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28 히브리서 4장.hwp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본문은 히브리서 몇 장인지 아시겠죠. 4장입니다. 히브리서 4. 1, 2, 3, 우리가 쭉 봤습니다. 히브리서는 집에서 보통 읽기가 조금 지루한 본문입니다.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되고 있고요.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 했지만 시편 이런 것들이 많이 인용됐어요. 그리고 어떤 사상이나 개념 이런 것들이 구약에서 많이 인용 되고 있습니다. 천사 이야기라든지 대제사장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혼자 읽기가 만만치 않은 건데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함께 읽으니까 훨씬 이 말씀을 가깝게 느끼면서 대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 41절부터 16절까지예요. 보통 때는 동그랗게 앉아서 해서 순서를 헷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약간 들쑥날쑥 해서요. 그러면 이쪽서부터 한 절씩 돌아갈까요? 먼저 읽으세요. 41.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제목은 4장 여러분들 유인물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안식과 말씀의 관계예요. 안식과 말씀입니다.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3장에서도 같이 본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쉼 그러한 거예요. 근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안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히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던지 아니면 어디 요양을 가서 좀 쉬었다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예요. 공관복음서에서 핵심을 이야기한다면 키워드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에게서 이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가장 궁극적인, 어떤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총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요 다른 때도 여러분들이 느끼셨겠습니다만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것들은 손에 잡히는 게 아니에요. 막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우리의 생각으로 다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꾸준하게 그 세계가 어떠냐하는 것을 넓혀갈 뿐이지 이걸 갖다가 어떤 걸 딱 고정시켜서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 부활, 예수님의 재림, 그런 것들과 다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 안식이라고 하는 그 개념, 오늘 여기 3장에 이어서 4장에 반복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걸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는 것을 지금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게 참,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보다도 저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목사가 설교하고 교회 운영하고, 목회하고 이런 저런 하는 것 자체로 사람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교회일 자체가 우리를 피곤하게 할 수 있어요. 피곤하다는 말이 정확한 건 아닌데 거기에 묶여 버려갖고 영혼의 안식, 이런 거하고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 평생 살았는데 어떻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이러한 안식이 내 영혼에 깊이 자리 잡을 수 있느냐 숙제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이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문제예요. 천천히 한 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제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중요한 안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갈 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 다시 한 번 생각난 김에 짚고 지나가야겠네요. 그러니까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인 거거든요. 당장 이 땅에 살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건 종말론 적인 거고 약속이에요. 그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 그거를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사로 잡혀야 되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죠. 그러한 기본적인 관점을 갖고 오늘 말씀을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 여러분들 가지고 계신 강의 요약문 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1절에 이렇게 시작하죠. 우리는 두려워하자, 이거 조심 좀 하자,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거냐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 테니까 그걸 좀 두려워해라, 그걸 조심해라, 좀 심각하게 생각해라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좀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를 하는데 이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이게 우리가 성경 말씀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거예요. 말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긴 있는데 말로 그거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든 거예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꾸 이제 공부를 통해서 성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에 더 가까이 가는 그런 게 최선입니다.

 

