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기독교인의 자유와 복종 ( 14:13-23)
                          

신앙과 현실
바울이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으면서, 그러나 불원간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 로마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갈등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 놓여 있습니다. 한쪽은 신앙을 이 세상의 풍습이나 관행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본 반면에 다른 한쪽은 그 현실 안에서도 여전히 기독교적 특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은 일종의 '열광주의'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먹거리 문제에도 그 어떤 제한을 받지 않으며, 날에 대한 문제에서도 역시 자유롭습니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은 '율법주의' 성격이 짙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양자가 서로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드러내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쪽은 현실을 초월하려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실에 의존하려는 것입니다.
신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로마 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특히 기독교 윤리학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불순하거나 그들의 마음이 편협한 까닭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이미 이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부활을 참되게 희망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습관이나 윤리에 의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철저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의 현실은 이 땅의 질서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답게 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지 않고, 멀리 해야 할 행위를 멀리 해야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땅의 질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결국 그의 신앙은 열광주의적인 관념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내재하는 변증법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명시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일단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한 가족 구성원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가족을 넘어서서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감수해야 할 어떤 일들이 있는 동시에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내 삶 자체를 위해서 누려야 할 자유가 있습니다. 이 두 상태가 적당한 조화를 이루면 살아가는 데 불편한 게 없지만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정확하게 구분되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기독교인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삶도 이런 구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이 세상에 종속되지만 신앙적 차원에서는 초월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자유
신앙의 초월적 성격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나는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합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막 7:15). 바울은 또한 22절에서 이와 비슷한 진술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세상의 그 어떤 질서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고유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이라 할 주술적인 힘은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예컨대 길을 떠날 때도 날을 택해야 한다거나 결혼을 할 때도 사주를 보아야 했는데, 그만큼 자유의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고대 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주술적인 힘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왕정과 귀족정치는 일반인들의 운명을 제압했고, 제사장들의 신적인 권력도 역시 일반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긴 했으나 그것이 독단적으로 적용됨으로써 유대인들의 자유는 무시당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 사이의 논쟁이 안고 있는 토대가 바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자유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들에게 전승된 율법을 수호하고 실천하는 데만 몰두한 반면에, 예수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자유를 규범으로서의 율법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그의 가르침에서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별로 날카로운 주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자유의 영역이 확대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축소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주초를 금한다거나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작은 문제만 연관된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야 어떤 점에서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접어두어도 됩니다. 그러나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유의 훼손은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나쁜 상황입니다. 신앙의 모든 중심을 교회 성장에만 집중시킴으로써 결국 신앙의 본질적인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인의 복종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기독교인의 자유는 무조건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무엇이나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음식 문제를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15,16). 바울은 20,21절에도 이런 입장을 고수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방종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덕을 위해 자기를 복종시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 토대를 허물어뜨릴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도 인간은 공동의 자리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의 행동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인 자유는 결국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모든 사물과 질서로부터 자유롭지만 그것이 타인을 억압하는 결과를 빚을 때 적절하게 유보하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논문에서 이 문제를 두 명제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기독교인은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둘째, 기독교인은 더할 수 없는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앞서 오늘의 교회가 기독교인의 자유를 축소시켰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만, 다른 한편에서는 복종해야 할 부분에서는 자유를 남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분리나 교파 분리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이 지나치게 열정적인 탓인지 교회 안에서 서로의 의견이 대립될 때 너무나 쉽게 갈라집니다. 이런 일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결국 교파 분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누가 통계를 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개별 교회의 분리 건수는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런 개별 교회의 분리와 교파분리를 통해서 큰 힘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래의 교회보다 분리된 교회가 훨씬 빨리 성장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어쨌든지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음식 문제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말고 오히려 그런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외면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유의 근거- 하나님 나라
바울이 본문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그 자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로 인해서 본질적인 요소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날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인 각자가 자기 형편과 취향에 따라서 선택해야 할 일종의 '옵션'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이 '가까이 임했다'고 선포한, 그래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와 동일시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와 연결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이외의 요소들은 이것을 위해서, 혹은 이것 때문에 요구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을 추구합시다."(17-19). 에른스트 케제만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 은혜의 영역입니다. 정의는 단지 우리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평화는 모든 사람을 향한 개방을 뜻하고, 기쁨은 열려진 하늘 밑에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부활 논쟁이 벌어지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 22:29,30).
예수님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실증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현재 우리 삶의 형식을 확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끌어내시는 은총의 힘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신앙의 근본이라고 해서 기독교인이 현실을 무시하고 열광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먹거리처럼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인해서 형제를 무시하고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자로서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형제와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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