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28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욥기는 19장입니다. 조금 깁니다. 29절까지 있네요. 빌닷의 비판에 대한 욥의 답변이에요. 빌닷이 벌써 두 번째 나섰어요. 욥의 친구들 세 명이 번갈아가면서 욥을 충고, 비판, 비난하고 있어요.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이 19장에 나와 있습니다. 일단 이 본문을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해요.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 전체를 볼 때도 욥이 힘들게 재난을 당했다가 다시 이전보다 더 좋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간단하게 앞의 1장, 2장, 마지막 42장에 나옵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계속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어요. 핵심적으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에요. 그게 4장부터 반복되고 있습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어요.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난하는데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충고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몹쓸 놈’ 이렇게 돼버려서 아주 격한 발언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찢는 일들이 벌어지고 욥은 거기에 대해 응수하는 일들이 4장부터 지금까지 계속됐고 앞으로도 당분간 더 나가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들이 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욥의 주장대로 하게 된다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이 모순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단 논쟁하고 비슷한 거예요. 친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의 주장은 이단이에요. 그들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었던 하나님 모습, 하나님에 대한 생각, 그들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본질, 특성들이 욥의 주장에 따르면 허물어져버리니까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지혜의 전통으로 그 동안 알고 있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는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한 대답으로 이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복을 줘서 잘 되게 하고 악한 사람은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집안이 망하고 여러 가지 재앙을 받은 사람은 다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거예요. 그걸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 받아서 다시 복을 받고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어느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이걸 계속 밀고 나가니까 친구들이 볼 때(친구들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 스승들이 볼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이단이에요. 그래서 논쟁이 그치지 않고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19장에서도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앞에서부터 여러 번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명의 친구들이 비판을 했고 욥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19장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욥의 답변을 들을 수 있어요. 우리가 잘 따라가면 그 당시의 신앙이 어땠는지 알 수 있고 그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살아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세 문단으로 나눠서 보겠어요. 첫 번째는 1절부터 12절, 두 번째는 13절부터 22절, 세 번째는 23절에서 29절입니다. 2절에 보면 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고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언제까지 하겠냐.’ 욥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거예요. 참 딱합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는데 이렇게 친구들이 힘들게 한다는 상태에 빠졌으니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은 반대로 생각한 거죠.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고 친구들은 욥이 교만하고 충고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때요? 욥과 욥의 친구들, 우리는 별로 심각하지 않게 욥과 친구들이 논쟁을 하고 있고 신학적인 어떤 문제로 다툰다고 보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굉장히 진지했을 거예요. 이런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서(지금도 신학, 경제, 정치, 사회문제에서 비슷하게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누가 더 진정성이 있느냐 하는 잣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성이라는 것은 모든 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선생이나 목사들, 집안의 가족들 사이에도 진정성이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높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쟁에서는 진정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진정성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거예요.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욥도 진정성이 있었고 욥의 친구들도 당연히 진정성이 있었던 거예요. 굉장히 진지한 사람들인 거예요. 일부러 욥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기 힘든 거예요.


인간 세상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선한 의지들이 충돌하는 거예요. 한 쪽이 진정성이 없고 장난하고 괴롭히려고만 하는 것이 보이 게 되면 그건 누가 잘하고 잘 못하는지 바로 드러나게 되는데(그런 경우도 많긴 합니다만) 정말 중요한 문제에서는 양쪽 다 진정성이 있고 선한 의지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분간하기 힘든 거죠. 욥이 잘했는지 친구들이 잘했는지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시각으로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잠깐 썼습니다만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여러 대학교수들 사이에 찬, 반이 갈리고요. 오늘 오전인가는 서울대학교 교수님들 400명 가까이 되는 분들이 반대한다는 기자회견을 하시나 봐요.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정권도 진정성은 있는 것 같아요. 나라를 이런 방식으로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양쪽 다 진정성이 있을 때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역사가 진행되는데 다시 거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조금 무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세계적으로 역사교사서 국정화를 하는 나라가 몇 개 되지 않은데,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라는 특별한 상황이라서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계 경제라든지, 문화라든지 그런 면에서 거의 선진국 수준으로 간 나라로서 북한하고 베트남 등 몇몇 나라 빼고는 하지 않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네요. 다만 진정성만큼은 다 있다고 인정을 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도 각자가 옳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세밀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있어요.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욥의 친구들이 하도 자신을 비난, 비판하니까 ‘내가 허물이 있다.’ 일단 그렇게 넌지시 이야기하네요. 이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거예요. 사람이 허물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금 욥의 입장은 ‘내가 잘못한 게 있지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런 재난을 받을 만큼 잘못한 건 아니다.’를 깔고서 하는 이야기죠. 앞에서도 한 번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욥이 친구들에게 계속하고 있어요. 6절에 보면 친구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표현이 친구들로써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6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이런 것들이 용납이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이 억울하게 하신다니,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인데 어떻게 억울하게 하냐.’ 욥의 친구들로써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망발처럼 들렸을 겁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여튼 이런 이야기를 쭉 따라가다 보면 이 욥이 얼마나 상황이 어려웠기에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말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나를 그물로 에워싸 버렸다.’라고 말을 하고 있잖아요.


