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21 히브리서 3장.hwp

 

, 오늘 우리 공부할 성경 본문은 계속 우리가 연초부터 시작한 히브리서입니다. 오늘은 3장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만이 아니라 이 성경 전체가 오래된 책입니다. 우리가 보통 500년 전에 쓴 것만 하더라도 오래된 책이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려시대로부터 이조로 넘어온 이성계 이야기, 뭐 그런 거 오래됐다고 해서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성경은 자그마치 2처년, 구약까지면 3천년 그런 정도의 전에 책입니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을 기록한 거거든요. 하여튼 역사적으로 오래된 책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제 히브리서라고 해서요.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인들, 그러한 뜻입니다. 이게 교회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 이름도 아니고 어느 민족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이 저자는 우리가 확실히 모릅니다. 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구약적인 배경이 굉장히 깊은 어떤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오늘은 제 3장입니다. 1절부터 19절까지 있네요. 우리 한 바퀴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으실까요? 성경 다 가지고계시죠?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9절까지 있네요. 아주 긴 장은 아니고 정당한 길이의 장이네요. 우리가 함께 읽으면서 대충 내용은 파악이 됐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어려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요? 일단 단어나 문장이나 그 자체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어디 있나 보실까요? 특별한 거는 없어 보입니다. 9절에 보면 약간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나와요. 증험한다, 증명하고 경험 한다 그런 뜻일까요? 시험한다, 같이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고 시험했고 또 증거가 되려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한 뜻입니다. 다른 단어나 문장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제가 3장의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 조금 부정적인 표현이죠. 그거는 불자만 빼면 적극적인 겁니다. 순종과 신앙,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장 전체가 얘기하려는 것은 유대 역사에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고 올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걸까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말을 역사적으로 보면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이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이게 대다수가 못 들어갔어요. 심지어는 모세도 못 들어갔으니까 아주 어렸던 사람들만 들어갔고 스무 살 이상 되는 친구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들어가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있다. 그 이유가 불순종, 불신앙, 이거다.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인거에요. 정확하게 바라봐야 됩니다. 신학성경 다른 복음서 같은 것도 예수님의 역사죠. 벌어졌던 이야기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게 있었던 역사들, 그런 것들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제목으로 이거를 공부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유인물을 보시면 거기 서론 부분에 그 이야기를 썼어요. 잠깐 서론 부분만 보겠습니다. 18, 19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그거를 불순종과 불신앙이라고 한다. 세 가지 단어, 하나님의 안식, 근데 이게 뭘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안식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안식이요. 종교적인 용어들을 우리는 다 놓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세속적이랄까? 어떤 종교적인 깊이를 현대인들 놓치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기 정말 성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그러한 게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이 성서 기자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불순종과 불신앙, 이런 겁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은 공부 끝날 때 제가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고요.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만 조금 더 보도록 합시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쉰다고 하는 거예요. 안식하면 안식을 이것도 연관이 되죠. 안식일,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는 쉼이 참 안됩니다. 그냥 쉽게 얘기하면 돈벌이라든지 사람들이 경쟁하고 이 세상살이가 쉼이 없어요. 그런 것들은 아주 부지런해가지고 그리고 경쟁하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실존 자체가, 실존이라고 할까요? 본질이라고 할까요? 그게 우리의 안식하고는 거리가 멀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런 거죠. 자기가 자기를 완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우리가 성실하게 산다, 뛰어나다,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그러한 삶들이요. 그런 것들은 결국 자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려는 것들 아니겠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 같은 것도 다 채워나가는 건데 그건 아무리 죽도록 해봤자 안식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 자체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안식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러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해서, 노력해서 어떤 걸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이루기만 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간절한데 이루고 나면 그걸로 안식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어거스틴 유명한 시, 기도문에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 안에서 내가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그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냥 인생살이가 그렇지, 애쓰고 힘들고 그래도 그게 인생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 성서 기자들은, 영성가들은 정말 안식, 어떤 것을 경험한 거예요.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이라고 할까? 똑같은 개념은 아닙니다만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얽어매고 있는, 그리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럴 때만 안식이 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우리는 전제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신앙의 훈련, 그 쪽 방향으로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겁니다. 네 그게 서론 부분이에요.

