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18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24:1-25

25:1-6

26:1-14

27:1-23

  1-17,21/18-20,22-25  

       1-6       

       1-4/5-14       

       1-7/8-23       

/소발

빌닷

욥/빌닷

욥/소발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욥기를 공부하고 있어요. 지난 수요일까지 23장을 했네요. 전체가 42장까지 있을 텐데 제법 했습니다. 오늘은 24장입니다. 그런데 이게 구조가 좀 복잡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어요. 이 욥기라는 것이 누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도를 갖추어서 쓴 것이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고요. 굉장히 오래된 고대 문헌이에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오래됐습니다. 이 성경이 기록될 때가 우리로 치면 삼국시대보다 더 오래된 거예요. 우리가 삼국시대하면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오래 전이니까요. 기원전 500년, 1000년 정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가 문서로 작성되면서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고요. 그리고 그 당시 언어라는 것이 지금처럼 완벽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때예요. 예를 들어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되어 있다니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이야기가 내려오면서 조금씩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종이가 있어서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쓰고 사본 만들고 하다보니까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이야기가 전달되고 문헌이 전수되다 보니까 지역에 따라 언어 사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섞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24장부터 27장까지의 내용이 좀 그래요.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을 보시면 돼요. 오늘은 제가 도표까지 그렸습니다. 오늘 24장을 공부할 텐데 이 24장이 23장에서 이어지는 거예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욥 이야기예요. 그런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8절부터는 욥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합니다. 욥을 비판하고 있는 친구들의 생각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냐면 내용을 보면 알아요. 그 주장과 사상이 다르니까요. 큰 재앙을 만난 사람의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지니까 지금까지 쭉 왔던 욥의 관점과는 다른 이야기인거예요. 왜 그러냐 하는 것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오늘 거기까지 하지는 않고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한 주, 한 주 진도 나가면서 그 차이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공부할 24절 1절부터 25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만 본다면 이건 당연히 욥의 이야기지만, 그게 아니라 1절에서 17절까지, 또 하나 더한다면 21절이 욥의 이야기고요. 25절도 욥의 이야기로 포함시킬 수 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주석 성경에 따르면 그 구절은 제외되고 1절부터 17절과 21절을 욥의 이야기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25장으로 넘어가 보십시오. 여기는 당연히 빌닷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너무 짧아요. 이렇게 6절까지라고 한다면 이야기를 꺼내다 마는 정도입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부분적으로 잘려나갔다고 추정할 수 있죠. 그래서 26장 5절에서 14절을 빌닷의 이야기로 학자들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분석이 아마 맞을 거예요. 25장 1절에서 6절과 26장 5절에서 14절이 빌닷의 이야기입니다. 빌닷의 욥을 향한 비판이죠.


지금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태를 아시겠죠? 친구들이 나와서 비판하고 그 다음 욥이 대답하는 것이 로테이션으로 반복돼서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까지 친구들이 몇 번 등장하는지 기억하시죠? 세 번 등장해요. 엘리바스, 빌닷이 세 번 등장하고 소발은 안 나와요. 소발은 두 번째까지만 나옵니다. 그것도 조금 이상하죠? 이게 문학적으로 완성도를 갖추려면 친구들이 세 번씩 나와서 이야기했으니까 소발도 나와야하는데 안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도 잘렸거나 다른 쪽으로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27장 8절에서 23절로 보는 거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만 본다면 27장은 전체가 다 욥의 말로 되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8절부터는 여기서 빠진 친구, 소발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게 보지 않고 그냥 욥의 이야기로 보면 어떠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보면 논리에서 어긋나는 거예요. 욥의 사상과는 많이 어긋나는 거니까 안 되는 거죠. 이렇게 24장부터 27장까지는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여기 24장에서 27장까지는, 24장 1절에서 17절까지 욥의 엘리바스에 대한 대답이 나오고요. 그 다음에 빌닷이 등장해서 이야기해요. 그게 25장과 더불어서 26장 5절에서 14절, 그 다음에 욥이 나와서 27장 1절, 26장 1절에서 4절, 27장 2절에서 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그 다음 소발이 등장해서 27장 8절에서 23절에 말하고 앞으로 돌아가서 24장 18절에서 20절, 22절에서 25절까지 연관시키면 되겠습니다. 복잡하죠? 사실 이거는 여러분들이 모르셔도 되는 겁니다. 몰라도 되는 걸 공부시간에 왜 이야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들어둬도 손해되는 거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거고요. 그리고 이것의 내용을 잘 아시라는 뜻으로 드렸다기보다 성경이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간접적으로 아시라는 뜻으로 이렇게 복잡한 문제들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게 문장, 비평적인 문제들은 다 몰라도 되고 간접적으로 성서 텍스트에 대한 어떤 관점을 잘 가져보시라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은 큰 틀에서 이게 욥의 입장인지, 친구들의 입장인지, 이런 건 구분하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이런 주석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24장 1절에서 17절까지만 보겠습니다. 이게 순수하게 엘리바스의 비판에 대한 욥의 두 번째 대답이에요. 23장부터 시작하는 거죠. 23장부터 시작해서 24장 1절에서 17절까지가 해당됩니다. 이 내용이 어떤가를 함께 봅시다. 말씀을 읽고 어떤 신앙적인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런 정도까지 여러분들이 살피면 되겠습니다. 그걸 오늘 말씀드리겠어요.


