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08 히브리서 13장.hwp

 

오늘 우리들 히브리서 공부 마지막입니다. 벌써 13주가 다 지났군요. 히브리서를 여러분들이 각자 집에서 읽거나 다른 큐티 등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겠습니다만 그래도 꼼꼼하게 같이 읽을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중에서도 앞에서 많이 우리가 접하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기도 해서 약간 뒤로 쳐지는 성경이었는데 그래도 이런 기회에 같이 읽으니까 여러 가지로 좋았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고요. 1절부터 25절까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을 교독해서 전체 읽고 천천히 전체 13장까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듣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여기 여러 가지 모양이 가지각색이에요. 주제가 앞에 하고는 좀 다르게 여러 가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고요. 특별히 여기에 13, 마무리를 하면서 일부러 그걸 강조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좀 생각해라는 게 있네요. 지금의 목사를 가리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하여튼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말씀을 전하거나 목회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라는 말도 있고 생각 좀 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거봐라 성경에 있지 않냐, 교회 목사에게 순종해라이렇게 말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모든 말씀이라는 것은 상황이 있기 때문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이거를 일반화 시키면 성경을 좀 오해하게 되는 거죠. 이 말씀을 따다가 무조건 순종하라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아마 히브리서 공동체의 정확한 배경이 뭔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만 여기 지도자들을 생각해봐라 반복해서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거기에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러한 풍토나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질서가 허물어지고 덕스럽게 운영이 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 그런 것들이 있어요. 여기 본문에 해당하면 조금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13장에서는 실제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어요.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잘 해야 되냐. 그러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잖아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의 일치,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갖잖아요. 기본적인 신앙이잖아요. 그걸 전문적인 신앙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날 제가 서울에 예배 인도 하러갈 때 예배 마치고 신학공부를 해요. 지난 공부 주제가 칭의와 성화였어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려놨으니까 보십시오. 거기서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른 건 빼고 하나만 얘기할게요. 칭의, 이걸 굉장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거든요. 예수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된다, 그렇게만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이론, 신학 개념들은 이론이기 전에 실체에요. 리얼리티에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도 그렇고요. 신학자들도 그렇고 이론을 잘 계산해갖고 어떤 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다, 신앙이 뭐다를 말한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신앙의 실체를 경험한 거예요. 그걸 합리적으로 설명한 게 신학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그 신앙의 능력 안에 들어간 사람의 체험에서 나온 이론적인 설명인 거예요.

 

그런데 이게 기독교인들이 이론에만 떨어져서 그게 어떤 건지를 조금 눈치를 못 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칭의의 능력, 역동성, 그거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똑똑해야 인정받죠. 돈이 있어야 이 사람 괜찮다 인정받죠. 스펙이 있어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다는 사실을 자기가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능력 있게 사는 거죠. 보세요. 시시한 사람들이 인정하냐, 아니냐에 우리는 너무 예민하게 작용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한다, 너 의롭다, 칭의가 그런 말이니까요. 그 인정한다는 사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인정하냐, 아니냐는 정말 작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어떤 학교에 한 반이 있습니다. 거기 한 학생이 있어요. 그 학생을 자기 친구들이 조금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얘를 인정해 주는 거예요. 약간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인정해 주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칭의라고 하는 거는 그냥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완성하실 그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아주 실질적으로 자기의 삶, 자기의 인식, 자기의 영혼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이건 자기 합리화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실질적인 깨달음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험이기도 합니다.

 

조금 말이 옆으로 지나갔네요. 오늘 본문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닌데 여기 신앙생활하고 실제 삶이 어떻게 연결 되나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칭의가 뭐냐를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칭의와 예수님과의 관계. 그러나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에 걸 맞는 실제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실제적으로 삶이 변화되는 거잖아요. 이 두 관계가 어떤 거냐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가 됐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세 가지 삶의 중요한 태도를 가르쳐요. 세 가지예요. 형제 사랑, 손님 접대, 갇힌 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거죠. 형제 사랑, 손님 대접, 갇힌 자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일일이 다 어떤 거냐를 꼼꼼히 살피려면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정리를 하면 되겠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실질적으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에 받아들여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 시각으로 이웃들을 대하게 되거든요. 나그네, 손님들, 형제, 그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한 갇힌 자들을 생각하고 또 그런 삶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힘을 나눠야겠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 도덕주의는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살되 그건 단순히 윤리학은 아니 겁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살잖아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이죠. 그건 아름다운 거예요. 기독교인이 휴머니즘적으로 사는 건 당연하되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은 아닌 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이 잘 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4. 여기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가르침이죠. 음행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사실은 한, 두 마디 갖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성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 윤리라든지. 그런 것들이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해요. 그리고 기독교가 처음 시작할 때 나온 문제들은 로마 윤리하고 굉장히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조금 구분해서 봐야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거라서 사실은 일반 신자들이 그걸 다 구분해서 보기는 힘듭니다. 이런 거예요.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들을 보면 성령의 열매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도 사실은 로마의 윤리적인 가치, 용어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관용에서 사랑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절을 갖다가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음적이라고 설교를 하면 조금 부족한 거예요. 관용적으로 살아야죠. 그러나 그건 일반 윤리이고 다 좋은 거예요.

