은 철학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준거로 작용한다.(Teppiche Ⅰ,8,2). 클레멘스는 철학이 지혜,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고 보기 때문에 철학을 그 개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20)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지혜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의 “여주인”인 한에서 그렇다. 이러한 추구는 여주인의 손 안에 놓여 있다.(Ⅰ,30,1).


3. 초자연적 계시와 달리 “자연적 이성”으로 기능하는 철학


교부신학이 기독교 교리를 참된 철학으로 생각했지만 라틴 중세기가 되자 신학적 인식은 인간적 이성에 걸맞는, 즉 철학에서 발전된 “자연적” 인식과 구별되었다. 신학의 대상은 이제 초자연적인 계시에 근거하는 일종의 교리가 된 셈이다.21)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개념은 매우 장구한 전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스의 교부신학에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사건의 일반적 진행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난 놀라운 사건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상-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고스(Pseudo-Dionysios Areopagita)를 통해서 이 단어는 라틴 스콜라 신학에서 전문 용어로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신학적 체계의 전문 용어가 된 것이다.22) 이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인간 지성의 본질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으로 특징화되었다. 인간의 육체적-영적 본질에 상응하는 인간 지성은 감각적으로 주어짐으로써 구체화된 실체의 인식과 연관되기 때문에 인과관계의 개념을 통해서 일종의 제일 원인자라로 파악될 수 있지만 그 본질을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고양이 필요하다. 자연 이성의 지고한 행위인 철학은 여기서 그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과 그 섭리를 열락(悅樂)에 대한 요구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23)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그 본질상 추구하고 있는 바인데,24) 지성의 본질과 연관된 한계로부터 고양될 필요가 있다. 이 고양은 신앙의 빛을 통해서 주어진다. 인간은 그 본질상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식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따라서 토마스에 따르면 자연과 초자연 사이에, 철학과 신학 사이에 그 어떤 대립과 반복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은혜가 인간의 본질을 성취한다. 이는 곧 자연 이성이 신앙을 돕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25) 이렇듯 토마스가 신학대전 첫머리에서 언급하고 있는대로 철학적 훈련은 신학을 통해서 보충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매우 효과적으로 규정해낸 이 작업은 고중세기 신학자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인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이성의 영역에서 아주 독특한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연 이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이었다고 한다면 신학의 신앙적 인식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받아들인 것은 그 고유한 자연을 통해서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표상의 기초를 형성한다. 즉 이성을 그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에 한정되어 버리게한26) 인식론의 그 기초에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 인식이 이성의 본성에 주어진 울타리를 원리적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토마스가 철학의 자연 인식과 신학의 신앙론 사이에서 제시한 그 연결은 인간이 자기 본성의 울타리를 뛰어넘으려 하며, 따라서 본성상 자기 초월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성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das sinnlich Gegebene)에 한정된다는 주장과는 달리 자기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이러한 추구는 인간의 이성에 적합하지 않아야만 하는 게 아닐까?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화가 이런 측면에서 문제이고, 또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작용하는 이성인식의 의도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의심스러워진다. 말하자면 자연 이성이 사물의 본질을 실제로 파악한다면 초자연적 교리를 통해서 보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한치의 틈도 주어질 수 없다. 이런 태도는 물론 “비본질적인 것”에 해당될 수 있다. 토마스는 이성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의 본질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이러한 결과가 방지된다. 그렇다면 왜 이성이 어떤 것에 대한 어던 사싱을 그것의 반영과 그 판단 형성에 대립시킬 수 없다는 말일까? 초자연의 개념을 통해서 이성의 본성을 고양시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초자연의 개념은 그의 편에서 이성을 통해서 생각될 수 있으며, 이성으로부터 그 개념의 내용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신앙 인식에 의존되어 있지 않은 “자연적” 사유의 독립성을 수용함으로써 -이는 철학의 자연적 사유를 신학으로 지양코자한 고대 교회의 시도와는 다른 것인데- 자연과 초자연의 인위적인 종합의 비약을 위해서 맹아가 싹을 틔웠다. 즉 자연적 이성은 자기의 외부로부터 착상된 그 어떤 울타리도 수용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자연 이성은 본질 인식의 자율과 그 충분성을 주장해야만 하며, 또한 이성적 상환성로부터 벗어나는 계시론의 요구를 제거해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가 종교 전통의 권위적 원리와 벌인 논란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발생했다.