<24:1-17>

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6.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8.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24:21>

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일관됩니다. 이건 지혜의 전통으로 나온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어요. 그 지혜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어떻게 끌어가신다고 했죠? 착하고 말 잘 듣는 사람 복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하고 재앙을 내린다는 거예요. 욥이 저렇게 저주받을 정도로 삶이 파괴된 것은 결과를 보니 욥이 악한 거거든요.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를 다시 돌봐 줄 거다.’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 논리가 지금까지 계속 오는 거예요. 기독교 안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옳습니다. 거기에 대해 욥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의 전통, 아주 선하고 바람직하고 은혜로운 것들로 모든 인간의 삶을 다 해명할 수 없다는 어떤 끝자락을 붙들고 있어요. 그래서 욥이 외로운 겁니다. 자신의 생각이 인정받기 힘든 거예요.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지혜의 전통에 구약성경이 있는데 그 안에 이런 욥기를 통해서 더욱 근원적이고 깊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혼란스러워 질 수 있어요. 왜 그러냐면(우리가 성경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점인데요.) 이 지혜의 전통, 하나님 뜻대로 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이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 옳아요. 그러나 그것이 절대 규범으로 작동되면 틀린 거예요. 우리가 이 긴장을 잘 갖고 살기가 힘든 겁니다. 하여튼 이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뻔한 대답을 갖는 게 아니라, 그리고 지혜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큰 옳은 말씀 속에서 그것으로써 다 감당해 낼 수 없는 삶의 심층들에 놓여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는 입장입니다.


여기 23장에 이어서 오늘 24장이 나왔어요. 욥이 엘리바스에게 23장에서 이야기하고 다시 한 번 24장 1절에서 17절 사이에서 이야기합니다. 1절 보십시오. ‘전능자는 때를 정하지 않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게 되는가.’ 전능자는 물론 하나님이시죠. ‘때’라는 것은 ‘심판의 때’예요. 이게 무슨 말인지는 전달이 됐을 겁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악한 자를 심판한다는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외면 받는 세계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 욥은 ‘심판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건데,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이 욥이 직면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되고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되리라고 봅니다만 이 욥의 친구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악한 자는 심판하고 의로운 자는 복을 주신다는 확신 속에 있었고 세상이 당연히 그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욥은 그것을 용납하기 힘든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나.’라고 하면서 1절에서 ‘하나님의 때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와야만 되는,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 보면 알 수 있죠. 2절 보면 이렇습니다. ‘땅이 경계표를 옮기고 양떼를 빼앗는다.’ 그리고 3절,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로 잡는다.’ 정말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죠. 4절,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고 그래서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죠. 소위 말해 난민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굉장히 오래전에 이야기잖아요. 지금도 이런저런 일로 난민이 많이 있잖아요.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본질은 잘 변하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약간의 모양만 달라지는 거지 이게 잘 되지 않네요. 옛날에 비해서 오늘은 훨씬 더 여러 가지 면에서 삶이 풍요로워 졌는데도 이러한 형편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실감이 나시나요? 대개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동화책이나 소설책 읽는 것으로 생각이 돼요. 우리들이야 난민의 신세는 안 됐잖아요. 그래서 실감이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평화롭게 산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세계, 우리가 더불어서 살고 있는 세계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런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5절 보십시오. 그러한 가난한 사람들, 난민과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5절에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공동번역을 보십시오. 이렇게 번역되어 있네요. 조금 더 실감이 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시로 기록되었는데 우리말 성경은 산문 식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뉘앙스가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은 시처럼 번역을 했어요. 우리들이 읽기에 더 잘 들어옵니다. 이렇습니다.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 실감이 나죠? 자식에게 한 끼 먹일 것들을 찾아 나선 사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광야, 빈들에서 먹을 걸 찾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게 밥벌이의 문제예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한탄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숙명이기도 하고요. 그것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고 또 거기에 모든 삶들이 빠져있어서 참 안타깝네요. 그러니까 밥벌이 때문에 인간의 품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오늘도 사실은 반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가있긴 합니다. 경제 크기로만 본다면 세계 10위에서 15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해요. 상당히 높은 수준이죠. 그런데 OECD국가 중에서 노동 시간이 제일 많고 아울러서 자살율도 제일 높고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살이의 어려움, 밥벌이 문제에 실감은 잘 못하죠. 그래서 이런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서울에 제 조카들이 있는데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해요. 조카만이 아니라 젊은이나 나이든 분들 소식을 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을 여섯시 반에 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출근 하는 곳이 굉장히 멀어요. 시간상으로 한 시간 반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밤늦게 10시 이상 돼서 들어오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이 안 되고 경쟁이 안 되니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러한 현실들을 제가 살아보지 않아서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게 현실이라고 하니, ‘그렇게 살지 말고 시골에 와서 농사나 짓고 살지.’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사실은 그런 말은 안 되는 건데 너무 답답하니까요. 저런 방식으로 인생을 소비하는 게 정말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게 해서 결국 하는 것이 집 한 채 사는 거잖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가족이 직장 안 갖고 산다면 시골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최소한 먹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요.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편안해서 하는 말 같기도 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할 말은 해야 됩니다.