이건 제가 보기에 역설적인 거예요. 욥이 지금 처한 그 상황에서는 정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욕하고 뛰쳐나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왜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욥은 자기가 처한 운명이 저주스러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이 욥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욥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어요. 보통 우리는 기도해서 응답받고 잘되고 안 되면 화를 내는 차원인데 이 욥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토로하면서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건 곧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판단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전적인 신뢰가 있지 않는 한 이런 신앙의 태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건성으로 해요. ‘하나님이 들어 주셨어.’ 이런 식이지 저 막장과 같은 끄트머리까지 내몰리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가느다란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었다는 것은 욥의 신앙이 가장 근본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이렇게 외치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자신의 모든 걸 다 맡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하고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13절에서 22절까지예요. 처음에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지루해요. 욥기를 사람들이 잘 읽어내지 못합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욥이 비슷한 논조로 대응을 해서 여러분들도 앞에서 공부할 때도 느꼈겠습니다만 ‘앞에서 하던 이야기와 비슷하네.’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래서 건성으로 지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적인 주제,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한 주제는 사실은 길게 끌고 갈 필요 없이 간단하게 할 수 있어요. 친구들이 두 번 등장하지 말고 한 번씩만 나와서 이야기하고 욥이 대답하는 정도로 한 바퀴만 돌면 다 될 것을 지금 두 바퀴째 돌고 있거든요. 그리고 뒤로 가서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가 나오기 때문에 또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욥기는 독자들이 읽기가 지루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다른 시각이 있으면 읽기가 가능합니다. 오늘도 제가 공부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만 이 욥의 문제는, 그리고 친구들과의 논쟁 사이에는 우리가 정서적으로 일치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차원이 있어요. 우리가 욥처럼 집안이 망하거나 한건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와 영적인 멘탈리티라고 할까요. 그러한 차원에서 공명하고 일치할 수 있는 대목이 있고요. 제가 보기에는 욥기를 기록한 사람이 그 대목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대목이 뭘까요?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욥의 처지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죽음의 길로 가니까 영적인 일치를 느낄 수 있고요. 당연히 또 그래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욥기를 내 이야기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냥 집안이 완전히 파탄난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욥이 죽음의 문제에서 우리와 일치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가 지루하지 않게 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거죠. 13절부터 쭉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죽음 직전에 방에 누워 있는, 아니면 호스피스 병원에 누워있는 어떤 사람의 신세와 비슷하지 않을까 느끼면서 읽었어요. 다 떠난다는 이야기잖아요. 13절부터 다 그 이야기예요. ‘모든 게 떠난다.’ 종들도 대답 안하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갖지 않는 상태, 식물인간이 된, 우리가 언젠가 식물인간이 되는 거죠. 죽는 것은 식물인간의 그 사이에 순간적인 찰나를 지나서 결국엔 돌아오지 못하는 때로 가게 되는데 그게 아직 우리 앞에 놓여있지 않지만, 조금 시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결국은 우리 앞에 있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좀 정색을 하고 봐야 됩니다.


여기 재밌는 표현이 나와요. 17절 보면 이러하네요.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이렇게 되어 있네요.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 늙고 병들고 몸에서 냄새도 나니까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입김까지 싫어하는 그런 상태에 빠진 거죠. 누구나 다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죽음의 때가 멀었는데도 누군가의 입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하여튼 이건 적나라한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 시각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욥기를 읽으셔야 됩니다. 이게 쉽지 않죠. 2주전에 우리 일일수련회 때 제가 죽음에 대해서 특강을 했는데 사실 제가 하기보다는 호스피스에서 일하시는 두 집사님이 나와서 말을 했으면 더 실감이 났을 것 같습니다. 거기는 인간의 품위고 뭐고 없어요. 몰핀을 맞아도 고통을 줄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러한 특별한 경우는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식은(우리가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만) 밤에 잠들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죽어 있는 상태, 자듯이 죽는 것, 저도 그게 소원이에요. 밤에 자기 전에 성경 한 구절 읽고 기도 간단하게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침에 보니까 숨이 끊어진 죽음이 가장 품위 있는 죽음일 것 같은데 이게 억지로 되지는 않잖아요. 만약 치매가 걸려서 제정신이 아니게 되면 그 사람이 왕년에 목사든, 교수든, 변호사든, 의사든 무슨 영향을 끼치겠어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특별한 준비를 할 수 없지만, 이런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런저런 이유로 인공호흡기를 장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상황이 됐을 때는, 그걸 연명치료라고 하거든요. 그런 건 거부하는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도 유서로 작성을 해놔야 하거든요. 저도 그것을 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다른 식으로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데 그 때 가족들이 살린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그게 연명치료인데 그런 방식으로는 죽음을 품위 있게 맞이하기가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별안간에 고통스러운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기 힘드니까 그건 하는 만큼하고 일반적인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일단 손에서 모든 것을 놓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기 때문에 여기서 설교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일단 놓는 거예요. 죽었을 때에 나에게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연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는 죽어도 걱정 없어. 하나님 품에 안길거야.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거야.’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가까이 들여다보면 두려워하고 감당을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손에서 놓는 훈련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걸 어디까지 놓느냐면 자기소멸을 받아들이는 거죠. 죽으면 자기소멸이니까 말이죠. 이건 좀 건강할 때 해야 돼요. 의식이 살아있어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런 쪽으로 생각이 확장되면 정말 위기의 순간에도,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죠. 100%된다는 건 아니고요. 