권위 개념은 고대 수사학에 그 뿌리를 둔다.27) 그리고 근원적으로 명백성의 원리를 연역법의 합리적인 증명 실행과는 달리 논증(그리스어로는 페이토이다)을 통해서 두드러졌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모든 가르침은 교사의 권위로 시작되는데, 이 권위는 나중에 고유한 식견을 통해서 대체된다. 물론 몇몇 앎은 항상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모든 역사적 앎이 그것인데, 이로부터 역사적 인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기독교 사신도 역시 이에 해당된다.28) 즉 이성 인식은 일반적인 것에 관계된다. 따라서 역사적 개인들은 고대 철학적인 면에서 아주 철저하게 합리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근대의 역사-비평 학문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전반적으로 볼 때 확실한 전승의 권위를 신뢰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중세기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는 권위에 의존하는 입장이 유보되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본질을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인식할만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우리 이성의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중세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하나님 인식은 이러한 권위적인 중재를 필요로 했으며, 또한 이것은 당연히 신앙에서만 타당한 것으로 주장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성이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당연히 인정되어야만 했다. 이에 따라서 종교적 전승의 “초자연적인” 하나님 인식은 이성적인 면에서 매우 피상적이며, 또한 더 이상 이성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권위의 산물로 판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이성적인 값싼 신앙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상호적으로 논란을 벌이는 종교적 권위 요청의 많은 부분과 대면해야한다고 생각했다면 이 문제는 특별히 첨예화 되어야만 했다.

권위적 신앙과 달리 계몽주의에서는 이성의 자율이라는 원리가 부각되었으며,29) 따라서 자연적 이성과 계시의 관계, 철학과 신학의 관계가 반전되었다. 즉 이성은 종교적 계시 요청의 권위를 판단하는 준거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성의 잣대 앞에서 이 전통은 매우 값싼 권위를 내보이는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이 권위가 주장하는 진리라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성적인 것으로 승인될 수 있는 내용만이 동의를 획득했다. 이로써 결과적으로 철학자들의 자연적 하나님 인식은 신학의 상위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곧 계시와 이성의 중세기적 위계가 전도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전도는 영국의 이신론에서, 그리고 계몽주의 마지막 시대에 나온 칸트의 “순수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1793)에서 그 형태를 얻었다.

이로써 이제 앞서 언급된 신학과 철학의 관계설정에 대한 기본적 형태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논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관계가 대립된다는 주장은 고유한 역사적 위치로서의 독자적인 기능을 결코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늘 복합적인 위치에 직면되어 있는 한 순간으로만 등장한 반면에 신학과 철학의 동일화는 최후의 것이 최초의 것으로 지양된다는 점에서 기독교 교부신학의 신기원을 이루는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철학을 신학 밑에 정치시키는 것은 중세기에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아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반면에 철학을 신학 위에 올려놓는 반전은 계몽주의의 사상적 특징을 나타낸다. 계몽주의에서는 보다 확장된 두 종류의 관계 설정이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신앙을 이성에 속한 권위의 억압으로부터 건져내려는 신학의 시도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적 표상을 철학적 개념에 지향시킴으로써신앙의 내용을 획득해내려는 철학의 시도다. 이 두 경향은 철학적 이성의 자율을 전제하며, 따라서 계몽주의를 그 토대에 깔고 있다. 신학이 신앙에 관한 학문으로 독립하는 것은 따라서 그 자체로 여전히 철학적 논증과 정당성 부여에 기울어지는 꼴이 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철학적 방향과 보증이라는 장 밖에서 신앙으로 하여금 하나의 영역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철학의 경향이 대두된다.


