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14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욥기는 17장입니다. 비교적 구절이 짧아요. 16절까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5.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6.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8. 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0.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이 16장에서는 엘리바스의 두 번째 비난에 대해서 맞받아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17장도 다시 한 번 욥의 대답인데 여기서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고단한지에 대해서 비탄하는 거죠.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를 준비하면서 문득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고 이 성경이 고전 중에 고전 아니겠어요? 동양에도 고전이 많이 있는데(똑같이 비교할 건 아니지만) 유럽의 정신 사상적인 면에서(우리가 성경이라는 것을 접어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성경은 유럽사상의 아주 핵심적인 토대가 돼요. 유럽사상은 두 가지 흐름이 있어요. 하나는 헬라철학이고 하나는 유대인들의 종교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쭉 연결돼서 유럽의 정신, 문화의 밑바탕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가 들어도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설명하기도 하면서 산다는 게 참 뜻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이런저런 할 일을 하며 삽니다만 우리에게는 더더구나 중요한 성경인데, 그걸 접어놓는다 하더라도 고전 중에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텍스트를 나이가 좀 들어도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욥이 17장에서 자신이 굉장히 어려운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좀 서글퍼요. 그런데 이 서술이 일목요연한 것은 아닙니다. 1절부터 16절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딱 들어맞게 기록되지는 않았어요. 여러분들이 읽을 때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읽어서는 비슷한 내용으로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것은 신학 전문가들이 알 수 있는데, 저도 성서 신학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신학도 여러 부류가 있어요. 신학 안에도 전공이 많이 달라요. 성서 신학이 있고요. 성서신학에서 구약 전공하는 사람, 신약 전공하는 사람이 있어요. 구약 전공하는 사람이 신약성경을 그렇게 전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 외에 교회사를 전공할 수도 있고, 저는 조직신학이라서 성서신학에 대해서는 전문가답게 아는 건 없어요. 그냥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전문적으로 설명해놓은 책을 읽고 도움 받아서 저의 조직신학적인 관점으로 다시 풀어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6절까지가 성서신학 전문가들이 볼 때는 딱 떨어지는 말들은 아니에요. 중간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심지어 어떤 구절은 한 절의 내용이 있는데 전문가들이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게 원래부터 있던 글자가 아니라 몇 자가 뜯겨져 나갔다거나, 아니면 다른 게 들어왔다거나 그렇게 분석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옛날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시면 될 거예요. 그래서 여러 왕들의 무덤에 가면 여러 가지 조각들과 파편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글씨도 좀 있거든요. 그 중에 벌레가 먹기도 하고 부식되기도 하는데 그걸 갖다가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는 거예요.


구약성경도 사실은 고대 언어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글을 쓰듯이 완벽하게,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다 쓴 건 아닙니다. 그게 전달되면서 조금 달라지기도 하고, 또 그 당시에는 언어로 기록되기 전에 입으로 전달되는 구전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성경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입으로 전달되는 내용들이 차츰차츰 언어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떤 것을 기록한다고 합시다. 옛날에는 글씨를 특별한 경우에는 양피지에 쓰지만 일반적으로는 파피루스라는 옛날 종이에 쓰는데, 갈대 잎줄기 같은 것을 뜯어서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본을 쓰다보면(사본은 베껴 쓰는 건데) 그런 와중에 조금씩 글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한 고대 문서들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문서비평, 역사비평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직접 해당되는 건 아닌데 참고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1절에서 16절까지를 기록하고 있는 17장에 약간 어색한 부분이 들어가 있는데 그건 고대 언어로써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통 때는 단락을 나눠서 설명했는데 오늘은 여기 있는 구절들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그건 빼버리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몇 개 선택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 제가 선택한 구절들은 다 17장의 핵심주제인 욥의 자조, 한탄에 해당되는 겁니다.


