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시 공동체의 구성원들
                    
예수 이후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똑같이 전혀 새로운 생명 현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언급했다. 이것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원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에 자신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생명 현상을 경험하고 유대의 전승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이미 구약성서에서 예언된 것으로 해석했으며, 더 나아가 외경 등의 자료를 근거로 승천과 재림을 부활 이후 예수 사건에 포함시켰다. 특히 사도신경에 의하면 승천한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일련의 서술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신화적인 구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는 매우 ‘리얼’한 세계였다. 고대 문헌인 이런 성서와 사도신경을 읽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그들이 경험한 것과 그들의 해석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지평으로 작동하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의 일부로서 오늘 우리는 예수 이후의 사태에 직면한 원시 공동체의 상황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특히 그 구성원들의 면면을 통해서 그 공동체의 성격을 파악하려고 한다.
우선 상식적으로 그들의 정신적 상황을 되돌아보자.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 구성원들은 정신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승천 이후 앞으로는 더 이상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을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재림’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희망이 아직 명확한 현실성을 획득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적인 혼란, 또는 정신적 공백 상태에 빠져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한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부터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나 사명감을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목표가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그 와중에서 자신들의 인간적 한계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그나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부활의 예수도 자신들에게서 떠난 마당에 그 무슨 야무진 목표와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 될 것이다”(행 1:8)라는 야심에 찬 세계선교의 사명은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에 회고된 신앙적 고백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또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설립할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그들의 태도가 적극적이었다기보다는 소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소극성은 인간의 의도가 최소화하고 하나님의 뜻이 최대화함으로써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성령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열 한 명의 사도
12절 말씀에 의하면 올리브 산에서 예수의 승천을 경험한 사도들은 안식일에 걸어도 괜찮을 거리(대략 880 m)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예수가 승천한 장소로 추정되는 올리브 산은 예수가 십자가 사건을 앞에 놓고 기도하던 곳이었다(눅 22:39).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묵고 있는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학자들에 따라서 이 방이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는 다락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는 성전 안에 있는 다락방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 방은 그 당시에 학자들의 회합장소, 공부방, 기도실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명단이 나온다. 우선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사도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아, 필빕보, 토마,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혁명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공동번역의 표기를 따름).
베드로는 명실상부하게 사도의 수장이었다. 물론 예수가 그렇게 임명했다거나 사도의 회의를 통해서 선출된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서신의 증언을 통해서 볼 때 그의 지위가 인정될 만하다. 우선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와 함께 예수에게서 제일 처음 사도로 부름 받은 인물이며, 예수의 공생애 동안 매우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복음서 기자들이 베드로를 그렇게 묘사한 이유는 복음서가 기록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베드로의 위상이 확고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수위권이 교회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유지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제도’에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수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말씀(마 16:18,19)에 근거해서 이 베드로의 수위권이 결국 역대의 교황에 의해서 전수된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일치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가 곧 교황제도이다. 개신교의 입장에서도 교황제도를 좋은 뜻으로 인정할 수는 있다. 예컨대 한스 큉이 제시하고 있듯이 교황의 자리가 제도적 권위를 행사하는 지위라기보다는 봉사의 카리스마로 자리를 잡는 것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교회가 로마 바티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황에게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가톨릭에서 무오(無誤)하다고까지 주장하는 교황제도가 교회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로마 지역의 주교 역할을 했던 교황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교회의 주교와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동서 로마의 혼란 가운데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게 된 로마의 교황이 결국 세계 교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이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그 때가 1054년인데, 최초의 기독교 분리였다. 앞으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의 일치가 현안으로 등장할 경우에 이 교황제도가 뜨거운 감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베드로 이외의 열 명의 사도들 중에서 요한과 야고보 같은 이들의 활동이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나머지 사도들은 없다. 사도들 중에서 혁명당원 ‘시몬’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유대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무력투쟁 집단에 속해 있던 사람으로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그 해방을 희망한 것 같다. 이런 부분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도 및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이스라엘의 해방 사이는 지금 우리가 완벽하게 재구성해내기 힘든 유사성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족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이 원시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는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가족 및 예수 생전에 그를 따르면 몇몇 여인들이 더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 헤로데의 고위 관리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수산나(눅 8: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막 6:3). 이들을 크게 나누면 예수의 가족들과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다.
복음서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친척을 포함한 가족들은 원래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귀신들린 자로 여기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었다(막 3:21, 31 이하, 요 7:5 참조). 예수도 가족들이 만나기 위해서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자기의 가족이라고 했다. 반면에 바울은 부활한 예수가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났다고 한다(고전 15:7). 이런 사실을 근거로 본다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예수와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전승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는 가족들이 예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듣고 그들도 그 소문에 흔들렸을 것이며,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가족들도 그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따라온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닥친 시련 때문에 따라나섰다가 부활과 승천의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동생들까지 모두 몰려왔다는 것은 이동 수단이 별로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특이한 일이긴 하다.  
어떤 면에서 인간 관계 중에서 가장 깊을 수도 있지만 가장 피상적일 수 있는 관계가 바로 가족 관계일 것이다. 이런 문제는 종교와 같은 가장 깊은 세계에 들어갈 것도 없이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7,80년대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 위장 취업한 아들과 딸 문제로 인해서 골머리를 앓던 부모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자기의 아이들이 왜 번듯한 대학공부를 그만 두고 그 당시에 불법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가족들 사이의 대화가 거의 일상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서도 가족 관계의 피상성을 확인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이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와 대화가 회복되어야만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가 가능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는 예수의 생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눅 8:2,3, 23:49,55) 이제 여기서 예수의 승천을 경험하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기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부유한 부인들이었는데, 개중에는 신분이 높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역할이 성서에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토대를 잡는데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승천 공동체
결국 사도행전에 따르면 최초의 공동체를 구성한 사람들은 올리브 산에서 예수의 승천을 경험하고 그가 다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한 사람들이었다. 굳이 숫자로 계산한다면 열 한 명의 사도와 나머지 8명을 합하면 19명이었다. 물론 다음에 공부하게 될 15절 이하를 보면 120명의 모임으로 확대되었지만 승천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모인 최초의 사람은 19명이었다. 아주 작은 사람들이 큰 의도 없이 시작한 공동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고 한다. 위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소극성을 언급한 것처럼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는 진술도 역시 이런 태도라 할 수 있다. 기도에만 힘을 썼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간혹 우리는 ‘부르짖어라’는 말씀에 의해서 실제로 부르짖듯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질 때까지 물고늘어지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그렇게 기도해야 마음이 후련해지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기도의 본질은 마음을 비운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의도를 가능한대로 축소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예수가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다시 오신다는 진술 앞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자기 뜻을 성취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게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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