4. 이성적 보편성과 종교적 주관성


보편적으로 참되다고 하는 것의 영역은 이성의 자율과 철학 쪽에 위임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 외에도 개인과 주관적인 경험과 느낌의 주장도 분명히 그 효능을 발휘한다. 주관성은 이 경우에 종교와 신앙의 피난소가 된다. 이는 곧 근대의 세속사회가 발전하면서 작용하게 된 경향과 상응하는 것인데, 이 경향은 공적인 영역에서 밀려난 종교를 개인의 사적인 일로 설명하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를 주관성에 정치시키기 위해서 철학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종교적 문제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한도 안에서 여전히 보편적으로 승인을 받게 하려는 한 형식의 표현이라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데빗 흄은 신앙의 감정적 본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 기적 신앙의 경우에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30) 칸트는 이와 달리 이성이 신앙의 주관성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그 한계를 통해서 신앙의 공간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물론 실천적인 의미에서만 그랬다. 말하자면 교회의 역사 신앙과 달리 하나님과 불사성을 도덕적인 토대에서 믿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신앙은 “결코 보편적으로 납득될만한 전달의 능력이 없다.”31) 이로써 칸트는 사실상 흄의 생각에 처음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 이와 달리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에 해당되는 일종의 “고유한 정서적 영역”을 요구함으로써32) 형이상학과 도덕 이외에 독자적인 제 삼의 차원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진술을 주시해야 한다는 그 토대를 얻어보려고 했다. 이 목표는 쉴라이에르마허가 초기에 종교개념을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규정하다가, 후기에는 의존감정으로 묘사했다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33)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신학자들도 역시 철학적 이성의 독립적 영역과 구별되는 신앙의 장소를 바로 이 철학적 이성의 수단과 일치시켰다. 이것은 각성신학에도 해당된다. 이는 개신교의 새로운 신학이 종교적인 주관성으로 돌아가는 입장을 말한다. 여기서는 칸트의 도덕철학이 그 기초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도덕률 요청에 직면한 죄책 경험은 사죄 경험이 복음의 권고를 통해서 신앙의 확실한 원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자기 내부의 분열을 최선으로 해결해 주는 “모든 계시를 발견한다면 이것이 곧 그에게 진리가 된다.”34) 칸트의 경우처럼 도덕적 경험 자체가 오히려 난파당하며, 그리고 사죄받아야 한다는 권고에 대한 경험이 이러한 난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앙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신앙의 확실성은 물론 전제된 죄책감으르 키워내야한다는 값을 치룬다. 각성운동의 경건에서 유래하는 신학적 방향은 신앙적 경험의 확실성이 어느 정도로나 믿을만한지에 따라서 구별된다. 이는 곧 사죄 경험의 기독론적인 전제를, 특별히 그리스도가 용서하시는 사역의 사실성을 보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각성 경건에서 전제된 도덕률과 그 난파의 도덕적 경험이 묘연해짐으로써 결국 경험 대신에 결단(Entscheidung) 개념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이미 키에르케가르드에게서 이루어졌다. 일종의 영원한 축복을 예수의 역사같은 역사적 소여성과 묶는다는 것은 신앙의 “비약”에서만 가능하며, 이 비약에는 “결단의 카테고리”가 해당된다.35) 신학계에서 이러한 사상은 제일차 세계대전 이후 수년 동안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칼 하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분노 사이의 이 “결단 문제”를 사람들이 직면해야 할 “궁극적인 이것이냐-저것이냐”라고 보았다.36) 이는 곧 “케리그마는 결단을 향한 부름이며 신앙적 결단”이라고37) 말한 루돌프 불트만의 진술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고유한 현존에 정위시키려는 “자연적” 자명성을 포기하는 결단을 가리키는데, 이 현존은 철학을 자유라 하고, 신학을 불신앙이라고 한다.38) 불트만에 따르면 철학은 “현존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도 안다. 철학은 말하자면 “현존이 너무 치우쳐 있는 그 결정의 자유를 알므로써 각기의 결정을 배격해 버리는 일종의 다른 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이에 대해서 자유로운 자기 구조의 행위에서 “상실된, 의미 없는 가능성”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39) 신앙을 철학의 자유이해와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불트만의 입장은 하이덱거의 철학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하이덱거는 이렇게 진술했다. “신앙은 가장 내적인 핵심에서 볼 때 일종의 특수한 실존 가능성으로서 본질적으로 철학에 속하는 ... 실존 형식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다.”40) 이런 주장은 앞서 논의된 모델 중에서 신앙과 철학이 상충한다는 입장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하이덱거와 마찬가지로 불트만에게도 역시 인간 현존의 구조에서 철학에 모순적인 실존 가능성의 장소를 규정하는 권한은 철학이 갖는다.