1절 보세요. ‘자기의 기운이 다 빠졌다.’ 죽을 때가 되지는 않았더라도 병들고 아들, 딸들 다 죽었으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죠. ‘기운이 쇠하였고 자기 날이 다했다.’ 이렇게 한탄하고 있네요. 삶의 의지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입니다. 여기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무덤이 나를 위해서 준비되었구나.’ 이미 자신은 무덤 앞에 서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어떤 운명에 처해있는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거고요. 우리는 이렇지는 않죠. 재산이 완전히 다 날아갔다거나 죽을병이 걸렸다거나 자식들이 몰살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주 특이한 거라서 부분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그러한 일을 당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 이야기는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도 어떤 근원적인 신앙의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 설정된 인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욥과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욥과 같은 영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욥과 똑같은 영적인 태도가 뭘까요? 무덤 앞에 내가 서있다는 자세인 거예요. ‘인생이 짧은데 구질구질하게 생각하느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삶이 기쁨이고 환희라는 사실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사실은 무덤 앞에 놓인 실존이라는 사실을 뚫어봐야 되는 거예요. 대개 영적으로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강의안에 유영모 선생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 재밌으라고 넣었습니다. 유영모 선생 이름을 들어보신 분은 드물겠죠? 아주 유명한 기독교인이면서 동양사상에 능통하신 분이에요. 여러분들은 유영모보다는 함석헌 선생을 더 잘 아실 거예요. 함석헌의 스승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을 하셨는데 함석헌이 유영모 선생한테 스승이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에요. 함석헌 선생도 물론 기독교인이었죠. 퀘이커 교도고 무교회주의의 대표고요. 유영모 선생도 그런 쪽에 속합니다. 이분에 얽힌 이야기 중에 이분이 나이가 들어서 아내와 해혼식(解婚式)을 했어요. 마흔 살인지 쉰 살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이제는 부부가 아니라 오누이라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성적인 관계도 없이 살고요. 그리고 잠도 푹신한 데서 안자고 널빤지 같은데서 평생 잤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이 널빤지를 관으로 만들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져요. 그런데 그 분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그 널빤지로 만들지는 않았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자학적으로 산거죠. 자기의 모든 열망을 절제하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거의 죽음을 친구처럼, 그림자처럼 안고 사는 거죠.


2절, 욥이 자신의 처지가 아주 어려운데 빠져있다고 자조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자신이 당한 불행도 불행인데 더 큰 상처는 친구들의 조롱인 거예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친구들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욥을 나쁘게 이야기하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 좋게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욥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선한 의도이긴 했는데 ‘이렇게 불행에 떨어진 것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거니까 그것을 좀 해결해야 네 운명도 새로워질 것 아니냐. 이 고통과 불행의 이유가 뭐냐.’를 계속 따지고 드는 거예요. 이게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먹히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늘 생각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일단은 ‘내가 하나님 앞에 뭐 잘못한 것 있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욥의 친구들은 그 당시에 굉장히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요즘 식으로 하면 목사나 장로가 ‘김 집사, 이 집사 회개할 것이 있는지 한 번 봐요.’ 이렇게 하면 귀가 솔깃해서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도저히 친구들의 ‘이유가 뭐냐.’하는 위로라면 위로고, 충고라면 충고고, 비난이라면 비난을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점이 사실은 더 어려웠던 거예요.


사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런대로 감당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죠. 불치병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는 거고 비행기 타고 가다가 사고 나서 죽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6.25 전쟁 때는 이유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해서 죽고요. 그런 것 따지기 시작하면 불행을 당하게 되는 것은 막상 당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하게 되는데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 불합리한 일, 모순된 것 이건 견뎌내기 힘든 거예요. 친구들이 욥을 행해서 ‘뭐가 잘못 됐다. 이유가 뭐냐.’하고 따지고 드는데 그걸 자신은 못 견디는 거죠. 이 같은 '불행의 이유가 뭐냐.'는 것은 유대인들이 늘 생각하던 거예요. 그건 일단은 좋은 자세예요. 뭔가 내 탓이라는 자세니까 좋은 겁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봤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어봤다고 하죠. ‘누구의 죄냐. 이 사람의 죄냐. 조상의 죄냐.’ 제자들은 그런 걸 배우고 배운 대로 물어본 거예요. 거기에 예수님이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거다.’라고 고치는 이야기예요. 하여튼 이것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말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이 똑같아요. ‘이유가 뭐냐.’ 그런 데에 매달리다가 정작 고난을 당한 사람과는 공감하지 못하는 그러한 문제가 있는 거죠.