 

1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약문으로는 다 자세하게 제가 설명하지는 않고 토막토막 필요한 부분들만 설명했습니다. 1절만 보더라도 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거리가 많습니다. 보세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게 느껴집니까? 어떤 건지.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얘기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대충 알긴 압니다. 신학교에 갈 때도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건 아무도 증명은 못합니다. 이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자기가 착각할 수 있는 거고요. 하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 어떤 건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거죠. 그래서 거룩한 형제들아 그렇게 얘기해요. 다시 한 번 그 문장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거만 하더라도 참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늘, 부르심, 거룩함, 형제, 이렇게 나가고 있어요. 거룩하다고 하는 거는 보이지 않는 거죠.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구별됐다고 하는 그러한 뜻인데요. 구별됐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뭐로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게 표시는 안 나잖아요. 예수 믿는 다고해서 우리가 다 잘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늘 마음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거룩한 형제들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인데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딱 부러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거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종말론적인 사건이고요. 종말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셨죠? 우리를 종말론적으로 구원 시키신다, 그런 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거를 종말에, 죽음에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별된다고 하는 데에 막연하게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오늘 현재에 어떻게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하는 게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거예요. 이게 잘 안돼요. 자꾸만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 확신을 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최면, 자기도취라고 할 수 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이게 숙제입니다. 그건 꾸준하게 공부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 구원의 세계, 성서가 말하는 세계에 가까이 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게 구별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같은 1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벌써 예수님을 두 가지로 호칭하네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여러분 나왔어요. 지난번에도 나와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자이라고 불렀죠? 앞에서 공부하신 거 기억해 보십시오. 중보자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중보자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떤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그건 하나의 공식이고 수학에도 어떤 공식이 있잖아요. 피타고라스의 공식에 이등변삼각형의 무엇 무엇은 어떻다 이러한 것 말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거는 기독교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그 공식 안에, 피타고라스 공식에 많은 수의 세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이러한 기독교의 고백문, 이러한데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요. 이걸 차근차근 따라가야 정말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대제사장, 지금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가 돼야 하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인지, 그냥 우리가 예수님 없어도 맘 착하게 살면 되자 않냐 사람들은 생각할 텐데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왜 생각하지 않는지를 더 알아야 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건 흔히 들었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사도라는 나와 있어요. 조금 이상하죠? 예수님을 사도라고 얘기하는 건 조금 맞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를 사도라고 얘기하는데 이 사도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차원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구절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 하나에요. 다른 데는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어떤 관점에서 이 사람이 여기 쓴 것 같습니다.

 