 

성경 내용이 어떤 사실을 얘기하잖아요. 어떤 때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사실을 지칭, 가리킬 때가 있는 거예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떠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다른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본질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하고 혹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뭔가 혼란스러워서 예수 믿어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교회 안에서 싸우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런 걸로만 충분하지 않으면 율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하나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르치듯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책 하루에 얼마나 읽어야 돼이런 것처럼 실질적으로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냐 그러한 요구가 교회 안에서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격렬하게 논쟁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걸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쭉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이런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인 공동체가 복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거기에만 집중하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부도덕한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러한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갈라디아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좀 까다롭죠. 일반 신자들이 성전 읽고서 그런 것을 다 분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제가 4절을 설명하다가 옆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결국은 성윤리, 로마 시대가 굉장히 혼탁했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빴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는데, 성도라는 뜻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구별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성윤리, 그런데 좀 끼지 마라 그런 얘기인 거죠. 그 당시에는 매음굴, 창녀촌이라고 하나요. 굉장히 일반화 됐습니다. 그래서 사생아들이 많이 태어났어요. 아기들을 로마 광장에다 버리면 소위 말해서 포주들이라고 할까, 그런 사람들이 끼워서 다시 윤락가에 보내고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기들은 모르지만 남자가 윤락가의 여자 대상이 자기의 딸일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동성애 이런 것도 굉장히 파괴적인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헬라 시대 때는 좋은 거였어요. 이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플라토닉러브, 이게 동성애였어요. 그 당시는 결혼해서 남, 여 간의 관계가 애기 낳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애기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거다. 플라톤 시대에 플라토닉러브라고 해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동성애였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문헌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굉장히 타락한 방식으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점점 문란하게 돼서 바울이 경고 한 거죠. 그게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경 말씀은 다 배경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촘촘히 따지지 않고 그것만 가져다가 봐라! 이렇게 해야 된다이런 식으로 하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서 6.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왔네요.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가 않죠. 기독교인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사랑한다.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둘 다 진정한 사랑은 못 되죠.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건데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하고 돈에게 맡기는 것,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두 가지는 하지 못합니다. 이게 지금의 자본주의, 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속에서,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 속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거라는 걸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서 개인이 그런 것을 다 못하니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도록 달라져야 돼요. 정치적인 것들도 필요합니다. 복지 문제도 우리의 현황이 되고 있는데 약간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국가차원에서 보장 해준다면 그렇게 돈에 많이 치우치지는 않을 수 있거든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목회 활동이 점점 열악해져서요. 목사의 품위,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에게 품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목회하기가 쉽지 않아요. 젊은 목회자에게 더 그렇습니다. 부목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일 년 뒤에 평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학생회, 청년회, 어느 교구를 맡았던지 그 동안 얼마나 성정을 시켰는지를 평가 받고요.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온순한 목사들은 일반교회 부목사로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면 자기 뜻대로 양심껏 하려면 담임목사를 가야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신학생들은 계속 많이 나오고요.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데 공급은 계속 되고 있으니까 불균형, 이게 목사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고 교회들끼리 경쟁이 더 심해지다 보니까 자기를 비하하게 되거나 과욕을 많이 부리게 되고 총체적으로 악순환 속에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품위인데 복지가 최소한 보장이 되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겨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두 가지 방법이에요.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자기의 신앙적인 인식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생명이 확보된다는 것을 정말 깊이 깨닫는 것하고 그 다음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하도록 서로 노력해 나가는 것. 같이 좀 병행해야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 8. 드디어 여기 나오네요. 교회 지도자들을 좀 생각해라. 7절에 나오죠. 너희를 인도하던 자를 생각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날하고 상황이 다르게 순교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다음 9.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 중에 하나에요. 영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9절에 재미있는 게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으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죠. 이거는 음식 규정, ‘이걸 먹어야 되냐, 말아야 되냐그러한 율법적인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그러한 것들. 그건 별 거 아니다. 그런 것들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 한다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16. 이건 조금 복잡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학자들도 이게 정확한 뜻이 뭔가를 다 풀지 못했어요.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난해 구절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게 무슨 비유, 상징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냥 제가 하나의 틀로만, 전체적인 그림으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소유한다거나 거기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그렇게 되지 못 한다. 그건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그 뒤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말하고 있어요. 12절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골고다인데 예루살렘성 밖이라는 뜻입니다. 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이죠. 안에서 십자가 달리신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셔서 고난 받으셨어요.