앞부분에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3절에서 자기의 상황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에요. 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줄 자가 누구리이까.’ 자신이 그러한 재앙을 받을 만큼 잘못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인증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내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만 의지한 거예요. 여기서 담보물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당신이 보증 서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자신의 정당성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욥의 영적인 실존, 이게 한편으로는 불행한 거죠. 외로우니까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만이 참된 삶의 근거라고 하는 사실이,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고대인들의 영적인 시각이었어요. 그걸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거기에 마음을 쏟고 있는 거예요. 정상적인 방법이나 조금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걸 제가 매도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노력을 해서 인정받고 학력도 인정받아서 연봉도 높은 직장에 가서 행복하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는 것을 제가 매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궁극적인 길은 아닌 겁니다. 그거로는 자기의 정당성이 유지가 될 수 없어요. 저는 이 절박한 상황에 떨어진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만이 나의 보증인입니다.’하는 절절한 요청, 여기에 참된 삶의 토대, 참된 신뢰, 쉽게 이야기해서 구원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신약으로 끌고 와서 생각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복음서들이 늘 주제로 삼고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신약시대의 핵심이잖아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그게 무엇으로 된다고 하죠? 이게 똑같은 말이에요. 보증 서달라는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는다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들어보셨죠? 의인이라는 말이에요. 이게 얼마나 다이내믹한 건지 신자들은 잘 모릅니다. 모른다기보다도 그걸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지 신약에서 가르치죠? 믿음인 거예요. 예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거예요. 이게 복음의 핵심이잖아요. 우리가 늘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것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지금은 돈, 돈 하는데 돈이 많아서 인정받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학력, 인격, 도덕성, 좋은 걸 손가락에 꼽아보세요. 없지요? 그런 게 아닌 거예요. 그런 건 아무리 하더라도 괜찮은 사람 정도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믿음인 거예요. 물론 이게 값싼 은혜에 떨어져서 말로만 믿는다하고 자기의 영혼 전체가 거기에 담기지 않을 때는 문제가 되는데 저는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전제하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칭의를 받는다는 사실이 바로 지금 욥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다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집중하시는 게 좋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그런 것들을 핵심 주제로 말할 때도 있고 간접적으로 말할 때도 있는데 여러분들이 깨달아질 때도 있고 그냥 지나갈 때도 있고 깨달아지다가 약화되기도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요일에 이런 공부를 통해서 그런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한발 한발 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수행하듯이 들어가야 됩니다. 갑작스럽게 믿음이 성장하지 않아요. ‘어젯밤에 기도하다가 뭘 봤다. 응답을 받았다’ 이런 걸로는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도 공부 준비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가 평소에 성경 읽는 것처럼 지나갔다면 포착하지 못했을 구절인데 가르쳐야 되니까 말씀을 조금 더 깊게 읽다보니 중요한 대목을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에게만 보증을 원하는 욥의 영적인 태도, 이게 정말 하나님 믿는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만 더 붙인다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다음, 7절로 가보십시오. 중간에는 지나가도 되는 거예요. 6절과 7절에서 자기 신세를 다시 한탄해요. ‘속담거리로 떨어지고 침 뱉음을 당하고(예수님과 비슷한 운명이 좀 있어요.) 근심으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이야기하네요. 어려운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면 발등에 불인 것처럼 그거 끄기 바쁘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으로 밝히 보기가 힘들어요. 영적으로 피곤해 지는 거예요. 자신이 지금 그런 상황이다 참 딱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참 중요한 표현을 7절 후반절에 했습니다.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이거 밑줄 치고 나중에 많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단순한 문학적인 수사, 래토릭(Rhetoric)에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 삶의 실체를 뚫어보는 이야기예요. 물론 비슷한 이야기들은 동양에도 있고 여러 정신적인 스승들이 말한 바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봐요. 여러분 강의 요약문 7절에 해당하는 문단 아래에 1번, 2번 번호를 매겨서 정리했습니다.


‘그림자 같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첫 번째는, 요즘 말로 뭐라고 표현하는지 깜빡 잊어버렸는데,(투명인간, 병풍?) 많은 사람들 속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그림자 같이 존재감이 없는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이 있든 없든 간에 사람들로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거예요. 그런 취급당하는 그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래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인정받으면 흐뭇해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간들은 다 그림자와 같습니다. 인정 받아봐야 그 안에 있는 겁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우리를 몰라봐요. 그 시대에 유명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시간이 까마득히 지나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신세가 욥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입니다. 존재감이 전혀 없어서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 실체예요. 두 번째는 우리가 언젠가는 다 무(無)가 돼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나 설교할 때,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러한데,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아니면 그림자인지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시감(旣視感 , Dejavu)이라는 표현이 있긴 한데, 옛날에 있었던 어떤 것이 다시 느껴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해요. 그런 기시감은 아니고요. 지금 이 시간이 다 지나가고 금방 내일이 와요. 그리고 더 많이 1년이 지난 후에는 오늘 이 시간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요. 기억으로 조금 남긴 합니다만 그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림자를 잡는 거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느낌이고요. 이런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無)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거니까 결국은 욥의 한탄,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과 같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천국가고 부활하는데 뭐가 무가 되냐?’라고 질문하고 싶으신 분은 안 계시겠죠?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주일 일일 수련회할 때 제가 죽음에 관해서 특강을 하는데 그 때 보충하겠습니다.