5. 종교적 표상을 철학적 개념으로 지양하기


계몽주의 철학은 철학적 이성을 종교적 전승과 신적 계시의 권위 요청을 시험하고 해석하는 준거로 삼아서 모든 피상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즉 도덕성과 자연신학으로부터 종교를 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써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와 상관 없이 이성에게만 타당한 내용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적 종교인 기독교를 철학이 손에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결과적으로 철학적 이성의 기독교적 해석이 되었다. 이것은 철학적 진리 인식이 역사적으로 철학보다 선행하는 종교에 의존적으로 될 수록 보다 가까이 놓여 있어야만 했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종교는 “표상적 형식에서만 참된 내용일지 모르며, 그렇다고 철학이 실체적 진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41) 그러나 철학의 과업은 이러한 내용을 개념적인 형식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은 종교 표상의 연관을 깊히 파악하고 관철함으로써 상호간에만이 아니라 또한 종교적 주제와의 관계에서도 역시 발생한다.42) 헤겔은 이런 사정을 종교적 표상이 개념적으로 지양되는 것으로 묘사했다.43) 이 경우에 종교 의식의 주제와 그 대상 사이의 대립이 그 중심에서 지양된다. 따라서 헤겔은 종교 행위가 실현됨으로써 종교적 표상이 개념적으로 지양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종교적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미 신학의 문제다.44) 그러나 신학은 이 경우에 늘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그 토대에 두고 있으며, 또한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계시의 내용을 해설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헤겔의 철학은 기독교의 역사적 출발점에 직면해서 (신적인) 주관성의 절대성이라는 생각을 통해서 독립하며, 기독교의 내용을 이러한 절대성의 전개라고 설명한다. 이런 한에서 종교적 표상을 철학적 개념으로 지양시키는 헤겔의 생각은 무언가 기독교를 보편적 철학의 진리로 축소시키려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기독교 신앙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는 그것이다.45) 이것은 역사적 종교와의 경쟁 가운데서 특수하게 철학적으로 짜여진 신론의 전통에 대해서 헤겔이 단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겔의 상황에서 볼 때 이런 전통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자기의식에 대한 이상주의 철학의 기초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절대 진리의 철학적 이해가 역사적으로 앞서 있는 종교에 의존적이라는 것을 헤겔이 분명하게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긴장을 수반한다. 이런 점에서 전반적인 역사성에 대해서 숙고하는 일과 철학적인 개념의 유한성을 숙고하는 일은 더욱이 절대 진리와의 관계에서 접근되어야 했을지 모른다.46) 철학적 신학을 계시신학이나 종교철학으로 지양시키는 일관성을 갖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철학은 대상의 역사적 소여성에 관한 전제를 아주 명백하게 실행한다.

종교적 표상을 철학적 개념으로 지양시키려는 헤겔의 명제로부터 철학적 신론의 신학적 지양으로 선회한다는 생각은 기독교 교부신학이 발전시켰던 것처럼 기독교를 참된 철학으로 해석하려는 접근이다. 철학을 신학으로 지양시킨다는 것은 여기서,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서 헤겔이 종교적 표상을 철학적 개념으로 지양시켰던 것과 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 양자 중의 하나가 다른 것에 나타나는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역사 과정에서 볼 때 신학과 철학의 병존은 몹시 긴장감 넘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실존적인 기초 결단이 일종의 공통적인 -철학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이 가능한- 인간 현존의 구조와 모순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학으로부터 출발해서 이제 철학적 통찰을 신학에 편입시키려는 그 변화가 보여온 늘 새로운 싸움의 형식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 교리와 연관된 철학적 성분의 계속된 축적과 집중으로 견인되었지만 신학과 철학의 자명한 병존 때문에 역사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는 기독교 교리를 조직신학적으로 전개하는 틀에서만 적절하게 제시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앞으로 다루어질 논의들은 기독교 신학이 우선적으로 고대 철학의 다양한 경향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접근했는지,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었는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철학의 주제 구성으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근대의 철학적 조직형성은 기독교 신학과의 어떤 관계에서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신학을 위해서 어떤 의미를 제공했는지 라는 질문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것은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에 한정된다는 형식에서만, 그리고 주제를 가장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1) 철학에 대한 터툴리안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E. Gilson und Ph. Böner; Christliche Philosophie von ihren Anfängen bis Nikolaus von Cues, 3. Aufl. 1954, 153f.