모든 우리의 삶을 거기에 송두리째 쏟아 넣는 방식은 하이데거의 말 표현을 빌리면 ‘비본래적인 실존’에 떨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한마디 더 보태면 ‘일상에로의 퇴락’이라고 합니다. 이게 철학자가 하는 말인데 굉장히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죠. ‘일상에로의 퇴락’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거예요. 돌아오는 주일이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이에요. 1년이 끝나는 주일입니다. 11월 마지막 주일은 교회력이 시작하는 대림절이에요. 다음 주일에 제가 설교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알파와 오메가’예요. 요한계시록 1장 어디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한 표현입니다. 대체적으로 어떤 설교를 해야겠다는 구상을 잡았어요. 그 중에 하나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딘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하나님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 시간을 전체적으로 주관하는 주라는 기본적인 신앙이 그냥 낱말 뜻으로만 알지 실제로 우리는 믿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계속 걱정이잖아요. 우리는 현재도 계시고 과거도 계셨고 미래에 장차 오실 분, 우리의 운명 전체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걸 아는데도 다른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이게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생각이 난 거예요. 혹시 여러분들 집에 불이 난 적 있으세요? 사람의 심리가 자기 집에 불이나면 일단 중요한 걸 가져와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대다수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온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중요한 것 같아서 다 가지고 나와요. 우리의 삶이 그와 같다는 거죠. 모든 것이 급해요. 자기 집에 불이 난 것과 같은 심리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교회 신앙생활도 비슷하고요. 너무 많은 것들에 손을 대는 거예요. 하여튼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걸로 말하면 밥벌이 문제, 너무 급한 거예요.


6절에서 12절을 보시죠. 여기에는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고 빈들에 나가서 자식 먹일 것을 좀 얻어오려는 사람들의 운명, 생존의 위협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요. 보십시오. 표현이 굉장히 문학적이고 노골적이고 적나라합니다. 6절 보세요.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에요. 그리고 ‘악인이 남겨 둔 포도’ 거의 버리는 거죠. 그것으로 먹을거리를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에요. 쭉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10절 보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린다.’ 내 앞에 있는 걸 먹으면 되는데 남의 것이니까 먹을 수는 없는 거죠. ‘이삭을 나르나 굶주린다.’ 12절 보면, ‘상황이 그러한데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않으신다.’ 욥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절대 빈곤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의 논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기억해 보십시오. 착한 사람들 복을 주고 악한 사람들 벌을 주는 거니까 정의롭게 세계가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세계는 그렇게 안 돌아가거든요.