사람은 늘 무의식으로 어떤 것이 작동되기 때문에 자신이 평소에 아무리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손에서 놓는 것과 자기소멸이라는 상태를 미리 준비하는 훈련이 잘 되어있으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훨씬 더 잘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인 거예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서의 신앙은 조금 왜곡이랄까,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요. ‘하나님 믿고 잘 된다.’ 이런 쪽으로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것은 자기소멸을 인정하는 삶의 태도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가서 잘 먹고 잘 산다든지, 거기서 우리 식구들 만나서 영원하게 산다든지 하는 방식 보다는 지금 여기서 경험됐던 삶의 모든 것들이 소멸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미래예요. (이 부분은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하는데)하나님의 미래를 우리가 용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와 자기소멸이 어떻게 일치 되냐. 하나님 안에서는 더 잘 먹고 잘 살고 좋은 일이 많아야 되지 않냐.’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건 이 시간에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많은 설명들이 전제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만 간단하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미래는, 아까 제가 한마디 던진 것과 연관이 되네요.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방식으로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신뢰인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과 꿈들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오게 될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 분의 자유함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사건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다음 세 번째 문단, 23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욥은 정말 외로운 사람이에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니까요. 이건 아주 실존적인 문제였어요. 그 당시에 모두 가 옳다고 생각했었던 신앙하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신앙이 엇박자가 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국 욥은 ‘내 생각과 내 말이 기록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호소를 하네요.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기록이 되면 나중에 후세들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누가 이해해 줄 거 아닌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23절에서 24절까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말이 기록되었으면, 오죽 좋겠나.’ 책에 쓰여 졌으면 오죽 좋겠냐는 뜻이에요. 24절에서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은 난해구절이에요. 성서학자들이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아직 모른다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렇습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을 보리라는 표현이죠. 이걸 내세에 대한 희망, 자신이 부활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조금 힘들다고 해서 논란이 많은 구절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욥이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7절, 하나님을 향한 강한 열망을 26절에 이어서 27절에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외워둬야 할 구절입니다. 성경을 외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공부예요. 많이 외워야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외우면 우리의 영혼이 돌에 글씨를 새기듯이 그러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27절 굉장히 중요한 구절이네요. 오늘 19장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간절한 거죠.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이 난외각주에 들어있죠. ‘콩팥, 신장’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초조하면 콩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 정도로 하나님을 확연하게 보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여기 담겨있네요. 우리가 이런 걸 보면 부끄럽죠. 우리는 이런 마음이 별로 없잖아요. 그냥 상투적으로 기도하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욥이 지금 표현하는 영적인 경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요. 여기서 ‘하나님을 내 눈으로 보기를’ 이렇게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마음인데 여러분들이 이런 표현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닌데 왜 성서 기자들은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하나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생명의 비밀, 생명의 완성을 알고 싶다는 뜻입니다. 잘 기억해두세요. 생명의 비밀과 생명의 완성이에요. 이런 것에 마음이 가려면 지금은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여전히 비밀이라는 것을 알아야 이런데 마음이 가지 그런 쪽으로 우리의 생각이 열리지 않으면 성서용어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언어 속에 들어있는 고대 유대인들의(말하자면 구약을 통해서) 영적인 깊이들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거죠. 생명의 완성, 생명의 비밀, 이런 것들에 대한 가슴 설레는 마음이 우리가 성경을 공부 할 때 경험해야 될 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27절을 여러 번 읽어보십시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하나님을 그만큼 가깝게 여기고 싶다는 것이고 그렇게 경험했다는 것이고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초조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비밀과 생명의 완성을 기독교인들은 이미 맛봤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미리 안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신약성서가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비밀이고 생명의 완성이에요. 이미 우리는 그것을 약속으로 받고 이미 성서를 통해서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날 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거예요. 그 순간은 종말에 일어나고 그걸 가리켜서 예수의 재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명의 완성이에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일어났던 부활 생명의 완성, 그걸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살아가는 것이 역사예요. 그리고 인생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안에 일어났던 그 사건을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이해하고 경험하면서, 그러나 마지막 때 확연하게 드러날 그 순간에 대한 기다림, 그 사이에서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그네처럼 우리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 약속에 따라서 이렇게 수요일 저녁에 욥기 19장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2500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 고대 유대인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이 놀라운 신앙의 깊이들을 우리가 한 문장 한 문장, 한 장 한 장, 이렇게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나 우리 듣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성령 안에서 그 욥기의 놀라운 신앙 깊이를 잘 따라가서 주님의 귀한 자녀들로 잘 성장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 환절기에, 또 날씨 기온이 떨어질 때에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 건강 지켜주시고 어디서 무엇을 하거나 주님의 은총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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