2) Tertullian, De Praescr. haeret. 7,9(CCL 1, 193).

3) Tertullian, De carne Christie 5: Certum est quia impossibile est (CSEL 70, 200,27).
4) Petrus Damianie, De divina omnipotentia 5, MPL 145, 603 D. 비교. Hieronymus CSEL 64, 56 n. 8 (658), sowie 21n, 13(122 ff.) und 70 n. 2(102).
5) I. Kant, Der Streit der Fakultäten, 1798, 26. 칸트는 이 실태를 여전히 열려진 질문이라고 했다.
6) M. Luther WA 1, 36, 17ff. 비교. B. Lohse: Ratio und Fides. Eine Untersuchung über die ratio in der Theologie Luthers, 1958, 32f. 특히 63ff., 98ff., zur Berufung Luthers in Worms 1518 auf klare Gründe der Vernunft110ff.
7) M. Luther WA 18, 164, 25f., 또한 위에 인용된 B. Lohse의 책 72쪽을 참조할 것.
8) 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WA 40/1, 20, 34ff.), 비교. WA 8, 36ff., WA 39/1, 174ff. 또한 위에서 인용된 Lohse의 책 74ff. 그리고 25쪽 이하에서 고찰되고 있는 것처럼 철학에 대한 마틴 루터의 초기 비판을 참조할 것.
9) Tertullian adv. Praxean 7 (CSEL 47, 237). Ph. Boener와 E. Gilson은 앞의 책에서(25f.) 영혼과 하나님에 대한 터툴리안의 유물론적인 시각을 밝혀주고 있다.
10)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된 B. Lohse의 책 26f.를 참조할 것.
11) M. Luther WA 5, 107, 5ff. u.oe. Vgl. B. Lohse a.a.O. 74f.
12) WA 18, 699(De servo arbitrio 1525). 발라와 루터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G. Ebeling: Lutherstudien 2, Disputatio de homine, 2. Teil, 1982, 90-92, 474f. 이미 후기의 멜랑히톤은 모든 사건의 일반적인 필연성을 위해서 의지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스토아적인 논쟁이라고 주장했다. (Loci praec. theol. 1559, CR 21, 919 und bes. 652).  
13) 이에 대해서는  B. Lohse의 책 77이하를 참조할 것.
14) Justin Dial. c. Tryph. 8, 1(E.J. Goodspeed: Die ältesten Apologeten, 1914, Neuaufl. 1984, 99).
15) 다음을 참조하라. E.R. Goodenough: By Light. The Mystic Gospel of Hellenistic Judaism, 1935.
16) 기독교 사상에서 초기에 이루어진 신학 개념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다음의 책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igie, 1973, 11ff., Sytematische Theologie 1, 1988, 11f.
17) 신학의 세 형식에 대한 스토아 교리에 대해서는 예거의 책 첫 장을 보라. W. Jaeger, Theologie der fruehen griechischen Denker, 1953. 신화론적이고 정치적인 신학에 대해서 자연신학의 대립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자연적 입장과 인간적 입장의 대립에 대해서, 이것은 궤변학파에서 대두된 것인데, 이에 대해서 하이니만이 다루고 있다. F. Heinimann, Nomos und Physik. Herkunft und Bedeutung einer Antithese im griechischen Denken des 5.Jahrhunderts, 1945.