이 절대 빈곤의 문제가 오늘 공부의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지나가면서 한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에 5절에서는 밥벌이 문제가 나왔어요. 절대빈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인 거죠. 이게 참 난감해요. 해결되기가 쉽지 않은데요. 자기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불쌍한 사람을 돕자는 동정심, 도덕심으로 해결이 되지 않고요. 이건 정부차원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옛날 같으면 힘이 있는 왕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지금 같으면 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겠죠. 최소한의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정부의 책임이 오늘 현대사회에서는 시급하게 요청되는 겁니다. 요즘 복지병(福祉病)이라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을 복지라고 하잖아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우리가 사는 세계 안에서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 대한민국(북한은 너무 가난하니까 복지고 뭐고 말할 게제가 안 되고요.)을 생각한다면 현재만 해도 돈은 충분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돈을 어떻게 적절하게 쓰느냐가 중요하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 총선이 있어서 지금부터 이렇게 저렇게 국회의원 나오려고 애도 쓰고 많이 하는데, 정권차원에서의 복지문제는 선거를 잘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복지문제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야하고 그런 사람 중에 대통령이 돼서 일을 해야겠죠. 그러려면 우리 국민들이 투표를 잘해야 하는데(제가 여,야를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투표할 때 정책투표를 하지 않아요. 자신의 정치적 소신으로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지역 등을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여권에 있는 정당이나 대통령을 투표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조금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이게 좀 아이러니합니다. 가난하고 학력이 좀 떨어지고(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전체통계를 내면 그렇습니다.) 블루칼라이고 가정주부이신 그런 분들이에요. 소득으로 보면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주로 많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정책의 제 일순위로 두겠다는 정당에 투표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정치가 바르게 발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도 답답해서 조금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다음 13절에서 17절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악한 사람의 행위가 묘사되어 있어요. 앞에서 6절에서 12절에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면 여기서는 악한 행위에 대한 묘사입니다. 13절, ‘광명을 배반한 사람들, 밝게 하지 않고 어둡게 한다.’ 14절,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나오고요. 15절, ‘간음하는 자’가 나오고 16절, ‘남의 집을 뚫는 자’ 도둑질하는 사람이에요. 이러한 몇 가지로 구분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둠을 좋아하고 그걸 이용한다고 나와 있네요. 17절을 공동번역으로 인용했습니다. 보십시오. ‘한 밤 중에 그들에게는 아침인가. 짙은 어둠속에서 온갖 무서운 일을 자행하는 무리’ 악의 본질, 참 이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아마 세상 끝 날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떻게 해결돼야할지 참 어렵습니다. 지난 주말에 파리에서 벌어진 동시다발적 테러도 그렇잖아요.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해명이 안 되는 건데, 20대의 젊은 IS, 이슬람 극단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한 거예요. 정말 이것보다 더 악한 일은 찾기 힘든 거죠.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에서는 바로 그 다음날인가, 공군기로 그 쪽 IS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의 건물들을 다 때려 부쉈다고 하는데 거기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겠죠.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이건 아마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강의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거기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악의 본질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더 나가서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한다.’ 파괴적이면서도 그걸 합리화하는 거예요. 테러리스트들도 당연히 자신들은 옳은 일을 한다는 겁니다. 자신들을 순교자로 생각하는 거죠. 합리화하는 거예요. 프랑스가 보복 공격하는 것, 그것도 합리화가 가능한 거죠. ‘죄가 존재론적인 능력이라고 본 성서의 주장은 인간학적으로도 옳다.’ 존재론적인 능력이라는 이 표현은 무슨 뜻이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죄와 악이라는 것은 인간이 교육을 받아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계몽시켜서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법을 강제해서라든지 지식을 많게 해서라든지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아주 근원적인 세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죄와 악의 문제는 숙명적으로 인간이 안고 사는 거죠. 그래서 ‘원죄’라고 기독교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원죄, 존재론적인 능력이라는 거예요. 그걸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냥은 해결할 수 없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안고 사는데 어떻게 해결하죠? 세례 받을 때 우리가 공부한 그대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거죠. 이게 굉장히 다이내믹한 인간과 죄의 숙명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가르침, 교리라고 할 수 있어요. 율법으로 더 이상 불가능했던 인간의 죄와 악이 하나님의 우선적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차원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면 되겠습니다.(17절까지)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소발 이야기할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욥기 24장 1절에서 17절 사이의 말씀을 같이 읽고 공부했습니다.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지혜 전통에 의해서 다 해명이 되지 않는 삶의 구석진 부분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세계의 질서들, 여기서 몸부림치는 욥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봅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개인들과 우리 사회의 모든 삶들도 정확하게 뚫어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지하고 바르게 그리고 신앙적인 깊이에서 살아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행위가 이 모든 일들을 뚫고 우리에게 바르게 실현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 각자 살고 있는 삶의 자리 그리고 맡아서 해야 될 여러 가지 수고와 봉사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될 수고들, 잘 감당하여 주님의 자녀로 매일매일 승리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 불순한 일기 가운데서도 함께 모여 말씀을 같이 나눈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넘치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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