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사도의 정체성  (15:14-21)
                

카리스마의 원리
바울은 이제 로마서의 긴 편지가 끝나 가는 이 대목에서 사도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원래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제자로 부른 열두 사도들과 달리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억압하다가 돌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도성에 대해서 의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그 이후 아라비아에서 자신을 성찰하던 시기를 거쳐서 자신의 사도성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흔쾌히 인정하지 않았으며, 간혹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곤란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사도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든 직제는 외형적인 조건보다 그 내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사와 장로의 외형적인 직책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약간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만 '카리스마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은사'를 받았는데, 그 은사는 외형적인 차원보다 그 내용으로 인해서 결정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15절)라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사(또는 은총)는 바로 사명에 관련된 것이지 어떤 직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리는 단지 교회 공동체의 종교적 직제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놓여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공장 노동자로 살든지, 학교 선생으로 살든지 그 직책의 외형적 상태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내용이 삶의 근본입니다. 연극 배우는 연기에, 학교 선생은 가르치는 일에, 국회의원이면 나라의 살림살이에 마음을 두고 그 행위가 바르게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기울이는 것이 곧 카리스마의 원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런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어떤 직책을 성취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결국 삶의 내용이 빈곤해집니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원리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사도의 사명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의 직무를 맡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이방인들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16절). 이 문장은 바울의 개인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모든 교회의 사명과도 연결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이 대충 세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방인을 위한 일꾼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런 바울의 생각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몇몇 보도를 보면 베드로 같은 사도는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바울 같은 사람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없었다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바울은 이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거의 유대인 사도들과 지도자들이 주류로 활동하던 그 당시에 바울의 이런 주장은 별로 탐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옥불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 창조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영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해석에 의해서 성령은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넘어 전 세계와 연결되었습니다.
셋째, 바울의 직무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에 이미 이방인과 이스라엘과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인 유앙겔리온은 특정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복음의 지평을 심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폐쇄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복음을 일종의 종교적 의무 사항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복음을 추상화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복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며, 후자는 복음을 값싸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복음과의 만남을 통해서 삶과 역사에 대해서는 진지해지고,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안타깝지만 그 반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 살리기
이 '복음'의 문제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로마서 전체의 주제에 속하는 것이니까 이 자리에서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겨우 교리의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이기적인 차원에서 소유하려고 합니다. '교리적'이라는 말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현실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차원에서만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 고단한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대신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술적인 차원으로만 인식합니다. 복음이 '이기적'으로 오용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흡사 콘서트 입장권를 구입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입장권을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콘서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은 매우 억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복음이 이처럼 철저하게 종교적 이기심을 부추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기쁜 소식'일 수 없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면 복음의 구조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교리에 머물거나 이기적인 도구에 머물지 않고 훨씬 근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곧 종교와 삶의 일치이며, 동시에 종교의 세속화를 막아내는 일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삶을 실제로 구성해야하며,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로 이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예민하게 영적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간단히 복음을 죽이는 길로 들어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간단히 우상 숭배의 길로 쉽게 들어섰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묵시적 능력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토대가 된 것은 '기적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힘 곧 성령의 힘'(19절)이라고 진술합니다. '기적'과 '놀라운 일'은 곧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묵시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종말에 완전히 드러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곧 기적적인 것으로 자신 앞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기적 자체를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발현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일으키는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사도가 철저하게 의존해야 할 유일한 힘입니다.
'성령의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가장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서 어떤 특별한 종교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을 아예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게 된다거나, 전도를 잘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이렇게 생각하는 게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역시 부족합니다. 우선 우리는 성령이 우리의 특별한 능력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즉 종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드러날 하나님이 하나의 종말론적, 또는 묵시적 징표로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들이 곧 성령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흡사 유치원 아이들에게는 마술이 놀랍게 보이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금년 안으로 남한과 북한이 통일을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믿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 일은 가능합니다. 그런 묵시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궁핍해서 그렇지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성령은 그런 일도 가능하게 합니다. 학력에 전혀 상관없이, 그리고 능력에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서 월급을 받는 시대가 왔다고 합시다. 또는 한국의 모든 교파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합시다. 대개의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그래서 놀랄만한 일들이지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곧 성령의 묵시적 능력입니다.

사도직의 원칙
바울은 끝 단락에서 사도직의 본질을 해명합니다. "나는 남이 닦아놓은 터전에는 집을 짓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써 왔습니다."(20절). 선교 대상을 놓고 다른 사도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이 대목이 바로 소위 자비량(自備糧) 선교의 원칙을 고수한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선교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지나친 경쟁을 한다거나 그 선교를 생활수단으로 삼지 않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은 목사가 거의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자비량 선교는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바울도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신명기서를 인용하면서 선교 사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는 게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 9:9). 이런 문제는 형편에 따라서 처리하면 되겠지만, 복음을 들어야 할 같은 대상을 놓고 과열 경쟁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교인 끌어오기의 경쟁에는 두 가지 논리가 작용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가 부흥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논리와 현실적으로 교인이 있어야 목사가 먹고 살 수 있다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수단을 무조건 합리화할 수 없으며, 아무리 현실이 고달프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세속주의와 타협시킬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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