18) Tertullian Ad Nationes Ⅱ,2, 14(CCL 1,43), Augustin De civ. Dei Ⅵ,5ff. und Ⅷ, 2ff., 졸저 Systematische Theologie 1, 1988, 91f.를 참조할 것.
19) 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앞에 나온 Gilson-Böhner의 책 33이하에 있다.
20)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개념화 하는 것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278d)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 파이드로스여, 내가 볼 때 현자와 알고 지내는 사람은 무언가 위대하다오. 그런데 오직 하나님에게만 이 이름을 돌릴 수 있오. 현자의 친구가 되거나(to philo sophon) 현자가 되는 것이 (월등한 사람이 되는 데) 훨씬 좋을 것이오.” Symp. 203 c-204 b를 참조할 것. 여기서 지혜를 사랑하는 에로스는 몰이해와 지혜의 중심에 위치한다. 
21)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실상 이 문제를 이미 신학대전(S.theol.) Ⅰ,1,1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개념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Ⅰ,12,4에서 신(神)인식에 관해 논의하면서, 신인식은 바로 피조된 지성을 위해서 supra naturam이며, 또한 우리의 지성은 ultra suam naturam으로 지양될 때만 그 인식을 필요로 할 수 있다고 했다.(ib. ad 3). 이에 상응하여 신앙적 인식은 quaedam supranaturlis이라고 특징적으로 말할 수 있다.(S.theol.Ⅱ/Ⅰ,2,3 ad 1). 
22) 이에 대해서 다음을 참조할 것. O.H. Pesch im LThK 10, 2.Aufl. 1965, 437ff., H. de. Lubac: Surnaturel. Études historiques, Paris 1946.
23) Thomas von Aquin, S. theol. Ⅱ/Ⅰ, 4,8.
24) Thomas von Aquin, S. theol. Ⅱ/Ⅰ,4.8.
25) S. theol. Ⅰ,23,1.
26) S. theol. Ⅰ,12,12를 비교할 것.
27) 권위 개념의 역사에대해서는 K.-H. Lütcke의 책 “Auctoritas" bei Augustin. Mit einer Einleitung zur römischen Vorgeschichte des Begriffs, 1968을 참조하라. 특히 어거스틴 이전 시대에 auctoritas-개념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보라. 여기서 뤼트케는 특별히 로마적 색채가 짙은 개념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그리스어 페이토(peitho)와 등가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아우크토리타스라는 단어는 집행권을 갖고 있었던 시의원(집정관, 호민관)과의 차별성 가운데서 원로원에서 정치적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어거스틴에게서 아우크토리타스가 권능(potestas)으로 변화되어가는 발전이 이미 보인다. 아우크토리타스와 포테스타스의 대칭은 교황 겔라시우스 1세가 494년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교회의 영적인 힘과 황제의 세속적인 통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적용되었다.(DS 347). 
28) Augustin, De div. quaest. 48: Alia sunt quae semper creduntur, et nunquam intelliguntur, sicut est omnis historia, temporalia et humana gesta percurrens (CCL 44A, 75,1-3).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졸저 Systematische Theologie3, 1993, 166f.에 나와 있다.
2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G.R. Cragg: Reason and Authority in the eighteenth Century, 1964.
30) 전자, 즉 보편적인 본성은 신앙(belief)의 개념과 연관되 가운데서 나오며(D.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 ed. L.A. Selby-Bigge, 2.ed. 1978, 623ff.), 후자는 기적 사건에대한 신앙과 연관된다.(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58, ed. Ch. W. Hendel 1955, 125, 61f.). 그러나 이 문제는 신앙의 개념 하에서 그렇다.(140f.). 다음을 비교할 것. E. Herms: David Hume (1711-1776) in der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94, 1983, 279-312, 특히 308ff.
31) I. Kant: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1793), 2.Aufl. 1794, 157, 155(비교). 칸트에 따르면 이 역사 신앙은 “단순 신앙이며, 또한 파악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되풀이 말”로 성격화 할 수 있다.(위의 책 117). 그러나 실천, 혹은 순수 종교 신앙은 이와 다르다.(위의 책 167이하, 또한 실천이성 비판, 1787, 227을 비교할 것). 이에 대해서 칸트는 말하기를, 순수 종교신앙은 “신앙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앎(Wissen)의 한계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순수이성 비판, 제2판의 머리말, 1787, B ⅩⅩⅩ).  
