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종말론적 희망  (15:1-13)
            

다름과 분열
창세기 11:1-9에 보도되어 있는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언어가 갈리게 된 동기를 설화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같은 카타스트로프(대파국)를 피해보려고 바벨탑을 건설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신성에 대한 도발이라고 여기고 그 탑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신성 모독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생각과 마음을 소통시켜주던 언어의 혼란으로 인해서 이제 인간은 진정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설화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분열 현상은 의사 소통의 훼손에 의한 결과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할 어쩔 수 없는 숙명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분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합니까? 노무현 정권을 좌파 정권으로 매도하고 부정하는 것은 약과이고, 더 나아가서 이런 좌파 정권의 공고화를 막기 위해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도 우파에 불과한 노무현 정권을 좌파로 보는 그 시각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은데, 그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이 나라의 지식인들이고 소위 오피니언 리더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런 시각의 차이는 그들의 지식이나 성품이 아니라 어딘가 인간 본질과 연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벨탑 설화가 보여주듯이 언어의 혼란으로 인해서 결국 인간의 사유와 가치관에도 혼란이 개입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이 우리의 숙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이상 분열로 발전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서로 적대감을 품지만 않는다면,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입장을 약간씩 고려할 수만 있다면(역지사지), 분열로 인해서 파생되는 극한의 파국만은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도 이런 분열의 조짐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기독교 현실을 보더라도 종교 집단 역시 이런 인간의 한계를 손쉽게 해결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로마 교회가 안고 있었던 이런 갈등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가 바울의 생각을 추정하는 것인데, 이런 다름이 분열 상태로까지 전개되지 않도록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런 차이가 미미한 요소가 되도록 전혀 다른 삶의 지평을 확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희망론의 왜곡
우선 종말론적 희망에 대한 개념을 약간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4절, 12절에 각각 한번, 그리고 13절에 두 번, 이렇게 네 번 거론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런 희망을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구약성서가 그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종교가 자신들의 구원론 속에 그런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도 이런 희망에 의해서 견인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집을 사고, 결혼하고, 여행을 다니고,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의 희망사항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희망이 담고 있는 내용과 더 나아가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희망이거나 아무런 실현 가능성이 없는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킬 염려가 많습니다.
기독교의 희망론도 이런 왜곡의 역사를 거쳐왔으며, 지금도 그런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방향에서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의 희망이 현실 도피적인 구조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구호로 집약될 수 있는 이런 희망론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거나, 심지어는 악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병든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런 희망에 기만당함으로써 현실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무뎌지면서 결국 자폐증 환자처럼 자신의 밀폐된 세계관 안에 갇힙니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이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그 세계는 철저하게 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그 세계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지평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땅의 생명을 근거로 삼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의 인격, 우리의 정체성, 실존 등등, 우리 자신의 모든 삶은 궁극적 미래에 성취될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왜곡은 기독교 희망이 매우 세속적 표상으로 착색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천국에 가면 황금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다거나, 먹을 게 많고, 영원히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 동산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곳에서 큰상을 받을 사람과 겨우 부끄럽게 구원받을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그래서 좋은 집도 있고 허름한 집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이런 탐욕을 하나님 나라에 적용시키면, 교회의 구원과 희망이 일차적으로는 성서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도 못합니다.

기쁨과 평화
바울은 13절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기쁨과 평화'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막연하게 영혼 구원을 받는다거나 이 세속적 욕망이 성취되는 것을 희망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기쁨과 평화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쁨과 평화는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성취되는 때라기보다는 '메시아' 경험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종말론적' 희망에 속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11:1,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롬 15:12). 이 말은 곧 메시아만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인식하는 사람,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이런 세계를 향한 희망은 성령의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은 거의 절대적으로 자기 욕망과 연관에서만 작용하기 때문에 메시아의 통치에 대한 희망을 인식하기가 힘들고, 또한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듭니다. 결국 이건 성령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성령의 힘이라는 것이 주술적인 작용이 아니라 진리, 사랑, 생명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마음을 닫아두고 있는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아주 인격적인 힘입니다.
여기서 잠시 성령의 인격이라는 말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일차적으로 이 말은 성령이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뜻입니다.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페르소나'에서 왔는데, 여기에는 가면, 배우, 인격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왜 인격을 가면과 같은 단어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복잡하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가짜라거나 허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이성적 능력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의 이성적 인식 작용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격 개념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즉 성령의 자유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방식으로 활동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성적 인식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활동하시는 셈입니다.

일치의 힘
바울은 1절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7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 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라고 서술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부분과 바울의 이런 진술을 연결시킨다면, 종말론적 희망이야말로 인간의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 토대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좋을 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대신 받았다(시 68:10, 69:9)고 합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데,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단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것은 정치, 종교권력이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사랑과 일치를 훼손하는 일을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종말론적 희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의 내용인 기쁨과 평화의 능력으로 일치를 이 땅에서 실현해나가는 일에 최선을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극복할 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거나, 유대인이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국제 관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한 국가 안에서도 여전히 분별심이 극치를 이루고 있고, 종교간에도, 또는 한 종교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의 희망이 부여되지 않는 한 이런 갈등과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참된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종말론적 희망을 경험함으로써 얻게 된 기쁨과 평화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접근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종말론적 희망이 그렇게 간단히 우리에게 일치의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분파 작용을 보면 그게 얼마나 고단한 길인지 확인됩니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능력들이 존재론적으로 드러나야만 성서가 말하는 종말론적 희망의 능력이 이 세상에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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