, 이 말씀이에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고 들어간 사람도 있다고 하는 건데 이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거기에 무조건 매달리는 거죠. 실제로 성서가 얘기하는 안식을 모르면서도 나는 안식을 얻었다. 다른 말로 구원 얻었다,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반대로 냉소적으로 생각해서 도대체 안식이 가능 하냐, 기독교가 얘기하는 구원이 실체가 있냐, 그렇게 조금 무시하면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말을 조금 더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잘 보세요. 약속.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도 약속인 거예요. 약속이라는 것은 지금 이루어 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아직 안 이루어진 미래적인 거예요. 미래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이 안식과 구원을 완성하거나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늘 조금 마음이 완벽하지 않은 거예요.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도 계속 시행착오가 있고 뒤뚱뒤뚱 대고 아무리 믿음 있어서 안 됩니다. 약속인 거예요. 아 그러면 현재 삶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약속이니까 미래적인 것 만이겠네 생각하면 그거도 오해입니다. 약속이 미래적인 것이긴 하되 그게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실질적이냐 그 관계를 잘 따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정확한 인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울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잡힌 바 된 것을 따라간다. 잡힌 바 된 정도예요. 우리가 지금 신앙하고 있는 세계는 그와 같습니다. 완전히 이룬 게 아니라 어떤 힘에 붙잡혀서 어느 쪽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 말씀 보세요. 여긴 안식의 약속인데 이르지 못할 자가 왜 그러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2절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습니다.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건 믿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아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얘기 하겠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에요. 유대인을 비롯하여 등등의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지로는 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게 참 이상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몰라요. 내가 지금 믿고 있는지 아닌지도 분간을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마음은 다른 데 가있는 거예요. 이런 게 많죠. 이런 경우가. 그러니까 안식의 약속을, 그것에 대한 복음을, 말씀을 실질적으로 믿어야 되는데 믿지 못하는 거죠. 그게 어떤 상태냐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니까 그냥 넘어 가도록 하고 여러분들이 개인 적으로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3절과 4, 여기에는 강의안을 잠깐 보시죠. 읽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요약을 했어요. 안식의 약속에 대한 복음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예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와 들어간 자에 대한 차이점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안식은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고 얘기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표현 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구원을 받았습니까, 받지 못했습니까. 이런 질문에서요.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거는 기본적으로는 약속이고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아주 궁극적인 일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받지 못했다는 건 맞아요. 그러나 구원 받았습니다 이야기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적인 거예요. 긴장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아주 궁극적으로는 약속이기 때문에 아직 아니지만, 그러나 그 약속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창조 사건하고 연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절에 이렇게 되어 있죠. 후반절 보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창조 6일 동안 하고 마지막 7일째 안식했다고 하는 그 사건. 그 창조는 기본적으로 안식 사건,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뒤에 또 나올지 모르겠는데 이 쉼이라고는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무덤에 가면 유럽이나 뭐 이런데 보면 비석 같은 거 세워 놓거든요. 거기에 누구누구가 여기에 영원한 안식을 얻다, 누워 있다, 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 잠깐 무덤에 보니까 거기에 쓴 단어가 루에라고 해요. 루에, RUHE해서 루에, 쉼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참된 쉼은 죽는 거죠. 이게 왜 참된 쉼이냐하면 살아 있는 한 자기 것하고 계속 뭐가 연결되어 생각합니다. 쉼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가리켜서 이 사람이 영원하고 참된 안식에 들었다, 쉼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짚고 있는 걸 거예요. 결국 죽어야 쉼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럼 이 땅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냐. 무의미한 것은 아니되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겁니다.

 

지난주에 제 설교 혹시 기억하시는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설교라기보다도 그 안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들 말이죠. 뭐뭐 아닌듯해라 이렇게 얘기 했잖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웃는 사람처럼 하라. 그 반어법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 얘기는 곧 너무 몰입하지 마라 그러한 뜻이었어요. 그래야 참된 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해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죽어야만 쉼이 있어요.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그걸로 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흥분하는 거죠. 열광하고 있을 뿐이지 열광하는 것이 쉼은 아니잖아요. 그건 푹 꺼져요 금방.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도 죽어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죽음이 곧 쉼이고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살아야 되요. 그러니까 긴장이죠, 불안하죠, 갈등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미래에 있는 죽음, 그게 구원의 관문인데 그걸 미리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죽음을 당겨서 사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핵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죽음을 미리 당겨서 살아가는 그 종교 의식을 가리켜서 세례에요. 세례 받는 것. 그렇잖아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본 관문이 세례이지 않습니까. 그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거잖아요. 그건 죽음입니다. 세례는 다른 게 아니라. 물론 삶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산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같이 있는 거예요. 하여튼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3절과 4, 여기에 따르면 안식 혹은 구원, 하나님 나라, 생명, 이러한 것들이 이미 창조 때부터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창조와 제 7일 안식하신 것, 그 사건을 가리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하다가 여러분들 혹시 갑자기 질문할 게 생각이 나면 손들어주세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질문할 때 안하면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즉시즉시 손드시면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5, 6, 7절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고 있네요. 5절에 인용한 시편은 9511절이에요. 쭉 여러 번 그렇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강의안을 좀 보십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설명한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이 복음이 뭐죠? 안식의 약속인거예요. 구원의 약속인거예요. 다시 한 번 여러분들 생각해 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성서를 이해하는데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이 약속이니까요. 구약과 신약, 약속입니다. 복음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왜 복음이냐, 왜 복음이라고 합니까, 정말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냐,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순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쳐놓으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들을 얘기 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말씀을 실제로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거기 강의 요약에 두 가지로 제가 분류해봤어요. 일번, 구약의 말씀을 전해들은 유대인들, 그걸 받았으나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 복음을 전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 읽으면 참 믿음도 없다, 불순종 했다고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다,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표현이 정확하지 않네요. 그건 누가 봐도 뻔하게 아는 잘못, 이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니까. 겉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순종 했다, 믿지 못했다하는 것은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방해하거나 교회를 방해하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안에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이 다른 데에 흩어져있는, 다른 데로 가있는 그런 겁니다. 자기 자신도 그걸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위험성이 많아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이게 자기의 잘못, 이런 것들을 인식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목사들에게는 그러한 위험성이 더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죠.