32) F.D.Schleiermacher: Über die Religion, 1799, 37.
33) F.D. Schleiermacher, 위의 책 50쪽 이하. 또한 쉴라이에르마허의 Der Christliche Glaube, 2.Ausg. 1830, 3f.을 참조할 것.
34) F.A.G. Tholuck: Guido und Julius. Die Lehre von der Sünde und dem Versöhner. 또는 die wahre Weihe des Zweiflers(1823), Tholucks Werke 1, 1862, 296.

35) S. Kierkegaard: Abschließende unwissenschaftliche Nachschrift zu den Philosophischen Brocken(1846), SV Ⅶ, 79 = deutsche Ausgabe von E. Hirsch 1957, 91. 또한 97f.(SV Ⅶ, 85) 비교.
36) K. Heim: Glaubensgewißheit. Eine Untersuchung über die Lebensfrage der Religion, 2.Aufl. 1920, 200. 이 결단 개념은 제3판에서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1923, 249ff.
37) R. Bultmann: Das Problem der "natürlichen Theologie", in ders.: Glauben und Verstehen Ⅰ, 1934, 294-312. 다음과 비교할 것. F. Gogarten: Zwischen den Zeiten, in: Die Christliche Welt 34, 1920, 374-378, 377. 또한 그의 책 Die religiöse Entscheidung, 1921을 참조할 것. 칼 바르트는 Der Römerbrief, 2.Ausg. 1922, 256ff.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이 결단은 (성)영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다(266f.).
38) R. Bultmann: Glauben und Verstehen Ⅰ, 310. 또한 그의 Gnade und Freiheit, in: Glauben und Verstehen Ⅱ, 1952, 149-161, 157f.를 비교할 것.
39) R. Bultmann은 위의 책에서 현존의 피투적 성격에 대한 하이덱거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M. Heidegger: Sein und Zeit, 1927, 284ff. 또한 296쪽 이하에서는 Entschlossenheit와 Entschluß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40) M. Heidegger: Phänomenologie und Theologie, 1970, 32.
41) G.W.F. Hegel: Begriff der Religion, hg. von G. Lasson(PhB 59), 299(MS).
42) 헤겔의 위의 책 291쪽 이하. 특히 294족 이하를 볼 것. “연관의 방식은 내용의 불가피성을 끝내 끌어낸다.”  또한 헤겔의 Encyc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hg. J. Hoffmeister(PhB 33) § 573을 비교할 것. 43)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 PhB 114, 479; Encyclopädie § 565. 또한 §555를 비교할 것.
44) G.W.F. Hegel: Begriff der Religion a.a.O. 256(1824년에 행한 강의).
45) 이것은 “지양” 사상에 대해서 칼 뢰비트가 제기한 애매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기독교를 철학으로 지양시키는 헤겔의 애매성, in K. Löwith: Vorträge und Abhandlungen. Zur Kritik der christlichen Überlieferung, 1966, 54-96). 이 애매성은 종교적 표상을 개념적으로 지양시킨다는 이 명제와 기독교의 “칭의” 사이에 어떤 구별점이 사상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헤겔은 지양 명제를 조직적 핵심 작품(Phänomenologie, Encyclopädie und Logik)에서 거론하고 있으며, 기독교 칭의를 종교철학 강의에서 다루고 있다. (F.W. Graf와 F. Wagner 두 사람이 편집한 책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Die Flucht in den Begriff. Materialien zu Hegels Religionphilosophie, 1982, 61). 또한 다음을 비교할 것. F. Wagner: Die Aufhebung der religiösen Vorstellung in den philosophischen Begriff, in: Neue Zeitschrift für systematische Theologie und Religionsphilosophie, 18, 1976, 44-73. 
46) 이에 대한 가능성은 헤겔의 사상 발전에서 한 순간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물론 정치성과 비정체성의 일치를 직관할 수 있고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그에게 생기지 않았던 시점이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 hg.H. Nohl, 1907,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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