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베드로의 설교 1(오순절)

베드로인가, 누가인가?
방언 현상으로 인해서 오순절 공동체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술과 관계없다고 해명하는 베드로의 설교가 오늘의 본문인데, 우선 우리의 공부 방향을 정확하게 잡기 위해서 이 설교가 과연 베드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누가에 의한 것인지 잠시 검토해보자. 이런 개론적인 부분이 정리되어야만 우리는 성서 텍스트에서 핵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의사 누가가 아니라 훨씬 후대에 살았던, 최소한 90년경에 살았던 기독교 저술가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당연히 이 설교는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고 보아야한다. (이 저술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편의상 누가라고 부른다). 이런 사실이 정확하다는 증거는 이 설교문에 인용되고 있는 70인역본과 연관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 70인역본을 사용하지 않았고 헬레니즘적 기독교가 정착된 후에야 사용했는데, 그 시기가 90년 어간이라는 말이다. 참고적으로, 요한복음도 역시 이런 헬레니즘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시기에 저술된 성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베드로의 설교를 초기 기독교 설교의 전형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이런 제반 상황을 헨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의 오순절 사건보도를 마치 그리스도교 선교의 시작을 사실 그대로 전달해주는 기록영화처럼 보려고 한다면 누가의 이 보도는 오해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보도에 함축되어 있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진술에만 관심을 국한시켜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임재하여 그들을 다스리며 이끌어나가는 성령은 그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다. 그리고 성령은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초월한다는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적인 진술이다.”
다른 한편, 오늘 본문에는 이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가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도되고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한낱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 현현, 승천, 오순절 성령체험 이후에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이런 보도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성령을 받으면 원래 그렇게 되는 거야, 또는 당신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군,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를 읽고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은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서 기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능력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성서의 진술방식은 상당히 비약적이다. 홍해가 갈라졌다거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거나 여리고 성이 이상한 방식으로 허물어진 이야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어떤 과정이 빠졌다는 말이다. 비록 원래 있었던 어떤 과정이 생략되었다고 하더라도 성서 기자들이 전하려고 했던 핵심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선포하기만 하면 모든 게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것을 다시 읽는 독자들이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웠던 초자연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성서의 핵심을 놓치거나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의 베드로처럼 어떤 큰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식한 어부였지만 성령을 받음으로써 70인역본 성서를 마음대로 인용하면서 자신들을 변호할 줄 아는 설교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단지 술, 담배를 끊는 정도의 일이라면 순간적인 결단으로 가능하지만 위대한 사상가, 신학자가 되는 일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졸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초기 기독교가 상당한 정도의 자기 성찰을 거친 후 얻게된 헬레니즘적 토대에서 쓰여진 고급의 설교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엘의 예언
베드로는 “당신들, 술 취한 것 아니오?”라는 비판을 방어하기 위한 설교에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인용문 끝 부분에 묵시적 현상이 묘사되어 있다.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19,20절). 이런 묵시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낯선 것이지만 근본에 들어가면 별로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묵시 사상에 연관된 사람들은 인간의 구원이 우주론적 차원에서 발생할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의 일들이 확장됨으로써, 즉 생산과 소비가 극대화하고 완전 복지가 구현되고, 인간의 수명이 무한으로 연장되는 것으로 구원이 발생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원칙적으로 고대인들이나 우리가 여전히 구원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고대인들은 묵시문학적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했으며, 오늘 우리는 역사적 방식으로 그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서 인용된 요엘의 예언에서도 결국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0절)는 말씀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에는 이 설교의 실제적인 동기라 할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리는 이 모순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비록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방언 현상을 수반하고 있었지만 기독교 복음에서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언으로 인해서 야기된 이 소동을 방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처리했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방언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이 부분이 확인된다. 아마 초기 기독교에 방언과 같은 열광적인 현상이 있긴 했겠지만 실제로는 훨씬 소극적이고 경건한 삶이 그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헬라의 보편적 세계로 나가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의 직접 저자가 살고 있던 시대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필요성 때문에 요엘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에게서 일어난 사건과 그 경험의 역사적 타당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사건의 신학화가 곧 ‘케리그마’(kerygma)이다.  

케리그마
22절부터 베드로는 요엘에 의해서 예언된 구원자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다(22,23). 뒤이어서 시편 16:8-11과 시편 132:11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이 이미 다윗에 의해 예언되었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이 예수를 높이 올려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게 하셨고,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 케리그마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에게서 많은 기적과 표징이 나타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셔서, 하늘로 올리시고, 오른편에 앉게 하셨다. 이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 이런 케리그마의 요약은 36절이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일종의 역사인 십자가 사건과 그 역사 너머에 있는 부활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신학이며 설교이다. 만약 기독교를 십자가 사건 안에 한정시키려고 한다면 기독교는 지난 인류 역사에 자주 등장했던 실패한 혁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자기희생을 값으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역사를 바꿔보겠다는 그런 이념들은 우리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기독교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는 이 역사에 제한 받지 않는 유일한 사건인 예수의 부활로부터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역사 변혁의 징표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만 치중한다는 것은 일종의 허무이며, 거꾸로 역사를 초월하는 부활에만 치중하는 것은 미몽이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케리그마에서 동일한 무게로 작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적 예수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책임과 주도권이 있으며, 부활은 역사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분이기 때문에 부활이 십자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이런 서열의 차이를 정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중요한 문제는 십자가가 가리키고 있는 이 역사의 고난과 불의에 참여하는 일과, 부활이 가리키고 있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심화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일치된다. 전자는 우리의 실천목표이고 후자는 우리의 존재근거이지만, 동시에 실천과 존재는 여전히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로 승화되어야 한다. 아직 이런 관계가 우리에게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케리그마의 신학적 내용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세례와 성령
베드로의 케리그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38절).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누가가 말하려는 바의 핵심이 곧 이것이었다. 회개, 세례, 죄용서, 성령. 하나님의 약속.
여기서 핵심은 세례와 성령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세례가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 설교가 상당히 후기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며,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마태 28:19)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던 시대에 첨가된 것이다. 누가는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세례 공동체의 형태를 그대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 접목시켜서 매우 적극적인 선교의 토대를 강화시킨 셈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초기 공동체의 객관적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누가의 신학을 읽을 뿐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진리는 이런 역사와 그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법이며, 우리도 역시 그런 과정에 있다. 비록 누가 공동체의 한계 안에 있지만 이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로 다가온다. 인간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고 말이다. 누가는 요엘의 예언과 시편을 근거로 해명했지만, 오늘 우리는 또 다른 해석학적 토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것이 철학일는지, 과학일는지, 아니면 타종교일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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