 

거기 강의 요약문에 제가 그래서 그렇게 묘사했어요. 이 불순종, 완고한 마음은 파렴치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세련돼 있지만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완고한 마음입니다. 불순종인 거예요.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내가 정말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아는 길은 별로 없어요. 스스로도 우리를 잘 모르니까. 그냥 기도하는 게 최선입니다. 나로 하여금 순종하는 사람, 목사에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교회 질서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안식의 약속, 이건 굉장히 궁극적인 거잖아요. 종말론적인 어떠한 하나님의 통치이고 생명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는, 거기에 마음이 가야되는 이게 순종인데 이게 잘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게 최선이죠. 성령이 우리 영혼을 끌어주셔서 거기에 마음이 가도록 해주십사 하는 기도가 최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고요. 목사도 할 수 없고 그분만이 할 수 있죠. 그분에게 전권이 있고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때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가사, 혹은 기도 가사는 성령이여 오소서입니다.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주관하지 않으면 이게 계속 흔들리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마음들이니까요. 그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확하게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이러한 기도지요.

 

다음, 8절과 9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들어가는 자,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어요. 구약에 있는 많은 시편과 어떤 사건들을 곁들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9절에는 여호수아가 나와요. 재밌어요. 8절 이렇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각주에도 나왔듯이 예수라는 말로도 같이 사용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건 구약의 역사를 아셔야 되는데 출애굽기에 나온 이야기고요. 또 등등 쭉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더라면 이라고 하는 거는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들어가는 거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요. 그게 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거예요. 상상해 보면 이거는 당연합니다. 이집트의 어떤 소수민족으로써 어려움을 겪다가 그리고 광야에서 생존조차 불확실한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은 곳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최소한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유목생활이고 떠돌이 생활이고 노마드라고 해서 이렇게 생활이 전혀 안정이 되지 않으니까 쉼이 없는 거죠.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정말 쉼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룬 사람이 여호수아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쉼을 얻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못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못 얻은 거죠. 그걸로 완성되지 않았다 얘기하는 거죠.

 

가나안은, 광야와 가나안은 이 땅에서의 모든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광야 40년 동안 굉장히 척박했어요. 광야에서의 삶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있을 때 삶은 그래도 비교적 농산물이 어느 정도 풍족해서 괜찮았습니다. 약간 가난했던 시절이나 조금 풍족했던 시절이나 안식은 없는 거죠. 이거는 뭐 설교조로 말씀을 해서 조금 그렇습니다마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부자로 사는 사람이나 안식이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개인 소득이 삼만 달러, 사만 달러, 된다고 하는 걸 정치인들이 이야기하지만 가능한대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가면 좋긴 하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살아봤자 안식이 없어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경험 하는바 일겁니다. 그래도 거기 죽자 살자 매달리는 이유는 다른 안식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도 이제 기복신앙에 만약에 떨어진다면, 이거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아시죠. 하나님 잘 믿고 헌금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떻게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이거는 가나안 바알 종교하고 똑같은 거고 그걸로 결코 만족이 안 된다는 걸 아실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많이 받긴 하는데 또 그거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살 수도 없는데 가나안의 어떤 풍족한 삶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게 축소가 돼야죠. 우리 삶의 영역에서 축소가 되고 이제 다른 안식, 다른 안식이기 보다도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하자면 안식의 약속, 그리고 더 밑바탕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통치, 그리고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비전, 혹은 영적인 감수성, 영적인 통찰, 그런 게 우리의 삶에서 풍부해져야 되는 거죠. 그래야 가나안과 40년 광야생활의 그러한 압박, 유혹, 그런 거로부터 우리가 훨씬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야기는 그겁니다. 그 걸로는 안돼서 만약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안식이 됐다면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안식할 때가 아직 남아 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 부분을 조금 읽어 보겠습니다. 안식할 때, 9절에 나온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식은 아직 진행중이고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게 필요한 것 같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안식의 깊이가 풍부해져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세상은 일종의 가나안이다. 나름으로 생활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도 이런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이 말은 몇 가지 뜻이 있어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머릿속에 꼭 넣어 두십시오. 제가 다른 때도 이야기 했지만 이 단어, 이름을 이거를 여러분들이 자꾸만 입으로 내 뱉어야 돼요. 종말론적이라는 말도 자꾸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개념이 더 우리들에게 풍부하게 들어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종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으니까 가능한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더 좋고요. 이거는 간단하게 우리의 공부 모임의 규모에 맞도록 이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미래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렸네요. 현재는 아직은 아닌 거예요. 미래적이다. 여기서 그거를 어떤 방식으로 성취해 내려고 노력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미래적이기 때문에 그 때를 기다리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림절 신앙이 기초입니다. 기다림이에요. 미래에 있게 될 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게 한 가지고요. 미래적이라고 하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절대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절대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경험한 것을 자꾸만 연장해서 조금씩 좋아지는 거, 이런 것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조금 배부르게 먹는 다거나 우리가 건강이 더 좋아진다거나 미래의 조건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이렇게 좋아지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절대적인 그러한 생명, 구원, 통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기다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정도로 보시고요.

