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초기 공동체의 생활
                    
교회는 필연인가?
오늘의 인간 모습이 이루어질 때까지 거쳐온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 과정을 염두에 두어야만 인간 이해에서 곁길로 나가지 않듯이 오늘의 교회 형태가 이루어질 때까지 진행된 그 이전의 역사를 참고하는 것은 교회 이해에서 필수적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그런 역사를 간접적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흔적인데, 자칫 이것마저 오늘의 관점에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실상을 놓칠 위험이 없지는 않다.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많은 수고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는 어떤 선입관에 기울어지지 않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뚫어보려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우선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과연 교회의 등장이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우리는 마태복음 16:18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셨다 거나, 아니면 최소한 제자들에게 그것을 명령하셨다고 생각한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미 베드로의 권위가 상당한 정도로 확보된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진술된 말씀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서술도 역시 100년 어간의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된 초기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것을 무조건 교회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역사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거나 우연일 뿐이라는 점을 밝히는 게 목적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의 사건이 없었다면 역사적 교회는 등장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성령의 활동이 이런 교회 등장의 필연성을 담보해준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교회의 필연성에 대해서 문제 의식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인 역사의 진행을 기계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너무 간단하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게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간과됨으로써 하나님 통치의 역동성이 훼손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특히 이런 섭리사상이 한민족의 숙명주의나 내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구원의 사회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이 실종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한국에서 부흥하는 거의 모든 교회는 구원의 역사적 차원을 무시하고 단지 개인 구원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대한 치열한 신학적 반성을 거친 결과로 개인의 차원을 강조한다기보다는 개인 구원이 한민족의 정서에 상응한다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그런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는 현실 교회를 당연시하거나 또는 초기 교회를 절대화하지 말고 그 역사적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드러났으며 교회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점을 가능한대로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도록 파악하여 오늘의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바르게 찾는데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의 특징
42절 말씀은 초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신앙생활의 특징에 대한 묘사이다. 학자들(바우에른파인트, 예레미아스 등)에 따르면 이 구절은 예배에 대한 설명, 즉 사도들의 가르침, 헌금(공동번역에 표현되어 있는 서로 도와 준다는 것은 친교 한다는 뜻으로 헌금을 가리킨다), 의식(儀式)적 공동식사,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헨헨은 이 네 가지 요소는 예배 순서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독립된 신앙생활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쪽이 옳은지 우리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예배라고 하든지 아니면 각각의 신앙생활의 특징이었다고 하든지 별로 크게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각각의 신앙활동의 형식들이 일정한 순서를 통해서 배열되는 게 곧 예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이런 네 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 특징 중에서 한 가지만 살펴본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부름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동시에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의 권위라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즉 부르심에 대답하는 ‘사명’과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다.
요즘 한국교회에 다음과 같은 이슈가 새롭게 등장했다. 설교권이 목사들에게 배타적으로 독점되어 있는가, 아니면 평신도들에게도 열려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사제를 중심으로 미사가 진행되는 로마 가톨릭과 달리 만인 제사장론을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마땅히 평신도들에게도 설교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원천적으로 성직자 계급을 두지 않는 교회에서는 이런 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침례교회는 원래 평신도 중심으로 모든 신앙생활을 꾸려갔으며, 퀘이커교도들도 그렇고, 약간 우리와 신앙을 달리하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렇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류 정통이라는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완벽하게 구분되었기 때문에 설교는 반드시 성직자에게만 독점되었다. 비록 성직자들이 설교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함으로서 벌어지는 문제가 적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에게도 설교권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처음에는 평신도들 중에서도 상당한 신학적 깊이와 상식을 갖춘 사람들이 설교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준비가 없는 사람들도 교권을 등에 업고 설교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이는 흡사 간호사들이 의사를 제쳐두고 환자를 진료하고 직접 수술하겠다고 나서는 사태와 비슷하다. 문제가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목사들의 설교에 아무런 내적 카리스마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반증이이다.

공동생활
초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이 재산과 물건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함께 나누었다는 사실(44,45절)은 매우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이들이 개인 소유를 이렇게 공동의 것으로 내어놓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이 이르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만약 1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오늘 우리 중에서 아무도 개인 재산에 미련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현실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공동생활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빛나는 삶의 형식이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간다는 마르크시즘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원리를 끌어갈 만한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또는 박태선의 신앙촌처럼 열광주의적 종교심을 통해서 해결할 수도 없다. 인간이 일시적으로는 그런 강력한 카리스마에 지배받을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현대 역사에 배웠다. 그렇다고 이런 원리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국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길이 있는가?
초기 공동체의 이런 공동생활에서 오늘 우리는 삶을 끌어가는 힘의 근원이 곧 예수님의 재림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 너머의 생명이 시작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소유와 능력들이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도래를 준비하는 동안 서로에게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만 한다. 이 나라의 경제 체제와 교육 제도가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에 유용하게 기능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재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것을 위해서 변혁되어야 할 이 문화와 역사를 백안시하고, 거꾸로 예수님의 재림과 아무런 상관없이 단지 이 세상을 변혁하는 데만 마음을 두는 일이 있다. 임박한 재림과 이 세상 사이의 긴장이 사라질 경우에 기독교 신앙은 왜곡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웬 성전?
초기 공동체가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다”(46절)는 구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당혹스럽기도 하다. 초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무리 전형적인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열심히 들락거렸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의 눈에 상당히 불쾌하게 보인다. 이 모순의 핵심은 무엇인가? 몇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1. 가장 큰 가능성은 초기 공동체가 유대교에 별로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심문당하는 과정에 제사장들과 산헤드린이 깊숙이 관여된 것으로 묘사된 복음서의 내용이 과장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초기 공동체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성전을 분리해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2. 또 하나의 가능성은 초기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교 안에 두었다는 점이다. 비록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권력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토대는 여전히 유대교 안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유대교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종교를 시작할 마음을 전혀 갖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역사는 그들의 생각과 달리 새로운 종교를 출현시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3. 사도행전이 기록된 90년 이후의 시기에는 이미 유대교와의 분리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을 때인데도 불구하고 누가가 성전과의 연관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누가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가 유대교와의 일치를, 아니면 최소한 그들을 향한 미련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초기 공동체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그 내용은 예배와 모임과 친교 등이었다. 이런 요소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47절)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누가는 이들 공동체가 주변에 끼친 영향에 대한 묘사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 이들의 특징은 이들의 것이고, 오늘 우리의 특징은 오늘 우리가 결정해야 할 몫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와 내용을 갖고 공동체를 꾸리며,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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