13절과 16절, 우리가 오늘 마지막으로 보는 구절입니다. 여기에 스올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와요. 14장 13절에 나왔던 거예요. 이 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거하게 될 지하의 어두운 세계를 가리킵니다. 지옥하고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도 돼요. 보통 음부(陰府)라고 번역을 많이 하는데 스올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본문을 보면(14절) ‘무덤을 아버지라 하고 구더기를 어머니, 자매라고 한다.’ 그렇게 하잖아요. 이건 굉장히 사실적인 표현이에요. 옛날 사람들도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 구더기가 끓는 걸 보잖아요. 무덤 속에 들어가면 못 보지만 이장할 때나 그리고 어떤 시체들은 무덤에 안장하지 않고 그냥 버립니다. 죄인이라든지 다른 여러 경우예요. 그걸 나중에 보면 시체에 구더기 등이 있는 걸 보니까 죽음 사람들이 가는 세계가 어둡고 침침하고 그림자처럼 허무와 고통 가운데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아주 사실적인 표현이에요. 고대 유대인들은 천국이라는 개념을 몰랐어요. 죽음 이후에는 다 스올에 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데요. 오늘 저는 이 스올이라는 단어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내지만 역설적으로 이 고대인들이 그냥 스올을 생각한 게 아니라 이것도 하나의 인간에게 구원으로 임하는 어떤 경험들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거예요. 욥이 지금 스올에 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 말은 곧 현재보다 스올이 더 낫다는 이야기예요. 더 나으면 그게 바로 구원에 가까운 거죠. 지금 현재 욥이 당하는 조롱,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것들, 절망적인 상태, 계속해서 친구들이 ‘너 잘못했어.’라고 따지고 그리고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안 돼.’ 이런 이야기를 듣지만 스올에 가면 그런 일들은 전혀 없는 거예요.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요. 이 땅에 있었던 모든 것과 격리되는 상태에요. 비록 어둡고 침침한 세계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게 안식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스올하면 늘 부정적으로만 이해를 하는데 아직까지 천국 개념이 없을 때에 거기에 안식,(이 땅에서 계속 조롱받고 간섭받는 것들이 다 끊겨진 안식) 그게 없으면 안식이잖아요. 이 땅에서는 자식이 있는 대로 걱정, 없는 대로 걱정이고 돈이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걱정입니다. 이 땅에서는 안식이 불가능한데 스올에서는 가능하니까 그러한 안식이라는 천국 개념이 아주 부분적으로 그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맞으면 제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말한 신학자가 되고 틀리면 거짓말한 신학자가 되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요. 용기를 갖고 제가 느낀 걸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100% 맞는지 안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들어서 한 말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성서와 기독교 세계의 창조와 종말, 칭의 전반적인 것을 바탕에 두고 이 스올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 욥기를 바라볼 때에, 그리고 욥의 심정으로 바라볼 때에 거기에 그러한 안식이라는 천국 개념이 전체적으로는 아니되 부분적으로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흙 속에서'를 희망과 연관해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흙 속에서 쉬긴 쉰다고 했잖아요. 이게 안식이니까요. ‘스올의 쉼’ 이러한 영성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단락을 보십시오. 이제 마쳐야 되겠네요. 그 부분 천천히 읽겠어요. ‘고난의 대표자 격인 욥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기피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기피 인물이지만 제가 보기에는)욥의 이야기는 바로 나, 그리고 인류 전체의 실존(실제적인,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을 가리킨다.’ 제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모두는 다 잠재적인 욥이라고 한 것처럼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살아 있을 동안에 욥이 떨어진 나락을 이해하지 못하면(무덤, 스올, 오직 하나님에게만 보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 고독한 욥의 영적인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삶을 이해할 수 없고요. 또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삶의 깊은 곳으로 떨어진 경험을 한 사람만이 (깊이를 아니까)절정의 높이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그렇게 되어있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이건 죄를 조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깊이, 절망을 안 사람이야말로 거기서 용서받고 새로운 생명을 경험한다고 하는 기쁨, 희열, 은혜를 더 절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욥과 같이 살기를 기대할 수는 전혀 없어요. 이건 정말 감당하기 힘든 거지만 부분적으로는 어디에나 있을만한 이야기고요. 방금 마지막 부분에서 읽었듯이 이것을 꺼려할 것 없습니다.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죽음도 직면해야 되고 무덤, 구더기 그러한 단어들이 주고 있는 어떤 세계를 직면할 때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될 생명과 구원의 기쁨, 설렘, 희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나락을 알아야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있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희열, 그리고 이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게 되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17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살아있어서, 정말 살아있어서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질문하면 질문할수록 더 풍요로운 대답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욥의 운명이나 그것이 곧 우리 미래에 닥칠 것이며 또 그를 통해서만, 그 운명을 직면함으로써만 오늘 이 현재의 삶이 얼마나 놀랍고 풍요로운지도 알게 되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참된 세계로 들어가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일상생활, 이렇게 저렇게 희로애락으로 점철되고 있는데 해결할 문제 잘 해결하고 견딜 것 잘 견디고 망상에는 떨어지지 말고 현실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며 하나님 손에 온전히 맡겨지는 사람들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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