 

13,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도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도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 골고다죠, 성문 밖에 있는 그거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두루두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걸 14절에서 좀 더 정확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영구한 도성, 영원한 성읍, 하나님 나라,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예루살렘 도시도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황제도 아니다. 그건 장차온다. 새 예루살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겁니다.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제가 지금 인용한대로 새 예루살렘 그 얘기가 나오거든요. 새 하늘과 새 땅 얘기 하거든요. 온다고 하는 것이 실감이 나나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표현들 말입니다. 그건 바깥에서 주어진다는 뜻인데 우주 공간 어디에서 내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는 세계를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살아서 그렇습니다. 이 나무 책상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무 책상으로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질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런데 제가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무도 묘사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예요. 하여튼 그런 정도까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변화될 때를 기다려야 되는데, 부활도 그런 거예요. 저도 전적으로 변화 됐으면 좋겠어요. 현대와 같은 상태, 이런 거로는 영원한 생명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러나 현재 이 몸도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그 때를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늘 입관 예배 갔다가 제가 성경을 한 군데 읽었어요. 간단하게 설교를 했는데 그 부분이 기억이 또 나네요. 지금 전적인 변화를 얘기하다 보니까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탄식이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이상하게 모든 좋은 일들은 짐하고 같이 옵니다.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이 삶은 숙제를 푸는, 짐을 진 것과 같은데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게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죽을 거잖아요. 생명에 삼킨바 된다. 우리가 없이 지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완전히 초월하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삼킨바 되는, 그 때를 우리가 바란다는 거죠. 바로 앞서 말씀드린 우리의 질적인 변화, 그게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고요. 그걸 우리가 기다리고 사는 거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10절에서 16절이라고 쓴 대목의 밑에 있습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15절이 가리키는 찬송의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16절이 말하는 선한 행위이다. 재밌게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하고 나눠주는 것을 제사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일상의 제사죠. 앞에 있는 거는 실제 우리가 예배드리는 제사고요. 제사라기보다도 찬양이죠. 두 번째 선함과 함께 나눔, 이런 것들은 일상의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체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와 연관되는 거예요. 신앙의 중심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그거로만 끝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성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 19. 여기에 두 번째로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나오네요. 재밌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순종하라, 복종하라' 그런 얘기도 하고요. 그 다음 좀 내려오면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런 일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억지로 하게 하지 말라고 얘기했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밑줄 쳐 놓고 잘 읽어두세요. 그리고 저를 잘 봐주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늘 즐겁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18절에 보면,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도 교회 지도자들이죠. 우리가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그 다음, 20절에서 21절까지. 여기는 축복입니다. 축복기도에요. 내용이 재밌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 쭉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 몇 마디에요. 22절에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여태까지 권면한 거예요.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그런데 간단한 건 아니네요. 13장까지 굉장히 길게 썼는데 간단하게 썼다고 했을까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는가 봅니다. 줄이고 줄여서 썼나보네요.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은 것을 너희가 알라, 감옥에 같이 있다가 풀려났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암시이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과 아주 가깝게 아는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요. 디모데하고 같이 일 한, 감옥에까지 같이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 여기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또 나오네요. 문안하라, 그렇게 얘기했고요.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지금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방문을 받았나 봐요. 이달리야, 이탈리아죠. 로마 교인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한 마디만 우리가 잘 생각해도 우리 신앙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 삶에 역동성이 생겨요. 이거는 사회에서 심리 치료 받고, 힐링 치료 받는 거하고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자꾸 놓치기 때문에 다른 데 한눈을 파는 거죠. 은혜라고 하는 것, 받았다고 하는 것, 선물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은혜 한 마디만 가지고도 사실은 많은 이야기가 가능한 거예요. 그냥 받았다고 하는 것, 너무 크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세상은 다 주고 받고 하는 차원인데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 이거를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13주에 걸쳐서 히브리서를 같이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천년 전, 전혀 우리와 상관없던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던 이들의 문서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특별히 우리 대구샘터교회, 수요일 성경 공부하는 이 시간까지,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이 시간까지 내려왔는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13주 동안 같이 공부한 히브리서의 그 영적인 깊이, 그러한 리얼리티, 우리의 신앙의 긴 발걸음에 좋은 디딤돌이 되도록 인도 해주십시오. 우리 다시 또 새롭게 다음 주부터 시작하게 될 욥기서 공부할 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