그 다음, 2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여러분들 요약문에는 3절로 되어 있는데 오타네요. 2절부터 봐야 되겠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여긴 이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요. 그냥 제가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겁니다. 딱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고요. 이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서 시작 한 게 율법이죠. 물론 여러분들 짐작하시기겠지만 모세가 율법을 다 쓴 건 아닙니다. 그거는 이스라엘 역사에 오랫동안 축적된 법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법전이 있는데요. 그게 율법인거죠. 가장 유대 사회에 준거가 되는 거라서 준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인 모세 이름을 붙여서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모세 율법이라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율법이 하나고요. 또 하나는 같은 율법의 문제인데, 모세에게서 시작된 게 제사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제사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냐 하면, 그 전에도 개인별로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식으로 하면 예배, 제사를 드린 게 구약 성경에 나오죠. 그건 개인적으로 한 거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는 가나안땅에 살면서, 요셉과 더불어서, 그 쪽으로 이민을 떠나지 않습니까. 3, 4백년 살았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구약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3, 4백년은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엔 성서 기자의 관심이 없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도 나름대로 활동을 하기는 했을 텐데 전혀 언급이 없어요. 역사가 비약해가지고 모세가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아닌데 성전의 원형이라고 하는 회막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사 드리는 그런 일들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세하고 연관된다 하는 거예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모세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 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종은 하나님의 아주 성실한 일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잖아요. 일단 율법이니 핵심적으로. 율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회가. 좋아져요. 건강해집니다. 그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율법대로 그 사회를 끌어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불문법,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뭐 미드라쉬인가, 제가 이름을 다 거명을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많은 시행세칙들, 헌법이 있으면 나머지 법률들이 있고 시행세칙, 대통령령,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처럼 유대도 율법을 중심으로 한 법칙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대로 하면 정말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기자들은 그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죠. 판단한 것만 아니라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과 예수님과의 충돌이 많이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율법이 좋기는 한 건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하고요. 율법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뭔가 불안하고 그런 거예요. 늘 상대적인 가치, 가치론적인 거예요. ,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율법은 가치에요. 조금 더 괜찮은 삶이 있고 좀 못 미치는 삶이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겁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연봉을 1억 갖고 사느냐 8천만 원 갖고 사느냐 조금 더 밑으로 떨어져서 5천만 원을 갖고 사느냐 삶의 어떤 형식들은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걸로 다 문제가, 오천만원 받는 사람보다 1억 원 연봉 받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괜찮아진다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비슷하잖아요, 약간의 차이만 있지. 율법은 그러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노력하는 자체는 괜찮은 겁니다. 그런 것을 종의 역할이다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6절 보시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 아들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확실하게 그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특별히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런데 제가 이런 용어를 쓰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안들 수도 있어요. 대다수의 신자들은 생각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만 그냥 대충,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들인가부지 생각하지 그게 이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한계에요. 그렇게 알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에요.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호칭했을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누가 대답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조금씩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정리가 들 겁니다. 이게 신학적인 거고 인문학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단어, 용어에 있는 어떤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에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경험을 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영적인, 종교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건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뭘 경험했다고요? 생명을 경험한 거예요. 이건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그것을 경험한 겁니다. 율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생명, 궁극적인 생명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려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지금 우리가 다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튼 방향은 그렇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을 정리 하셔야 됩니다. 2절에서 6절을 봤습니다. 모세는 사실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종이었다. 아들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의 집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7절에서 11절입니다. 여기에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이 됩니다. 여러분 각주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 957절 이하의 내용들이 인용이 돼요. 신약성경이 구약을 인용할 때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957절을 찾아보면 똑같은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그러나 비슷한 게 있고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있고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히브리어 성경이 원래 있고요. 그러나 여기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경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이라고 해서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성경이 있어요. 그걸 주로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왜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지는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틴에 살지 않고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 말, 언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알랙산드리아인가, 거기서 모여서 학자들 70명 정도가 번역을 했다고 해서 그 성경을 가리켜서 70인역, 얘기하는데 권위가 있는 성경입니다. 주로 그거를 많이 인용을 한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거예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너희들 조상들이 거기서 고집을 피우다가 망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너희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그걸 이제 시편 95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죠.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여기서 시험하던 날에는 구약에 나온 어떤 사건들인지는 대충은 아시죠? 뭘 시험 했냐 그러한 거죠. 만나, 메추라기, 사실은 이거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도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결과인거예요. 하여튼 그래서 계속해서 이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불안했어요. 가나안땅에 들어간다는 확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리고 모세에 대한 불평, 불만 이런 것들도 많이 있었고요. 굉장히 그렇습니다. 약간 전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애굽에서 뛰쳐나온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하는데 그 히브리라고 하는 말이 꼭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근동 지역의 하층민들을 가리키는 히브루라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정말 순수하게 유대인 자기 민족만 끌고 나온 게 아니라 욕구 불만, 사회 불만이 있는 사람들, 하층민, 노예들 이런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반란을 일으켜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다 시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완고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어요. 완고하다. 여기 보면 8절에도 있고요 13절에도 나오고 15, 이건 다시 반복한 시편 인용문인데 완고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완고하다고 하는 건 신앙하고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사람 완고하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괴팍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 사실 그런 게 완고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7절에서 11절 부분 정리했는데 잠깐 보겠습니다. 세 번째 문장부터 봐요. 성령은 신구약을 관통하게 하는 진리의 힘이다. 그러니까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유대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부분이 못했어요.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마음이 완고한 것이다. 완고하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신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완고, 교만 비슷한 겁니다. 대게 우리는 그렇게 살죠. 저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복하기가 참 쉽지 않아요. 우리 어떤 전 이해에 너무 강하고 이렇게 저렇게 교육받은 것도 있고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그런 위험성은 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11절에 보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한 경고를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요약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리한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러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니까요. 이건 그냥 의인화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고, 말고 그런 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어떤 다른 걸 가리키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문제에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 그건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거죠.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하는 우리의 영적인 태도에서 가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게 경험 한다 아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제가 어저께 밤에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린 커피에 대한 이야기 잠깐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색깔, , , 찰찰 넘치는 거품 등등이 있어요. 그리고 커피를 갈아서 넣고 거기 관계되는 많은 것들, 물을 넣어서, 물이 이제 중력에 따라 내려와서 커피가 내려진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어마어마한 이 우주 전체에 신비한 생명의 힘들이 작용한 거다 전 그렇게 보여요. 커피 알 갈고, 가루, , 수증기, 색깔,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온 세계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느끼는 사람은 느낄 수 있고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지금 빨리 한 잔 마시고 나서 다른 일 해야 된다고 마음이 쫓기게 되면 우리 일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놓치는 거하고 비슷하게 하나님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게 계시는 건 아닌 거거든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경험 하냐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거를 제가 요약문 안에 정리를 했습니다. 보시면 되겠어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해야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반복해서 얘기하듯이, 그건 13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완고한 마음, 이런데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보통 이런 글들을 읽으면 도둑질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성서는 그렇게 유치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도덕가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죄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묘해서 선으로 위장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집중이라고 하는 게 죄인데 자기를 스스로 성취하려고 하는 아주 강력한 욕망, 이게 죄에요. 이상하죠? 우리는 보통 자기 긍정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르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유혹하면 이상한 것 생각하지 말고요. 아주 파렴치한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유혹,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것에 있게 되면 완고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경험이 점점 줄어들게 되죠. 시간이 많이 돼서 제가 30분까지 정리를 해야 되는데요. 좀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이게 오늘 결론이기도 하지요. 다시 한 번 요약문을 보겠습니다. 7절에서 인용된 시편 957절이 다시 인용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청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입니다. 이건 귀를 기울이려고 억지로 해봐야 사실 되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의 영혼이 그쪽으로 마음이 가야되는데 이게 쉬운 가요. 안되잖아요. 이거 저걸로 우리가 쫓기고 있는데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에 귀가 가겠습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인거죠. 크게 엄청나게 잘못한 거보다도 살인, 강도, 이거는 그냥 정말 파렴치한, 파괴적인 행위고요. 성서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순종을 통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순종이라고 하는 게 신앙하고 비슷한 얘긴데 어려운 거예요. 순종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런 것들이 잘 잡히지가 않으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뭘까. 내가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뭐 그런 건가. 아니면 심지어는 주의 종, 목사에게 순종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자꾸만 생각을 해요.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거 거부하고 청백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됩니다.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도 있고요.