 

10, 11, 강의안 좀 더 보겠습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의 일을 쉰다고 얘기한다. 거기 그대로 나와 있네요. 다시 한 번 성경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신 것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쉰다. 살아 있는 한 안식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을 쉰다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멈춘다고 하는 의미에요. 앞에서 이미 제가 말씀드린 거네요. 죽지 않으면 안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지요. 세례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와 더불어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할까요. 죽은 사람들은 신경 안 쓰잖아요. 다른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얘기할까, 다른 사람 말에 그렇게 부하뇌동하지 않잖아요. 죽은 사람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는 예수와 더불어서 죽음사람으로 세상을 사는 거죠.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눈만 뜨면 계속해서 신경 쓰고요. 눈 뜰 때만이 아니죠. 잘 때도 꿈속에서도 꿈도 사납고 말이죠. 계속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안식을 누린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다음, 마지막으로 12절에서 13절입니다. 위의 사실을 전하는 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얘기를 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헬라어 성경에 로고스 투 데우라고 해서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특성을 12절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어요. 살아있다. 활력이 있다. 예리하다.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그리고 생각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어요. 이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우리는 예술가나 시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그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영혼, 내 삶 전체가 화염에 불사르듯이 그 말씀에 휩싸이는 그런 경험들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바인데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수, 일반 통속 노래 부르는 그분이, 다른 클래식 가수도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납니다. 단 하루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벌써 음감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들 전문가거든요. 연습을 안 해도 언제나 완벽하게 노래를 부른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만 노래 연습을 안 해서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어떤 소리와 음의 세계가 자기하고 거리가 있어지게 되는 게 느끼게 되요.

 

우리 기독교인에게 그러한 게 좀 필요하죠. 그런데 매일 우리는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듯이 절간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보다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매일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야만 노래의 어떤 감각을 유지하는 가수들처럼 수도사들 이런 사람들은 계속 그 안에서 삽니다. 그래야지 영적인 내공이라고 하는 게 유지가 되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 살잖아요 현실적으로. 그게 좀 어렵습니다. 하는 만큼 해야죠. 제가 다른 때 말씀드렸듯이 재가 수도승처럼 가능한대로 최다한 우리가 그런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는 부족하니까 불쌍히 여겨주소서. 퀴리 엘레이송, 그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속성들을 쭉 열거 됐네요. 재밌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시고요.

 

강의안 중간에 보겠습니다. 12, 13절 중간, 그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종말 때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13절에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 우리의 마지막, 그 모든 것을 받으실 이에 눈앞에 만물이 다 드러난다. 그러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가서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한 뜻이죠. 그 말은 곧 지금 이 세상의 만물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숨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그 때가 와야 실체로 서로를 알게 될 것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죠 사실은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 누군지 모릅니다. 내가 어디 선생이다, 목사다, 어디 이름이 뭐다 이런 거가 우리 자신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우리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이, 실체를 드러낸다는 그런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체 이런 거 아는 거하고 우리의 실제 삶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여러분들 혹시 그러한 질문을 하실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제가 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대답을 드려야겠네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냐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주는 게 아닙니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서 그 세계에 우리가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앎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거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돈벌이 어떻게 할 거냐? 이웃하고 어떻게 하냐? 사이가 나쁜 부부사이는 어떻게 하냐?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이 말씀을 통해서 해결하는 건 아닌 거예요. 그런 건 여러분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지혜롭게 잘 할 수 있는 거고 좀 잘 안되면 시행착오도 겪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내가 이렇게 인격적으로 이럴 수밖에 없나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고상한 사람이 되거나 심리적으로 어떤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그것을 알고 앎으로써 그분의 통치, 그분의 하시는 사건 속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또 말씀을 배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고 안식의 약속이 어떻고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는 내려놓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하나님 말씀이 어떤 걸 가리키고 있는지 거기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매진하는 게 필요합니다.

14절에서 16절은 오늘 공부할 게 아닙니다. 이건 대제사장이라는 주제로 5장에 넘어가거든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들에게 전해준 우리들을 예상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의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 해 주신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식의 약속이라고 하는 놀라운 가르침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안식의 세계에 이끌림을 받도록,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모저모로 혼란스러운 세상, 그리고 손에 확실하게 붙잡히지 않는 그러한 모든 세상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푯대가 분명하여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옳은 신앙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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