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베드로의 설교 2 -솔로몬 행각-
                      
설교와 해석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단순하게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서술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간간이 설교문을 담아냄으로써 문학적이고 신학적적인 깊이와 품위를 담보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이러한 묘미를 포착하려는 사람은 사도들의 활동에 나타난 서사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이런 설교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사도행전이 전하려는 전체적인 맥락을 우리가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게재된 중요한 설교는 베드로, 스데반, 바울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오순절 설교(2:14-36)와 오늘 공부하게 될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는 베드로에 의해서 선포되었고, 가장 장문의 설교인 7장은 순교당하기 직전의 스데반에 의해서, 그리고 그 뒤로 몇 편이 바울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설교를 베드로, 스데반, 바울에게 직접 소급시키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설교는 이 사도행전을 집필한 누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태를 파악하는 게 왜 중요한가? 물론 말씀 자체에서 은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역사비평은 별로 큰 의미가 없지만 말씀과 말씀 사이에 개입되어 있는 성령의 활동까지 파악하고 싶은 사람은 그 내막을, 즉 ‘행간의 의미’를 밝혀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이 곧 ‘해석’이다. 우리가 외국의 간단한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서도 고지식하게 직역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작품의 실체적인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서 그 작품과 연관된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이해된 신앙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단지 문자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그것의 심층적 의미까지 파고들어가는 ‘해석’이 반드시 요청된다. 현대의 설교에 우리가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가 성서를 거의 직역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해석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과연 해석이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해석학’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세세하게 설명한 생각은 없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선포된 누가의 설교가 이미 누가 이전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누가의 ‘해석’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성서에 직면해 있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데 머물지 않고 부단하게 해석했으며, 그런 해석의 역사는 성서가 정경으로 완료된 다음에도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신학(도그마) 역사이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해석’이라는 용어를 가다머의 ‘지평융해’ 개념과 연관해서 우리의 입장에서 한 마디 짚어보자. 성서 해석은 성서 본문의 지평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지평에서 새롭게 받아들임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이 우리에게 열리는 사건이다. 이 말은 곧 궁극적인 진리는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성서는 이런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종말의 지평과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각을 전제하고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 내용을 누가의 신학적 배경을 전제하고 읽도록 하자.

책임 추궁
베드로와 요한이 장애인을 치료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장소가 솔로몬 행각이라는 본문의 설명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자세하게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어쨌든지 베드로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한다.
그의 설교는 일단 예수의 재판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핵심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석방하려던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했다는 것이다(13절). 베드로는 그 사건을 좀더 상세하게 보도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 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14,15절). 지금 장애인의 치료사건에 놀라서 몰려든 사람들이 바로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배척한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책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의 재판 사건이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았거나 유월절을 맞아 순례하러 온 모든 사람들이 연관될 정도로 큰 사회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이 설교가 구체적인 어떤 대상을 놓고 행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의 일반적 변증설교로서 역사가인 누가에 의해서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기원 후 100년 어간에서 초기 기독교를 해석하고 있는 누가로서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그 당위를 해명해야만 했다는 데에 있다.
누가는 장애인의 치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예수의 십자가형 선고에 개입된 유대인들의 책임을 자연스럽게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장애인 치료 사건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이름으로 발생했다면 결국 그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하나의 영적인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옳은 것을 배척하고 거짓을 선택할 때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훗날 잘못된 것으로 증명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무슨 판단을 내릴 때 역사의 차원을 상수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역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이다. 그 종말론적 신앙은 미래의 생명이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나게 될 그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미래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규정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에서 이런 종말론적 빛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15절).
  
무지로 인한 죄
베드로의 책임 추궁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대립각을 세운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17절).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 사건이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로 든 모세(22), 사무엘과 그 뒤를 이은 모든 예언자(24), 아브라함(25)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로 예수 사건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 사건을 전혀 생소한 것으로 인식한 게 아니라 구약과의 연속성 안에서 인식했다. 이런 대목에서도 역사의 해석이 진리를 드러내는데 결정적인 작업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전을 집필한 누가의 생각 속에 중심 주제로 자리를 잡고 있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갈등에서 구약 성서의 해석이 관건이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예수에 대한 인식이 상반되는 것이다. 누가의 해석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 원인은 구약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몰랐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런 역사 현상을 매우 정확하게 분석한다. 유대인들의 성품이 왜곡되었다거나 어떤 불순한 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라 ‘무지’로 인해서 진리를 배척했다는 것이다. 이런 무지로 인한 죄는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지는 어떤 사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요즘 ‘국가보안법’ 폐기냐 개정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헌재와 대법에서는 보안법을 합헌이라고 주장했고, 노 대통령은 그런 법리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과정을 놓고 볼 때 폐기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헌재의 주장은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인 법리적 해석이며, 노 대통령의 주장은 오늘 우리가 몇 번 언급한 해석학적 접근이다. 내가 보기에 ‘국보법’ 문제는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 논쟁처럼 관점에 따라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안식일 법도 사용하기에 따라서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모세의 법이었지만 예수는 그것을 철저하게 상대화했다. 인간을 위해서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나는 예수의 이 경구가 바로 국보법에도 그래도 적용된다고 본다. 남북분단의 냉전시기에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국보법이 더 이상 무의미한 시대에는 과감하게 철폐해야만 한다. 좀 거칠게 표현해보자. 헌재위원들과 대법관들이 법 전문가들이지만 법 정신을 모르면 결국 유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배척한 죄처럼 ‘무지로 인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지체된 재림
베드로는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무지로 인해서 죄를 범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인류의 구원 역사가 종결된 게 아니라 그런 죄로부터 돌아설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한다(19, 26절). 19절에는 ‘회개하다’(메타노에오)와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는 두 단어가 병해하고 있다. 이 두 단어가 각각 사용될 때도 있고 병행할 때도 있어서 그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메타노에오는 악으로부터 떠난다는 의미의 강조이며 에피스트레포는 돌아선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강조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성서가 죄와 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실정법에 대한 위반이나 도덕적인 범죄, 또는 파렴치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또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간성을 파괴하는 근원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런 문제를 요약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이 곧 죄이며, 그런 삶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것이 곧 회심이다.
유대인들의 회심을 요청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단지 유대인들에 대한 연민이나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만이 아니라 훨씬 본질적인 기독교의 신앙을 담고 있다. 그것은 곧 예수 재림의 지체에 대한 해명이다.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기대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재림이 지체되는 상황을 맞아 부분적으로 당황했을지 모른다. 이들이 찾은 대답은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을 하나님이 기다린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때가 오기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21절).
어떤 사람은 기독교 교리가 상황에 따라서 자꾸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안해할지 모르겠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 기독교의 교리는 자기 절대화에 묶여서 역사와 더불어 형해화(形骸化)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진리를 향해 개방함으로써 늘 새로워지는 길을 가고 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토막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사실을 해석하고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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