 

제가 요약문에 예수님의 경우를 썼어요.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그렇죠? 십자가라는 것은 인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이거는 자기 파멸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파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가 점점 가까이 오니까 이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겁니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도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아마 그래서 제자들은 피하라고 많이 얘기 했잖아요. 그건 아주 상식적인 거예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순종하신 거죠. 자기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 그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일종의 결단이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 뭐 그렇게 엄청난 인류 구원,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일상적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되는 건데 이런데서 순종이 뭐냐 한, 두개로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어떠한 말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이거 결정하기도 힘든 문제고요. 제 삼자가 말해 줄 수도 없는 문제고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순종해야될 거냐 아니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거 어떤 구체적인 사항보다도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들어간 것만큼 어떻게 말하고 행동을 하는지 그러한 방향이 잡히겠죠. 문제는 용기가 있냐, 없냐, 그러한 건데. 그럼 안 되는 것을 희생해가지고 억지로 해라 전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자학적인 거 그걸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얻는 길인 거예요.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내가 당연히 가야될 길이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 그럴 때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생명을 얻게 되는 거죠. 신앙의 선진들은 다 그런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것 몇 줄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순종, 또는 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그 대상을 더 깊이 알아야 된다. 내가 따라가야 할 대상을 알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수다. 두 번째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공부는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다 보이는 게 아닌 거예요.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그 대상에게 자기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어야 된다. 저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다, 구도적인 거다, 죽을 때까지 계속 그 긴장이 있어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공부를 해야 되고요. 정말 이건 필요한 건데 우리 수요 공부팀은 그런 면에서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따로 공부실수도 있는 거고요. 꾸준하게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그러한 수행과 구도로써의 기독교인의 삶이 돼야 되지 않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3,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준 그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눴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하여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그 생명에, 궁극적인 현실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이 어려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이 날로 달로 더 심화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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